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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분단의 비밀…"칭기즈칸의 부활을 막자!"

구름위 2016. 1. 2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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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몽골
고비 사막은 거대했다. 울란바토르에서 꼬박 24시간을 가야 내몽골의 수도 후허하어터(呼和浩特)에 달한다. 드문드문 쌍봉낙타가 보이고, 뜨문뜨문 게르도 있었지만, 마을이라 할 만한 곳은 딱히 드물었다.
한 나절이 지나서야 거대한 풍력 발전소를 만났고, 비닐봉지와 페트병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흔적이다. 외몽골의 국경 도시 자민우드에 도착한 것이다.
사막 한 복판에서 국경이 갈렸다. 간단한 출국 수속을 마치자 곧 오성기가 보였고 한문이 눈에 들었다. 중국의 국경 도시 얼롄하오터(二?浩特)였다. 불과 100여 미터를 사이에 두고 이번에는 입국 수속이 진행되었다. 번거로울 일은 없었다. 모든 절차가 기차 안에서 이루어졌다. 짐 검사도 눈 시늉이다.
의아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입국 심사를 마친 기차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더니 한 격납고 안으로 들어간다. 광궤의 차이로 기차 바퀴를 교환해야 했던 것이다. 몽골은 여전히 소련이 깔아준 철도를 사용하고 있다.
덕분에 역 밖으로 나가볼 수 있었다.

 

국경 도시의 풍경을 잠시나마 맛보았다. 중국임에도 여전히 키릴 문자 간판이 여럿이었다. 내 지갑에는 몽골 돈이 약간 남아 있었다. 구멍가게에 들려 사용할 수 있냐고 중국어로 물었더니, 주인아저씨는 몽골어로 대답한다. 눈치 상 되는 것 같다. 캔 맥주 둘을 샀다. 북경의 옌징 맥주도 아니고, 산동의 칭다오 맥주도 아니다. 흑룡강의 하얼빈 맥주이다. 역시나 이곳은 북방이었다. 그래도 잔돈이 남았다. 혹시 중국 돈으로 바꿀 수도 있어요? 그 분은 이번에도 몽골어로 대답하고 환전을 해주셨다. 말은 달라도 뜻은 통했다.

 

▲ 외몽골 국경 도시 자민우드 역. ⓒ이병한

 


역으로 돌아왔더니 기차의 생김새가 달라졌다. 내가 타고 왔던 몽골 기차 뒤로 중국 기차 다섯 칸이 붙었다. 몽-중 국제선에 중국 국내선을 합친 것이다. 국제선은 여전히 몽골 안내원들이, 국내선에는 중국 안내원들이 자리했다. '일차양어(一車兩語)'의 풍경이었다. 레일을 바꿔 단 기차는 쌩쌩해졌다. 한결 속도가 붙었다. 과연 철도 대국, 중국이었다.
내몽골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리 간판들이었다. 몽골의 옛 문자들이 고스란히 쓰이고 있다. 몽골 문자와 한자가 병용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시내버스 안내는 몽골어가 먼저이고, 중국어가 그 다음이었다. 키릴 문자가 전면화 된 외몽골과는 딴 판인 것이다.
외몽골에서 키릴 문자 전용 정책이 도입된 것은 1941년이다. 몽골 민족주의를 억압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민주화'와 함께 몽골 문자 복원을 선언했지만, 20년이 되도록 거의 실현되지 못했다. 근 두 세대 만에 전통 문자를 완전히 소실한 것이다.
내몽골서도 문화 대혁명 시절에는 몽골어 교육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개혁 개방과 함께 초등학교부터 다시 보급되었다. 몽골어 전용의 컴퓨터 자판도 만들었다. 지금은 모든 공공장소에서 몽골어와 한자가 함께 표기된다. 이중 언어 생활, '일지양어(一地兩語)'의 실천이다. 한마디로 제국의 유산이다. 소련/(외)몽골과 중국/내몽골의 운명을 가른 기저라고 하겠다.

