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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전차공격, 敵 방어선에 큰 충격 안겼다

구름위 2017. 1. 15.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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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전차공격, 敵 방어선에 큰 충격 안겼다

Mk.IV로 무장한 영국군, 캉브레 전투에 476대 동시 투입독일군 방어태세 뚫고 초반 성공… 실패 불구 가능성 주목
2013. 02. 25   14:42 입력


기사사진과 설명
영국군의 Mk.IV전차(포를 장비한 수컷 모델). 주포가 Mk.I보다 약간 짧아졌다.

영국군의 Mk.IV전차(포를 장비한 수컷 모델). 주포가 Mk.I보다 약간 짧아졌다.


 

 

기사사진과 설명
캉브레 전투 직후 구덩이에 파묻힌 채 노획된 영국 전차를 파내고 있는 독일군. 많은 영국 전차가 기동 불능이 된 채 독일군에 노획됐다.

캉브레 전투 직후 구덩이에 파묻힌 채 노획된 영국 전차를 파내고 있는 독일군. 많은 영국 전차가 기동 불능이 된 채 독일군에 노획됐다.


 제1차 세계대전에 전차가 처음 등장한 지 1년 정도가 지나자 전차를 사용하는 연합군 측과 전차의 공격을 받는 독일군 모두 전차에 대해 가졌던 환상이 사라졌다.

 먼저 독일군은 전차라는 존재의 약점을 일찍 깨달았다. 가장 처음 한 일은 야포를 최대한 전선 부근으로 끌어온 뒤 접근하는 적 전차를 쏴버리는 것이었다. 아직 철갑탄이 없던 시대지만 장갑이 얇은 당시의 전차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야포의 고폭탄 사격에도 지극히 취약했다. 게다가 당시의 전차는 기동력이 약한 데다 지면에 처박혀 꼼짝도 못하게 되기 쉬웠기 때문에 적의 야포 사격에 좋은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야포를 전선 코앞까지 끌고 오기는 쉽지 않은 법이고, 이 때문에 보병에게도 대전차 수단이 처음으로 지급됐다. 당시 K탄이라고 불리던 소총용 철갑탄이 그것으로, 독일군은 이것을 주로 기관총에 장전해 전차가 접근하면 마구 쏘아댔다. 실제로 1917년 4월에 60대의 영국 전차가 아라(Arras) 지방 공격에 참가할 때 대부분의 전차들이 독일 기관총의 K탄 사격을 당했다.

 여기에 독일군 보병들도 여러 개의 수류탄을 묶거나 공병용 폭약을 던져 터뜨렸고 경우에 따라서는 화염방사기를 사용하는 등 영국 전차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설령 제대로 기동할 경우라도 최고 시속이 6㎞ 정도에 불과한 데다 실제로는 그보다 느리기 일쑤이고, 또 사각지대도 많아 보병이 접근해 공격을 가하기 쉬웠던 것이다.

 이로 인해 영국군은 전차를 몇십 대씩 찔끔찔끔 투입해서는 효과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병만으로 돌격하는 것보다는 분명 효과적일지 몰라도 원래의 방법을 답습해서는 여전히 독일군의 강한 방어선을 뚫기 힘들었던 것이다.

 먼저 사용되는 전차였던 Mk.I은 개량돼 Mk.II, 그리고 Mk.IV로 발전해 나갔다(Mk.III는 실전용이 아닌 훈련용). 기본적인 구조나 제원에 큰 차이는 없었지만 기계적 문제가 조금씩 개량되고 장갑 역시 적의 기관총에서 쏘는 철갑탄을 막기 위해 약간 보강됐다. 특히 Mk.IV는 수적인 면에서 이전의 전차들과 확연히 달랐다- Mk.I이 150대, Mk.II가 50대 생산된 데 불과한 반면 1917년 5월부터 생산된 Mk.IV는 무려 1220대라는 물량이 생산돼 영국군의 주력 전차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처럼 대량으로 생산된 것은 영국군의 전차 운용이 새로운 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이제 전차도 수백 대 단위를 단번에 투입해야 적의 대규모 참호 진지를 돌파할 수 있다고 깨닫기 시작했고, 여기에 맞춰 최신형인 Mk.IV를 대량으로 장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대규모 전차 투입의 기회가 찾아왔다. 1917년 11월 20일, 독일군이 구축한 대규모 참호선인 힌덴부르크 라인의 일부를 돌파하기 위한 캉브레(Cambrai) 전투에 무려 476대의 전차를 동시에 투입한 것이다.

 힌덴부르크 라인은 독일군이 세심하게 마련한 참호선으로, 이것을 보병만으로 돌파하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연합군이 이 방어선을 돌파하려 한 시도는 종종 수포로 돌아갔지만, 캉브레 전투의 양상은 예전과 달랐다.

 무려 2개 군단의 병력이 476대의 전차와 함께 돌격하자 공세를 예상하던 독일군의 방어태세도 대부분 버틸 수 없었다. 공격 당일에 영국군은 최대 8㎞까지 전선을 돌파했다. 첫날의 영국군 사상자는 약 4000명으로 예상을 훨씬 밑돌았다. 대규모의 전차 공세가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성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무적인 첫날의 전과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점에서 보병과 전차의 협동이 잘되지 않았고, 목표 도달에 실패한 때도 많았다. 게다가 독일군은 미리 배치한 대규모 병력을 집중해 반격에 들어갔다. 독일군의 반격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며칠 되지 않아 영국군은 거꾸로 방어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고, 결국 영국군은 첫날 점령한 땅 대부분을 포기하고 후퇴함으로써 공세는 사실상 실패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공세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남겼다. 전차의 대규모 공격이 적 방어선에 주는 충격이 매우 크다는 것이었다. 비록 한계는 있었지만 전차의 가능성이 더욱 주목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