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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전엔 ‘기대 半’ Mk.1 데뷔戰 출전 후엔 ‘우려 半’

구름위 2017. 1. 1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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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전엔 ‘기대 半’ Mk.1 데뷔戰 출전 후엔 ‘우려 半’

고장 잦고 전술도 없어 시행착오 속출 하루 4㎞ 돌파 성공 보병들엔 ‘구세주’
2013. 02. 12   12:09 입력 | 2013. 02. 14   13:57 수정


기사사진과 설명

영국군이최초의 전차공격을한 1916년 9월 15일부터열흘이지난9월 25일 촬영한Mk.1 전차. 첫 공격이후전차는주요전투장비로자리잡게 됐다. 필자제공




 

1916년, 마침내 전차가 정식으로 영국군에 납품되는 사이 연합군은 프랑스의 솜므 강 일대에서 전세를 뒤엎을 대대적 공세를 계획했다. 1916년 7월 1일에 시작될 이 대규모 공세는 독일군 방어선을 대규모의 포격으로 완전히 궤멸시킨 뒤 보병들은 그 폐허 위를 걸어서 점령만 하면 된다는, 이론적으로 보면 거의 피해가 없는 완벽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이 완벽한 공격은 시작부터 전혀 완벽하지 않았다. 영국군은 1400문이 넘는 야포를 동원해 1만2000톤이 넘는 포탄을 퍼부었으나 다양한 문제로 독일군 방어선에 입힌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돌격해 들어간 영국군은 첫날에만 무려 2만 명 가까운 전사자가 발생했다. 불과 몇 자루의 기관총과 소수의 방어병력만 있어도 1개 연대가 말 그대로 휩쓸려 사라졌고 공세는 거의 성과 없이 정체돼 버렸다.

 이렇게 되자 신무기인 전차의 가치에 회의적이던 영국군 수뇌부도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되는 공세에도 진격은 거의 멈췄고 7월 중순부터 9월 중순 사이까지 영국군은 겨우 900m를 전진하기 위해 8만2000명이라는 엄청난 사상자를 내야 했다. 새로운 돌파수단이 필요해졌던 것이다.

 1916년 9월 15일 새벽 5시 20분, 마침내 영국군에서 최초의 전차 공격이 실시됐다. 영국군 참호에서 스멀스멀 기어 다가오는 거대한 강철 괴물의 모습에 독일군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곧 총탄을 퍼부었지만 끄떡도 하지 않은 채 철조망에도 개의치 않고 코앞까지 닥쳐오는 괴물 모습에 곧 대혼란이 일어났다. 몇몇 병사들은 소총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나 이런 성공적인 모습은 유감스럽게도 매우 드문 경우였다. 영국군 전차들은 공격시작 전부터 말썽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원래 49대의 Mk.1 전차가 동원돼야 했으나 고장 등의 문제로 실제 공격에 참가한 전차는 32대에 불과했다. 그나마 5대는 출발 직후 포탄 구덩이나 참호에 처박혀 움직이지 못했으며 9대도 금세 고장 났으며 9대는 너무 느려 제대로 된 공격을 감행할 수 없었다. 결국 예정대로 진격한 전차는 9대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 9대도 숱한 말썽에 직면했다. 적진 근처까지 가서 고장 나거나 포탄 구덩이에 빠지는 등 행동 불능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문제에 직면하지 않은 전차도 아무런 구획 구분 없이 가운데 놓인 엔진의 엄청난 소음(당시에는 엔진에 머플러조차 없었다)과 현수장치 없는 차대의 극심한 진동, 총성과 포성, 간간이 장갑의 약한 부분을 관통해 들어오는 총탄 등으로 승무원들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었다. 심지어 통신용으로 탑재한 비둘기들조차 넋이 나가 제대로 날아가지 못할 정도였다.

 여기에 최초로 등장한 무기인 만큼 운용 전술 등의 개념도 없는 시행착오가 속출했다. 그 결과 기껏 등장한 신무기의 효과는 기대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 공격 당일에 영국군은 그 어떤 작전 목표도 성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독일군도 곧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반격하기 시작해 결국 이튿날 사실상 모든 참가 차량이 기동불능 상태가 됐다. 객관적으로 보면 첫 전차 공격은 잘해야 ‘제한적 성공’에 불과했다.

 그러나 첫 전차의 전과는 무시할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하루에 4㎞라는 거리를 돌파하는 데는 성공했으며 인명피해도 상대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특히 연합군 병사들은 신무기 등장에 사기가 높아졌다. 이제는 맨몸으로 돌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앞에서 적진을 돌파해 줄 신무기가 등장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보병들은 큰 위안이 됐다.

 게다가 이 공격은 결과에 관계없이 전차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줬다. 전혀 기대하지 않던 영국군 사령부는 전차가 어느 정도라도 돌파에 성공한 그 자체에 감명을 받았다. 프랑스 파견 영국군 총사령관이던 더글러스 헤이그 장군은 당장 런던에 사절을 보내 전차 1000대 추가 주문을 요구했다. 실망스러운 첫 실전이었지만 전차가 ‘신기한 장난감’이 아니라 한 나라의 주요 장비로 자리 잡는 역사적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