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동경을 불바다로

구름위 2012. 12. 3.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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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 폐허에서 일어선 날개

◇ Act 1. 동경을 불바다로

(First Korean Pilots)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3. 5. 7

* 한국공군의 선구자 노백린 장군

한국공군의 역사에 대해서 조사하다보면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일본의 강점에 대항해서 독립군 공군을 창설하여 하늘을 날아보고자 했던 노백린 장군과 그의 지도하에 떨쳐 일어선 독립군단의 젊은 비행사들의 발자취를 느끼게 된다. 이번회에서는 비록 한국전쟁의 내용은 아니지만 한국공군의 뿌리로서 일제의 폭압과 강점에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이역만리의 타국에서 조국 독립의 신념으로 떨쳐 일어섰던 선구자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 독립운동가이면서 한국공군의 선구자로 기억될 노백린 장군의 사진 ]

계원 노백린 장군, 그는 그가 이룩한 업적과 공로에 비해 잘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대중에게 잘알려진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등과 함께 초창기부터 일제에 대항해서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였다. 호는 계원,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재원이었으며 대한제국의 관비 유학생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했고,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이 점차로 제국주의를 향해 군사력을 키우고 있으며 조선을 침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일본의 발전된 문물과 군사력을 배워 이를 하루라도 빨리 조국에 전파해야 조국의 안위를 보장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대한제국 유학생의 신분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여기서 근대적인 군사훈련을 마친후 1898년 일본군 장교가 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곧장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정령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관립무관학교, 육군연성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면서 유능한 재원을 양성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1907년 국운은 날로기울어 가고있었으며 호시탐탐 조선을 침략할 기회만을 노리던 일본군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그가 후진을 양성하던 연성학교가 폐교되자 노백린 선생은 잠시 낙향하였다가 조국 독립의 신념하에 도산 안창호 선생, 김구 선생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여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1911년 이른 바 '105인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된 고문을 견뎌내며 모진 옥고를 치룬 노백린 선생은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그만두지 않았다. 이후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하여 처형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던 일제의 표적이된 노백린 선생은 1914년 하와이를 통해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여기서 이승만등의 독립운동가들과 만나게 되어 다시 독립운동을 재개했다. 1919년에는대한제국의 육군정령이었던 경력을 인정받아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에 임명되어 독립군의 장군이 되었고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이승휘 선생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될 대표로 할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백린 장군의 역량이 발휘된 곳은 태평양 건너의 머나먼 미국이었다. 그는 미국에 도착한후 드넓은 미국을 여행하면서 거대한 미국의 산업능력을 접하게 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들을 직접 눈으로 보게되자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새로운 군대, 독립군공군의 가능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독립군의 날개가 되어

일찍부터 일본의 군사력을 파악하는데 전력을 기울인 노백린 장군은 일본 육사출신답게 일본군 파견 장교생활을 하면서 피부로 느낀 일본군의 강력한 군사력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노백린 선생은 일본군의 군사력에 대해서 '그들의 육군과 해군의 능력은 매우 강하지만 아직 하늘에 비행기를 본격적으로 날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만일 그가 이곳 미국땅에서 정예 조종사들을 양성할수만 있다면 장차 전개될 미래의 독립투쟁에서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선 노백린 장군은 독립군 활동을 했던 청년들중 6명을 선발하여 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 민간인 비행학교에 입교시켜 이들로 하여금 빨리 비행기 조종술을 배워 후진을 양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라고 당부했다. 이들 청년 독립투사들은 오임하, 이용선, 이초, 이용근, 한장호, 장병훈의 6명으로서 이들은 한동안 한국최초의 조종사로 알려졌던 안창남보다도 1년이나 빠른 1920년 2월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 때문에 한국인 최초의 조종사가 안창남이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1990년대 들어서 바뀌게 된다. - 안창남은 최초로 한국의 하늘을 비행한 비행사로 기록된다.)

[ 독립신문에 게재된 최초의 한인 조종사들의 사진 ]

이들의 이야기는 1920년 4월 27일자의 독립신문에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독립신문에는 태극마크가 선명한 비행기앞에서있는 독립군 조종사들의 사진과 함께 '대한이 처음으로 가지는 비행가 6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의 내용은 '이들이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의 비행학교를 1920년 2월에 마친후 윌로우스의 한인 비행학교에서 연구교수에 종사하는 사람이다'라고 쓰고 있으며 이들 자랑스러운 대한의 청년들이 장차 독립군의 공군을 이끌 예정이라는 내용을 담고있다.