제국의 유산

 

▲ 몽-중 국제 열차. ⓒ이병한

 

중화인민공화국은 몽골의 독립(과 대만의 미수복)을 제외하면 대청제국의 영토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현재 중국 땅의 절반이 18세기 만주족이 정복한 것이다. 그만큼이나 내/외몽골의 운명에도 대청제국이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내몽골은 대청제국 초기에 병합되었다.

 

만주족은 고비 이남의 내몽골과 연합하여 중원을 장악한 뒤, 고비 이북으로 진격했다.

 

외몽골(당시 할하 몽골)까지 정복을 완수한 이가 강희제이다. 즉, 고비 사막을 경계로 내/외몽골은 약 반세기의 차이를 두고 대청제국에 따로 편입된 것이다. 20세기 내/외몽골이 분화하는 먼 기원이었다.
대청제국에서 변경 통치를 담당한 기관이 이번원(理藩院)이다.

 

한족 관료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었던 배타적 통치 기구였다.

 

이곳에서 몽골족에 행한 정책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몽골족과 한족의 교류를 차단하는 것이다. 역사적 기억의 산물이었다. 몽골은 한족(송나라)과 연합하여 여진족(금나라)을 멸했던 바 있다. 그 여진족의 후예가 바로 만주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몽골족과 한족의 결혼도 금지했고, 몽골에서의 한문 교육도 배제했다. 그래서 대청제국 내내 몽골족과 한족은 서먹하고 소원했다. 한 지붕, 딴 가족이었다.
내/외몽골 간 접촉도 방지했다. 대청제국의 일원으로 소속감을 갖되, 몽골족 전체를 아우르는 정체성을 배양하지는 못하도록 했다. 몽골에서의 활불(活佛)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칭기즈칸의 핏줄에서 활불이 등장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다. 오로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만 인정함으로써 몽골에서 정치와 종교를 통합한 리더십이 출현하는 것을 봉쇄한 것이다. 몽골족의 티베트 방문까지 제한시켰을 정도이다. 대신에 몽골 왕실과 귀족, 라마승들에게는 높은 지위를 보장하는 회유책을 구사했다.
대청제국은 분할 통치의 선구자였다. 중원은 군현제, 변방은 봉건제를 구사하여 대일통(大一統)을 달성했다. 몽골은 왕족과 라마승들이, 서장은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귀족들이, 신장은 이슬람 율법을 따르는 토착 관료들이 제 각기 중앙 정부의 승인을 받아서 개별적으로 통치했다.
매우 급진적인 형태의 '다문화주의'였고, 매우 조숙한 형태의 '허브 앤 스포크(Hub and Spokes)'였다. 하여 몽골족과 장족, 회족, 한족들은 각기 만주족과 주종(主從) 관계를 맺되, 상호 간의 교류는 거의 없었던 셈이다. 대청제국의 천하(天下)는 물리적 결합이었지 화학적 통합은 아니었던 것이다. '중화 민족'이라는 20세기의 용광로(Melting Pot) 모델과는 전혀 달랐다. 

 

▲ 후허하어터 라마 불교 사원. ⓒ이병한

 


제국에서 제국'들'로
제국의 유산은 20세기에도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제국에서 국민 국가로의 전환이라는 통상적 진술도 실상에 딱히 부합하지 않는다. 하나의 제국이 붕괴하자 여러 제국이 각축했다.
먼저 1911년 독립을 선언한 몽골부터 제국을 지향했다.

 

티베트 불교 서열 3위의 인물을 '복드칸(Bogd Khan)'으로 등극시켜 티베트와 연합하는 라마 불교 제국을 모색했다.

