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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 미그 앨리 (Red stars over Yalu)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3. 3. 10 * 증강되는 미그기들 1951년 6월부터 소련공군은 미그-15 전투기부대의 세력을 더욱 증강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미공군을 북한의 하늘에서 몰아내라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대대적인 전력증강이 비밀리에 추진된 것이다. 미그기들은 중국공군에게도 대량으로 공여되었으며 1951년 여름경부터는 중국공군도 자국의 조종사들이 제트전투기에 대한 훈련을 어느정도 받은 것으로 판단하고 소련공군과 함께 미그앨리로 출격시키f려는 준비를 시작했다. 이러한 공산측의 항공전력 강화는 미공군도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미공군의 정찰기들은 압록강 이북의 주요 비행장에 대한 정찰임무에서 갑자기 공산측의 항공기들의 숫자가 매일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했다. 이들이 촬영한 사진자료를 분석한 결과 압록강 이북에는 총 690여기의 항공기가 집결하고 있었으며 이들중 미그-15로 보이는 전투기들이 두달전에 보고된 200여기에서 2배가 넘게 늘어난 445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게다가 이 숫자는 계속 늘어나 1951년 9월경에는 미그앨리에서 작전하는 미그기들이 525기로 집계되게 된다. 사실 이 숫자는 미공군에 의해서 상당부분 과대평가된 것으로 소련공군의 기록에따르면 1951년 4월경에는 72기의 미그기들이 미그앨리에 투입되어 작전하고 있었으며 대대적인 전력증강이 시작된후에는 200여기 정도로 늘어났다고 한다. 물론 중국군에도 200여기 정도의 미그-15 전투기가 넘겨졌으므로 이들 모두를 합한 미그의 세력은 총 400여기 정도로 미군의 주장과 비슷한 정도였다. [ 중국공군의 미그-15기들이 도열해있다. 중국공군은 참전의 대가로 이 제트전투기 수백대를 소련으로부터 얻어냈다. 그러나 조종사들의 훈련과 운용체계가 미흡하여 한동안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으며 1951년 겨울이 되서야 본격적으로 미그앨리를 향해 출격에 나서게 된다. ] 여하간 미그기들의 숫자가 갑자기 불길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었지만 1951년 6월을 기준으로 미공군이 한국에 전개하고 있었던 세이버 전투기들의 수는 총 89기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들중 한번의 출격에 동원될 수 있는 완전 대기상태의 전투기 수는 평균적으로 24기 정도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급박한 상황에 대비하여 출격 가능 기체수를 최대한으로 많이 잡더라도 44기에 불과했다. 만일 공산측이 대규모로 미그기를 출격시킨다면 미공군의 세이버 조종사들은 심각한 수적 열세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1951년 6월 10일, 미극동공군을 지휘하고 있었던 웨이랜드 장군은 이러한 사태의 심각성을 워싱턴에 보고하고 즉시 미극동공군의 전투기 전력이 보강되어야 하며 특히 F-86 세이버 전투기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호소했다. 그는 최소한 F-86으로 구성된 2개 전투비행단이 추가로 파견되어야 공산측의 항공전력에 대등하게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정부는 웨이랜드 장군의 요구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미행정부는 한국전쟁 자체를 여전히 과소평가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입장이 아니라 어떻게든지 이정도선에서 전쟁을 모양새가 좋게 마무리 하려고 했다. 게다가 미공군에 배치되는 F-86 세이버들은 한국전선 이외에도 미본토 방위사령부와 소련의 침공위협이 우려되는 유럽에 보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더 이상의 전력증강이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 김포에서 작전중인 미공군 제4 전투비행단의 세이버들이 발진대기 상태로 주기중인 모습이다. ] 더구나 소련공군이 조직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고 있다는 정황증거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대외적으로는 한국전쟁에 관여하고 있지 않는 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었으며 이에대해서는 미군의 입장도 비슷했다. 미군은 이것을 크게 문제 삼을 경우 소련을 더욱 자극하게 될 위험이 있었고 미국내의 반공여론이 높아져 더욱 큰 전쟁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만일 미국이 이를 빌미로 소련을 압박하게되면 외교공세에 몰린 소련이 아예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할 가능성도 있었으며 이것은 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될 것이 분명했다. 이러한 상황이다보니 소련측이 참전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이 이를 따지고들 이유는 없었다. 