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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 폐허에서 일어선 날개 (The beginning)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3. 5. 17 foxmouse : 한국공군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대한민국공군'홈페이지나 '공군사관학교'홈페이지와 같은 국가기관의 자료를 통해서 어느정도 알려지고는 있지만 이런 자료들의 대부분이 한국전쟁을 통해서 공군 초창기에 활약했던 조종사들의 영웅적인 업적위주로 단편적으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한국공군이 갑자기 닥쳐온 한국전쟁이라는 엄청난 국가의 재난속에서 어떻게 독립적으로 작전을 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자세히 설명된 자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사실 일제의 강점에서 막 벗어나자마자 분단된 작은 나라에서 항공전력이라는 최첨단의 군대가 탄생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는지는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연재되고 있는 한국전쟁 항공전 제 3부에서는 한국공군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 홈지기가 그동안 수집한 자료중 비교적 객관적인 자료라고 생각되는 것을 리뷰하여 진행하려고 합니다. 사실 홈지기 개인의 능력으로는 자료 수집의 한계도 있고, 더구나 이런 초창기 공군의 발전을 살펴볼만한 국내 자료가 너무나 부족한 실정이어서 구성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틀린 내용이나 고증과 벗어난 내용이 충분히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혹시 불타는 하늘에 들러주시는 분중에 연재에서 잘못된 부분을 하시는 분들은 주저하지 마시고 게시판을 통해서 의견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시절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태평양전쟁은 끝이나고 일본은 한반도에서 물러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2차대전의 두 승전국 소련과 미국에 의해서 남과 북으로 나뉘어 동서이념대립의 대결장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이라는 작은나라의 상황에는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소련이 북한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북한군의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는 것을 크게 중요시하지 않았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미국이 유사시 전력을 다해 군사력을 투입하여 방어할 라인을 선정할 때 한국은 제외하도록 한다는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표를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남한에 군사력을 강화할 경우 소련을 자극할 우려가 있으므로 남한에는 치안유지수준의 경비대정도로 충분하다는 정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까지 미국은 한반도에 대해서 별로 관심도 없었으며 이 작은 나라가 장차 동서이념 대결의 최전방에 위치하는 교두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뜩이나 어려운 나라살림에 독자적인 항공전력을 가지겠다는 남한 정부의 희망은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당시 항공에 대한 기술이나 인적자원이 태부족인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가 없이는 공군의 창설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북한의 군사력이 강화되고 있다는 군관계자의 건의로 자신이 그동안 쌓아왔던 미정부와의 친분관계를 이용해서 전투기 100대를 원조해 달라고 요청 했지만 미정부는 당시 남한에 이런 수준의 항공전력을 제공하면 남한군이 북침을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이 원조요청은 번번이 단칼에 거부되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남한 정부가 미국에 이런 원조요청을 하면서 한국공군을 키우기 위해 섭외한 인물이 바로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일본을 상대로 맹활약했던 유명한 용병비행단 '플라잉 타이거즈'의 사령관 클레어 센놀트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센놀트는 한국정부의 초청에 혼쾌히 응했지만, 자신이 한국에 공군을 키우기 위해서는 최소한 100대의 전투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전투기의 원조를 거부하면서 사실상 자체 공군을 양성하려는 것이 어려워지자 난색을 표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한국공군의 초창기 전력 상황에 대해서는 본 연재의 1회에 간단하게나마 언급되어 있으므로 궁금하신분들은 그부분을 다시 읽어주시기 바라며 여기서는 그때 언급되지 못한 이야기들을 알아보고자 한다. 