 

'복드'는 몽골어로 신성하다는 뜻이다. 칭기즈칸의 핏줄을 이어받은 활불을 재차 정치적 지도자로 삼은 것이다.
외몽골은 이 점을 십분 활용하여 내몽골과의 통합도 도모했다. '근대화=중국화'를 추구하는 신해혁명에 내몽골 지배층 또한 반발이 거세었기 때문이다. 몽골족의 입장에서 신해혁명은 한족이 만주족을 전복한 종족 혁명에 다름 아니었다. 황제를 대체한 총통이라는 제도 또한 낯설기만 했다. 종교적 신성함이 없는 세속적 지도자에게는 좀체 권위를 느낄 수 없던 것이다. 전통과 언어와 종교 등 모든 방면에서 상이한 중화민국을 사절했던 것이다.
공화파 혁명가들은 변방의 귀족과 종교 지도자들을 혐오했다. '멍청한 몽골인(愚蒙)'이 시세를 전혀 따르지 못하는 구세력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을 포용한 것은 역설적으로 '반동파'로 간주되었던 위안스카이였다. 그는 라마 불교 세력을 중시했다. 몽골제국을 복원하자며 내몽골을 유혹하는 복드칸에 맞서, 위안스카이는 대청제국이 보장했던 내몽골의 귀족과 승려들의 권리를 계승하고, 더 높은 직위와 더 높은 급여를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1912년, 21살짜리 내몽골 라마를 깍듯하게 예우하며 광명대국사(光明大國師)라는 직위까지 부여했다. 대청제국 시절보다 신분을 상승시켜 준 것이다. 그의 부모와 형제, 스승도 작위를 수여했다. 공화국 안에 제국을 품고자 했던 것이다. 아니 위안스카이는 서둘러 공화정을 거두고, 제정으로 복벽할 것을 도모했다
위안스카이의 실각으로 중화민국은 복원되었으되, '제국의 근대화'는 지속되었다. 라마들에 대한 대접은 더욱 후해졌다. 봉급을 더욱 높여주고 경호원까지 제공했다.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의 등장은 중화민국에 도리어 기회였다. 공산 국가의 불교 탄압이 본격화되면서 불교 지도자들이 베이징으로 대거 피신한 것이다. 그들은 종교를 거세하는 소련의 위성국이 되기보다는 중화민국의 품에 안기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그들이 베이징에서 조우한 이가 판첸 라마이다. 판첸 라마는 영국의 지원으로 독립을 추진하는 달라이 라마에 불만을 품고 티베트를 떠났다. 판첸 라마의 견해는 단호했다. 중화민국이야말로 대청제국을 계승한 유일한 국가이기에, 외몽골도 티베트도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몽골의 소련, 티베트의 영국 모두 라마 불교에는 무지한 외세였을 따름이다. 즉, 대청제국이 달라이 라마를 모셨듯, 중화민국은 판첸 라마를 모시기로 했다. 1931년 판첸 라마는 호국선화광휘대사(護國宣化廣輝大師)가 되었다. '왕족을 존중하고, 활불을 공경하라(尊重王公, 恭敬活佛)'는 선전 구호가 널리 확산되었다.
중화민국이 판첸 라마에 정성이었던 것은 대일본제국과의 경쟁이 크게 작용했다. 일본도 판첸 라마에 무척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아시아를 위한 아시아'의 구호에 맞추어 판첸 라마를 적극 활용코자 했다. 나가사키에서 열린 범아시아 대회에 초청하고, 선양에서 열린 반소련 대회에도 초빙했다. 만주국 수립 이후에는 몽골로 진출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불교를 더욱 드높였다. 한편으로는 서구와 동구에 저항하며 동아의 문명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대일본제국에 도전하는 몽골 민족주의를 견제하기 위하여, 초국가적인 성격을 담지한 라마불교를 적극 활용했던 것이다.
대일본제국의 공세에 맞서 중화민국 또한 '범아시아주의'를 설파했다. 몽골, 티베트는 물론 인도, 버마(미얀마), 태국(타이)까지 불교를 통해 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활불과 승려들을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초청하여 성대한 불교행사를 치르고, 쑨원의 무덤도 함께 참배했다.
답례로 승려들은 난징, 상하이, 항주(항저우)를 순례하며 불법을 설파하고 중국의 통일을 강조했다. 그들은 몽골과 티베트, 만주는 중국임을 선포하며, 소련과 영국, 일본은 즉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마 불교(북방)와 삼민주의(중원)의 결합을 모색한 것이다.

