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분유는 원래 전투식량이었다

구름위 2017. 1. 14. 19:56
728x90

분유는 원래 전투식량이었다

 분유


13세기 ‘동방견문록’에서 발견된 분유에 대한 기록

칭기즈칸 몽골 군대의 원정 식량으로 우유 굳힌 형태

고단백으로 병사들 체력 보충… 4㎏면 최소 20일 버텨

갓난아이에게 먹인 것은 600년 지난 19세기 후반 추정


 


 


 

 최초의 분유는 갓난아이를 위한 것이었을까, 어른을 위한 것이었을까? 기록을 보면 분유는 철저하게 어른들이 먹는 식품이었다. 그것도 평화 시의 저장음식이라기보다는 전쟁 중에 먹을 전투식량으로 만든 음식이었다. 갓난아이에게 모유 대신 분유를 먹인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최초의 분유가 만들어진 후 거의 600년이 지난 다음이다.

 현존하는 기록으로 보면 최초의 분유는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가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분유로 여겨지는 식품이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보이기 때문이다. 동방견문록은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 시대에 몽골이 다스렸던 중국을 여행하면서 쓴 것이니 13세기 무렵의 기록이다.

 따라서 분유는 늦어도 13세기 이전에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른들이 장거리 여행을 떠나거나 전투에 나설 때 먹기 위한 음식으로 만들어졌다.

 동방견문록에는 타타르 기병, 다시 말해 몽골 기병대가 장거리 원정을 떠날 때는 취사를 위한 특별한 장비나 식량 없이 오직 두 개의 가죽 부대에 든 우유 반죽과 고기를 끓여 먹을 사기그릇, 그리고 비를 막아줄 텐트만 가지고 출발한다고 나온다.

 몽골 기병대는 일반적인 이동과 행군일 때는 중간에 말에서 내려 식사도 하고 휴식도 하며 진군을 했다. 하지만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이나 기습공격을 펼칠 때는 열흘 동안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고 따로 식사도 하지 않으면서 쉬지 않고 행군을 했다.

 인간이, 더군다나 전투하러 떠나는 군인이 열흘 동안 쉬지 않고 행군하기도 쉽지 않은데 제대로 먹지도 않고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 그러나 칭기즈칸 시대의 몽골군은 가능했다고 한다. 몽골 기병이 가지고 떠난 음식, 전투식량 덕분이다.

 몽골 기병은 원정을 떠날 때 여러 필의 말을 끌고 갔다. 가는 도중 타고 가는 말의 정맥에 상처를 내 말의 건강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범위에서 흐르는 말의 피를 마셨다. 지금 우리 기준으로 보면 엽기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당시 몽골 군대에서는 자연스러운 음식이었다. 혈액은 고단백의 영양식이기 때문에 병사들이 별도로 식사하지 않고도 체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열량과 영양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흡혈귀처럼 말 피만 빨아먹고 행군한 것은 아니었다. 육포도 있었고, 햄버거의 뿌리라는 생고기도 있었지만, 병사들의 체력을 유지해준 기초 음식은 가죽 부대에 넣어 가져간 우유 반죽이었다.

 서양에서 분유는 19세기 초에 등장한다. 타타르족은 기록상 서양보다 약 600년 앞서 분유를 만들었다. 몽골 사람들이 이 대단한 전투식량을 만든 방법이 동방견문록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그들은 커다란 솥에 우유를 넣고 끓이면서 유지방이 생기면 국자로 떠내 별도로 마련한 그릇에 담아 버터를 만들었다. 끓는 우유에서 유지방을 제거하는 작업은 필수였는데 유지방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유가 굳지 않기 때문이다. 유지방을 제거해 굳은 우유는 밀가루처럼 반죽으로 만들어 햇빛에 말렸다. 몽골군의 우유 반죽이 연유보다 분유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는 이유다.

 원정을 가는 몽골 기병은 한 사람이 말린 우유를 약 4.5㎏씩 가지고 떠났다. 이들은 아침에 말린 우유 반죽 일부를 떼어내 충분한 물과 함께 가죽 부대에 담았다. 이 가죽 부대를 말 잔등에 싣고 달리면 달릴 때의 진동 때문에 분유와 물이 골고루 섞였다. 이 고단백 우유 음료를 하루치 식량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니 말의 혈액을 제외하더라도 두 개의 가죽 부대면 별도 보급 없이 최소한 20일은 견딜 수 있었다는 것이다.

 칭기즈칸이 동유럽까지 진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으로는 몽골군의 기동력을 꼽는다. 몽골 기병대는 하루 100㎞ 주파가 가능했다. 그래서 적군이 미처 대비할 틈도 주지 않고 번개처럼 나타나 상대를 짓밟았는데 그 중심에 분유를 비롯한 각종 전투식량으로 이뤄진 몽골군 병참이 있었던 것이다.

 몽골 기병대는 보급부대를 따로 두지 않았다. 몽골군은 전쟁이 나면 기본적으로 10만 명을 기준으로 군사를 동원했다. 이때 병사 한 명이 여러 필의 말을 끌고 다녔고 부대 단위로는 암소와 양, 낙타를 끌고 이동했다. 적의 성을 공격할 때 필요한 공성(攻城) 장비를 운반하고 식량으로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별도로 볏짚이나 귀리와 같은 사료를 갖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암소·양·낙타는 풀과 뿌리를 먹지만 각각 먹는 종류가 달라 최소한의 풀밭만 있어도 가축을 먹일 수 있었다. 기병들 또한 최소한의 양식만 소비했으니 전방의 공격부대는 분유와 같은 휴대 식량만으로도 20일 넘게 별도 작전이 가능했다.

 칭기즈칸의 몽골군이 전광석화 같은 전격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데는 지금은 갓난아이의 음식이 된 분유도 한몫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