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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 세계제패 숨은 공신들 돋보기 정보력 현미경 배려심

구름위 2017. 1. 1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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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 세계제패 숨은 공신들 돋보기 정보력 현미경 배려심

고려인의 매운탕 사랑


기사사진과 설명

여몽 연합군의 고려 사령관 김방경 장군.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운탕을 무척 좋아한다. 생선을 넣고 끓이면 매운탕이 됐건, 일본말로 지리라고 하는 맑은탕이 됐건 가리지 않고 탕, 국, 찌개를 즐겨 먹는다.

 조상님들 역시 매운탕을 얼마나 즐겨 먹었던지 주변국에까지 널리 소문이 퍼졌던 모양이다. 원나라 황제가 “고려인들은 생선국을 좋아한다”고 특별히 언급했을 정도인데 황제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일본 정벌 여몽연합군 출정때 매운탕 준비  元나라 황제 ‘입맛까지 잔신경’ 본받을 만

 

기사사진과 설명
고려때부터우리조상은매운탕을즐겨먹었다. 원나라황제가일본원정을떠나는여몽연합군을 위해 매운탕을 준비했을 정도다.

고려때부터우리조상은매운탕을즐겨먹었다. 원나라황제가일본원정을떠나는여몽연합군을 위해 매운탕을 준비했을 정도다.


 

 13세기 말, 고려 충렬왕 때 고려와 원나라가 연합해 일본을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구성된 여몽 연합군의 고려 사령관이 김방경(方慶) 장군이다. 김 장군은 1274년 10월, 8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몽골군과 함께 일본을 공격하는데 먼저 대마도인 쓰시마 섬을 정복한 다음 일본 본토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때아닌 태풍이 부는 바람에 상륙을 미루고 철수해 여몽 연합군의 제1차 일본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 7년 후인 1281년, 김방경 장군의 여몽 연합군이 다시 일본 정벌을 추진했지만, 이때도 태풍 때문에 되돌아오면서 고려와 몽골의 일본 정벌이 무산됐다. 일본은 당시 하늘이 바람을 일으켜 일본을 도왔다고 해서 그때 불어온 태풍을 신풍(神風), 즉 가미카제라고 부른다.

 어쨌든 김방경 장군이 제2차 여몽 연합군을 이끌고 출정하기 전, 원나라에서 거대한 출정식이 열렸다. 김방경 장군도 당시 원나라 수도였던 북경으로 가서 출정식에 참석해 황제인 세조, 쿠빌라이 칸으로부터 중선대부 관령고려국도원수라는 칭호를 받는다. 세조는 이어 출정 장군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성대한 잔치를 베푸는데 김방경 장군에 대한 대접이 극진했다.

 김 장군을 승상 다음 자리에 앉도록 자리를 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특별히 “고려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김방경 장군을 위해 하얀 쌀밥에 생선국을 마련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이 대목이 흥미롭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세조 쿠빌라이 칸이 특별히 고려인의 입맛까지 언급하면서 김방경 장군을 위해 생선국, 다시 말해 매운탕까지 준비한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고려 해군의 일본원정을 그만큼 중요시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쓴 원나라의 정보력도 돋보인다. 구중궁궐 속의 황제가 고려인의 식성까지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당시 원나라의 정보력, 또는 정보 보고 체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제가 “그대를 위해 특별히 매운탕을 준비했다”고까지 말했다. 김방경 장군은 사실 원나라 몽골군이 고려를 침범했을 때 서북면병마판관으로 몽골군에 맞섰던 인물이다. 한때 적이었던 장수의 입맛까지 세심하게 배려해 음식을 준비한 것이니 고려를 침략한 원나라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을 떠나서 세계제국을 건설한 원의 정보력과 함께 쿠빌라이 칸의 포용력이 새삼스럽게 돋보인다.

 그런데 김방경 장군을 비롯해 고려 때부터 사람들이 즐겨 먹었다는 생선국은 과연 어떤 음식이었을까? 지금과 같은 매운탕이었을까 아니면 맑은탕이었을까?

 고추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임진왜란 때이니 고려 장군 김방경이 생선국을 먹었을 때보다 300년 후의 일이다. 그러니 고려에서는 고춧가루를 풀어 끓인 매운탕은 없었고 지금의 생선 지리인 맑은탕만 먹었을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고려 시대에도 우리 조상은 생선국을 맵게 끓여 먹었다. 다만, 고추가 들어오기 전이니 고춧가루 대신 다른 양념을 넣고 매운탕을 끓였을 뿐이다.

 고추 대신에 얼얼하고 매운맛을 내는 양념이라면 당시에는 후추 아니면 산초를 넣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후추는 당시에 값비싼 수입품이었으니 이전부터 향신료로 사용했던 산초였을 가능성이 높으니 고려의 매운탕은 산초 매운탕이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매운탕을 좋아한 것은 이렇듯 뿌리가 깊다. 김방경 장군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 인물인 추적(秋適)은 “손님을 대접할 때 따듯한 쌀밥에 생선국이면 충분하니 굳이 산해진미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했으니 한국인의 매운탕 사랑은 고려 때 이래로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참고로 추적은 잘 알려진 명심보감의 저자다.

 우리가 얼마나 매운탕을 좋아했는지 조선 시대에는 논쟁까지 벌어졌다. 논란의 대상이 된 음식은 복어국으로 “자칫 잘못 먹으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데 그까짓 먹는 음식을 놓고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다”는 실리파의 주장과 “음식을 미인에 비유하자면 천하절색인 서시에 버금간다고 할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니 죽을 때 죽더라도 그 맛을 놓칠 수는 없다”는 낭만파의 생각이 팽팽하게 맞섰다. 여러분은 어떤 주장에 더 마음이 끌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