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역사속 신무기<71>전투용 코그<fighting cog>

구름위 2017. 1. 10.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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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신무기<71>전투용 코그<fighting cog>

영국의 제해권 장악 일등공신
2008. 06. 16   00:00 입력 | 2013. 01. 05   03:53 수정


흔히 백년전쟁이라 부르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오랜 전쟁은 전쟁 기간에 관한 한 전무후무한 기록과 해상원정을 통해 지속된 전쟁이란 점에서 다른 전쟁과 구별된다.

백년전쟁은 정확히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계속됐고 전쟁 기간에 영국은 끊임없이 병력과 보급물자를 해상으로 수송해 프랑스를 공격했다.

그리고 영국이 보유한 전투용 코그(fighting cog·사진)는 영국이 영불해협과 북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대규모 해상원정을 가능케 한 일등공신이다.전투용 코그는 중세 유럽의 대표적 상선인 코그를 군함으로 개조한 것으로 백년전쟁 기간에 영국 해군의 주력함으로써 해전·전쟁수행의 핵심역할을 담당했다.

코그는 매우 간단한 평저선(平底船·flat bottom)으로 높은 현측과 곧은 선수·선미를 갖고 있으며 하나의 돛과 함미에 방향키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의 네덜란드 남서부 라인강 하구에 위치한 슬로이스 인근 해역에서 1340년 영국과 프랑스 함대 간 최초의 해전이 벌어졌다.

백년전쟁 초기 영국이 보유한 총 1300척의 선박 중 57%가 전투용 코그였던 반면 프랑스는 대부분 제노아로부터 대여한 노선을 사용했고 이 차이가 해전의 승패를 갈랐다. 흔히 백년전쟁 최초의 해전으로 평가되는 이 해전에서 에드워드 3세가 직접 지휘한 147척의 영국 함대는 190척으로 구성된 프랑스 함대를 대파했다.

여덟 시간에 걸친 전투 결과 프랑스 함대는 166척의 함선과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이것은 곧 프랑스가 영국의 해상 침공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당시 해전은 주로 서로 근접한 후 선상 백병전으로 승부를 가르는 방식으로 전개됐기 때문에 프랑스의 제노아 노선과 영국의 전투용 코그 중 누가 더 월등했는지 직접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현측이 높은 전투용 코그는 원거리 공격·전투에 유리했고, 영국 해군 역시 이러한 장점을 활용해 해전을 벌였기 때문에 프랑스 노선의 우수한 근접 기동성은 쉽게 무력화됐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전투용 코그가 병력과 말을 수송하는 수송선으로도 운용돼 영불해협의 가교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다.

사실 전투용 코그는 북독일 도시국가들이 발트해와 북대서양에서의 무역을 위해 1159년 결성한 한자동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해상 무역이 더욱 활발해짐에 따라 등장한 사략선의 공격과 한자동맹 도시들이 다른 지역 국가들과 충돌하면서 코그를 보호할 수 있는 전투용 코그의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최초 등장한 전투용 코그는 단순히 병력수송선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1285년 발트해에서 벌어진 한자동맹국과 덴마크 간의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한 이후 본격적인 전투함으로 운용되기 시작했다.

백년전쟁과 그 이전에 벌어진 한자동맹과 주변국과의 전투에서 전투용 코그는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군함 발전사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 1400년 이후 세 개의 돛대를 갖춘 소위 전장 범선 개발에 촉매역할을 했고 1650년 전열함의 등장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역사속 신무기<72>전장범선 캐랙(carrack

1300년 등장…함포 무장에 큰 공헌
2008. 06. 23   00:00 입력 | 2013. 01. 05   03:54 수정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1400년 이후 세 개의 돛대를 갖춘 전장범선의 등장은 군함 발전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도 혁신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최초의 범선이 등장한 이후 전투용 코그(fighting cog)까지 약 4000년 동안 몇몇 특이한 범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서양 범선은 하나의 마스트에 하나의 돛을 사용했다.

가장 효율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돛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정교한 선박 건조기술과 항해기술이 뒷받침돼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전장범선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변화했다. 전장범선의 등장은 보다 정교한 항해를 가능케 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유럽의 대항해 시대, 즉 장거리 원양항해를 통한 유럽의 세계 진출에 초석이 됐다.

전장범선의 등장으로 군함은 더욱 정교한 무기체계로 발전했으며 이것은 인류가 불과 바퀴를 발명한 이래 성취한 가장 중요한 기술혁신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1300년께 등장한 캐랙(carrack·사진)은 전장범선의 등장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500년 이후 함포가 군함의 기본 무장으로 사용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물론 1453년까지 백년전쟁이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1417년 이후 해전을 벌이지 않았기 때문에 캐랙이 해전에서 활약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군력을 과시하고 주변국의 도발을 억제하는 장치로 캐랙은 계속 건조됐고 그 크기는 점점 대형화됐다.

일례로 1490년 영국의 헨리 5세가 건조한 두 척의 대형 캐랙 중 한 척인 리전트(Regent)는 함포만 225문을 탑재했고 이 때문에 일부 학자는 캐랙을 현대식 전함(戰艦)의 조상으로 본다. 특히 포문(gun port)의 설치와 후장식 대포의 등장으로 캐랙은 더욱 강력한 화력을 갖추게 됐는데 1513년에는 함포사격만으로 함선을 격침시켰다.

사실 캐랙은 1350년께 제노아 선박을 지칭하는 의미로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고 그 어원은 1302년 제노아 코크에서 파생된 코치(coche)라고 보나 정확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캐랙은 북유럽과 남유럽의 서로 상이한 선박건조 방식을 종합한 코크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부 돛대를 추가하는 등 건조기술을 더욱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영어로 미즌(mizzen)이라 부르는 두 번째 후부 돛대는 1350년부터 이후 75년 동안 건조된 쌍돛대 캐랙의 가장 대표적 특징이 됐다.세 개의 돛대를 지닌 캐랙은 1416년 처음 등장했는데 바로 영국이 건조한 1400톤급 그라스디유(Grace Dieu)다.

위대한 범선이란 뜻을 지닌 이 전장범선은 1450년 이후 전장범선 건조의 표준이 됐고 범선시대가 끝나는 1850년까지 기본 형태는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됐다. 세 개의 돛대를 지니게 되면서 캐랙은 자연스럽게 대형 함선으로 발전했는데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크고 화려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위압적으로까지 느껴졌다.

대항해 시대를 통해 유럽인들은 아무 제약 없이 인도와 아시아로 항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광대한 신대륙을 발견하고 식민지화할 수 있었으며 이는 유럽패권 시대를 열었다. 특히 캐랙과 함께 이후 등장하는 카라벨·갈레온은 1650년께 전열함이 개발되기 전까지 대항해 시대의 가장 강력한 해상전투함이자 유럽패권 시대의 첨병으로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