그가 의도했던대로 교관진이 확보되자 한인 스스로 비행사들을 양성할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한 노백린 장군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한인들이 사는 지역을 여행하면서 마음이 맞는 동지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캘리포니아주 북방의 소도시 윌로우스에서 벼농사로 성공한후 큰 농장을 경영하고 있던 부호 김종림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김종림은 항상 마음속에 조국독립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한인 부호러서 마침 노백린 선생과의 만남에서 조국독립에 대한 그의 열정에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독립군의 공군을 양성하고자 했던 노백린 선생의 뜻을 전해듣자 자신이 자금을 책임질테니 반드시 우리의 공군을 양성하여 비행기를 이끌고 동경의 하늘로 날아가 불바다로 만들어 달라는 당부를 했다. 이에 노백린 장군의 주도하에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여러 한인들이 그 뜻을 모아 1920년 3월 호국독립군단과 한인 비행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독립군 비행사들을 양성을 시도하게 되었다.

[ 독립군 최초의 항공기중 하나인 커티스 JN-4D의 3면도 ]

이무렵 이 소식을 듣게된 윌로우스에 거주하고 있던 300여명의 한인들이 너도나도 지원하여 임시로 독립군단의 공군으로 편성되었으며 비행학교의 교장은 노백린 장군이 맡게 되었다. 이들은 낮에는 일을해서 돈을 벌었으며 밤에는 군사훈련을 받았다. 조국을 되찾겠다는 신념하에 모인 한인들은 그들이 어렵게 벌어들인 돈을 모아 매달 600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군단경비에 보탰다. 당시 미국에서는 인종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해서 특히 중국인들이나 한인과 같은 아시아인들은 모든 면에서 차별대우를 받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인들이 농업이나 공장인부로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 최고급 승용차 1대를 구입할 수 있을 정도였던 600달러라는 돈을 모아 매달 군자금으로 기탁하는데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들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의 한인 비행장에서 훈련중인 조종사들 ]

특히 독립군단의 가장 핵심전력으로 키워질 조종요원의 양성은 부호 김종림이 3만달러라는 거액을 기부하므로써 자금이 확보되자 빠르게 진척되었다. 캘리포니아의 교육국으로부터 임대한 40에이커 규모의 연병장에 사관양성을 위한 숙소와 건물이 지어지고 비행훈련을 위한 교관을 초빙하고 학생을 모집했다. 이 소식을 듣자 미국에 흩어져있던 한인들중 반드시 조국을 되찾겠다는 신념과 희망을 품고 있었던 젊은 청년들이 조종사 훈련을 받겠다며 지원했다. 그들은 월 10달러의 월사금을 내고 입교하여 비행술과 비행기 정비, 영어 교육등을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1920년 5월 노백린과 김종림은 본격적인 조종사 훈련을 위해서는 한인 소유의 비행기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훈련용 비행기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비행사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훈련에 필요한 2인승의 복엽기를 구입하기로 했지만 당시 미국에서도 비행기는 최첨단의 산물이었으므로 국적도 없는 아시아인들에게 선뜻 기체를 팔려는 비행기 회사는 없었다. 결국 그들은 각고의 설득끝에 미국의 민간인 비행클럽에서 사용하고 있었던 3기의 커티스 JN-1, 2  중고기체를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 태극마크가 선명하게 그려진 JN-4D 훈련기, 옆의 기체에는 KAC라는 기호가 보인다. ]

그리고 6월 22일 드디어 훈련용 기체인 JN-1, JN-2 복엽기 3기가 윌로우스의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때 이 기체들의 구입에 들어간 비용은 대당 2천불씩 총 6천불이나 하는 거액이었다. 이 비행기들을 보자 가슴이 벅차오른 노백린 선생과 사관후보생들은 즉시 이 비행기에 선명하게 태극마크를 그려넣었으며 대한의 항공대라는 의미로 KAC라는 식별기호를 표시했다. 독립군 교관 요원들이 조종석에 올라 태극마크가 그려진 훈련기들을 차례로 하늘로 날려 보낼 때마다 이를 지켜보던 한인들은 만세를 불렀고 심지어 감격에 벅찬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JN-2기들은 미국에서는 '제니 (jenny)'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기체로서 미국내에서도 민간 비행사들의 훈련에 많이 사용되던 기체였다. 이날 도착한 기체들은 생산된지 5년정도 지난 기체들이었지만 모든 기체에 편대 비행을 위해서 무선 통신 장비가 갖추어져 있었는데 이는 당시 미국의 항공기들에도 대부분 무전기가 없었던 것에 비하면 매우 획기적인 최첨단의 장비를 가졌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경을 불바다로

