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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 열면 100명에 牛~ 다리 하나씩을? 배고픈 여진족들 “음메~ 졌소”

구름위 2017. 1. 14.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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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 열면 100명에 牛~ 다리 하나씩을? 배고픈 여진족들 “음메~ 졌소”

충무공에 버금가는 조선의 명장 김종서의 소고기 리더십


배부른 군대로 배고픈 적 상대 손자병법 실천

 

 

기사사진과 설명
전쟁기념관에 있는 김종서 장군 흉상.

전쟁기념관에 있는 김종서 장군 흉상.



기사사진과 설명
여진족을 토벌하고 고려 영토를 알리는 비석을 세우는 척경입비도.

여진족을 토벌하고 고려 영토를 알리는 비석을 세우는 척경입비도.



 

기사사진과 설명
김종서 장군의 일화를 기록한 임하필기.

김종서 장군의 일화를 기록한 임하필기.




 

 

 600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훌륭했던 장수는 누구일까? 물으나 마나 이순신 장군을 꼽는다. 하지만, 한 명 더 있다. “우리나라 장수의 재목으로 근래에 이순신 장군이 있다면 옛날에는 김종서 장군이 있다.” 조선 후기의 지성인, 다산 정약용의 평가다.

 

   ‘징비록’의 저자로 임진왜란을 지휘했던 서애 류성룡 역시 조선 최고의 장수로 이순신이 아닌 김종서를 지목했다. 물론 류성룡은 이순신 장군과 같은 시대를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 장군을 발탁해 키웠고 또 상관이었으니 충무공을 조선 역사상 최고의 장수로 꼽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류성룡이 김종서를 최고의 장군으로 평가한 이유는 북방 6진의 설치 때문이다. “나라에 유명한 재상과 장군이 많지만, 이들이 이룬 커다란 공적 중에서 6진을 설치한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 장군의 계획이 원대하고 생각이 넓고 넓으니 작은 지혜와 얕은 꾀로 말만 잘하며 집안과 나랏일을 망치는 세상의 속 좁은 자들과 풋내기들이 장군을 보면 기운이 빠져 감히 그 입을 놀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 시대를 주름잡은 뛰어난 인재라고 할 수 있겠는데 실로 세종 임금께서 잘 임명하여 이룬 업적이다.”

 6진은 두만강 하류의 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을 말한다. 고려 때 윤관 장군을 대원수로 삼아 17만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여진족을 격파하고 국경으로 삼았지만, 훗날 여진족이 강성해지면서 땅을 빼앗겼다가 이성계가 다시 북방을 평정했다. 그런데 조선 건국으로 방비가 소홀해진 틈을 타 침입해 온 여진족에게 다시 점령당했다가 세종 16년, 김종서 장군을 함길도 절제사로 임명하면서 옛 땅을 수복했다. 이로써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조선의 영토가 확정됐다.

 이에 세종대왕도 “내가 있어도 김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고 비록 김종서가 있어도 내가 없었다면 이 일을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공로를 평가했다.

 장군의 업적은 6진 개척과 함께 여진족의 재침으로부터 북방을 확실하게 지켜낸 데 있다. 김종서 장군은 성격이 불같았다. 맹장이었던 만큼 6진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장병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고 엄하게 다스리며 군기를 확실하게 다잡았다. 원칙에 어긋나면 장병은 물론 지방 관리들까지도 엄격하게 문책을 했기에 부하들이 힘들어했다.

 그렇다 보니 암살 시도까지 있었다. 지나친 훈련과 엄격함 때문에 부하들이 반발한 것인지 여진족의 음모였는지 확실치 않지만, 기록을 보면 밥하는 취사병(膳夫)이 여러 차례 장군이 먹는 음식에 독을 넣었다. 물론 모두 실패했다. 하루는 잔치를 열었는데 어디에선가 화살이 날아와 술동이에 꽂힌 적도 있었다. 그러자 장군이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간사한 것들이 나를 시험하지만, 저들이 감히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며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조선 후기 ‘임하필기(林下筆記)’라는 문헌에 실려 있다.

 평소에는 엄격하고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했지만, 부하들이 믿고 따르며 함께 6진을 개척한 것을 보면 장군의 리더십에는 특별한 무엇이 있었다. 그 사례가 역시 임하필기에 보인다.

 여진족을 몰아낸 김종서 장군은 장병과 함께 6진을 수비하면서 가끔 잔치를 베풀어 병사들을 위로했다. 그런데 이 잔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한번 잔치를 열면 간부들인 비장(裨將) 100명에게 모두 소 다리가 하나씩 돌아갈 정도로 음식을 푸짐하게 차렸다. 단순하게 계산해도 100명이 소 다리 하나씩을 먹으려면 소 25마리가 필요하다. 즉 4명당 한 마리의 소를 잡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간부인 비장은 말할 것도 없고 병졸들까지도 배가 터지도록 소고기를 먹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만 해도 소는 농사에 필요한 소중한 가축이었다. 그러니 일각에서 장군이 귀중한 소를 마구 잡으며 물자를 아끼지 않고 낭비한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장군이 대답했다.

 “북쪽 변방은 태조가 나라를 일으킨 땅이다. 선대 임금들이 잃었던 땅을 회복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가 이제 다행히 영토를 개척했다. 장병들이 10년 동안이나 변방에서 전투했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위로할 방법이 없다. 베풀 때는 야박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절약한다고 야박하게 굴어 장병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린다면 누구와 더불어 변방을 굳게 지키겠는가?”

 손자병법에 “군대를 잘 운용하는 장군은 가까운 곳에 위치해 먼 곳으로부터 오는 적을 상대하고, 편히 쉰 군대로 피로한 적을 상대하며, 배부른 군대로 배고픈 적을 상대하니 이것이 전력을 잘 통제하는 것이다(善用兵者 以近待遠 以佚待勞 以飽待飢 此治力者也)”라고 했다.

 힘든 훈련과 전투로 승리한 후 그 기쁨을 맘껏 누리게 최대한 베푸는 것이 김종서 장군의 소고기 리더십이었다. 이런 리더십이 있었기에 조선 전기 최고의 명장 소리를 듣고 장병들도 기꺼이 장군을 따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