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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두 번째 실전용 전차 ‘슈나이더’ 탄생

구름위 2017. 1. 1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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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두 번째 실전용 전차 ‘슈나이더’ 탄생

초기부터 결함 노출·실전 투입된 전차 132대 중 57대가 격파돼 두 번째 전차 ‘생 샤몽’ 앞부분 참호 등에 처박혀 행동불능 잦아
2013. 02. 18   16:05 입력


기사사진과 설명

프랑스 최초의 전차이자 세계 두 번째의 실전용 전차인 슈나이더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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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두 번째 전차인 생 샤몽 전차. 전차 생산 업체 간의 알력으로 프랑스 최초의 전차를 만든 슈나이더 대신 FAMN이 따로 설계해 납품했다. 
필자제공

프랑스의 두 번째 전차인 생 샤몽 전차. 전차 생산 업체 간의 알력으로 프랑스 최초의 전차를 만든 슈나이더 대신 FAMN이 따로 설계해 납품했다. 필자제공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만이 전차라는 무기를 떠올린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연합국인 프랑스도 비슷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이다.

특히 프랑스는 자국 영토가 전장이 된 데다 구태의연한 돌격 일변도의 전술 탓에 초반부터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인명피해를 줄이면서 적 참호선을 돌파할 수 있는 ‘기계 돌격병’이 더 절실했다.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포병 장교인 장 밥티스트 에스티엔 대령이었다. 기술적으로나 전술적으로 높은 식견을 가진 것으로 칭송받던 그 역시 당시의 최신 기술인 무한궤도 차량을 개조, 장갑과 무장을 갖춘 차량을 만들자고 1915년 초반부터 제안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육군에서도 이런 전대미문의 차량에 대한 반신반의는 있었다. 하지만 전쟁 최초의 몇 달 사이에 수십만 명의 자국 청년이 목숨을 잃었고 그 뒤로도 피해가 쌓여가는 상황에서 새로운 제안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1915년 12월에 몇 가지 새로운 차량에 대해 실시된 테스트에서 에스티엔이 제안한 방식, 즉 미국제 홀트 트랙터와 같은 무한궤도 차량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마침내 1916년 2월 차량 제작 업체인 슈나이더 사와 에스티엔이 함께 개발한 13톤 무게의 슈나이더 전차 생산이 시작됐다. 세계에서 두 번째의 실전용 전차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슈나이더 전차는 초기부터 결함이 적지 않았다. 영국의 리틀 윌리처럼 궤도식 트랙터의 차대 위에 박스형의 장갑 차체를 얹고 무장을 장착한 것인데 무게중심을 낮추기 위해 결국 무장을 차체 측면에 설치해야 했다. 이 때문에 사각이 많이 발생했다.

특히 크기가 작은 차량에 6명이나 되는 승무원이 몰려 있다 보니 내부가 상당히 좁고 불편했다. 물론 영국의 Mk.I과 마찬가지로 엔진실과 전투공간이 분리되지 않아 소음과 매연 등에 승무원이 노출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또 적 철조망을 쉽게 뚫기 위해 만든 앞부분의 돌출부가 실제로는 시야를 가로막는 등 주행의 장애물이 된 것도 문제였다.

무장은 기관총 두 자루와 75㎜포 1문인데, 주포는 구경은 크지만 포신이 매우 짧은 박격포여서 유효사거리가 수백 미터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실전에 투입된 슈나이더 전차의 첫 전투도 문제였다. 1917년 4월, 슈나이더 전차 132대가 처음 전투에 투입됐지만 이미 전차 공격을 충분히 예측한 독일군은 야포를 전선으로 끌어와 여기에 맞섰다.

아직 철갑탄이 없었지만, 장갑이 11.5㎜에 불과한 만큼 야포의 고폭탄 사격도 치명적이었다. 132대 중 57대가 격파됐으며 프랑스군의 공세도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게다가 프랑스의 전차 생산은 업체 간 알력으로 더 혼선에 빠졌다. 원래 프랑스군은 슈나이더 전차를 800대 만들 예정이었고 그 중 400대를 생 샤몽 지역에 있는 FAMH라는 업체에서 만들 예정이었다. 하지만, 슈나이더 측에서 비싼 로열티를 요구하는 바람에 FAMH는 따로 전차를 설계해 납품했다. 이것이 바로 생 샤몽 전차였다.

 생 샤몽 전차는 23톤에 달하는, 슈나이더보다 더 큰 전차였다. 승무원도 9명에 달하고 무장도 4문의 기관총에 더해 장포신의 75㎜ 야포를 탑재, 화력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슈나이더보다 유리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차체를 늘린 것이 화근이었다.

궤도 길이와 비교하면 차체가 너무 커지다 보니 차체 앞부분이 참호 등에 처박혀 행동불능이 되는 경우가 잦았던 것이다.

 생 샤몽의 전투경력은 슈나이더와 비교해 명암이 엇갈리는 편이었다. 1917년 5월에 감행된 첫 전투에 투입된 16대의 생 샤몽 전차 중 단 세 대만이 적의 공격에 격파됐지만 여러 대가 참호 등에 처박혀 기동불능이 됐던 것이다.

즉 기동 중에 행동불능이 되기 쉬워 과감한 돌격 등은 어려웠지만, 섣불리 진격하는 대신 강력한 주포를 이용해 적진과 거리를 두고 최전선에서 화력을 지원하는 일종의 ‘기동 포대’처럼 활용하면 나름대로 높은 성과를 보일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전차보다는 자주포에 가까운 셈이었다.

 이 두 전차의 문제는 생산성이었다. 둘을 합쳐 800대를 만드는 데 원래는 1년 미만이 소요될 예정이었지만 실제로는 2년이 넘게 걸렸다. 결국 프랑스는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