 

즉, 대일본제국의 만-몽 연합 국가 건설을 저지하려 들면 들수록 중화민국은 점점 복합 국가=제국에 방불해져갔다.

 

(외)몽골제국도, 대일본제국도 중화민국도 하나같이 대청제국을 흉내 내고 모방했던 것이다. 겉으로는 근대 국가를 지향했으되, 실질로는 제국의 정통성을 과시하며 경쟁했다.

 

▲ 내몽골 회족 거리. ⓒ이병한

 


제국의 근대화
과제는 하나였다.

 

누구 중화 세계의 태평천하를 복원할 것인가?

 

최종 승리는 중국공산당의 몫이었다.

 

따라서 이렇게 답할 수 있겠다. 중국공산당이야말로 '제국의 근대화'에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무엇으로? '대장정'이다. 대장정은 제국을 복원하고 갱신하는 기나긴 행군이었다. 근거지부터 서북 지역의 연안이었다. 변방에서 출발했기에 소수민족의 자치 및 자결 의지를 결집할 수 있었다. 1938년 발표한 마오쩌둥의 '신단계론(論新階段)'이 대표적 문헌이다. '소수 민족의 자치를 도와야 비로소 각 소수 민족이 연합하여 항일의 목적에 이를 수 있다. 소수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민족 간 평등한 연합도 이루어질 수 없다.'
얼핏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한 근대적 언어 같지만, 실상은 자치와 연합의 상호 진화를 꾀하는 제국을 계승한 것이었다. 항일을 위한 연합, 연합을 통한 항일이라는 마오쩌둥의 모순론과 실천론 또한 과거 몽골족이나 만주족이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다민족 연합 통일 제국을 건설해갔던 과정과 일맥이 상통했다.
1947년 소수 민족 자치구를 가장 먼저 선보인 곳이 내몽골이다. 내몽골은 공산당에는 열렸으되, 국민당에는 닫힌 공간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국공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즉, 중국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해가는 과정은 만주족의 대청제국 건국 과정과 놀라우리만치 흡사했다.
만주에서 몽골로, 변경에서 중원으로. 과연 수도의 처소 또한 난징(南京)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겼다. 난징은 명제국과 중화민국의 수도였다. 베이징은 대원제국과 대청제국의 수도였다. 중화민국이 한, 송, 명을 잇는 중화제국이었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은 당, 원, 청을 잇는 유라시아제국에 가까웠다.
제국의 근대화로 중국의 내외 정책도 변경되었다. 이번원에서 관리했던 지역은 자치구가 되었다. 조공국과 호시(互市)국(유럽과 일본 등 중화 세계 밖에서 무역만 하던 나라들)은 독립국이 되었다. 소수 민족에게는 자치권을 부여했고, 주변 민족에게는 자결권을 인정했다. 1955년 반둥 회의에서 공식화된 '평화 공존 5원칙'이 상징적이다. 암묵적이었던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근대적인 조약의 형태로 명문화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국가 간 체제를 중화 세계의 내부로 수용하여 신형 대-소국 관계를 확립했다. 왕년의 상국(上國)과 하국(下國)은 더 이상 없다. 소수 민족과 주변 민족과 대동단결하여 항일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제국의 근대화'를 완수한 것이다. 그리고 그 동력을 발판으로 미국과 소련에 동시에 저항하는 제3세계의 탈냉전 운동을 선도했다.
반면 항일에서 항미/항소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이 집합적 역사 운동으로부터 이탈했거나 소외되었던 국가들은 하나 같이 '속국'으로 전락했다. 몽골은 독립하자마자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일본과 류큐(오키나와), 대만(타이완),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위성국(Satellite State)과 동맹국(Client State)은 하나같이 '속국의 근대화'를 경험했다. 북조선이나 베트남과는 달리 지금껏 주권 국가에 이르지 못했다.
동아시아 대분단 체제의 심연을 가르는 분열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제국의 근대화'와 '속국의 근대화'로 말미암은 상이한 국제 질서가 첨예하게 길항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각기 '냉전'을 명분으로 근대화된 속국들을 만들어갔다.
소련의 해체가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독립 국가들의 대거 등장으로 귀결되었음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그 '탈냉전'이 한쪽의 일방적인 붕괴로 도래함으로써 다른 한쪽은 여전히 속국을 해소하지 못한 병폐를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근대 국가에 미달한 나라들이 도열하고 있는 것이다. 목하 동중국해와 남중국해가 요동치고 있는 근저라고 하겠다.
'제국의 근대화'와 '속국의 근대화'가 빚어내는 '신냉전'의 양상은 작금의 동북아가 처음은 아니다. 1980년대 동남아에서 이미 구현되었다. 지난 4월 30일은 베트남 통일 40주년이었다. 사이공의 함락으로 '도미노 이론'은 현실이 되었다. 남베트남도, 캄보디아도, 라오스도 순식간에 공산화되었다.
1975년 인도차이나는 온통 붉었다. 몽골이 아시아 최초의 공산 국가라면, 라오스는 세계에서 가장 늦게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이다. 올 12월이면 건국 40주년을 맞는다. 동아시아 대분단 체제의 기저를 한층 세심히 살펴보기 위해서 '붉은 라오스'가 탄생한 저간의 사정도 복기해볼 필요가 있겠다. 다시 남하한다.

