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역사속 신무기<61>우르반 대포

구름위 2017. 1. 10.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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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신무기<61>우르반 대포

비잔틴제국 멸망에 ‘직격탄’ 날린 사석포
2008. 03. 24   00:00 입력 | 2013. 01. 05   03:42 수정


중세 요새 가운데 가장 강력한 방어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은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제국이 1000년 이상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였다.

그러나 1453년 5월 29일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 무너졌고 이것은 비잔틴제국의 멸망뿐만 아니라 그리스·로마 문명의 완전한 몰락, 역사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비잔틴제국이 멸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오스만투르크의 사석포(射石砲·Bombard)가 바로 유럽의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Mehmed II·1451∼1481)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 위해 만든 우르반 대포(Urban's Bombard 또는 Great Turkish Bombard)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사석포다. 대포를 직접 만든 헝가리 출신 기술자 우르반(Urban)의 이름을 따 보통 우르반 대포라고 불리며 오스만투르크에서는 ‘불 뿜는 도마뱀’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1453년 초 우르반은 아드리아노플에서 당대 최고의 대포를 제작했는데 가장 처음 완성된 대포는 포신의 길이만 8.2m, 무게는 19톤이 넘는 괴물이었다. 직경 75㎝, 무게 450∼550㎏의 돌덩어리를 깎아 만든 포탄을 최소 1.6㎞ 이상 발사할 수 있었고 그 위력은 당시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물론 한번 포탄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데 3시간 이상이 걸렸고 명중률은 형편 없었으며 발사시 발생하는 엄청난 반동과 화염으로 하루에 최대 7발 이상 발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능에 크게 만족한 메메드 2세는 이 대포의 양산을 지시하는 한편 제조공장에서 240㎞나 떨어진 콘스탄티노플까지 이동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 거대한 대포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사륜마차 30대와 소 60마리, 사람 200명이 필요했고 가장 큰 것은 황소 90마리와 400명의 병사가 필요했다. 이와는 별도로 엄청난 무게 때문에 300명 이상의 병사가 이동경로상의 도로나 다리를 미리 보수해야 했고 이러한 이유로 하루에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4㎞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 사용된 우르반 대포와 다른 사석포들은 포탄의 강력한 파괴력으로 공성전의 중요한 무기로 사용됐고 대포의 가치를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정작 우르반의 대포는 포위 공격 초기에 포격시 발생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깨지고 말았지만 우르반이 전수한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투르크의 다른 대포들은 위력을 발휘했다.

사석포는 엄청난 양의 화약을 일시에 터뜨렸기 때문에 당시 역사가들은 이 초대형 대포가 글자 그대로 ‘불 트림을 했다’고 기록했고 대포가 발사될 때마다 수비군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한편 사석포는 대포의 선발 주자로 불리며 처음에는 청동이나 구리로 만들어지다가 15세기 이후부터는 쇠로 만들어졌다.

상당 기간 동안 포탄으로 바위 덩어리를 쏘았기 때문에 사석포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오스만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공성전뿐만 아니라 100년 전쟁 당시 영국·프랑스에서도 다수가 사용됐다.

역사속 신무기<62>클레이모어<Claymore>

검의 마지막 전성기를 장식한 강력한 무기
2008. 03. 31   00:00 입력 | 2013. 01. 05   03:42 수정

최근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우리 민족 최고의 전성기가 언제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민국 성인 남녀의 70% 이상이 ‘광개토대왕의 고구려 시대’라고 답했다고 한다.

전성기(全盛期)란 사전적 의미로 형세나 세력 따위가 가장 왕성한 시기를 뜻하는 명사로 정치·경제·사회·민족·국가·개인 등 광범위한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서유럽에서 사용된 클레이모어(Claymore)는 검의 마지막 전성기, 즉 대미를 장식하는 검이다.

극대화된 검의 크기로 인해 이점보다 약점이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이모어는 5000년 이상 지속된 검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스코틀랜드의 정예 하이랜더(highlander)들이 사용해 더 유명하며, 일반적으로 양손 검(two hand sword)의 한 갈래로 보지만 크다는 공통점 외에는 사용법 등이 달라 전혀 별개의 검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클레이모어는 그 크기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다. 생산 시기와 장인에 따라 길이 1∼1.9m, 폭 0.2∼0.3m, 무게 2∼4.5㎏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다. 보통 길이 1.2m, 무게 3㎏ 내외의 것이 가장 많이 사용됐다. 날의 폭은 넓고 손잡이는 십자형으로 장식이나 별도의 세공 없이 무기로서 기본에 충실한 것이 특징이다.

그 크기에 비해 날의 두께가 얇아 검의 무게는 무겁지 않으며 날카로운 날을 지니고 있어 숙련된 자라면 무엇이든 단 한번에 베어 버릴 수 있었다.클레이모어의 어원은 ‘위대한 검’(great sword)을 의미하는 게르만어 ‘클레이드헴 모르’(claidheamh mor)에 기원을 두고 있다. 게르만어로 원래 클레이드헴(claidheamh)은 검을 의미하고 모르(mor)는 크다는 의미다.

다만 길이가 필요 이상으로 길었기 때문에 전투에 유리할지는 몰라도 실제 사용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 크기와 무게 때문에 허리에 차고 다니기보다 아무렇게나 등에 메거나 양손으로 들고 다녔고 장거리 원정 때는 말이나 마차에 실어서 운반했다.

클레이모어가 전장에서 사용된 시기는 불행히도 총·포로 대표되는 화약무기가 점차 위력을 발휘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지리적 특성과 스코틀랜드인 특유의 용맹함, 여기에 동시대의 다른 양손 검보다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훨씬 빠른 공격이 가능했기 때문에 명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클레이모어가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노르만족이 장악한 영국 왕실에 대항해 스코틀랜드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윌리엄 월레스’(Willam Wallace) 때문이다.1297년 벌어진 스털링(Stirling) 전투에서 월레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독립군은 특유의 돌격전법으로 에드워드 1세의 잉글랜드 군대를 격파하는데 이때 이들의 주력 무기가 바로 클레이모어였다.

한편 총·포로 대표되는 화약무기 발전은 역설적으로 석기시대부터 주력 무기로 사용되던 검의 지위를 보조무기로 격하시켰을 뿐만 아니라 활용 범위도 크게 제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이모어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더와 같이 숙련된 전사 집단이 조직적으로 사용할 경우 검이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입증하는 상징적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