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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괴롭힌 애물단지, 러 혁명정부엔 ‘愛물단지’로

구름위 2017. 1. 14.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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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괴롭힌 애물단지, 러 혁명정부엔 ‘愛물단지’로

캐비아


철갑상어 알… 공급 어민들엔 큰 고통

유럽과 거래 끊기고 현금도 부족하자

캐비아 팔아 식량 수입해 ‘위기’ 넘겨

 

 

 



 

 철갑상어 알인 캐비아는 거위 간 푸아그라, 송로버섯 트러플과 함께 유럽의 3대 진미로 꼽힌다. 제정 러시아 황제인 차르의 음식으로 유명하며 비싸고 사치스러운 요리이기에 검은 황금이라고도 불린다. 북한 김정일이 생전에 즐겨 먹었던 것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유럽의 귀족과 부자들을 비롯한 상류층이 먹는 요리, 비행기 일등석에서 제공하는 요리인 캐비아의 맛은 과연 어떨까?

 우리말에 “개발에 편자”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영어에는 “서민 입에 캐비아(caviar to the general)”라는 속담이 있다.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캐비아는 왕이나 귀족이 먹는 음식이지 서민한테는 안 어울리는 것이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서민은 캐비아를 먹어봤자 그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서민이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은 아닌데 누가 이런 말을 했을까?

 영국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한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말이다. 햄릿 제2막 2장에서 햄릿이 너무 고상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연극을 평가하며 대중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지금은 최고급 요리로 대접받고 있지만, 유럽의 왕과 귀족들이 그 맛의 진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캐비아 역시 그저 그런 평범한 생선 알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철갑상어가 많이 잡히는 카스피해에서는 우리 명란젓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예전 가톨릭 교회와 러시아 정교에서는 부활절 직전의 고난절 기간 동안 고기를 금지했다. 대신 생선을 먹었는데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은 철갑상어를 먹었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철갑상어 알, 즉 캐비아를 먹었다고 하니 지금과는 정반대였다.

 이랬던 캐비아가 어떻게 유럽의 3대 진미 중 하나가 됐을까? 유럽의 귀족들이 캐비아의 참맛을 알게 된 것과 함께 생산지와 소비지가 다른 것도 그 요인이 됐다. 주 생산지인 동유럽의 카스피해에서는 가난한 어부가 먹는 생선 알에 지나지 않았지만 주 소비처인 프랑스 파리나 제정 러시아 시절의 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식품이었다.

 

기사사진과 설명
현금이 없었던 러시아 혁명정부는 캐비아를 팔아서 식량을 수입할 수 있었다. 사진은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의 시위 장면.

현금이 없었던 러시아 혁명정부는 캐비아를 팔아서 식량을 수입할 수 있었다. 사진은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의 시위 장면.




 


 산업혁명도 캐비아를 최고급 식품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냉장기술이 발달하면서 캐비아를 장시간 기차로 운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맛있는 캐비아가 유럽의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여전히 몇 달이 걸렸기 때문에 캐비아의 가치가 높아져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덕분에 캐비아는 매력적인 음식으로 어필하면서 유럽 귀족들이 캐비아에 열광한다. 캐비아가 맛뿐만 아니라 ‘검은 황금’으로 불리며 부와 권력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캐비아는 20세기 초, 러시아 공산혁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련을 맺게 된다. 캐비아는 사치품의 상징이었다. 러시아 귀족들이 좋아하는 최고급 식품이었지만 이런 캐비아를 생산, 공급해야 하는 어부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식품이었다.

 제정 러시아의 귀족들이 캐비아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는 다음 일화로도 알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이 마무리될 무렵인 1919년 11월, 공산 혁명군에 쫓기던 제정 러시아의 군사령관이 귀족과 병사, 그리고 가족을 이끌고 시베리아로 퇴각했다. 이때 제정 러시아 군대가 가져간 물건이 황금 500톤과 최고급 캐비아였다. 이들은 8000㎞에 이르는 먼 거리를 이동해 마침내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에 도착하기까지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와중에도 캐비아만큼은 소중하게 지켰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최고급 캐비아를 챙긴 제정 러시아 귀족의 부패를 비판할 때 흔히 인용하는 사례지만 그것은 어쩌면 캐비아의 또 다른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마침내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차르의 음식이자 ‘인민의 눈물’을 짜내던 사치스러운 음식 캐비아가 한몫을 했다고 한다. 귀족의 음식이 러시아 혁명을 살렸다는 것인데 내막은 이렇다.

 혁명 과정에서 러시아 농촌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러시아의 밀 생산량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혁명은 끝났지만 그 결과 대다수 농민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당장 부족한 식량을 외국에서 들여와야 했는데 혁명정부는 돈이 없었다. 게다가 혁명 직후의 러시아는 다른 서방 국가들과는 외교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원조를 받을 수도 없었고 외상으로 밀을 수입할 수도 없었다. 자칫하면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러시아를 구한 것이 바로 캐비아였다. 러시아 귀족들이 몰락하면서 캐비아 수요가 줄었기에 생산지인 카스피해 연안에는 고급 캐비아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런데 모든 무역거래가 끊긴 상태에서 유일하게 유럽으로부터 캐비아만 주문이 들어왔다. 덕분에 혁명정부는 현금 대신 캐비아를 내고 밀을 대량으로 수입해 혁명 초기의 위기를 넘겼다는 것이다.

 백성에게 고통을 안겼던 귀족의 음식 캐비아가 역설적으로 러시아 혁명을 살렸던 것이다. 차도살인(借刀殺人), 적의 칼을 빌려 적을 물리친다는 ‘삼십육계(三十六計)’의 병법이 실제로 적용된 사례가 바로 캐비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