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못나서 버린 아귀 6·25때 피란민 배고픔 해결

구름위 2017. 1. 14.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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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나서 버린 아귀 6·25때 피란민 배고픔 해결

 아귀찜


최대 피란처 부산서 양식 없을 때 헐값에 구해 먹어

지금 아귀 소금구이는 바닷가재보다 더 대접받아

 

기사사진과 설명

1950년 12월 말 흥남철수 당시 부두에 모인 피란민 행렬.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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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

아귀




 

   1950년 12월 말 흥남철수를 배경으로 시작하는 영화 ‘국제시장’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 당시 흥남을 떠난 피란민의 숫자는 약 10만 명, 대부분이 일단 거제도로 왔다. 당시 거제도 인구 역시 약 10만 명이었다. 주민에 버금가는 숫자의 피란민이 한꺼번에 몰려든 것이다. 기존에 있던 피란민까지 합쳐 피란민 숫자는 15만 명이 됐다. 군에서 관리하는 거제포로수용소의 포로를 제외하고도 좁은 섬에 인구가 졸지에 2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다.

 최대 피란처였던 부산도 마찬가지. 전쟁 직전인 1949년의 부산 인구는 약 47만 명, 그리고 전쟁 이듬해인 1951년의 인구는 84만 명이다. 공식 통계가 이 정도이니 실거주 인구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도시 인구가 일 년 사이에 최소 2, 3배가 늘어난 것이다.

 전시 비축 식량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원조물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순식간에 증가한 피란민까지 먹여 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살기 위해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까지 먹었다. 미군부대에서 버린 음식물 쓰레기로 꿀꿀이죽을 끓였다.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던 꿀꿀이죽은 전쟁이 끝나고 생활 형편이 나아지자 곧 사라졌다.

 한편, 예전에는 식재료로 잘 사용되지 않다가 형편이 어려운 전쟁통에 그 가치를 재발견하고, 나중에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국민음식으로 발전하는 것도 있었다. 이런 음식 중 하나가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 어울리는 아귀찜이다.

 아귀찜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70년대다. 아귀찜의 원조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대체로 마산에서 아귀를 북어찜처럼 콩나물과 미나리, 마늘, 고춧가루 등의 양념과 함께 찜으로 요리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6·25 전쟁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난 다음이다.

 아귀찜이 등장한 것은 전쟁이 끝나고 한참 후이지만 많은 사람이 아귀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때였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아귀는 그다지 즐겨 먹는 생선이 아니었다.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지는 ‘물텀벙이’라는 아귀의 별명에서도 알 수 있다. 아귀가 그물에 걸리면 어부들이 재수없다고 바다에 던져버렸는데 이때 물에 빠지는 소리가 ‘텀벙’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흉측하고 못생겨서 맛도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아귀를 제대로 먹지 않고 구박했던 역사는 꽤 길다. 멀리 200년 전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정조 때의 문인인 이학규가 영남 지방을 여행하며 현지 음식을 소개한 기록이 있다.

 그는 영남 바닷가 마을에서는 별 괴상한 생선을 다 먹는다면서 몇몇 종류의 생선을 적시했는데 여기에 아귀도 포함돼 있다. 커다란 입이 몸뚱이에 바로 붙어 있으며 이름은 아귀어(餓鬼魚)이고 현지에서는 물꿩(水雉)이라고 부른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먹는 음식치고는 참 구차하다고 했으니 썩 바람직하지 못한 생선으로 취급했음을 알 수 있다.

 아귀(餓鬼)는 굶주린 귀신이다.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다 지옥에 떨어졌는데 배는 산더미처럼 불룩하고 크지만, 목구멍은 바늘구멍만 해서 음식을 삼킬 수가 없어 언제나 배가 고파 괴로워하는 벌을 받았다. 괴상하게 생긴 이 물고기의 몸통에 바로 붙어 있는 커다란 입이 바로 그 아귀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아귀는 맛을 떠나서 생김새 때문에 구박을 받았는데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전 영국에서는 아귀를 가난한 사람이 먹는 바닷가재라고 불렀다. 맛은 바닷가재와 비슷하지만, 부자들은 먹지 않는 생선이라는 것이다. 입맛이 떨어질 정도로 볼품이 없어서 주로 돈 없는 서민들이 먹었기에 얻은 별명이다.

 이랬던 아귀가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 때 피란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면서 제대로 생선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들면서 부산에서는 먹을 것 자체가 귀해졌다. 그래서 예전에는 거의 버리다시피 했던 아귀를 사다가 먹었다. 당시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물꽁(물꿩)’이라고 불렸던 아귀는 생선 중에서 가장 값이 쌌기 때문에 돈 없는 피란민도 구해 먹을 수 있었다. 아귀를 손질해 무와 파를 넣고 시원하게 탕으로, 혹은 양념장에 찍어 수육으로 먹으면서 배고픔을 달랬다.

 이렇게 간단하게 간을 한 후 먹는 아귀의 담백한 맛에 익숙해질 무렵, 1970년대를 전후해 마산 아귀찜이 유행했다. 그 결과 지금은 버리는 생선이었던 아귀가 값이 만만치 않은 어종으로 바뀌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생선이라고 아귀를 구박했던 영국의 사정도 비슷하다. 제2차 세계대전 무렵, 생선이 귀해지면서 많은 사람이 아귀를 먹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금 아귀 소금구이는 바닷가재보다 더 대접받는다. 아귀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승천한 셈이다. 아귀찜이 발달한 과정에도 전쟁의 아픔, 그리고 상처를 겪어 낸 사람들의 삶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