당시 김좌진, 홍범도 장군등이 이끄는 독립군과의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일본군의 잔학행위로 만주와 중국에 거주하는 수많은 한인들이 독립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잔혹하게 학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훈령생들은 땅을치며 분개했으며 모두들 하루라도 빨리 비행기를 타고 일본열도를 폭격할 날만을 꿈꾸면서 훈련에 전념했다. 이무렵 비행학교의 운영감독을 맡았던 곽임대 선생의 회고록 '몾잊어 화려강산'에 의하면 한장호, 이용선, 이초 등 갸륵한 15명의 청년들이 "반드시 동경에 날아가 쑥대밭을 만들자"는 결의를 되세기며 훈련에 임했다고 회고했다. 그후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하기로 한 노백린 장군과 젊은 조종사들은 착실하게 훈련 비행을 거듭하여 1920년 7월 7일, 첫 번째 졸업생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졸업생들은 모두 25명이었다. 이들은 모두들 비행술을 배워 이를 무장독립투쟁에 쓰고 자 했으며 모두들 후진들을 양성해야 한다는데 뜻을 모아 모두 함께 졸업하자마자 다시 이 비행학교의 비행교관으로 종사했다.

이후 이들의 소문은 미국의 한인사회 전역으로 퍼졌으며 이 이야기를 들은 한인들중 독립운동에 참여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생업을 그만두고 비행학교에 입학하고자 문의가 쇄도했다.  미국언론에서도 이들의 이야기를 화제거리로 다루었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본 몇 몇 미국인들이 이들과 함께 비행을 배우고자 이 학교에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용기백배한 노백린 선생은 상하이의 임시정부에 미국에서 조직된 독립군단과 비행학교의 활동상황을 알렸으며 독립군 공군의 창설이라는 어떻게 보면 황당하기까지한 일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노백린 선생의 서신을 받은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운동가중에서 젊고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미국으로 파견하여 비행술을 배우게 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방침까지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노백린 선생을 임시정부로 불러들여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으로 일해달라고 하였다. 결국 임시정부의 장군이 된 노백린 선생은 그의 제자들에게 비행학교를 맞기고 1921년 7월 미국을 떠나 상하이로 향했다.

비록 그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노백린 장군이 상하이로 떠난후에도 한인 비행학교에서는 계속 많은 훈련생들이 입교하여 조종술을 배웠으며 1922년 6월에는 학생이 41명에 달하기도 하였고 1923년에는 2회 졸업생 11명을 또다시 배출하게 되어 그 활동이 절정에 달했다. 이후 노백린 장군과 김종림의 노력으로 2기의 JN-4D 훈련기가 더 도착하여 총 5기의 훈련기를 장비하게 되어 본격적인 훈련 비행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도 했다.

[ 투지에 불타는 한인 훈련생의 사진, 아쉽게도 이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

그러나 이무렵 미국의 경제가 급격하게 악화되면서 비행학교와 독립군단의 자금줄이었던 현지 한인들의 경제도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점점 자금 사정이 악화되자 한인 비행학교는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게다가 이무렵 임시정부에서도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자금사정이 악화디었으며 도저히 정상적인 독립운동 활동을 진행하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많은 한인들이 안타까와하며 어떻게든지 비행학교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늘어나는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7개월뒤 윌로우스 독립군단과 비행학교는 해체되고 말았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독립군 항공전력의 선구자였던 노백린 장군이 임정활동을 위해 머무르던 상하이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에 중상을 입고 요양중 결국 1926년 1월 22일 세상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몇 개월만에 독립군 항공대를 만들겠다는 노백린 장군과 젊은 독립투사들의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이곳 항공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은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거나 2차대전이 발발하자 미국 CIA의 전신인 OSS의 요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몇몇 조종사들은 미 육군 항공대에서 조종사로 활동하기도 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비록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그 숭고한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조국의 독립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한국공군의 선구자였던 노백린 장군의 높은 뜻과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조국 독립의 꿈을 이룩하기 위해서 헌신했던 젊은 한국인 조종사들의 가슴저린 사연들은 이제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한 전설이 되어 길이 기억될 것이다.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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