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의 전투 - 663년
백강(白江)은 현재 한국 전라도의 금강(錦江)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본에서는 이를 하쿠스키노에(白村江)이라
표기하여 백촌강 전투라고도 한다. 백강 전투는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출정한 왜의 야마토 조정군이 나당 연합군과
백강 부근에서 서로 맞서 싸운 전투를 의미한다.
6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던 당시의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정립되어 있었는데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누르고 한반도의 강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왜국은 이전부터 백제 및 가야와 친교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신라가 562년경에
가야를 멸망시키자 왜국은 신라의 대두가 압박으로 다가왔다.
한편 581년에 중국대륙을 통일한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길에 올랐다가 실패하여 국력이 약화되어 618년에 양제가 살해당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이에 새로 건국한 당(唐)나라는 628년에 중국 전역을 통일한 후 두번째 황제인 태종 및 고종의 시절에 역시
고구려를 세 차례에 걸쳐 침략했지만 실패했다.
신라는 627년에 백제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 때 당나라는 내정문제로 혼란스러웠지만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고구려 및 백제가 당나라에 적대적이었기에 신라와 친교를 맺기로 하였는데 이에 선덕여왕 재임당시의
실력자이던 김춘추가 적극적으로 당나라 정책을 받아들였고 654년에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자 양국관계는 더욱 친밀해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왜국에도 전해져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이 한창이던 왜국 내부에서도 경계심이 높아졌다.
이에 651년에 좌대신(左大臣)이던 고세노 도쿠타(巨勢德陀子)는 왜국의 실질적인 수장이던 나카노 오오에 황자(中大兄皇子)
에게 신라를 토벌하자고 진언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는 서로 연합하여 군대를 일으킨 후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백제의 영토에 군현을 두고
지배하에 넣었지만 곧 백제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백제의 옛 신하이던 복신(福信)과 흑치상지(黑齒常之)를
중심으로 한 백제부흥군은 왜국에 체류중이던 풍(豊)을 풍장왕(豊璋王)으로 옹립한 후 왜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것은 전후 일시적이나마 왜국이 백제에 영향력을 증대시킨 것을 의미했지만 백제부흥군에게 있어선 오랜 동맹관계이던
왜국의 도움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왜국을 통치하던 나카노 오오에 황자는 이를 승인하여 661년에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은
큐슈로 출병했지만 도중에 급사하고 말았다. (암살이라는 말도 있다)
나카노 오오에 황자는 천황의 자리에 즉위하지 않고 백제부흥군을 돕기위한 정책에 적극적으로 나서 세 부대로 왜군을 나눈 후
한반도 남부로 향하게 했다. 이에 아즈미노 히라후(安曇比羅夫)가 제 1진으로 170척의 선단에 1만의 군사를 이끌고 풍장왕을
태운 채 661년 5월에 출진했다.
그리고 662년에 2만 7천명의 제 2진, 다시 1만 명의 제 3진이 한반도로 향했는데 왜군의 구상은 먼저 풍장왕을 귀국시켜
백제부흥군의 강화를 도모한 후 신라를 격파한 뒤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려 당군과 결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663년에 풍장왕은
복신과 대립하면서 그를 죽여버렸지만 왜군의 지원을 받은 백제부흥군은 백제 남부로 침투해 신라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백제가 다시 재기의 모습을 보이자 당나라는 유인궤(劉仁軌)가 이끄는 수군 7천명을 증원군으로 파견했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수륙양동작전으로 진격하여 백제부흥군과 왜군을 한번에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육상부대는 당나라 장수인 손인수(孫仁師)와
유인원(劉仁原) 및 신라의 국왕이던 김법민(문무왕)이 지휘했다.
유인궤, 두상(杜爽) 및 전 백제태자 부여융(扶余隆)이 이끄는 170척의 수군은 웅진강을 내려가 육상부대와 만난 후 왜군과 격돌했다.
왜군은 백제부흥군이 복신의 살해사건으로 인하여 백강에 도착하기로 한 시일이 10일 늦어지는 바람에 외로이 나당연합군과 백강에서
해전을 벌여 네 차례의 공격을 실시했지만 나당연합군의 화계와 조수간만의 차로 인하여 많은 병사와 군선을 잃고 663년에 대패했다.
동시에 육지에서도 나당연합군은 왜군 및 백제부흥군을 격파하여 백제부흥세력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백강에 집결한
1,000척 남짓했던 왜군 선단도 400척이 불타버렸다. 큐슈의 귀족이던 치쿠시노키미 사야마(筑紫君薩夜麻)도 당군에게 잡혀
포로로 당나라에 끌려갔다가 8년만에 돌아오기도 했다.
백강에서 대패한 왜의 수군은 패잔병과 망명 백제유민들을 태운 후 당군의 추격을 물리치며 귀국했다. 당시 당나라는 가장
세력이 강성할 때였는데 이 때 정복한 이민족들을 군에 편입했기에 백강 전투에 참전했던 당나라 수군 대부분은 여진족이었다고
한다.
텐치천황(天智天皇 - 나카노 오오에 황자)은 백강의 패전소식을 듣고 나당연합군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큐슈 북부의
다자이후(太宰府)에 미즈키 성(水城)을 쌓고 세토나이카이 일대에 산성을 구축하고 큐슈 북부연안엔 사키모리(防人)라는
방어군을 배치했다. 667년에 텐치천황은 도읍을 난바(難波)에서 내륙인 오우미노미야(近江京)로 옮기고 방위망을 구성했다.
한편 한반도에선 당과 신라가 666년 경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668년에 멸망시켰다. 백강 전투에서 나라를 잃은 풍장왕은
고구려에 망명했지만 고구려가 멸망하자 포로가 된 후 유폐되는 신세를 맞이했다. 전후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를 점령한 후
신라에 대해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하자 이에 신라는 고구려의 옛 신하들을 지원해 669년에 반당(反唐) 봉기를 부추겼다.
이에 당나라가 토별을 위해 출병하자 신라도 670년에 옛 백제영토로 침공하여 당군을 몰아냈다. 몇 번의 전투 후 매소성 싸움에서
당군은 신라군에게 축출당하여 675년에 한반도에서 철수해 신라가 완전한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신라는 다시 당나라와
국교를 회복하여 친교관계로 지냈다.
한편 왜국에선 텐치천황이 당나라와의 관개개선을 위해 669년에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했다. 671년에 텐치천황이 급사하자
아들이던 오토모(大友)황자와 동생이던 오아마노(大海人) 황자가 황위를 둘러싸고 서로 대립했다. 그 결과, 672년에 왜국에선
최대의 내전인 진신(壬申)의 난이 일어났다. 여기서 승리한 오아마노 황자는 텐무천황(天武天皇)으로 즉위했다.
출처 : 일본서기, 구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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