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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신무기<63>갈레아스(galleys)

구름위 2017. 1. 10.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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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신무기<63>갈레아스(galleys)

강력한 화력에 범선 특징 갖춘 전투 갤리선
2008. 04. 07   00:00 입력 | 2013. 01. 05   03:43 수정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소문이 빠르게 전달된다는 뜻인데 레판토 해전(Battle of Lepanto)의 최초 발단이 소문, 즉 잘못된 정보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1569년 9월 13일, 베네치아의 한 화약공장이 폭발했고 이로 인한 대화재로 큰 소동이 벌어졌다. 폭발사고 자체도 심각한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사고 소식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피해 규모가 더욱 부풀려져 베네치아가 군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수준이 됐다는 점이다.

당시 지중해 진출을 노리고 있던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셀림 2세(재위 1566∼1574)는 이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베네치아 침공을 전격 결정했고 대함대를 키프로스로 파견했다. 1571년 10월 7일 유럽의 기독교 함대와 오스만투르크 함대가 그리스 아드리아해 파트래 만 입구에서 조우했을 때 기독교 함대의 승리를 예상한 유럽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기독교 함대에는 갈레아스(galleys·그림)와 오스만투르크에 비해 2배 이상 많은 1815문의 대포가 있었다.갈레아스는 레판토 해전 당시 기독교 함대의 선봉을 담당했던 베네치아의 군함으로 강력한 화력과 범선과 노선의 특징을 모두 갖춘 대형 전투 갤리선이다.

베네치안 갈레아스(La Galeazza veneta)라고도 불리며 상용노선의 선체에 보다 많은 함포를 장착하기 위해 높은 함수루(艦首褸)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해상포대라는 별명에 걸맞게 갈레아스는 선수에 2문, 선미에 6문, 양 측면에 각 11문 등 30문의 함포를 장착해 단 일격으로 적함을 격침할 수 있을 정도의 화력을 투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무장을 운용하기 위해 기존 대형 전투 갤리선에 비해 무게는 140톤에서 170톤으로, 측면 흘수선의 길이는 39m에서 40m로, 노는 60개에서 75개로 늘어났다.거대해진 선체로 인해 민첩한 해상기동은 기대하기 힘들었지만 강력한 화력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았고 이를 통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해전이 벌어지자 당시 기준으로 갈레아스와 같이 거대하고 강력한 전투함을 본 적이 없었던 이슬람 함대는 갈레아스의 무시무시한 포격에 큰 혼란에 빠졌다. 순식간에 이슬람 함대 진형은 완전히 무너졌고 미처 전열을 재정비하기도 전에 기독교 함대의 갤리선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전투는 전술기동이 더 이상 불가능할 정도의 난전 형태로 돌변했고 서로 근접한 전투함들은 화살·화승총·대포를 난사하고 곳곳에서 격렬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전투는 쉽게 승패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됐지만 갈레아스와 2배 이상의 대포 수가 해전의 승패를 갈랐다.

오후 4시쯤 치열한 전투가 완전히 끝났을 때 오스만투르크 해군력은 재건이 불가능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음이 밝혀졌고 이에 비해 기독교 함대의 피해는 경미했다. 군사적 측면에서 레판토 해전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갈레아스와 대포가 해전의 새로운 무기로 등장, 노선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과 이를 통해 대양해군의 등장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역사속 신무기<64>유럽 시각으로 본 거북선

역사상 최초 폐쇄형 선체…당대 최강 군함 평가
2008. 04. 14   00:00 입력 | 2013. 01. 05   03:44 수정

16세기 유럽의 역사를 바꾼 해전이자 전사에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레판토 해전(1571)과 에스파냐 무적함대의 패배(1588)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두 해전 모두 함포가 절대적 위력을 발휘, 화력으로 승부가 판가름 났을 뿐만 아니라 노선의 몰락과 범선의 등장 등 이후 해전양상과 서양사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미국이나 유럽 해양학회에서 갈레아스(galleys)나 갤리온(galleon)이 아닌 조선 수군의 거북선(사진)을 당대 최강의 군함으로 평가하는 데 이견이 없다는 사실이다.동시대 다른 우수한 함선이 다수 존재했고 거북선에 대한 검증된 역사적 자료와 근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거북선을 당대 최고의 군함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조선 수군의 돌격용 거북선은 노선시대에 건조된 가장 흥미로운 군함이자 가장 혁신적인 군함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조선 수군의 거북선과 판옥선은 군함으로 부적합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돛과 노를 사용해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고 다양한 전술기동이 가능했다.

이뿐만 아니라 노선임에도 불구하고 대포를 장착해 사용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고 수병들의 포술 능력이나 함포 성능 역시 동시대 해군 중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 갑판 위에 지붕을 덮는 등 거북선은 조선(造船) 역사상 최초로 선체를 폐쇄형으로 건조해 이전 군함들과는 완전히 차별된다.

특히 거북선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판옥선(板屋船)은 1592년에서 1598년까지 무려 6년여의 기간에 걸쳐 진행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당시 일본·인도 등 대다수 아시아 국가들의 해군 전술은 조총이나 화살로 적선을 공격하고 충각을 사용한 돌격과 선상 백병전 등의 전법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대포를 배에 설치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구조적으로도 대포를 설치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한민족은 항해술에 능한 민족이고 뛰어난 선박 건조기술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제독이 있었다. 그리고 거북선은 이 세 가지 조건이 가장 이상적인 조건으로 결합했을 때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군함이다.

지상전에서는 연패를 면치 못했지만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 수군은 해전에서만큼은 단 한 번도 제해권을 빼앗기지 않았으며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한산도 해전 당시 포위·섬멸작전을 통해 순식간에 적선 66척을 격침한 기록은 해전사를 통틀어 그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대승이다.

만약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했던 각종 대함 무기와 함께 거북선이 아시아, 혹은 아프리카와 유럽에 소개됐다면 노선시대는 분명 새로운 전기를 맞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