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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인천상륙작전 (1951년 2월 10일)

구름위 2017. 1. 7.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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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특공대원으로 탈환 ‘1차 작전’ 신화 되살리다

제2차 인천상륙작전 (1951년 2월 10일)
2016. 11. 10   17:21 입력 | 2016. 11. 10   17:25 수정


대부대 상륙처럼 위장해 작전 성공 …서울 재탈환 발판

 

 

 

 

 




1950년 9월의 인천상륙작전은 전세를 뒤바꾼 신의 한 수였습니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하고, 반격과 함께 승기를 잡는 계기가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천에서는 다음 해 2월 또 한 번의 상륙작전이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서울을 다시 내주고 북위 37도선인 평택-삼척선까지 밀렸던 그때입니다. 11일 해군의 날을 맞아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최영섭(88·해사 3기) 예비역 해군대령을 통해 그날을 재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그는 6·25전쟁 발발 당시 우리 해군의 최초 전투함이었던 백두산함(PC-701)의 갑판사관으로 대한해협전투, 장사상륙작전 등 주요 전투에서 맹렬히 활약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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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전투함으로 맹활약했던 백두산함(PC-701).

6·25전쟁 당시 전투함으로 맹활약했던 백두산함(PC-701).


 

 

 


중공군 참전으로 전쟁 악화

중공군의 참전은 전쟁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눈앞에 뒀던 통일의 꿈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또한 미 워싱턴 일각에서는 미군을 일본으로 철수하고 한국정부와 군경을 제주도로 후퇴시키자는 계획도 세워졌습니다. 그만큼 위기가 고조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열을 가다듬은 유엔군은 1951년 1월 25일을 기해 일제히 반격에 나섭니다. 2월 초 안양-양수리-지평리-횡성을 연결하는 선에 도달한 데 이어 9일에는 관악산을 점령하고 노량진-영등포로 이어지는 한강선까지 진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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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륙작전 중 노획한 전차. 중공군과 치열한 혈투를 벌이다 빼앗긴 영국군 전차로 알려졌다.  사진 제공=최영섭 예비역 대령

상륙작전 중 노획한 전차. 중공군과 치열한 혈투를 벌이다 빼앗긴 영국군 전차로 알려졌다. 사진 제공=최영섭 예비역 대령


 

 



특공대원 70명으로 상륙 감행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이런 상황에서 전개됐습니다.

처음 목표는 상륙작전이 아닌 월미도 포격이었습니다. 월미도를 포격하면 적이 전해 9월처럼 인천상륙작전을 하는 줄 알고 병력을 인천으로 뺄 것이고 그러면 유엔군의 부담이 한결 가벼워져 서울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이었습니다. 계획에 따라 2월 3일 한·미·영의 군함이 참가한 가운데 작전은 성공적으로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적 포대의 위치와 화력 규모를 파악한 군은 상륙작전을 결정하게 됩니다.

상륙작전은 2월 10일 오후 5시, 미국·영국 함정의 함포사격으로 개시됐습니다. 1시간 뒤 함정승조원으로 편성된 상륙특공대 70명은 302정과 2척의 발동선에 분승, 만석동 해안으로 상륙을 감행합니다. 상륙특공대를 지휘한 김종기 소령은 지난 인천상륙작전 당시 해병대 제2대대를 이끌었기에 이곳 지리는 손바닥 보듯이 익숙했습니다. 특공대원들은 마치 대부대가 상륙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각기 ‘대대 앞으로’ ‘중대 앞으로’ 등의 구령을 외치며 돌격했습니다. 오후 7시께에 덕적도에서 출발한 100여 명의 해병부대가 상륙했고 오후 9시께에는 목표했던 기상대 고지를 점령합니다. 이 과정 중 적 참호에 포대만 나온 상태로 설치된 전차를 발견합니다. 나중에 이 전차는 영국군의 전차로 적에게 포획됐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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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인천상륙작전 다음 날인 11일 인천 만석동 부두에 모인 주요 관계자들. 왼쪽부터 백두산함 함장 노명호 소령, 95기동부대사령관 스미스(해군소장) 제독, 통역관 최병해 대위, 상륙부대장 김종기 소령,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  사진 제공=최영섭 예비역 대령

제2차 인천상륙작전 다음 날인 11일 인천 만석동 부두에 모인 주요 관계자들. 왼쪽부터 백두산함 함장 노명호 소령, 95기동부대사령관 스미스(해군소장) 제독, 통역관 최병해 대위, 상륙부대장 김종기 소령,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 사진 제공=최영섭 예비역 대령


 

 



인천의 탈환, 작전상 지대한 가치

전쟁에서 인천이 가진 전략적 가치는 높았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2월 4일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에게 보낸 전문을 보면 그 사실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김포비행장과 인천항 탈환은 작전상 지대한 가치가 있다. 양자의 확보는 보급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것이다. 또한 귀군에 대한 항공지원을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중공군은 아군의 후방지역 상륙에 많은 관심을 두고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95기동부대사령관 스미스 제독은 상륙기동부대와 고속항모의 지원을 받아 1월 30일에는 고성에서 기만상륙작전을 시도했습니다. 2월 10일에도 인천에서 기만작전을 하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작전상 큰 의미가 있던 것은 분명합니다. 상륙작전 다음 날인 11일 스미스 제독이 인천으로 와서 작전 참가자들을 치하한 데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술적·군수지원 측면에서 큰 의미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여러 분야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전술적 측면입니다. 한국 해군은 소규모 상륙부대로서 작전을 수행해 인천시를 탈환하는 등 큰 전과를 거뒀습니다. 적이 아군의 대부대 상륙작전으로 오인하게끔 취한 전술적 조치가 성공적으로 작용했습니다. 한국 해군과 유엔 해군은 맹렬한 함포사격과 상륙작전을 수행, 적에게 1950년 9월에 감행됐던 인천상륙작전의 공포를 되살아나게 했습니다. 또한 당시 부천 소사 지역까지 진출한 유엔 지상군과 인천 상륙부대 사이에 포위될 것을 두려워해 신속히 후퇴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군수지원 측면에서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습니다. 인천 철수 후 1개월 동안 부산 한곳에서 지상군의 군수지원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던 까닭입니다.



유엔군 반격작전에 교두보 마련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한국 해군·해병대 특공대에 의한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유엔군의 반격작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나아가 이는 서울재탈환, 38도선 진격의 발판이 됐습니다. 앞서 말한 미군의 일본 철수와 한국정부 및 군경의 제주도 이전 계획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에서 또 하나의 신화 창조입니다.


TIP


제2차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2권의 책을 권합니다. 하나는 2012년 해군본부에서 펴낸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입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 해군의 PT편대 기습작전, 연안 경비작전 등이 소상하게 기록됐으며 주요 작전별 경과 및 결과를 다양한 요도와 통계자료, 사진 등을 통해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최영섭 대령이 지은 ‘6·25 바다의 전우들’(세창미디어 펴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