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역사속 신무기<37>프란시스카

구름위 2017. 1. 9.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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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신무기<37>프란시스카

4~8세기 프랑크족의 투척용 전투도끼
2007. 10. 08   00:00 입력 | 2013. 01. 05   03:17 수정


현대 무기체계의 명명법을 보면 위인이나 명장의 이름, 또는 지명이나 맹수의 이름에서 따오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런데 반대로 무기의 이름이 너무나 유명해 특정 지역의 지명이 됐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이름이 돼 현대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는 사례가 있다.

서로마제국 멸망에 즈음해 갈리아 지방을 평정한 프랑크족은 새로 획득한 영토의 이름을 프랑시아(Francias)라고 명명했다. 이 이름은 4세기에서 8세기 중반까지 프랑크족이 주력 무기로 사용한 전투용 투척도끼 프란시스카(francisca·사진)에 그 어원을 둔 것이다.

한편 프랑크족에 의해 갈리아가 아닌 프랑시아라고 불리게 된 이 지역이 바로 지금의 프랑스다. 프란시스카는 윗부분과 아랫부분 모서리가 뾰족하고 날에서 자루와 연결된 부분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아치 모양의 머리부분이 특징이다. 무게는 1.2∼1.4㎏ , 길이는 50㎝ 내외의 손잡이와 10㎝ 정도의 날로 이뤄져 있다.

전체적인 외형이나 구성은 바이킹족의 전투도끼와 비슷하며 다만 지역에 따라 그 크기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로마시대의 역사학자 프로코피우스(Procopius·500∼565)는 프랑크족과 그들이 사용한 투척도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묘사했다.

“모든 프랑크족 남자들은 긴 칼과 방패, 그리고 무시무시한 도끼로 무장했다. 이 도끼는 나무 손잡이가 아주 짧은 반면 도끼머리 자체는 아주 두껍고 양 날은 매우 날카롭다. 선제공격 신호가 떨어지면 이 도끼를 던져 로마군 병사들의 방패를 산산조각내고 전열을 무너뜨렸다. 병사들은 죽거나 부상당했으며 살아남은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맹수 같은 프랑크족의 공격에 로마군단은 더 이상 무적이 아니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크족은 그간 전장에서 절대적 우위를 보장하던 로마군단의 집단전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백병전 바로 직전에 프란시스카를 투척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프랑크족의 이러한 전술은 단순하지만 매우 효과적이었고 무거운 도끼머리와 짧은 손잡이로 구성된 프란시스카는 12m 이내의 거리에서 로마군의 방패와 갑옷을 찢을 수 있도록 최적화한 투척 무기였다.

고고학자들에 의해 복원된 프란시스카는 건장한 성인 남성이 투척했을 경우 회전하며 날아가 약 15m 이내의 표적을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기록에 따르면 프란시스카는 특유의 모양으로 인해 표적에 명중하지 않더라도 땅바닥에 박히지 않고 고무공처럼 다시 튀어 올라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날아가곤 했다.

이렇기 때문에 프란시스카의 공격을 받는 로마군 병사들에게 방패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대열의 가장 뒤쪽에 있더라도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프랑크족은 프란시스카의 특성을 활용해 단지 도끼를 흔드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로마군 병사들에게 겁을 주거나 혼란시킬 수 있었으며 전투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프랑크족이 남긴 법전에 따르면 프란시스카는 성인만이 지닐 수 있는 무기이며 한번 주인이 결정되면 팔거나 살수 없는 신성한 무기였다고 전해진다.

역사속 신무기<38>드라카

유럽 제패한 바이킹의 ‘고속 수송함’
2007. 10. 15   00:00 입력 | 2013. 01. 05   03:18 수정

동로마제국 멸망 이후 서양세계는 흔히 암흑시대로 불리는 문명 퇴보현상을 겪게 된다. 이러한 퇴보현상은 문명 전반에 걸쳐 벌어졌으며 전쟁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과거 아시리아·이집트·페르시아·그리스 등에 의해 수십 세기에 걸쳐 발전하고 완성된 다양한 전략·전술은 로마를 끝으로 완전히 단절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부분에서는 새로운 군사적 발전을 이뤄 내기도 했는데 암흑시대에 전반에 걸친 군사적 성공사례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북방민족, 즉 바이킹족의 해상 침공이다. 당시 이들 바이킹족이 보여 준 장거리 해외 원정과 군사력 투사를 통한 전략임무 수행 능력은 현대 미 해병원정군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다.

그리고 바이킹족의 이러한 군사적 성공 이면에는 드라카(Drakkars·사진) 또는 용선(dragon ship)으로 불린 바이킹 장선(long boat)이 있었다.서기 800년에서 1050년까지 지속된 바이킹 전성기에 사용된 바이킹 장선은 일반적인 군함이 아닌 침략용 강습선이자 고속 수송선이었다. 일부 해전을 치르기도 했지만 건조 목적이나 용도 자체가 기존의 노선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그리스·로마의 전통적인 노선과 완전히 다른 독특한 선형을 자랑한다.

일반적인 바이킹 장선은 전장 18∼30m 사이의 다양한 크기로 건조됐으며 그중 길이 23m, 폭 3.8m 크기에 건현 0.9m 이하의 날씬한 형태가 가장 많이 사용됐다.바이킹 장선은 길고 날씬한 선형과 배의 흘수와 건현이 아주 낮아 쉽게 노를 저을 수 있었고 이 덕분에 해상에서도 빠르게 항해할 수 있었다.

거친 북해에서 항해해야 했기 때문에 지중해 갤리선과 달리 노를 1단으로 배치했으며 근해에서만 활동하던 초창기에는 돛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활동 영역이 확대되면서 돛대를 세우고 돛을 달았다.크기 면에서는 로마의 군함 리버니안과 유사했지만 바이킹족은 이 작은 장선으로 북대서양뿐만 아니라 지중해·흑해까지 거침없이 항해했다. 서기 1000년께 길이 46m급 길이의 드라카라는 새로운 선형이 등장했다.

지중해 노선과 달리 바이킹 장선은 충각이 없었으며 비록 규모가 큰 용선은 높은 누각이 있었지만 바이킹족들은 별도의 대함무장 대신 자신들의 활과 화살·창·도끼, 그리고 칼로 싸웠다. 사실 바이킹 장선은 기본적으로 고속 수송함이었고 그들의 전략 역시 기습공격이 핵심이었기 때문에 장선에 별다른 무장을 장착하지 않았다.

바이킹족은 뛰어난 전사이자 상인이었으며 특유의 선박 건조술과 항해술, 그리고 남다른 투지로 암흑시대 동안 경제·군사적 측면에서 유럽을 제패했다. 특히 바이킹족은 자신들의 장선을 사용해 장거리 해상 원정과 기습 상륙의 모범을 제시했으며 이는 군사적 측면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다. 원양에서의 작전뿐만 아니라 천해·하천에서의 작전까지 가능했던 바이킹 장선의 존재는 바이킹의 부흥과 군사적 성공에 밑거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