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역사속 신무기<49>샤를마뉴의 중장기병

구름위 2017. 1. 9. 20:51
728x90

역사속 신무기<49>샤를마뉴의 중장기병

유럽 제패 프랑크 군대의 핵심… 대부분 귀족
2007. 12. 31   00:00 입력 | 2013. 01. 05   03:30 수정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유럽을 제패한 프랑크 제국의 샤를마뉴(742∼814) 대제는 역사적으로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독특한 인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무력으로 오늘날 거의 모든 서유럽을 포함하는 대제국의 황제가 됐다.

프랑스 최초의 서사시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에서 주인공 롤랑의 실제 모델일 뿐만 아니라 롤랑은 샤를마뉴 대제 이름이다.그는 교황 레오3세와의 정치적 야합을 통해 서로마제국의 공식 계승자가 됐을 뿐만 아니라 교황과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로서 이교도와의 성전을 표방한 합법적인 정복전쟁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유산은 중세 봉건사회가 탄생하는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비록 적은 수에도 불구하고 샤를마뉴의 중장기병(사진)은 프랑크 군대의 핵심이었다. 대부분 귀족으로 구성돼 있어 높은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었고 쇠사슬 갑옷과 단단한 투구·방패·창·칼·도끼 등으로 완전 무장한 최고 정예들이었다. 문명의 퇴보와 함께 전쟁기술 역시 함께 퇴보한 상황에서 샤를마뉴의 중장기병은 중세 유럽의 전장을 말 그대로 휩쓸고 다녔다.

전반적으로 보병 역시 수가 감소했지만 전반적인 질은 오히려 향상됐고 이들은 궁수로 활약했다. 보병 궁수가 적을 도발하거나 견제하는 동안 중장기병은 전장을 우회하거나 가로질러 적을 공격했고 이러한 기병 돌격은 종종 기대 이상의 전과를 거뒀다. 특히 샤를마뉴의 중장기병은 아바르족의 기마 궁수나 롬바르디족 창병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해 대제국 건설의 기틀을 마련했다.

물론 아무리 뛰어난 전력을 발휘했다고 해도 샤를마뉴의 중장기병을 당대 최강이라 할 수 있는 비잔틴 제국의 중장기병 카타프락토스와 비교할 수는 없다. 특히 당시 프랑크 왕국의 국력으로는 비잔틴 제국과 같은 수준의 중장기병을 유지할 수 없었다. 중장기병의 가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던 샤를마뉴는 직접 기병을 육성하는 대신 봉건제도를 통해 골치 아픈 문제를 귀족들에게 모두 일임하고 이를 최대한 활용했다.

봉건제도의 핵심은 왕이 영주들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그 대신 영주들은 왕을 위해 군사력을 제공하는 의무를 지도록 하는 것이다. 영주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장원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 수의 기사를 거느렸으며 왕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보냈다. 결국 샤를마뉴는 따로 돈을 들이지 않으면서 귀족 출신 기사로 구성된 상비군을 보유할 수 있었다.

샤를마뉴 사후 프랑크 제국의 분열과 함께 프랑크 중장기병의 황금시대도 막을 내렸다. 그러나 날이 넓은 칼·창, 그리고 방패로 무장한 프랑크 기병의 가공할 만한 공격, 그리고 다양한 특징은 중세 기사에 그대로 계승됐고 중세 봉건사회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역사속 신무기<50>석궁

4~18세기 유럽의 대표적 사출무기
2008. 01. 07   00:00 입력 | 2013. 01. 05   03:31 수정

신사협정 또는 신사협약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 서로 상대편을 믿고 맺는 사적인 비밀협정 또는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아니하는 비공식적인 국제협정을 뜻한다.

1949년 체결된 제네바협약이 가장 유명하지만 990년 중세 교회가 남부 프랑스에서 시행한 신의 휴전 협정(Truce of God)이야말로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신사협정으로 불린다.

재미있는 것은 신의 휴전협정에 석궁(cross bow·사진)의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된 것인데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살상무기 사용 금지 규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석궁은 가장 종교적인 무기로 손꼽히기도 한다. 그 이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십자가(cross)와 활(bow)을 결합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상징성뿐만 아니라 실제 전장에서의 살상률도 매우 높았다.

서양 무기 발달사에서 석궁은 4세기에서 18세기까지 유럽에서 사용된 대표적 사출무기이자 고대 그리스 시대에 사용된 노포(ballista)의 축소 개량형으로 본다. 등장 초기에는 빈약한 사거리 때문에, 성능이 개량된 이후에는 화약무기 등장으로 주력무기로 사용되지는 못했지만 11세기 초에서 15세기 말까지 중세 유럽에서 폭넓게 사용됐다.

1066년 정복왕 윌리엄 대공의 군대가 사용한 것을 현대 석궁의 원형으로 보며 십자군 전쟁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인 사자왕 리처드 1세는 석궁을 보급하고 체계적으로 전쟁에 사용했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1199년 4월 프랑스 리모주에서 벌어진 공성전 도중 석궁을 맞고 전사했다. 본격적인 석궁부대는 12세기경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1346년 크레시 전투에 투입된 제노바인 용병들은 뛰어난 석궁 사격 솜씨로 이름을 날렸다.

석궁은 나무와 강철로 만들었고 화살을 장전하고 명중률을 보장하는 홈(溝)과 활, 그리고 시위를 풀어주는 방아쇠 등으로 구성돼 있다. 석궁의 가장 큰 특징은 쏘기 전 미리 시위를 당겨 놓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한 조준과 발사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간단한 조작만으로도 60m에서 300m 거리 내의 표적에 화살을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었다.

11세기에 등장한 석궁은 무거웠고 조작 시간이 오래 걸렸으며 비를 맞으면 작동되지 않았다. 또 연사속도가 떨어지고 사정거리가 짧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간단한 교육만으로도 누구나 쉽게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은 이러한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강력한 화살을 쏘기 위해서는 강력한 시위가 필요했고 이 때문에 시위를 당기고 화살을 장전하기 위한 전용 기구를 필요로 했다.

전체 길이 60∼100㎝, 폭 50∼70㎝에 무게는 재질과 크기에 따라 6∼10㎏ 내외의 것이 주로 많이 사용됐다. 화살은 종류에 따라 쿼럴(quarrel)이나 볼트(bolt)라고 불렀고 사정거리 내에서는 거의 모든 갑옷을 관통할 수 있었다. 특히 공선전이 벌어졌을 때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화약무기의 발전으로 16세기 이후 석궁은 전장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