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역사속 신무기<41>쿼터스태프

구름위 2017. 1. 9.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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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신무기<41>쿼터스태프

10~16세기 중세 유럽 농민들의 무기
2007. 11. 05   00:00 입력 | 2013. 01. 05   03:22 수정


서양사를 논할 때 암흑시대로 불리는 중세 유럽에서는 몇몇 역사적 발견과 발명에도 불구하고 문명 전반에 걸쳐 발전이 아닌 퇴보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나 바이킹 침공 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 과거의 찬란한 문명과 문물은 모두 사라졌고 그 뒤에는 파괴와 약탈로 인한 폐허만이 남았다.

파괴와 약탈이 빈번하게 벌어지다 보니 농기구를 포함한 공구와 무기의 대량생산 및 관리는 과거의 일이 돼 버렸고 질 좋은 무기를 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바이킹들조차 10세기 초까지 식량이나 가축보다 무기 확보를 최우선으로 했을 정도다. 이러한 현상은 상당 기간 지속됐는데 문명의 전반적인 퇴보는 전쟁무기의 양극화 현상을 불러 일으켰고 쿼터스태프(quarterstaff·사진)와 같은 무기 아닌 무기를 등장시켰다.

쿼터스태프는 떡갈나무를 깎아 만든 길이 2∼3m, 무게 0.8∼1.2㎏의 단순한 형태의 봉(棒)으로 중세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결코 무기로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끝에 날카로운 금속 날이나 촉만 붙여도 도끼나 창이 되지만 쿼터스태프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막대기 또는 작대기라고 부르는 봉의 형태 그대로 전쟁에 사용됐다.

무기라고 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지만 10세기에서 16세기까지 중세 유럽의 농민과 예비군들은 이 무기 아닌 무기를 들고 적군과 싸웠다.길이가 길었기 때문에 단지 휘두르는 행동만으로도 적에게 강력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고 별다른 훈련 없이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는 의외로 많이 사용됐다.

특히 영국에서는 할베르트(halbert)와 롱 스피어(long spear) 같은 장검이나 장병무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사용됐다.일부에서는 쿼터스태프를 개량하기도 했다.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사용된 호스맨즈 플레일(horseman's flail)이나 14세기에서 19세기까지 유럽에서 사용된 풋맨즈 플레일(footman's flail) 같은 무기가 대표적이다.

한편 유럽에서 전쟁무기의 양극화 현상은 상당 기간 지속됐다. 일례로 로마군단의 무장과 갑옷은 장군에서 말단 병사까지 거의 통일돼 있었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장군들의 검은 좀 더 주의 깊게 제작되고 무게 추 역할을 하는 폼멜에 보석이 박혀 있거나 상아로 세공돼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는 지휘관과 말단 병사의 무장과 갑옷이 그들의 신분 격차만큼이나 차이가 났다.중세시대 주요 군사력은 기사를 중심으로 하는 중장 기병이었고 일반 보병들 역시 강력한 활과 창, 사슬갑옷과 방패로 무장했다. 그러나 모든 병사가 이처럼 무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왕의 친위대나 일부 정규군의 무장은 더욱 강력해진 반면 대다수의 정규군이나 일반 농민들로 구성된 예비군의 무장은 오히려 더 빈약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로 구성된 대다수의 부대는 낫이나 괭이 같은 농기구를 그대로 들고 나와 싸웠고 쿼터스태프 역시 이러한 도구의 연장선상에 있는 무기다.

역사속 신무기<42>베르툼

기원전 3~2세기 로마군 투척용 투창
2007. 11. 12   00:00 입력 | 2013. 01. 05   03:23 수정

영국 신사들의 게임으로 불리며 현재는 전 세계적 레저 스포츠로 자리 잡은 다트는 2∼3m 떨어진 거리에서 불이라고 불리는 원판에 화살을 던져 승부를 겨루는 게임이다. 그런데 다트게임의 원형이 사실은 중세 유럽의 다트라는 작은 투척무기였고 그 기원이 로마군 병사들이 사용한 투창 베르툼(verutum·사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로마군 병사들이 사용한 베르툼은 뛰어난 성능과 역사를 뛰어넘어 두 번이나 표준무기로 사용됐음에도 불구하고 잊혀진 비운의 무기다.최초의 베르툼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까지 초기 로마군 벨리테스(velites) 병사들이 적과의 근접전에서 사용한 짧은 형태의 투창이다.

대열을 유지하지 않고 각자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며 유격전을 수행한 벨리테스들은 여러 개의 베르툼을 동시에 투척하며 적의 공격을 교란하거나 진격을 방해했다. 기록에 따라 베리클룸(vericulum)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여러 자루를 지칭할 때는 베루타(veruta)라고도 부른다.

에트루리아인들이 처음 사용하고 기원전 5∼4세기께 전래된 필룸과 같이 베르툼 역시 기원전 3∼2세기께 볼스키인과 삼니트인의 정복 과정에서 로마군에 도입됐다. 길이는 2m 길이의 필룸보다 훨씬 짧은 약 1.1m, 창끝의 길이는 13㎝ 내외였고 무게 역시 1㎏이 되지 않았다. 필룸과 비슷하게 자루가 철로 됐거나 또는 끝이 점점 가늘어지는 철로 된 창끝을 가졌다.

기원전 3∼2세기 동안 로마군은 베르툼을 효과적으로 활용했고 특히 베르툼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종결한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의 코끼리부대를 무찌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베르툼은 그 우수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의 전술 변화와 베르툼을 주력 무기로 사용했던 벨리테스들이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2세기 만에 자취를 감췄다.

여전히 로마군 병기고에는 많은 수의 베르툼이 전쟁물자로 비축돼 있었지만 그 역시 1세기 무렵 모두 대장간으로 보내져 필룸으로 개조됐다.두 번째 베르툼은 로마제국 말기인 서기 4∼5세기께 로마군단병들이 동유럽에서 사용한 소형 투척 무기로 현대 다트의 원형으로 본다.

사용 목적이나 용도는 초기 베르툼과 동일하고 이름도 그대로 계승됐지만 길이 30∼40㎝, 무게는 0.1∼0.2㎏로 외형이나 크기는 더욱 축소됐다. 동로마군단 병사들은 방패 뒤에 이 베르툼을 최대 5자루 정도 숨겨 두고 있다가 접근전이 벌어지면 일제히 투척해 적을 교란하고 일제히 돌격해 로마군의 장기인 백병전을 벌였다.

전략적 이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보병뿐만 아니라 기병부대에서도 베르툼을 사용할 정도로 유용한 무기로 인식됐다.비록 짧은 사용 기간으로 다른 무기에 비해 현존하는 기록이 많지 않지만 로마군이 베르툼을 중요한 무기로 인식하고 두 번이나 표준무기로 사용했다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