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급선 끊긴 중공군 ‘발등의 불’ 살림마저 빠듯 공급 ‘강건너 불’
- 중국 미숫가루
빌려 쓰는 형식의 강제 징발 ‘현지 조달’ 선택
전쟁 끝나자 감감소식…피해는 남북한 몫으로
6.25전쟁 중 중공군 주요 전투식량은 미숫가루였다. 사진은 미숫가루를 만드는 모습. |
중공군은 전투식량으로 미숫가루 한 움큼과 눈 한 덩어리를 먹었다. 필자 제공 |
중공군 식량주머니. 출처=전쟁기념관 |
65년 전 오늘, 1950년 10월 20일에 중공군 5개 사단이 압록강을 넘었다. 중국의 6·25전쟁 개입이 본격화된 것이다.
최초로 강을 건넌 병력은 약 20만 명, 참전한 전체 병력은 약 135만 명으로 추산된다. 엄청난 숫자를 바탕으로 중공군은 초기에 문자 그대로
인해전술을 펼쳤다. 소총 한 자루 들고 징과 꽹과리를 치며 돌격해 왔다. 그런데 이 많은 병력이 하루 세 끼 무엇을 먹고 싸웠으며, 중국은
엄청난 식량을 어떻게 조달했을까?
미국은 세계 최고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군은 물론 연합군에게도 식량을 보급했다. 반면 건국한 지
1년이 겨우 지난 중국은 전쟁 전의 북한보다도 가난했던 나라였다.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부터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처음부터 준비가 안 됐던 것은 아니다. 중국 기록을 보면 여러 이유로 인해 보급이 원활치 못했기 때문이다. 개입 초기 중국은 병력이
100% 자급할 수 있는 19만 톤의 식량을 비축했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면서 일선 부대에 보급된 것은 필요량의 40%에 불과했다. 미군
폭격으로 보급선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또 다른 요인은 밥해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전선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대부분 부대가
연속해 작전에 투입됐고 또 신속하게 이동해야 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주력이었던 제9병단의 일부 부대는 나흘 만에
300㎞를 이동해 전투에 투입됐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밤낮없이 싸웠다.
대부분의 중공군 부대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준비한
식량은 5일치에 불과했다. 그러고는 보급이 끊기다시피 했다. 양식을 운반할 보급열차 15량 중 13량이 공습으로 파괴됐기 때문에 장진호 전투에서
개인에게 지급된 주·부식은 하루 평균 1㎏이 되지 않았다. 그 결과 장진호 초기 전투인 황초령 전투에 참가한 중공군 제42군 124사단과
126사단 병력은 3, 4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운이 좋아야 땅에서 꽁꽁 언 감자를 캐내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뿐만이 아니었다. 중공군은 전반적으로 전투 중에 원활한 보급을 받지 못했다. 낮에는 공습으로, 밤에는 야간작전으로 밥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투 중에는 주로 초면(炒麵)을 먹고 싸웠다.
중국어로 초면은 볶음국수지만 여기서는 한자 뜻 그대로 볶은(炒)
밀가루(麵)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중국식 미숫가루다. 우리 미숫가루는 쌀이나 찹쌀 혹은 보리쌀로 만들지만, 중국 미숫가루는 밀로 만든다. 기본
성분이 밀가루 70%, 고량미나 쌀가루 30%, 그리고 소금 0.5%다.
미숫가루는 가장 원시적이면서 가장 간단한 군용
식품이었다. 운반이 쉽고 저장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먹기도 편했다.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널 때부터 병사마다 각자의 식량주머니(干糧袋)를 메고
다녔다. 여기에 보통 5일분의 미숫가루를 넣고 다녔는데 전투 중 배가 고프면 등에 찬 주머니에서 중국식 미숫가루를 꺼내 입안에 털어 넣고 눈을
뭉쳐서 먹으면 허기는 면할 수 있었다.
중국은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에게 먹일 미숫가루를 마련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중국 공산당 당사(黨史)에 기록된 중공군 병참보급조치(抗美援朝戰爭中志愿軍的給養供應保障)를 보면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중국이 미숫가루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개입 초기, 중공군에게 보낼 미숫가루는 741만㎏이 필요했다. 지금의
동북3성이 중공군의 후방보급기지 역할을 했는데 최대로 노력하면 500만㎏까지 공급할 수 있었다. 나머지 부족분 241만㎏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
중부와 남부에도 미숫가루 제조 분량이 할당됐다. 실제로 1950년 11월 랴오닝성의 성도인 선양에서는 매일 7만㎏의 미숫가루를 만들었다고 하니
전 도시가 미숫가루 만드는 데 매달렸던 셈이다.
물론 연인원 135만 명에 이르는 중공군이 중국에서 가져온 미숫가루만 먹고 싸웠던
것은 아니다. 공습으로 원활한 보급선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인 데다 전체 중공군이 먹을 양식을 중국에서 가져올 형편도 못됐다. 그러니 중공군의
선택은 결국 식량의 현지 조달이었다. 중공군 제38군의 경우 1950년 10월 압록강을 건넌 후 4개월 동안 현지에서 조달한 식량이 전체
공급량의 80%였다.
현지 조달의 중공군 측 표현은 ‘차량(借糧)’이다. 문자 그대로는 식량을 빌린다는 뜻이다. 붕괴한 북한군은
식량을 빌려줄 형편도 아니었다. 결국 민간에서 징발해야 했다. 민간에서 순순히 내놓지 않으면 강제로 빼앗는 것이다.
급기야
중공군은 1950년 12월 23일 조선과 식량임차규정(借糧規定辨法)을 체결하고 공개적으로 한반도에서 식량 징발에 나섰다. 도장 찍힌 문서를 주고
식량을 가져가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증서를 제시하면 가져간 식량을 돌려준다는 것이다.
중공군은 6·25전쟁 기간 내내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남북한 우리 민족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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