따라서 양측은 서로 실체를 부인하는 적과 싸워야 했고 압록강 상공의 전투는 점차로 양측의 자존심이 걸린 대결양상으로 변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싸움에서 어느한쪽의 전격적인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상황의 유지에 양측모두 촞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런 저런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서 결국 미공군의 제4 전투비행단은 현수준의 전력으로 미그앨리에서 공산측의 수적으로 우세한 항공전력에 맞서 싸워야 했다. * 압록강에 나타난 붉은 전사들 한편 대대적인 미그-15 전투기의 수적인 증강에도 불구하고 압록강 이북의 소련 조종사들도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쳐해 있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증강된 전투기의 숫자에도 불구하고 잘 훈련된 전투기 조종사들의 수가 아직은 미공군에 맞설만큼 충분하지 못했다. 부족한 조종사 숫자를 채우기위해서 소련 고문관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있었던 중국이나 북한 조종사들은 소련 조종사들의 기준으로 볼 때는 아무래도 함량 미달이었다. 따라서 소련 조종사들은 이들과 같이 위험한 미그앨리로 날아가는 것을 싫어하고 있었다. 소련 조종사들은 중국이나 북한 조종사들과 같이 비행을 하게되면 작전에 방해만 된다고 생각했으며 이들중 대부분이 미공군의 전투기에게 먹이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공군은 소련의 간섭을 받지않고 독자적으로 작전하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공군 조종사들로서는 오히려 잘 되어 버렸다는 식으로 서로 돕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 중국공군은 1951년 12월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출격에 나서게 된다.) [ 2차대전에서 유명한 P-47 전투비행대 울프팩의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던 미공군의 에이스 프란시스 갸브레스키, 그는 한국전쟁에서도 에이스에 등록하게 된다. 미그 앨리로 출격하기 전에 점검중인 모습이다. ] 하지만 북한 조종사들은 소련 군사고문관의 통제에 절대적으로 따르고 있었으므로 소련공군은 교관들은 이들 북한 조종사들에게 상공에서 대비하고 있다가 단 한번의 공격패스후에는 무조건 기지로 도주하라는 전술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 조종사들의 수가 워낙 적어 이들은 항공전력에 포함되지 못했다. 북한 조종사들은 1952년 중반에서부터 미그앨리로 날아오르게 된다.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결국 소련공군도 동시에 출격시킬 수 있는 자국 조종사들의 숫자가 40-50여명으로 이는 미공군에 비해서 약간 더 많은 정도거나 거의 대등한 정도였다. 게다가 소련 조종사들도 여러 가지 제약을 받고 있었다. 비록 언어의 제한에서는 해방되었지만 그들은 활동범위의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공군 조종사들도 절대로 압록강을 건너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지만 이것은 위반하게 되더라도 공군내에서 별 문제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공군의 경우는 조금 더 엄격했다. 소련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된다는 스탈린의 엄명으로 인해서 조종사들은 절대로 UN군의 포로가 되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고, 지휘관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양 이남으로 내려가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서해바다는 미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중전에 피격되어 서해바다에 착수하게되면 포로가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서해 상공에도 절대 진출하지 말 것을 명령받고 있었다. 심지어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비상탈출후 UN군에게 포로가 될 가능성이 높을 때는 살아서 포로가 되지 말고 자살을 하라는 명령까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작전지역의 제약으로 미그기들은 대부분 그들이 방어하고 있는 지역에서의 요격임무에만 중점적으로 나서고 있었으며 귀환하는 세이버 편대를 추격하거나 평양이남까지 진출하여 미군기들을 요격하는 공격적인 작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 혼초의 시대 하지만 1951년의 여름이 시작될 무렵인 6-7월경에는 한국전쟁 전기간을 통털어 가장 우수한 소련조종사들이 속속 압록강 이북의 안뚱으로 도착해서 전투에 투입되고 있었다. 이들 최고조종사들은 가장 먼저 도착하여 활약중이던 제 196 비행연대장 예프케니 파펠라예프를 선두로 훗날 한국전쟁의 최고 에이스자리를 놓고 파펠라예프와 호각의 다툼을 벌이게될 니콜라이 슈타킨도 있었으며 대 독전선에서 많은 활약을 했던 레프 슈슈킨, 세르게이 크라모렌코, 미하일 페노마리에폐, 드미트리 사모이로프와 같은 에이스 출신의 우수한 재원들이었다. 이들은 전원이 한국상공에서 활동하는 동안 10기 이상의 미군기들을 격추시키는 대 전과를 기록하게 된다. 이들을 비롯한 잘 훈련된 조종사의 도착으로 미그앨리에서의 전투양상은 점점 호각의 싸움이 되어가리라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 한국에 나타난 정예조종사들, 소련공군의 탑에이스 니콜라이 바실례이치 슈타킨이 그의 편대원들과 한컷을 찍었다. 