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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1929년 영국 Mk.C 전차 특징 조합해 개발

구름위 2017. 1. 1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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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1929년 영국 Mk.C 전차 특징 조합해 개발

<21>일본의 89식 전차
2013. 05. 27   16:43 입력


초기엔 가솔린 엔진 채택했으나 1935년부터 디젤 엔진 장착  도로 최대속도 시속 25km로 중국 침략서 적잖은 성과 거둬

 

기사사진과 설명
일본이 개발한 89식 전차의 원형이 된 영국의 빅커스 Mk.C.

일본이 개발한 89식 전차의 원형이 된 영국의 빅커스 Mk.C.


 

기사사진과 설명
일본이 영국에서 수입한 빅커스 Mk.C의 특징과 자국산 시제 1호 전차를 개발해 쌓은 노하우를 조합해 개발한 89식 전차. 
필자제공

일본이 영국에서 수입한 빅커스 Mk.C의 특징과 자국산 시제 1호 전차를 개발해 쌓은 노하우를 조합해 개발한 89식 전차. 필자제공


일본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차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기병의 말은 장기적으로 자동차나 전차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자동차를 기반으로 한 장갑차는 험지 기동력이 떨어져 만주 등 당시 일본이 관심을 보이던 지역에서 운용이 어려운 만큼 전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은 1차 대전 직후부터 영국과 프랑스의 전차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차 대전 직후의 예산 감축 등 여러 요인 탓에 대대적인 조달은 어려웠다. 1925년에 기갑부대가 창설되기는 했으나 그 규모는 영국제 Mk.A 휘펫 중전차 6대, 르노 FT-17 경전차 13대라는 빈약한 수준으로 본격적인 실전부대라기보다는 기갑부대의 개념을 연구하는 실험부대에 더 가까운 실정이었다.

 게다가 이 전차들은 이미 1925년 시점에서 구식이 되기 시작한 상황이라 더 발달된 전차가 필요했다. 이 때문에 처음에 일본은 더 발달된 해외 전차의 수입을 고려했다.

당시 전차 개발과 생산이 그나마 활발하던 영국의 전차가 주요 후보로 부각됐다. 그러나 일본이 바라던 영국의 주력전차 빅커스 Mk.II는 영국군이 자국 제식이라는 이유로 수출 허가를 내리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전차를 자체 개발하기로 작정하고 마침 영국군에 채택되지 않은 빅커스 Mk.C 중(中)전차의 시제품 한 대를 수입해 1927년에 일본으로 반입하는 데 성공했다.

 거의 동시에 일본은 이것과는 별도의 자국산 전차인 시제 1호 전차를 개발했다. 이 전차는 1개의 포탑과 총탑 2개를 갖춘 다포탑 전차라는 점, 무게가 원래 육군의 요구보다 6톤이나 무거워지고 기동성도 낮아진 점 등이 문제가 돼 결국 일본군에 채택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적잖은 노하우를 쌓게 됐고 그 노하우와 영국에서 수입한 빅커스 Mk.C의 특징을 조합해 새로운 국산 전차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개발한 것이 1929년에 완성된 일본의 89식 전차다.

 89식 전차의 개발 과정에서 일본 전차의 역사에 영향을 끼치는 사건이 벌어진다. 수입된 빅커스 Mk.C의 시험 중 배관에서 새어나온 가솔린이 기화돼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고로 전차에 탄 영국인 기술자 두 명이 부상을 입고 전차도 파손됐다. 이 때문에 일본은 전차 엔진으로 화재 위험이 낮고 연비가 좋은 디젤 엔진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89식 전차의 초기 생산형(일명 ‘갑’형)에는 마땅한 디젤 엔진을 못 찾아 가솔린 엔진을 채택했으나 1935년부터의 후기형(‘을’형)을 포함한 그 뒤의 일본 전차에는 모두 디젤 엔진을 장착했다.

또 파손된 빅커스 Mk.C를 미쓰비시 중공업이 3개월 만에 수리하는 능력을 보여준 덕분에 군 당국이 미쓰비시를 전차 개발과 생산의 중심 업체로 선정했다. 그 뒤로 80년이 넘게 지난 오늘까지도 일본의 전차 개발과 생산은 미쓰비시가 맡고 있다.

 1939년까지 약 400대가 생산된 89식 전차는 빅커스 Mk.C와 매우 흡사한 형태로, 무장도 적 보병이나 진지 제압이 주목적인 57㎜ 곡사포와 기관총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차전이 전차의 주목적이 아니었기에 이것은 별다른 문제는 아니었다. 최대 속도는 도로에서는 25㎞/h였으나 험지에서는 최대 10㎞/h 정도로 일본군에게는 다소 불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89식은 영국이나 프랑스의 다른 나라 전차들과 비교해도 딱히 뒤떨어지는 성능이 아니었다. 일본 육군도 정식으로 채택한 뒤 한동안은 큰 불만 없이 잘 운용했다.

 특히 89식은 1931년부터 본격화된 일본의 만주 및 중국 침략에서 적잖은 성과를 거뒀다. 전차 전력도, 대전차 무장도 빈약한 중국군 상대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공격력과 방어력(최대 장갑 두께 17㎜) 모두 큰 불만은 없었지만 낮은 기동성이 일본 육군에서 나름 불만을 샀다.

이 때문에 일본군 전차는 그 뒤로 방어력과 공격력을 희생해서라도 중국 및 만주에서의 이동과 유지가 편리한 가벼운 무게를 유지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것이 나중에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전차의 실전에 큰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