한국이 독립한 시점에서 일본군이 황급하게 한국에서 물러가면서 한국에서 사용되고 있던 일본의 민항기나 훈련기등의 기체들이 방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중 고성능 기체들은 소련과 미국에서 기체를 수거하여 본국으로 보내 평가와 연구에 사용했다. 따라서 한반도에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기체들중 별로 이용가치가 없는 고물기체들만이 버려졌는데, 그동안 이런 일본제 항공기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었지만 미군과 소련측의 무서를 살펴보면 이런 기체들이 북한과 남한에서 한동안 비행을 계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의 문서자료에 따르면 1945년 일본이 항복한후 김포비행장에 미군 정보부 장교들이 도착했을 때 비행장에 몇대의 Ki-84 전투기를 비롯해서 Ki-46, Ki-55, Ki-54, Ki-79와 같은 기체들이 비행장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중 Ki-84 하야테는 발견되는 족족 모든 기체가 테스트를 위해서 미본토로 실려갔으며 나머지 쓸모없는 기체들은 그냥 버려져 한국정부에서 이를 입수하고 이의 도색을 변경하고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북한의 상황도 거의 비슷해서 한국전쟁에서 연합군이 평양으로 진격했을 때 평양비행장에 상당수의 일본제 기체들이 북한군의 마킹이 그려진채 방치된 것이 촬영되었다. 한편 1953년 미그-15를 몰고 귀순한 노금석 소위는 이 당시 상황에 대해서 북한지역에 남겨진 거의 모든 일본제 항공기들은 소련군이 본국으로 가지고 갔으며 남겨진 기체들은 사용이 불가능한 고물 몇기에 불과했다고 증언했다. [ 역시 평양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북한군이 사용하다가 파손된채로 방치된 Ki-55 기의 사진이다. ] 사실상 남한과 북한은 소련과 미국의 원조가 없이는 항공기를 가질 수가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일본이 남기고간 중고 기체들이라도 초창기에는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특히 Ki-9 훈련기 같은 경우는 한국공군의 초창기 기록중에는 이런 일본제 기종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지만 최근 인터넷을 통해 공개된 외국자료에서 태극마크가 선명하게 그려진 사진들이 남아있는 것들이 소수 발견되어 아마도 일본이 패망하면서 남한과 북한 지역에 많은 수의 일본 항공기들이 버려져 양측에서 모두 초등 훈련기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역시 태극마크가 도색된 Ki-9 훈련기의 사진으로 초창기 한국공군의 태극마크 형식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는 자료이다. (사진제공 : 이종태님 ) ] 당시 미군은 한국정부의 항공기 원조요구가 계속되자 1948년 9월에 이르러서야 선심을 쓰듯이 포병의 관측용으로 사용되던 L-4 연락기 10기만을 원조했을 뿐으로 이런 기체들은 고정 무장도 없고 항속거리도 짧아 사실상 저공에서 지상의 상황을 관측하는 정도 이외에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특히 이 연락기들은 짧은 항속거리와 무선장비의 부재로 인해서 1948년 10월의 여순반란사건 당시에 몇 대가 투입되었지만 통상적인 정찰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에 한국군은 미군에 더 고성능을 가진 항공기를 원조해줄 것으로 요청했으나 미군은 이에대해서 항속거리가 약간 늘어난 L-5 연락기 10 기를 더 넘겨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무렵 북한은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독소전에서 맹위를 떨친 정예 전투기인 야크-9과 우수한 지상공격기인 IL-10 슈트로모빅을 수십기씩 들여와 공군력을 크게 강화하고 있었다. 건국기 더구나 남한에서는 아직 공군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연락기에 불과한 L형 항공기들조차도 모두 육군의 소속으로 되어 있었는데 항공관계자들은 독립후부터 공군을 육군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공군을 구성할 만한 항공기들의 부재와 남한의 군사력 강화를 우려한 미군사 고문단의 반대, 그리고 육군내부에서도 얼마되지 않는 항공기를 육군 소속으로 유지해서 육군의 지원에 사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 그 뜻을 쉽게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최용덕, 김정열과 같은 몇몇 선구자들의 노력으로 국군조직법을 제정시에 공군의 창설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반영하여 