 

 

 

 

 

칭기즈칸의 경고 "성을 쌓는 자 망한다!"

 

[유라시아 견문] 몽골 : 유라시아의 축도

이병한 역사학자 2015.06.02 10:36:29

 

 

신정(新政) : 백년의 급진
모든 비극의 출발에 '새 정치'가 있었다. 대청제국이 '신정(新政)'을 단행함으로써, 몽골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중국이 동방형 제국이기를 멈추고, 서구형 국민 국가가 되고자 한 것이다. 몽골로서는 배반이었다. 대청제국은 만몽연합에서 출발했다. 만주족은 몽골족과 협동함으로써 한족을 누르고 중원을 차지할 수 있었다. 몽골은 그 대가로 자치와 자주를 누렸다.
만주족은 잠재적 위협인 몽골족을 관리하기 위하여 '분리 통치'를 행한 것이지만, 몽골은 덕분에 '중국화'와 '한족화'를 면할 수 있었다.

 

라마불교를 신봉하고 몽골어를 사용하면서 근 300년을 지낸 것이다. 즉, 대청제국은 하나의 하늘 아래 두 개의 세계를 품고 있었다. 동남부는 농경 문명과 유교 세계였으며, 서북부는 유목 문명과 불교/이슬람 세계였다. 대청제국의 황제들은 한족들에게는 천자였으되, 몽골인들에게는 대칸이고 법왕이었다.
20세기의 '새 정치'란 바로 그 복합 국가를 철폐하는 것이었다. 신정과 함께 '근대화=중국화'가 본격화되었다. 유교 교육이 강요되었고, 한문 쓰기를 강제했다. 한족과의 통혼이 장려되었고, 유목을 접고 농사를 지으라고 했다. 몽골은 '변법(變法)'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그들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었다. 반(反)중국 운동에 승려와 사원이 앞장섰다. 대청제국에서 철수하기로 뜻을 모았다. 천하에서 이탈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1911년 독립을 선언했다. 신해 혁명을 촉발한 무창 봉기보다도 앞서 일어났다. 20세기 아시아 최초의 독립 혁명이 몽골의 푸른 초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독립을 추구했으되, 자강에는 이르지 못했다. 자존과 자부는 있었으되, 자력갱생에는 못 미쳤다. 천하(天下)에서 벗어나자 중국은 외국(外國)이 되었다. 압도적인 이웃나라와 '평등'해져야했다. 그래서 남의 힘을 빌어야 하는 역설이 일어났다. '세력 균형'의 국제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정신적으로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에 의존했다. 라마교로 연대하는 불교 연방 국가를 모색했다. 물질적으로는 러시아 제국에 기울었다. 러시아의 지원으로 신정(神政) 국가를 건설할 것을 도모했다. 1915년 맺어진 중국-몽골-러시아 간의 캬흐타 조약은 이행기의 흔적이었다. 몽골은 러시아의 보호 아래 독립을 인정받았으되, 중국 또한 '종주권'을 유지한다고 결착이 났다.
'자주적인 속국', 중화 세계의 조공국과 유사한 위치에 그쳤던 것이다. 몽골로서는 충분치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러시아에 안달했다. 그럼으로써 러시아 혁명의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적색 물결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이 몽골이었다. 초원은 점점 붉게 물들었다.
1920년 몽골의 불교 지도자 보그드 칸이 중화민국 총통에게 절하기를 거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청제국에 이어 중화민국에서 벗어나는 제2차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근대적인 정당도 등장했다. 몽골인민당이 창설되었다. 민족 혁명가 수흐바타르도 등장했다. 그는 보그드 칸의 인장을 들고 러시아를 찾았다. 그를 접견한 이는 러시아 제국의 차르가 아니라 소련의 혁명가 레닌이었다. 레닌은 종교 국가를 부정했다. 볼셰비즘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결국 중화민국에서 떨어져나가기 위해서 공산주의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흐바타르가 소련의 적군과 귀환한 것은 1921년이었다. '몽골공화국'이 출범했다. 1924년에는 '몽골인민공화국'으로 개명했다. 세계 두 번째, 아시아 첫 번째 공산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위성 국가였다. 사실상 소련의 속국이었다. '근대화된 속국'이었다. '속국의 근대화'였다. 1945년 이후 동유럽에 도열했던 위성 국가(satellite state)들의 원조였다.
