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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신무기<33>그리스의 불

구름위 2017. 1. 9.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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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신무기<33>그리스의 불

비잔틴 제국의 승리 보장한 비밀무기
2007. 08. 27   00:00 입력 | 2013. 01. 05   03:12 수정


인류 문명 발전과 불(fire)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인류가 불이라는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기후와 어둠을 극복하고 자연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불을 이용해 금속을 가공할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 문명을 건설, 발전시킬 수 있었다. 당연히 불은 다양한 형태로 인류 전쟁에 사용됐다. 군사력을 상징하는 단어로 화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보통 ‘적에게 화력을 퍼부었다’는 표현은 ‘다양한 무기를 사용해 적을 공격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673년 비잔틴 제국은 상징적 의미의 화력이 아닌 진짜 화력을 적에게 퍼부었다. 그리스의 불(Greek Fire)이라 불린 무기를 사용해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한 사라센 함대를 말 그대로 불태워 버린 것이다. 현대적 개념의 화염방사기에 비견할 수 있는 이 무기체계는 가연성 액체에 불을 붙여 적에게 직접 방사하거나 투척하는 방법으로 사용된 비잔틴 제국의 비밀무기다.

그리스의 불이 기록에 등장한 것은 673년으로 이슬람의 콘스탄티노플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이 살라에움 해전에서 최초 사용했다. 679년까지 계속된 이슬람의 콘스탄티노플 침공 당시 사용된 그리스의 불은 압도적 전력 격차에도 불구하고 사라센 함대를 격파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후 그리스의 불은 아랍세계와 벌어진 수많은 전쟁에서 비잔틴 제국의 승리를 보장하는 비밀무기로 활약했고 14세기 전반 화약이 실용화되기 전까지 가장 강력한 무기로 인정받았다.그 기원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의 불은 시리아 헬리오폴리스 출신 그리스인 공학자 칼리니쿠스(callinicus)의 업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비전되던 그리스의 불 제조법을 개량하는 방법으로 더욱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 정확한 성분이나 제조기술은 국가 기밀로 철저히 관리됐기 때문에 확인할 수 없고 오늘날 네이팜탄과 같은 일종의 나프타혼합물로 추측할 뿐이다.그리스의 불은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됐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선수에 펌프를 설치하고 호스 모양의 관(管)을 이용해 방사하는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사정거리는 20m 이상이었으며 적선에 근접해서는 오히려 효과가 반감됐다. 일부 대형함은 이동식 발사기구 2개를 양 현측에 설치하기도 했다. 또 다른 방식은 적선의 갑판에 명중하면 폭발하는 항아리 수류탄을 노포(ballistae)나 투석기를 사용해 발사하는 것이었다. 그리스 불은 어느 날 갑자기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무기가 아니다.

비잔틴인들은 그리스·로마 문명의 전통에 따라 적의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과학과 기술의 힘에 의존했다. 비잔틴인들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로 만들어진 그리스 화약은 수세기 동안 그들에게 결정적 이점과 군사적 우위를 보장했다. 그리스의 불은 국가와 민족 번영의 근간이 되는 자주국방의 중요성과 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이유를 상징하는 무기다.

역사속 신무기<34>비잔틴 해군의 상징 드로몬

해양패권 장악한 당대 최강의 군함
2007. 09. 03   00:00 입력 | 2013. 01. 05   03:14 수정

동로마제국 혹은 비잔틴제국으로 불리는 비잔티움제국(Byzantium Empire·330∼1453)은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동서로 분열된 중세 로마제국 중 동방제국이다.


지정학적 특성에 의해 동쪽의 러시아와 서쪽의 이슬람 세력의 끊임없는 침공을 받았지만 해상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격퇴할 수 있었다. 비잔티움제국이 해양 패권을 장악하고 비잔틴 해군이 무패 신화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들에게는 그리스의 불이 있었고, 둘째 러시아나 이슬람 세력에 비해 배를 더 잘 만들었기 때문이다.


드로몬(사진)은 비잔틴 해군의 대표적 군함이다. 드로몬은 고대 그리스의 트라이림(trireme)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지중해 지역에서 몇 세기에 걸쳐 사용된 검증받은 형태를 취한 돛·노를 갖춘 노선이다. 드로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5세기 말 문헌에서 찾을 수 있고 534년 비잔틴 역사가의 기록에서 보다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비잔틴 해군은 92척의 드로몬을 보유하고 당대 최강의 해군력을 투사할 수 있었다. 드로몬에 대한 보다 정확한 기록은 886년부터 911년까지 비잔티움제국을 통치했던 현제(賢帝) 레오 6세가 907년 집필한 저서 ‘책략’(Tactica)에서 찾을 수 있다. 전형적인 드로몬은 길이 약 33m, 폭 약 4m, 홀수 1m 정도의 2단 노선으로 100명의 노수가 노를 저었으며 더 큰 드로몬은 길이 약 43m에 230명이 노를 저었다.

9세기가 되자 드로몬의 선체는 더욱 확대됐고 크기에 따라 가장 작은 아우시아코스(ousiakos), 중간 크기의 팜필로스(pamphylos), 가장 큰 첼란디온(chelandion) 등 세 종류의 2층 노선으로 그 형태가 정해졌다. 아우시아코스는 아우시아로 불린 1개 중대 병력, 108명이 탑승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중간 크기의 팜필로스에는 120∼150명의 전투병력이, 가장 큰 첼란디온에는 300명의 승조원이 탑승할 수 있었다.


드로몬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이전까지의 대표적 노선 건조방식인 정밀 목판 이음식(shell method)이 아닌 변형 용골식(frame method)으로 건조됐기 때문이다. 선박 건조 관점에서 이러한 건조법 변화는 충돌 공격의 효과를 감소시켜 충각이 사라지고 해전 방식이 변화하는 시발점이 됐다.

건조법의 변화와 함께 비잔틴인들은 기원전 3500년 이래 사용돼 온 사각형 돛이 아닌 라틴돛(라틴범)으로 불린 삼각형 돛을 880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드로몬의 조함 성능과 속도를 더욱 배가시켰다. 드로몬과 그리스의 불을 보유한 비잔틴 해군은 당대 최강의 해군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며 해양 패권을 완벽히 장악해 비잔티움제국 번영의 일익을 담당했다.

비잔틴 해군의 활약은 11세기 튀르크의 공격으로 인해 비잔티움제국의 국경이 내륙으로 후퇴하기 전까지 계속됐으며 드로몬은 제국 수호의 일익으로서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훗날 콘스탄티노플의 생명선 역할을 수행한 해군력의 상실은 비잔티움제국 멸망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됐고 해양 패권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사례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