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역사속 신무기<67>롤랑의 노래

구름위 2017. 1. 10.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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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신무기<67>롤랑의 노래

애국심 고취 최초 선전문학 작품
2008. 05. 19   00:00 입력 | 2013. 01. 05   03:49 수정


사전적 의미로 선전전(宣傳戰·propaganda war)이란 방송·신문·간행물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아군의 사기를 높이고 반대로 적군의 사기는 떨어뜨리는 고도의 심리전을 뜻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선전전의 중요성을 그 어느 누구보다 깊이 인식한 나치 독일의 총통 히틀러는 아예 별도의 국가 상설기구를 만들고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했다.

독일의 선전전에 자극받은 소련공산당 총서기 스탈린 역시 선전문학(宣傳文學)이라는 별도의 어용문학(御用文學) 분야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 어느 참전국보다 강도 높은 선전전으로 범국민적 지지와 젊은이들의 자발적 입대를 이끌어내는 한편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는 바로 미국이었다.
전쟁의 승패를 떠나 당시 각국이 선전전의 일환으로 만든 선전문학 작품들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애국심과 전의를 고취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해 강요된 희생을 미화하고 정당화했다. 그런데 약 840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중세 유럽사회에서 벌어졌다. 기사도(騎士道) 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찬양한 프랑스 최초의 서사시,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를 접한 수많은 젊은이에게 십자군 전쟁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100년께 지어진 이 작품은 치밀한 구성과 기품 있고 힘 있는 문장으로 현존하는 최고·최대의 무훈시(武勳詩)로 평가받으며 문학적 가치나 당대와 후대에 미친 영향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작품의 완성도에 비해 작자에 대해 불분명한 부분이 있으며 실화를 바탕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이나 구체적 내용은 사실과 크게 다르다.
실제 사건은 778년 8월 15일 에스파냐 원정에서 돌아오던 샤를마뉴(Charlemagne·742. 4. 2∼814. 1. 28) 대제(大帝)의 후위부대가 피레네 산속 롱스발 고개에서 바스크인의 기습으로 전멸한 사실이다. 롱스발 전투로 불리는 이 싸움의 실상은 일방적 대량학살이었지만 약 300년 뒤 문학적 상상과 약간의 허구가 더해져 최고의 무훈시 소재가 됐다.
롤랑의 노래는 많은 부분에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Leonidas)와 결사대 300명의 최후와 유사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Thermopylae) 전투가 실제 벌어진 사실인 반면 롤랑의 노래에서 묘사된 롱스발 전투는 사실과 다르다. 또 주인공 롤랑의 장렬한 최후는 완전한 허구다. 일부에서는 사실상 허구인 작품의 내용 전체를 구전(口傳) 실화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일부 유럽 학자들은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자행한 회교도 학살의 원인을 롤랑의 노래에서 찾기도 한다. 표면적으로 주인공 롤랑을 통해 봉건 프랑스의 기사도를 찬양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라센으로 상징되는 회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십자군 전쟁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선전 자료로 활용됐다는 주장이다. 작품의 등장 시기가 십자군 전쟁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도 이러한 가설에 힘을 싣고 있다.

역사속 신무기<68>브랜디스톡(brandistoc)

14세기 유럽 등장…날을 지닌 찌르기용 무기
2008. 05. 26   00:00 입력 | 2013. 01. 05   03:50 수정

상대방이 모르게 감춰 둔 무기, 또는 긴급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상대방의 위협을 격퇴할 수 있는 무기를 뜻하는 말로 ‘비장(秘藏)의 무기’라는 표현이 있다. 한편 14∼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부흥운동, 즉 르네상스(Rinascimento)는 무기 발전사 측면에서도 예술작품에 버금가는 다양한 장식과 세공이 이루어진 고급 무기를 등장시켰다.

무기제작 장인(匠人)이 아닌 예술가들의 무기 설계와 제작 참여는 전통적 형태와 규범에서 벗어난 기발한 무기의 탄생을 촉진했고 무기의 형태와 사용방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4세기 처음 만들어져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서유럽에서 널리 사용된 브랜디스톡(brandistoc·사진)은 날을 지닌 찌르기용 무기로 실용성과 미적 감각이 이상적으로 결합된 무기다.

‘도검을 휘두르다’는 뜻의 ‘브랜디쉬’(brandish)와 찌르기용 검인 ‘에스턱’(estoc)의 합성어로 영어로 브랜디스턱(brandestoc) 또는 이탈리아어로 브랜디스토코(brandistocco)라고도 불렸다. 이탈리아 롬바르디 지방을 중심으로 북부 이탈리아 일대에서 사용됐고 속이 빈 두꺼운 지팡이 속에 50∼100㎝ 내외의 날이 숨겨져 있어 휴대가 편리하고 무기로 사용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손잡이의 길이는 100∼120㎝ 내외, 칼날을 포함한 전체 길이는 150∼200㎝, 무게는 1∼2㎏ 내외의 것이 널리 사용됐고 지팡이 끝에 도끼처럼 생긴 날이나 워 해머 같은 갈고리가 특징이다. 무기의 특성상 찌르기 공격밖에 할 수 없었지만 날을 집어넣고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귀족이나 근위병들이 호신용이나 경호용으로 주로 사용했다.

한편 17세기에는 브랜디스톡의 성능과 외형이 유사한 페더 스태프(feather staff)가 등장해 보병부대 하사관을 중심으로 19세기까지 서유럽 전역에서 널리 사용됐다. 외부 장식을 모두 없애 지휘봉이나 지팡이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적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는 두 자루의 짧은 검이 좌우 대칭으로 칼날과 함께 돌출되는 것이 특징이다.

브랜디스톡이나 페더 스태프는 평소 칼날을 숨긴 채 지팡이나 지휘봉처럼 휴대하고 다니다 위급한 순간이 되면 숨겨진 칼날을 외부로 돌출시켜 호신용 무기로 사용했다. 구멍 뚫린 끝부분을 상대방을 향해 힘껏 휘두르면 원심력에 의해 숨겨진 칼날이 튀어나오는 방식으로 한번 튀어나온 칼날은 잠금장치로 인해 단단히 고정됐다.

일반적으로 브랜디스톡의 직접적인 기원은 14세기 초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방을 중심으로 성지 순례자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소지하고 다녔던 ‘순례자의 지팡이’(pilgrim's staff)로 본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칼날을 숨길 수 있는 특수무기에 대한 기록이 꽤 오래전부터 발견되는 만큼 이들 무기가 르네상스라는 특수한 시대상황으로 탄생한 무기라는 견해에는 반대한다.

브랜디스톡은 르네상스라는 독특한 시대상황이 만들어낸 특수무기로 페더 스태프나 소드 스틱과 같은 유사한 무기의 등장에 영향을 미쳤고 현대에도 이와 유사한 무기들을 찾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