1924년 이래 소련판 '신정'이 단행되었다. 수도 이름도 바뀌었다. '붉은 영웅'이라는 뜻의 울란바토르(Улаанбаатар)가 되었다. 소련이 보기에 몽골은 낙후한 봉건 국가였다. 자본주의를 건너뛰고 공산주의로 곧장 도약할 것을 강권했다. 대약진이었다. 농업화와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말을 타던 유목민들이 집단 농장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어갔다. 생래적으로 '모던 보이', '모던 걸'이 될 수 없었던 이들은 '봉건의 유산', '계급의 적'으로 지탄받았다. 소련의 근대화 정책에 반대하는 몽골인민당 간부들은 숙청을 면치 못했다. 독립 영웅 수흐바타르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련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다가 의문사로 제거되었다.
수흐바타르를 대체한 인물이 초이발산이었다. 소련 여성을 부인으로 둔 '몽골의 스탈린'이었다. 1952년 사망까지 장기 집권하며 몽골판 대숙청을 자행했다. 특히 라마 불교에 대한 탄압이 극성을 이루었다. 9할 이상의 불교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처형했다.
만주국 건국의 파장도 영향을 끼쳤다. 만주국은 은근히 중화 제국을 흉내 냈다.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樂土)를 내세우며 동방의 이상 국가를 표방했다. 만주족의 마지막 황제, 푸이까지 모셔갔다. 몽골인들로서는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판 '신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로 만주국에 솔깃했던 것이다. 일본은 노련하고 노회했다. 만주국의 매력 공세로 몽골을 꾀어냈다. 중화민국서도 소비에트연방에서도 벗어나 만주국과 연합하는 '몽골국'이 되라고 유혹했다. 초이발산은 초조해졌다. 불교 세력들을 친일파로 몰아갔다. 만주국의 스파이라며 뿌리째 뽑으려 했다.
라마 불교 지도자들의 패착도 있었다. 전통적 지배층으로 지나치게 귀족적이었다. 대부분의 재산을 사원이 소유하며 민중 위에 군림했다. 어디까지나 소승(小乘)에 그쳤던 것이다. 소승의 민주화/민중화/근대화로써 대승(大乘)에는 이르지 못했다. 중생들을 구제하여 지상에 극락을 구현하는 보살로서의 책무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하더라도 전통의 전면적 말살은 비극이었다. 불교 탄압은 곧 몽골 전통 문화를 담지한 지식 계층 전체에 대한 억압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에서 유학한 과학적 유물론자들이 피바람을 일으키며 활개쳤다. '신청년'들의 객기와 광기가 '조드'가 되어 한바탕 초원을 휩쓸고 갔다.
결국 몽골은 새나라가 되었다. 새마을도 생겼다. 사원과 게르 대신에 공장과 집단 농장이 들어섰다. 말과 양, 가축도 국가 소유가 되었다. 5개년 생산 계획에 따라 젖을 짜고 가죽을 벗겼다. 몽골 문자와 티베트 문자도 사라져갔다. 러시아어의 키릴 문자가 책을 채우고 거리를 점령했다. 신생아의 이름마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이 유행했다. 1963년 인구의 절반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었다. 1985년에는 65%까지 달했다. 삽시간에 유목 국가가 노동자 국가가 된 것이다. '백년의 급진'이었다.

