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가 높아 전투식량으로 ‘안성맞춤’
- 우유
우유 농축시킨 연유 발달의 계기는 미국 남북전쟁 북부 연방의 기술력·경제력이 전쟁 승리의 원동력
남북전쟁의 시작을 알린 섬터 요새 포격을 그린 판화. 섬터 수비대 구출작전을 계기로 농축 우유 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필자제공 |
연유 통조림. 남북전쟁 당시 연유는 병사들이 가장 좋아했던 보급품이었다. |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군 병사들이 어쩌다 북군 보급열차를 습격해 탈취하는 날은 속된 말로 계 탄 날에 다름 아니었다. 경제력 열세로
보급품이 부족해 배고픔에 시달리던 남군 병사들이 이날만큼은 마음껏 배불리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으면 달콤하고 맛있는 연유(煉乳)도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실제로 남군이 북군 보급열차에서 가장 먼저 찾은 식품이 연유였다고 한다.
연유는 당시 북부 연방에 속해
있던 뉴욕의 한 공장에서 유일하게 만들어냈다. 뉴욕에 생산 공장이 있었던 만큼 북군에게는 보급됐지만 남군에게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그런데 남군 병사들이 어린아이도 아니고 왜 그렇게 연유에 목말라 했을까?
연유는 수분을 제거한 우유를 농축해 놓은
식품이다. 요즘은 주로 팥빙수에 넣어 먹거나 아니면 쿠키와 같은 과자·아이스크림·초콜릿을 만들 때 재료로 사용한다. 또 분말 우유가 보급되기
전에는 갓난아이에게 모유 대신 먹이는 영양식품이었다. 이 때문에 지금은 연유나 분유를 주로 어린이용 식품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처음부터 이들 우유
가공품이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물론 작정하고 군사용으로 쓰려고 만든 식품도 아니지만, 전쟁 때문에 널리 보급됐고 덕분에 지금의
연유와 분유로 발전했다.
우유는 사실 전쟁과는 불가분의 관계다. 영양가가 높아 군량으로 안성맞춤이다. 다만 휴대가 어렵고 보관이
불편해 전쟁터에서 그대로 마실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진작부터 우유를 가공해 군용 식량을 만들었으니 13세기 칭기즈칸의 몽골군도 유럽을 침공할
때 우유를 가져갔다. 당시 몽골군은 우유를 솥에다 끓여 건조한 후 그 우윳가루를 갖고 다니면서 식사 때가 되면 물에 타서 마셨다고 하니까 원시
상태의 분유다. 하지만 분유가 공업적으로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부터다.
분유가 나오기 전에 발달한 것이 연유다.
우유를 2분의 1 수준으로 농축시켜 설탕을 더하면 부피도 줄고, 통조림에 담아 뚜껑만 열지 않으면 몇 년씩 장기 보관도 가능하다. 여기에 다시
물을 부으면 우유와 같아지고 또 가공해 다른 음식을 만들 때도 쓸 수 있기 때문에 전쟁터의 군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식량이 된다. 이런
연유가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바로 미국의 남북전쟁이었다.
우유를 농축시켜 연유로 만들려는 노력은 옛날부터 있었지만 대량
생산에 의한 상업화에 성공한 것은 미국의 사업가 게일 보든(Gail Borden)이다. 보든은 1850년대 식품회사를 운영하면서 소고기를 가공해
비스킷으로 만들어 팔려다 파산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 소고기를 건조시키는 기술을 응용해 우유를 농축시키는 기술도 개발했는데 이 기술로
1856년 특허를 받았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아무도 우유를 농축시켜 만드는 연유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치즈도 있고 버터도 있는데 굳이 신선한
우유를 농축시켜 장기간 보관하면서 먹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일 보든이 특허를 받은 지 5년이 지난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때 지금까지 아무도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연유의 효용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 계기가 된 것이 남북전쟁 초기
북군이 남군에게 처절하게 패했던 섬터(Sumter) 요새 구출 작전이었다.
섬터는 미국 남동부 해안에 있는 요새로 남부연맹에 속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속이 위치한 북군 기지였다. 남부동맹 입장에서는 자신의 목덜미에 칼을 겨누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기에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요새를 포위해 공격을 퍼부었다. 식량과 탄약이 떨어진 요새 수비대는 워싱턴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구원병에 도착하기 전 서른여섯 시간 동안 퍼붓는
남군의 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이 전투를 계기로 북부 연방은 포위됐을 때 버틸 수 있도록 장기보관이 가능하면서 영양가가
높은 전투식량을 보급했는데 그중 하나가 연유였다. 미국 남부지역의 더운 날씨 탓에 신선한 우유 공급이 어려워진 것도 연유 보급을 부추기는 계기가
됐다.
북부의 미국 연방정부는 파산 직전에 있던 게일 보든과 계약을 맺고 연유를 생산한다. 그리고 1862년 9월 북군이 남군에게
최초로 결정적 타격을 입히며 승기를 잡은 앤티텀 전투를 계기로 북군 전체에 연유를 공급한다. 북부 연방의 압도적인 경제력과 공업력을 바탕으로
북군에 우월한 보급품을 제공한 것이다. 뒤집어 보면 게릴라전도 아닌 상황에서 이런 북군의 보급품을 탈취해 먹으며 싸워야 했던 남군의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대로 전쟁의 승패는 결국 경제력이 좌우하기 때문이다.
연유를 먹으며 싸운 북군 병사들의 홍보
덕분에 전쟁이 끝난 후 너도나도 연유 공장을 세우면서 공급과잉 현상이 벌어졌다. 그리고 1912년의 대공황 무렵에 연유 공장들이 무더기로
파산하는 과정에서 연유가 다시 한번 주목을 받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연유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전쟁과 관련된 연유의
흥망성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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