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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도 큰 게 빠르기까지 美·英·佛 합작 ‘인터내셔널 Mk.Ⅷ’ 떴다

구름위 2017. 1. 1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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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도 큰 게 빠르기까지 美·英·佛 합작 ‘인터내셔널 Mk.Ⅷ’ 떴다

<13>엔진·변속기 등 분리 소음·매연 고통 벗어나 39톤 큰 몸집에도 최고 시속은 8.45km 달해
2013. 04. 01   17:23 입력


 제1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유례없는 소모전이었고, 특히 참전국의 공업 능력이 절대적인 역할을 차지했다. 연합국 측에는 영국과 프랑스라는 유럽의 양대 공업국이 있었으나 추축군 역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공업 능력을 합치면 무시할 수 없었고, 특히 프랑스는 독일에 가까이 위치해 있던 중공업 단지의 상당수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면서 중공업 능력의 70%를 잃었다. 영국 역시 심각한 병력 소모로 인해 국내 노동력이 부족해진데다 막대한 전쟁 채무로 인해 점점 한계를 느껴 갔고, 이런 상황에서 1917년에 미국이 참전을 결정했다.

기사사진과 설명
인터내셔널 Mk.Ⅷ 전차.

인터내셔널 Mk.Ⅷ 전차.


기사사진과 설명
인터내셔널 전차의 단면도. 엔진 등의 부속이 뒤에 몰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내셔널 전차의 단면도. 엔진 등의 부속이 뒤에 몰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차 생산에 희망을 안겨줬다. 영국도 전차 생산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으며 프랑스 역시 중(重)전차의 생산은 이미 심각한 한계에 봉착한 지 오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FT-17 같은 경전차 생산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전선 돌파를 위해서는 강력한 중전차의 존재가 필수적이었지만, 영국도 영국이거니와 프랑스는 개발 중이던 차기 중전차인 샤르(Char) 2C형 전차의 개발을 전쟁 중에 끝낼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암담한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참전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곧 미국의 공업 생산능력을 활용해 새로운 중전차를 개발하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영국과 프랑스, 미국이 공통적으로 사용할 중전차를 하나 개발한 다음 궤도나 엔진, 변속기 등 주행에 필요한 부속들은 미국에서 만들고 장갑판과 무장은 영국에서 제공한 뒤 프랑스에 조립 라인을 만들어 새로운 전차를 출고하면 프랑스 내에 있는 연합군 모두가 같은 전차를 받아서 쓰자는 논리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국제 합동 전차개발 프로젝트인 ‘인터내셔널’ 혹은 ‘리버티’ 프로젝트였다.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프랑스에 새로운 전차 공장을 세운 뒤 이것을 1918년 봄부터 가동시켜 처음 몇 달간 1달에 300대씩, 총 1500대를 1918년 끝 무렵까지 만든 뒤 그 뒤에는 한 달에 1200대씩 생산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대로라면 1919년 여름에는 1만 대가 넘는 연합군의 ‘인터내셔널’ 전차가 독일군 전선을 짓밟고 있을 터였다.

 인터내셔널, 혹은 리버티라고도 불린 신형 중전차인 Mk.VIII는 당시 연합군이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중(重)전차였다. 기본 디자인은 좌우에 돌출형 포탑이 달린 기존 영국제 중전차의 스타일을 따랐으나 포탑은 운반 중 좌우 폭을 줄이기 위해 안으로 접어 넣을 수 있었고, 또 길이가 10.42m나 되는 덕분에 4.9m에 달하는 참호도 극복할 수 있었다.

 무장은 57㎜ 포 2문과 기관총 7문(미군용 버전은 기관총 5문)으로 기존 전차들과 큰 차이가 없었으며 승무원도 12명(미군용 버전은 10명)으로 결코 적지 않아 당시 전차의 개념인 ‘지상 군함’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늘어난 길이를 잘 활용해 엔진과 변속기 등을 전부 뒤쪽의 분리된 공간으로 몰아넣었고, 그 덕분에 승무원들은 엔진 소음과 매연에 고통받지 않고 작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39톤에 달하는 거대한 차체(이 전차는 역사상 실전배치된 전차 중 두 번째로 크다)에도 불구하고 엔진도 당시로써는 강력한 300마력의 항공기용 리버티 엔진을 사용, 최고 시속 8.45㎞/h로 그 이전의 영국군 중전차들보다 오히려 빨랐다.

 그러나 이런 성능에도 불구하고 인터내셔널의 생산과 배치는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1918년 9월에야 첫 완성차량이 나왔고, 테스트가 끝나기도 전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나버렸다. 결국 프랑스에서의 생산은 포기됐고, 전쟁이 끝난 직후에 미국이 100대, 영국이 24대를 각각 따로 만드는 것이 전부였다.

 미국에서의 인터내셔널 전차는 그나마 좀 나은 신세였다. 100대의 차량 모두 실전배치가 된 뒤 1932년까지 운용됐던 것이다. 이것들은 1940년에 전차가 턱없이 부족하던 캐나다에 훈련용으로 제공됐다. 하지만 영국군에서 24대 모두 실전배치가 되지 못한 채 폐기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의 전차 개발사에 하나의 징크스를 안겨줬다. 두 나라 이상이 얽히는 전차 공동개발이 잘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 징크스는 그 뒤로 오랫동안, 지금까지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