 

▲ 몽골의 독립 영웅 수흐바타르와 레닌. ⓒ팟캐스트 역사책읽는집

 


민주화 : 몽골화와 세계화
그 체제가 오래갈 수는 없었다. 1986년 쇄신(шинэчлэл) 운동이 분출했다. 1990년 다당제가 도입되었다. 1992년에는 헌법도 개정되었다. 몽골인민공화국은 사라졌다. 몽골국이 되었다. '민주화'로의 체제 이행을 경험한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를 지속하고 있는 중국/북조선/베트남/라오스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붉은 몽골'은 확실히 동방보다는 동구에 가까웠다. 몽골인민공화국 시절 교역 통계를 보더라도 소련이 75%, 동유럽이 15%를 차지했다. 중국은 4%에 그쳤다. 물류와 문류 양면에서 몽골은 동구권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몽골판 '민주화'의 향로는 탈동구화이자 재동방화이기도 했다.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한 해가 바로 쇄신 운동이 일어난 1986년이었다. 소련군이 철수한 것도 다당제가 시작된 1990년이었다. 적성국가 한국과 수교한 것도 1990년이다. 소련의 원조가 끊어지면서 붕괴 상태에 이르렀던 경제도 동방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으로 만회할 수 있었다. 재차 동아시아의 일원이 된 것이다.
흔히 1990년대 이후 몽골의 변화를 '민주화'라고 갈음한다. 충분치 못한 진술이다. 세계를 '민주 대 독재'로만 가르는 외눈박이 시선으로는 적절한 술어를 찾을 수가 없다. 나는 갈수록 '민주화'라는 말조차 삐딱하게 보고 있다. 20세기 초기의 문명화, 중반의 근대화와 아울러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지배 이념은 아니었던가 의심을 품고 있다.
문명화는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논리였다. 근대화는 개발 독재의 명분이 되었다. 민주화 또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을 가리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발휘했다. 문명화-근대화-민주화 간에는 묘한 연속성도 있다. 근대화가 탈식민화를 왜곡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면, 민주화는 정부의 역할과 기능을 축소하고 무력화함으로써 발전 국가들이 축적해둔 국부를 강탈해가는 수단이 되었다. 하여 1980년대의 동아시아, 1990년대의 동유럽, 2000년대의 중앙아시아 및 중동을 아울러 '민주화'의 실질적 효과와 결과를 냉철하게 따져봐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여긴다. 유라시아의 곳곳을 견문하면서 민주화의 실상과 허상 또한 차근차근 살펴볼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몽골은 또 하나의 전범이었다. '쇼크 독트린'이 동유럽이나 동아시아보다 먼저 관철된 곳이다. '민주화' 이후 몽골에도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이 진출했다. 옛 공산국가에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질서'를 도입하는 전위 노릇을 한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몽골인민공화국 시절 축적해둔 몽골의 국부가 원체 변변치 않았다는 점이다. 종속 이론의 전형이라고 할 만큼 소련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민영화'와 '구조 조정'을 추진할 만한 자산이랄 게 마땅히 없었다. 덕분에 동아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이 '민주화'의 경로에서 경험했던 파국적 금융 위기, '세계화의 덫'에도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오히려 몽골에서의 '민주화'란 '서구화'보다는 '몽골화'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탈동구화와 더불어 몽골의 전통과 개성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칭기즈칸의 복권이 상징적이다. 시내 복판에 있는 수흐바타르 광장부터 칭기즈칸 광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붉은 몽골' 시절 몽골인들은 차마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사회주의 국제주의' 정신에 어긋나는 민족주의의 화신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하여 칭기즈칸의 귀환은 전통 복원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라마 불교도 다시 번창하기 시작했다. 지방에서는 토착적 무속 신앙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강철국가에 억눌렸던 민간사회의 저력이 재생하고 재활하고 있는 것이다.
유목민의 기질도 재차 발현되고 있다.

