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역사속 신무기<35>고트족 ‘ 등자 ’

구름위 2017. 1. 9.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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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신무기<35>고트족 ‘ 등자 ’

안장에 매달아 발 걸치는 승마 기구
2007. 09. 10   00:00 입력 | 2013. 01. 05   03:14 수정


서기 378년 현재의 터키 북서쪽에 위치한 아드리아노플에서 서양 역사와 전쟁사에 한 획을 긋는 결정적 전투가 벌어졌다.

동로마 황제 발렌스가 이끄는 로마군단과 훈족의 압박으로 서쪽으로 밀려난 고트족이 소아시아와 발칸반도의 주요 교통로가 지나는 전략 요충지 아드리아노플에서 충돌한 것이다.

동로마 황제 발렌스는 승리를 장담했지만 전투는 로마군의 선공에도 불구하고 600여 년 전 칸나에 전투 이후 로마가 경험하지 못했던 최악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무적을 자랑하던 로마군을 상대로 고트족이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등자와 일당백의 기량을 갖춘 중기병이었다.

로마군 역시 용병과 이민족으로 구성된 용맹한 기병대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등자가 없었기 때문에 고트족 중기병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등자란 사람이 말 위에 올라타거나 말을 타고 다닐 때 말 등에 얹어 놓는 안장에 매달아 발을 걸칠 수 있게 만든 승마 기구다.

그 원리나 구조는 단순하지만 등자의 등장은 과거 특별한 기술과 남다른 감각을 요했던 승마를 보다 쉽고 대중적으로 바꿔 놓았다.군사적 측면에서도 기병이 승마시 두 발을 디딜 수 있어 더 안정된 자세로 활을 쏘거나 칼·창을 휘두를 수 있었다. 등자에 발을 걸치면 같은 조건에서도 더 무거운 갑옷을 착용하고 더 무거운 무기를 휘두를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무거운 갑옷과 창으로 무장한 상태에서도 안장 위에서 몸을 지탱하거나 적과 격돌할 때의 충격을 이겨낼 수 있었다.일례로 등자가 없었던 로마군 기병은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한 손으로 고삐를 단단히 쥐어야 했지만 고트족 기병은 고삐를 잡지 않더라도 등자만으로 몸을 고정하고 양손 모두를 사용해 싸울 수 있었다.

등자의 존재가 중기병 등장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등자는 기원전 4세기께 동양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1세기께 스키타이나 사르마티아 같은 유목민족을 통해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해졌다. 훈족의 압박으로 남부 러시아와 중앙 유럽을 거쳐 장기 이주를 하면서도 2세기께 고트족은 등자와 사르마티아인의 군사기술을 바탕으로 강력한 중기병을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를 통해 고트족 중기병이 거둔 보병에 대한 첫 승리는 중세 기사의 전형이 된 중기병의 탄생과 중세 전쟁의 서막을 알린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 기원전 13세기께 아시리아에 의해 인류 최초의 기병부대가 전장에 등장한 이후 처음으로 기병의 전략적 가치가 보병을 압도한 것이다. 이후 중기병은 14세기 영국의 궁수와 스위스의 창병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 전장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며 기병의 시대로 불리는 전성기를 열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승리한 고트족은 로마제국으로 이주할 수 있는 권리와 강력한 무력을 갖춘 독립된 유랑민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이것은 결국 로마제국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등자는 매우 간단한 승마용 기구다. 그러나 등자가 미친 역사적·군사적 영향은 서양 고대사를 완전히 뒤바꿀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역사속 신무기<36>전투용 도끼 (battle ax)

권위·신성함 상징… 인류 最古 격투용 무기
2007. 09. 17   00:00 입력 | 2013. 01. 05   03:16 수정

전투용 도끼(battle ax·사진)는 이름 그대로 전투에 사용하도록 특별히 만들어진 도끼를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다.

그 외형은 손잡이와 금속으로 된 머리로 구성되며 날카롭게 날이 서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철퇴와 같은 구조다. 전투용 도끼는 석기시대부터 무기로 사용된 인류 최고(最古)의 격투용 무기 중 하나이며, 들고 휘두른다는 측면에서 곤봉의 발달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만 곤봉이나 그 연장선상에 있는 철퇴가 휘둘러 때리는 속성을 지닌 무기라면 전투용 도끼는 휘둘러 베거나 자르는 속성을 지닌 무기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도끼의 기원은 약 60만년 전 전기 구석기시대 때 원시인들이 사용한 손도끼(hand ax)에서 찾을 수 있으며 나무나 짐승의 뼈와 같이 단단한 것을 자를 때 사용했다.

손잡이가 달린 현대적 개념의 도끼가 등장한 것은 기원전 6000년께 신석기시대로 마제석기와 타제석기로 분류할 수 있으며 종류·크기에 관계없이 목공구로 널리 사용됐다. 그러나 인류문명 발달과 함께 분쟁 규모 역시 점차 확대되면서 도끼는 본격적인 전쟁 무기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상 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도구였기 때문에 별다른 교육이나 숙련이 필요하지 않았고 간단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었기 때문에 널리 사용됐다. 문명 발달과 함께 무기와 공구의 경계가 명확히 분리됨에 따라 도끼 역시 목공구와 전투용 도끼로 사용 목적과 용도에 따라 변화했다.

최초의 전투용 도끼는 신석기시대 고대 오리엔트 지역에서 사용된 눈도끼(eye ax)로 도끼날에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면서 전투용 도끼는 더욱 공격적이고 강력해졌다. 특히 청동기 금속의 사용과 방패·갑옷 같은 방어도구 등장으로 전투용 도끼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구리에서 청동으로 재질이 바뀌면서 날이 더욱 예리해졌고 절단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면서 빈약한 방패나 갑옷 같은 방어도구를 가볍게 찢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문명 발달에 반비례해 전투용 도끼의 가치는 점점 낮아졌다. 도끼의 특성상 충분한 위력을 발휘하려면 크기가 클수록 좋았지만 크기에 비례해 무게가 늘어나고 휴대하기도 불편해졌다.

작은 손도끼가 있었지만 숙련된 병사가 아니면 충분한 위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일격에 상대방을 제압하지 않으면 반대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점점 더 강력한 무기가 등장하면서 도끼는 본래의 목적, 즉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도구로 돌아갔다.한편 도끼는 많은 민족에 의해 신성시됐고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일부 민족들은 도끼에 주술적 힘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켈트인과 프랑크·트·훈족에게 전투용 도끼는 여전히 중요한 무기였고 북유럽 민족들 역시 전투용 도끼를 애용했다. 비잔틴 제국의 충성했던 바이킹 용병 친위부대나 앵글로색슨인들 사이에서 전투용 도끼는 권위와 신성함의 상징이었다. 반대로 9∼10세기 서유럽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바이킹들의 전투용 도끼는 공포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