좌측에서 3번째가 슈타킨이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총 21기의 미군기 격추를 기록했으며 이중 10기는 미공군에서도 손실로 인정하고 있다. 슈타킨을 비롯한 이시기의 소련조종사들은 그들의 기량을 높이산 미공군 조종사들로부터 '혼초'라는 별명을 얻게된다. ] 1961년 6월 24일, 이날도 미그앨리 상공에서는 세이버와 미그기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날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던 제336 전투요격기대대의 부르스 힌턴 소령은 이날 미그기 조종사들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그는 한국상공에서 첫 번째 미그 격추를 기록했던 미군조종사로서 이날까지 총 3기의 미그-15를 떨어뜨렸다.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 그의 눈앞에 우군의 세이버 한 대가 미그-15에게 꼬리를 물린 것을 발견했다. 세이버는 이미 검은 연기를 끌고 있었으며 후방의 미그기는 그 가공할 37mm 기관포를 계속 발사하면서 후방을 물고늘어진 상태였다. 아군기의 위기상황을 목격한 힌턴 소령은 주저없이 조종간을 당겨 그 미그기를 추격했다. 바로 그순간 그 미그기의 조종사는 마치 힌턴 소령의 마음을 읽고있었다는 듯이 그가 추격하던 세이버를 놔두고 즉시 급선회를 시행해서 부르스 힌턴의 세이버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너무 갑작스런 미그기의 대응에 힌턴 소령은 크게 놀랐으며 두 기체는 서로 사격할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공중충돌의 불안감에 힌턴이 움찔하는 순간 이 미그기는 힌턴 소령의 세이버와 스칠 듯이 비껴나가 후방으로 날아갔다. 두 기체간의 거리는 거의 5m도 되지 않았을 정도여서 그 미그 조종사의 얼굴까지 똑똑하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 슈타킨이 F-84를 격추하는 장면을 담은 일러스트, 미그-15의 상대는 세이버뿐만이 아니라 F-84, F-80, F-51등의 지상공격기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기체는 미그-15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힌턴은 미그 조종사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고 뒤쪽으로 빠져나간 미그기를 찾기위해 조종간을 당기면서 후방을 살폈다. 힌턴의 직감대로 그 미그기도 공격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미그기는 힌턴과 반대 방향으로 급선회를 해서 다시한번 정면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두 전투기는 서로 상대방의 사격기회를 잡기위해서 여러차례의 씨저스 기동과 급상승, 선회를 반복했지만 서로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힌턴의 세이버가 약간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는 듯 하자 그 미그기는 더 이상의 교전을 중지하고 그대로 하강하면서 압록강 이북으로 이탈해 버렸다. 긴박한 전투가 끝난후 힌턴은 미그의 37mm 기관포에 피격되어 비틀거리며 검은 연기를 뿜고 있던 동료기를 엄호하면서 김포로 기수를 돌렸고, 다행히도 동료기는 김포까지 날아올 수 있었다. 이날 힌턴은 귀환후 그가 상대했던 미그 조종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 조종사는 정말 대단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적절한 순간에 공중전에 뛰어들고 이탈하는 법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으며 우리 세이버 조종사들에 비해서 절대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던 것이 틀림없다. 비록 적이었지만 훌륭한 조종사였고 그와 같은 적들이 다수 참전한다면 한국하늘에서 더 이상 우리가 제공권을 장담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힌턴의 말대로 이 소련 조종사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이날 그와 맞서 싸운 조종사는 바로 제303 항공사단 17 전투기연대 소속의 니콜라이 바실례이치 슈타킨으로서 훗날 공인격추 19기, 비공인 2기로 총 21기의 격추기록을 올려 공인격추 19기의 예프게니 파펠라예프와 함께 소련공군의 최고 에이스로 명성을 날리게되는 인물이었다. [ 예프케니 파펠라예프가 조종하는 미그-15의 건카메라에 촬영된 세이버 격추장면 ] 1951년 여름경에 이러한 소련 조종사들이 대거 전투에 나타나면서 미공군은 어려운 싸움을 해야 했고, 이들 소련의 베테랑 조종사들은 이들과 교전을 했던 미공군 조종사들로부터 '혼초 (honcho)', '캐시 존스 (Casey Jones)'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들이 압록강 상공의 전투에 참가하던 1951년 여름부터 다른 비행연대와 교체되어 한국을 떠나던 1952년 봄까지의 기간이 압록강 하늘에서 가장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던 시기였으며 미공군에게도 어려운 시기였다. 훗날 미공군의 전사관련 자료에는 이 기간을 '혼초의 시대 (Honcho period)'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상황속에서 양측의 대결은 더욱 치열해 졌으며 바야흐로 미그기들의 위협이 최고조에 달하게되는 1951년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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