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역사속 신무기<31>스큐툼

구름위 2017. 1. 9.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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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신무기<31>스큐툼

고대 로마군을 상징하는 방패
2007. 08. 13   00:00 입력 | 2013. 01. 05   03:11 수정


스큐툼(Scutum·사진)은 로마군단 병사들이 사용한 방패 이름이다. 글라디우스·스파타·필룸·필라와 함께 스큐툼은 로마군 병사의 상징이자 로마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방패다.

스큐툼 자체의 성능은 그리 뛰어난 것이 아니었지만 이 방패를 든 로마군 병사들은 무적이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방패 본래의 임무를 완수해 수많은 무용담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무기로서의 가치를 떠나 대중적으로 얼마나 유명한 방패인지 여름철 남쪽하늘에 보이는 독수리자리·뱀자리·궁수자리 중간쯤에 위치한 별자리의 이름으로 명명됐을 정도다. 사실 폴란드의 천문학자 헤벨리우스(1611∼1687)가 국왕 얀3세 소비에스키의 용맹을 기려 1690년 명명한 방패자리의 원래 이름은 ‘스비에스키의 방패’였다.

그 이름을 처음 명명한 당사자가 안다면 매우 억울해했겠지만 현대인들은 이 별자리를 고대 로마군 병사들의 방패, 스큐툼으로 부른다.저명한 그리스 사학자 폴리비우스(기원전 203∼120)는 스큐툼을 가로 0.66m, 세로 1.1m에 양쪽 측면이 곡선 모양으로 굽은 종려나무처럼 두꺼운 방패로 묘사하고 있다.

적당한 크기의 판자들을 겹겹이 붙여 강도를 높이고 칼이나 도끼 공격으로 방패가 잘려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청동이나 쇠로 테두리를 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방패 중앙에 구멍을 뚫은 다음 손잡이를 설치하고 방패 전면을 방패심이라 불린 볼록한 반구형 금속 덮개로 막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로마군 병사들은 적의 공격을 방패 옆으로 흘려버릴 수 있었고 방패 중앙을 잡음으로써 방패가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균형 있게 들 수 있었다.최초의 스큐툼은 기원전 7세기께 이탈리아에서 사용된 타원형 방패와 그리스의 방패를 그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완전한 타원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기와 사용지역·군단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스큐툼이 존재했으나 크게 타원형과 장방형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모양 이외의 구조나 성능은 거의 동일했다. 스큐툼에 유명한 ‘번개’문장이 그려진 것은 20년께로 로마의 여러 군단이 이러한 모티프가 변형된 방패를 휴대했고 100년 이후에는 모든 로마군의 스큐툼에 보편적으로 사용됐다.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이 로마시대의 스큐툼이라 생각하는 형태는 40∼50년께 등장했으며 측면을 곧게 하고 모서리에 L자 모양으로 금속을 박아 강도를 보강한 것이 특징이다.스큐툼은 로마군 병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방어무기였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수비군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로마군 병사들은 이 방패로 완전한 방어태세를 유지하면서 적과 맞붙어 싸웠다.

특히 로마군 병사들은 방패가 맞닿을 정도로 간격을 좁힌 다음 항상 2인 1조로 적과 싸워 전투의 주도권을 장악했는데 이 방법은 스크럼(scrum)을 짠 현대 전투경찰의 시위 진압법과 유사하다. 스큐툼은 역사상 가장 균형 잡힌 방패라 할 수 있으며 현대의 시위 진압용 방패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을 만큼 그 기본에 충실한 방패다.

역사속 신무기<32>워 피크

기원전 스키타이족의 전투용 망치
2007. 08. 20   00:00 입력 | 2013. 01. 05   03:11 수정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도구들이 어느 날 갑자기 무시무시한 살인도구로 사용된다고 가정해 보자.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면 아마도 매우 당혹스럽거나 불쾌할 것이다.

기원전 6세기께 남부 러시아 초원지대를 생활 터전으로 한 스키타이족(Scythian)이 워 피크(War pick·사진)를 들고 나타났을 때 약탈을 당한 농경민족들의 반응도 이와 유사했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마유목 민족으로 기록되는 스키타이족은 전투용 망치의 일종인 워 피크로 악명을 날렸다.집어낸다, 찍어낸다는 뜻을 가진 워 피크는 새의 부리처럼 생긴 돌기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기병용 무기다. 일부에서는 전투용 도끼로 분류하기도 한다. 기원전 7세기에 처음 등장했고 유럽에서는 16세기까지 사용됐다.
보통 길이는 50∼60㎝, 무게는 0.8∼1.2㎏ 정도이며 쇠망치처럼 내려치면 뾰족한 날이 방패나 갑옷을 뚫고 들어가 치명상을 입혔다. 사실 워 피크는 곡괭이·호미 같은 농기구나 망치 같은 공구가 무기로 전용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칼이나 투창·곤봉 같은 무기는 수렵문화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인류가 사용하기 시작한 도구를 그 기원으로 한다.

농경문화가 정착된 이후 등장한 각종 도구 역시 문명의 발전과 함께 무기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군인 계급, 이후 용병이 등장한 후에도 이러한 현상은 중세시대까지 계속됐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특별히 사용법을 익히지 않더라도 무기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원전 13세기께 인류 최초의 기병부대를 창설한 아시리아나 페르시아 등 정규 기병부대를 운용한 군대에서는 워 피크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았다. 굳이 워 피크가 아니더라도 더 치명적인 무기가 더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변한 대장간조차 없었던 유목민들 입장에서는 워 피크와 같이 손쉽게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의 가치는 매우 높았다.

비록 주력무기는 아니었지만 워 피크는 기병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기병과 기마민족의 보조무기로 광범위하게 사용됐고, 고고학적 흔적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워 피크가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은 16세기께로 기병 전투에서 갑옷을 입은 적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다. 다른 무기와 달리 정확히 때리면 갑옷을 뚫고 적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 충격으로 적을 때려눕힐 수 있었다.

무기체계 발전에 따라 워 피크는 급격히 전장에서 사라졌지만 대신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의 생활을 돕는 도구로 그 명맥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등산용 피켈(pikel)이나 곡괭이, 국내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도리 혹은 노루발장도리 역시 워 피크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생활용품들이 전쟁에 사용되던 무기들을 일상생활에 편리하도록 개량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