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역사속 신무기<47>소선 파타

구름위 2017. 1. 9.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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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신무기<47>소선 파타

인도 라지푸트족의 상징적 칼
2007. 12. 17   00:00 입력 | 2013. 01. 05   03:29 수정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인도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매우 특별한 매력을 지닌 땅이다.

수많은 정복자가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과 척박한 아프가니스탄 고원지대를 건너 인도를 침공했지만 결국 인도를 정복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도에 침입한 이민족 스스로 인도화(印度化)돼 인도 역사의 일부가 됐다. 아프리카와 서유럽을 제패한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고 로마화했던 전례나 남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포르투갈에 의해 잉카와 마야 문명이 완전히 사라진 것과는 상반되는 현상이다.

5세기께 중앙아시아에서 인도 북서부에 침입한 후 서부 및 중부 인도에 여러 왕조를 세우고 인도 땅에 정착해 버린 라지푸트족 역시 이러한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라지푸트족은 고유의 검 소선 파타(sosun patta·사진)를 들고 특유의 결집력과 막강한 무력을 바탕으로 8세기에서 12세기까지 라지푸트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전성기를 열었다.

산스크리트어로 ‘백합 꽃잎’을 뜻하는 소선 파타는 칼끝이 칼등이 아닌 칼날 방향으로 완만하게 굽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외날 검이다. 길이는 80∼100㎝, 무게는 1.2∼1.5㎏ 내외이며 찌르기보다 베기 용으로 내리칠 때 그 힘이 칼끝에 집중되도록 돼 있어 위력을 더욱 배가시킬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원전 10세기께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한 코피스나 기원전 6세기께 고대 로마에서 사용한 팔카타와 외형이나 사용 목적 등이 유사하나 길이와 무게가 두 배 이상 큰 것이 특징이다.라지푸트족의 영주국가(領主國家)들이 전성기를 누린 8세기께 처음 등장해 라지푸트족이 쇠퇴한 이후에도 19세기까지 인도의 대표적인 검으로 계속 사용됐다.

일부에서는 라지푸트족과 연관이 있는 구르카족의 단검 쿠크리나 콜라를 소선 파타의 변형 혹은 개량형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 및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되는 무기들과 유사해 그 기원에 대한 여러 가지 가설이 있으나 고고학적 근거가 부족해 그 어느 것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왕의 아들’을 뜻하는 라지푸트족에게 소선 파타는 검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 기사도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라지푸트족이 씨족 단위로 세운 영주국가에서 소선 파타는 충성을 다짐한 무사들에게 군주가 내리는 하사품이자 봉건사회와 비슷한 당시 사회에서 계급과 신분을 증명하는 징표로 사용됐다.

9세기에서 10세기까지 라지푸트족이 인도 역사상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소선 파타 역시 인도 전역으로 퍼졌다.한편 고대 인도의 표준어이기도 한 산스크리트어는 인도 아리아어 계통으로 기원전 5세기께 처음 사용된 이래 종교·철학·문학 용어로 현재도 지식계급 사이에서 계속 사용되고 있다. 원어로 산스크리트라고 불리며 완성된 언어, 순수한 언어를 의미한다.

역사속 신무기<48>커타나

영국 왕의 자비·관용 상징인 왕실 보검
2007. 12. 24   00:00 입력 | 2013. 01. 05   03:30 수정

국민들의 선거에 의해 제17대 대통령이 선출됐다. 2008년 2월 25일은 제17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리고 공식 임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행정권의 수반이 되는 최고 통치권자로서 향후 5년간 국가와 국민을 대표하고 국정 전반을 책임지는 국가원수다.
국가마다 차이가 있지만 새로운 국가원수의 취임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만큼 취임식 또한 역사적 전통과 의전절차에 따라 매우 엄숙하고 경건하게 진행된다. 현대 국가원수의 취임식은 많이 간소화되기는 했지만 그 뿌리는 과거 절대왕권이 건재하던 시대의 황제 또는 국왕의 즉위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유럽에서는 황제 또는 국왕의 즉위식을 대관식이라 부르는데 오랜 역사적 전통과 장엄한 예식이 특징인 영국 왕의 대관식이 가장 유명하다.
특히 왕에서 왕으로 1000년 이상 전해져 온 왕실의 보검 커타나(curtana·사진)가 새로운 국왕에게 전수되는 장면은 영국 왕실 대관식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커타나는 바이킹과 노르만인들이 사용한 바이킹 검의 일종으로 길이 약 1.2m, 무게 1.5㎏이며 재질은 강철과 황금의 합금으로 알려져 있다. 커타나의 가장 큰 특징은 칼날이 없고 칼끝이 부러져 없기 때문에 ‘자비의 검’(Sword of Mercy)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으며 ‘고해자 에드워드의 검’(Edward the Confessor's sword)이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커타나를 언제 전투에 사용했는지 또 언제 커타나가 부려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제작 시기나 검의 기원 등에 대해서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아 어느 것도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다만 1100년께 지어진 프랑스 최초의 서사시이자 최고·최대의 무훈시로 평가받는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가장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칼날이 없고 검신이 부러져 있어 무기로 사용할 수 없지만 국왕의 관용과 평화의 상징으로 13세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영국 왕과 왕비의 대관식에 사용돼 왔다. 그러나 커타나가 처음부터 영국 왕이 대관식에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기록에 의하면 커타나는 1236년 잉글랜드 왕 헨리 3세(1207∼1272)의 아내 앨리너 왕비의 대관식에 처음 사용됐다. 백년전쟁을 일으킨 에드워드 3세(1312∼1377) 때 왕실 보물로 인정됐으나 정작 커타나를 대관식에 사용한 최초의 영국 왕은 리처드 3세(1452∼1458)로 알려져 있다.
1640년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 청교도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은 이후 커타나는 혁명의 혼란 속에 왕가의 다른 보물들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명예혁명으로 영국이 다시 군주제로 돌아선 이후 영국 왕 찰스 2세(1630∼1685)는 헨리 8세(1491∼1547)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커타나를 하사받은 그림을 바탕으로 커타나의 복원을 지시했다. 1953년 거행된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때 사용된 커타나가 바로 이때 복원된 것이며 이제는 영국 왕실의 상징이 아닌 영국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국보로 인식되고 있다.
역사상 수많은 무기가 등장하고 사라졌지만 커타나는 단순한 검이 아닌 영국 왕의 자비·관용의 상징으로 살아 있는 역사이자 전설이다. 칼날도 없고 칼끝이 부러져 무용지물인 커타나가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