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역사속 신무기<43>쿠크리

구름위 2017. 1. 9.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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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신무기<43>쿠크리

네팔 구르카 전사를 상징하는 도검
2007. 11. 19   00:00 입력 | 2013. 01. 05   03:24 수정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의 독일군과 동남아시아 전선의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한 적은 바로 쿠크리(kukri·사진)를 손에 든 영국군 소속 구르카(Gurkha) 병사들이었다.

구르카 병사들은 야간에 소리 없이 적진에 침투해 경계근무 중인 보초는 물론 잠든 병사들까지 가차 없이 적군의 머리를 베어버렸다. 때로는 총탄·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대범하게 적진에 난입한 뒤 적 지휘관이나 적군 병사들의 머리를 잘라 전리품처럼 가져오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구르카 병사들은 바이킹의 악명을 만방에 떨친 광(狂)전사 집단, 버서커(berserker)나 여성전사(shield-maiden)들처럼 놀라운 힘과 보통 사람들보다 배 이상 큰 체격을 갖추지 못했다. 구르카 병사들이 남다른 투지와 근성을 갖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오히려 이들의 체격은 네팔의 가혹한 자연환경으로 정상인보다 왜소한 것이 특징이다.

고대 바이킹 전사들처럼 뛰어난 신체조건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적병을 단 일격에 양단할 수 있는 구르카 병사들의 괴력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구르카 병사의 상징 쿠크리는 독특한 외형을 제외하면 매우 단순하고 평범한 단검이다. 전체 길이는 45∼50㎝, 무게 0.6㎏ 내외이며 손잡이는 고급 목재나 상아로 만들어졌고 네팔 사회에서 쿠크리는 성인 남성의 상징이자 매우 귀중한 보물로 인식됐다.

그러나 쿠크리의 독특한 외형이야말로 비교적 왜소한 체격의 구르카족이 어떤 적과 맞서 싸워도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다. 쿠크리는 칼 등이 굽어 있고 폭이 좁은 부분은 3㎝를 넘지 않지만 폭이 넓은 부분이 6㎝를 넘을 정도로 손잡이에서 칼날 끝으로 갈수록 칼 폭이 두툼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검의 무게 중심이 칼날 끝에 집중되도록 만들어진 독특한 외형으로 인해 쿠크리를 살짝만 휘둘러도 어렵지 않게 통나무를 조각낼 수 있다. 원래 구르카족은 인도 중부에서 농업을 주업으로 삼은 농경민이었으나 14세기께 힌두교도라는 이유로 이슬람교도에게 쫓겨 현재의 네팔 중부 및 서부 산악지대로 이동했다. 이들은 매우 온건하지만 한번 칼을 뽑으면 반드시 피를 봐야만 하는 강인한 면모 역시 함께 갖추고 있다.

이들에게 쿠크리는 삶의 일부라 할 수 있으며 보통 성인식 때 부모 또는 조상의 것을 물려받아 허리띠에 달린 칼집과 함께 휴대하고 다녔다. 재질과 장식을 통해 소유자의 신분과 직위를 알 수 있고 집안의 가보로 대대로 대물림되기도 했다.쿠크리의 원형은 고대 그리스 왕국 마케도니아의 검을 그 기원으로 하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을 통해 인도에 전해진 것으로 본다.

일부에서는 고대 서아시아와 중동·그리스 문명에서 사용된 보편적 검의 형태가 네팔에서 특화한 것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과는 무관하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 기원에 대한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네팔 구르카족 고유 단검 쿠크리는 매우 우수한 전투용 단검이며 오늘날까지 불패 구르카 신화를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이다.

역사속 신무기<44>훈족의 활

기병에 최적화··· 크기 작아도 강력
2007. 11. 26   00:00 입력 | 2013. 01. 05   03:25 수정

전혀 연관성이 없는 작은 행동이 예상치 못했던 큰 결과를 일으키는 현상을 가리켜 흔히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데 1972년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가 이 이론을 발표하기 약 1500년 전 나비 효과라 부를 수 있는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다.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대에 거주했던 훈족이 새로운 초원을 찾아 이동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들의 행동이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훈족의 이동은 곧 5세기 전반 고트족을 비롯한 동유럽 군소 민족들의 연쇄적인 대이동을 촉발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훈족의 왕 아틸라(Attilar·434∼453)는 중부 유럽에서 흑해·도나우 강에서 발트 해까지 이어진 대제국을 건설하고 서양세계에 일찍이 그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충격과 공포를 선물했다. 하지만 훈족이 단순히 말만 잘 타는 기마민족이었다면 결코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비밀의 열쇠는 바로 훈족의 활(사진)에 있다.
훈족은 모두 경기병이었으면 가죽 갑옷으로 무장하고 훈족 특유의 활을 주무기로 사용했다. 특히 훈족이 사용한 활은 매우 작으면서도 강력했고 훈족 경기병들은 마상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며 활을 쏠 수 있었다. 훈족의 활도 기본적으로 여러 재료를 복합적으로 결합해 만든 복합궁 일종이며, 형태로 볼 때 활 몸체가 굽어 있는 만곡궁의 한 종류에 속한다.
세계사에서 복합궁(複合弓·composite bow)은 기원전 2200년께 아카드의 제4대 왕 나람신(Naram-Sin·기원전 2254∼2218)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그러나 훈족이 사용한 활은 같은 복합궁이라도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서양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위력이 강력한 것이었다.
복합궁의 정점에 서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훈족의 활은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만드는 데만 5년, 자유자재로 활을 쏘기 위해서는 10년 이상을 연습해야 한다는 고급 무기다. 그러나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1분 안에 15발 이상의 화살을 연사할 수 있었고 500m 이내의 거리에서는 단단한 갑옷은 물론 어떠한 목표라도 관통시킬 수 있을 정도로 우수했다.
우리나라의 전통 활인 각궁도 복합궁·만곡궁이라는 점에서는 훈족의 활과 기본적으로 같은 계열의 무기라고 할 수 있다. 훗날 게르만·프랑크·고트 등 여러 민족이 훈족의 활을 모방하거나 그보다 뛰어난 활의 개발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롱보우(long bow)나 석궁(cross bow) 같은 다른 스타일의 무기만 양산했다.
거의 대부분의 유목민족들이 그러하듯 훈족 역시 구전(口傳) 이외의 기록수단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서기 453년 위대한 정복자 아틸라 사후 그들의 문화·역사는 거의 대부분 소실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족은 서양 세계사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꿀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남겼고 그들의 활 역시 무기 발전 측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