삽입케함으로써 공군독립의 근거를 마련하였고, 1949년 10월 드디어 김정렬 대령을 초대 참모총장으로 하여 1600명의 병력과 20대의 연락기로서 육군에서 분리되어 마침내 한국 공군의 이름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한편, 남한 정부는 계속 미국에 전투기 100대의 원조를 요청했지만 이 요청이 미정부로부터 번번히 묵살되자 공군의 항공기를 자력으로 장만하기로 하고 정부와 언론기간의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서 전국적인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당시 모든 신문에는 '우리 비행기를 우리 힘으로'라는 호소문이 실렸고, 이를 본 국민들이 어려운 살림에도 너도나도 성금을 기탁하여 이 당시 모아진 자금은 무려 3억 5천만원에 달했다. 당시의 어려운 국내 상황을 고려해볼 때 대단한 거액이었다. 정부는 이 돈으로 미국으로부터 전투기를 구매하고자 했지만 여전히 남한의 한공전력 건설에 부정적이었던 미국은 당시 본토와 유럽에서는 수천대의 프로펠러 전투기들을 고물로 페기처리하고 있었음에도 한국에는 단 한 대의 항공기도 팔 수 없다면서 항공기의 판매조차 거부했다. 사실 미정부는 한반도의 실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서 만일 남한의 군사력이 너무 강해지면 이 무기들을 가지고 북침을 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 우려를 했다고 한다. [ 고증에 충실한 AT-6 건국기의 모형, 김영규님의 작품 ] 결국 항공기를 구하기 위해서는 미국외에 다른 나라로부터 항공기를 우회해서 구매하는 방침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많은 노력끝에 간신히 캐나다로부터 항공기 구매 교섭이 성사되어 당시 캐나다가 면허 생산한 AT-6 택산 훈련기 10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AT-6는 미국 노스아메리칸사의 제품으로 2차대전 당시에도 일선 전투기에 비해서는 성능이 많이 떨어지는 훈련기로서 미국에서는 조종사 양성용 훈련기로 사용되거나 육군의 정찰기등으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이런 기체라도 한국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L-4/5 시리즈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고성능의 기체로서 약간의 개조를 통해서 어느정도의 무장도 장착이 가능했다. 이 기체는 운동성이 뛰어나고 비행시에 안정성이 높아 미군에서도 계속 훈련기와 육군의 근접지원을 위한 관측기로 사용하고 있던 기체였다. 하지만 북한에 70여기 이상이 원조된 소련제 야크-9과 같은 고성능 전투기와는 너무나 큰 성능의 격차가 있었다. [ 건국기 명명식을 담은 사진과 기록화, 많은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적인 행사로 개최되었다. ] 1950년 5월 드디어 대망의 AT-6 기들이 여의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무렵 캐나다로부터는 항공기연료 1천 드럼과 AT-6에 장착하기 위한 12.7mm 기관총 20정, 실탄 5천발 그리고 1년정도 유지가 가능한 부속품등을 같이 들여올 수 있었다. 이 당시 이 기체들에대한 국민의 관심은 대단해서 이 기체들이야말로 진정한 우리 비행기라는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와 함께 정부에서는 이 기체들에게 국가건설과 국민의 애국심을 상징하기 위하여 "건국기"라고 명명하였으며 5월 14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외 고위 인사를 초청하고 시민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건국기'의 명명식을 열었다. [ 건국기들의 편대비행 장면, 폭음도 드높게 날아올라 편대비행을 하는 건국기들의 모습에 눈물까지 흘렸던 국민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날 조종을 맡았던 10인의 조종사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이근석 대령, 김신 중령, 김영환 중령, 장성환 중령, 오점석 대위, 박희동 대위, 이상수 중위, 정영진 중위, 강호륜 중위, 장동출 중위 ] 이 건국기들의 명칭은 1호기인 '교통'호를 시작으로 10호기까지 각각 전남, 전북, 전매, 충남, 체신, 국민, 농민, 남전, 경북호로 명명되었으며 여의도 상공에서 많은 시민의 환호속에 역사적인 첫 번째 편대비행을 실시하였다. 일본으로부터 독립한후 5년만에 우리힘으로 장만한 비행기들이 하늘로 날아오른 역사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에 이 장면은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많은 국민들은 건국기들이 편대비행하는 모습을 쳐다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한국공군은 아직 전쟁에 대비가 된 상태로 볼 수는 없었고, 그로부터 불과 40일뒤 북한의 대대적인 남침으로 처참한 한국전쟁이 시작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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