 

그들에게는 애당초 '고향'이라는 관념이 미미하다. 게르부터가 계절에 따른 이동식 주거 공간이다. 매년 10여 차례 거주지를 옮겨 다니며 사는 게 익숙한 사람들이다. 수도(首都)라는 발상조차도 희미했다. 현재의 울란바토르에 자리했던 이흐흐레(Ih Huree) 또한 대청제국 시절에는 스무 번도 넘게 장소를 이동했던 상징적 기호였을 따름이다. 몽골 세계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마저도 폐허처럼 남아있다. '성을 쌓는 자 망할 것이요,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 세계를 정복할 것이다'를 되뇌며 살았던 유목민다운 문화재였다.
역으로 말하면 몽골인들에게는 모든 곳이 내 집이고, 전 세계가 곧 고향이다.

 

과연 '민주화' 30년, 몽골 인구의 1할이 몽골 밖에서 살고 있다.

 

몽골의 안과 밖을 순회하며 노마디즘을 향유한다. 몽골인의 절반이 울란바토르에 이주해서 살고 있고, 그 울란바토르 시민의 절반은 외국 생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몽골화 및 전통화가 곧 세계화에 부합하는 것이다.
당장 나를 도와 몽골의 동서남북을 안내해 주었던 운전기사 에르덴도 부산에서 5년을 살다왔던 유목민의 후예였다. 난생 처음 본 해운대 바다를 추억으로 품고 있는 26세 청년이었다. 비단 한국뿐이 아니다. 당장 몽골 초원을 가로지르면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이요, 터키도 한 걸음이다. 게다가 몽골인들은 외국어도 쉽게 배우는 편이라고 한다. 타고난 천성이고 물려받은 기질이렷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다.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
울란바토르 시내에는 유독 항공권을 판매하는 여행사들의 간판이 많았다. AIR TRANS, AIR MARKET, AIR WAYS 등 다양했다. 왕년의 초원길을 대신하여 하늘길을 애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몽골의 밖으로 나간 젊은이들은 온라인 금융망을 통하여 몽골의 안과 접속한다. MONEY GRAM, WESTERN UNION 등 글로벌 송금 업체도 여럿이었다. 즉 몽골은 영토 국가에서 가교 국가(Transit Mongolia)로 이행하고 있었다. 유목 국가의 속성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시골 간이역 같은 칭기즈칸 공항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한창 제2 국제공항을 시공하고 있었다.

 

▲ 칭기즈칸 동상. ⓒ팟캐스트 역사책읽는집

 


유라시아의 축도
붉은 광장에서 '역사 동맹'을 맺은 시진핑과 푸틴의 공동 성명 가운데 주목에 값하는 내용이 하나 있다.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경제연합(EAEU)과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단일 사업으로 통합하겠다는 것이다. 냉전기 유라시아의 패권를 두고 다투었던 북방 제국과 중원 제국이 유라시아의 대통합에 거국적으로 합의한 것이다.
그간 미국은 EAEU를 '재소련화'라고 폄하해 왔다.

 

그러나 중국의 일대일로가 결합됨으로써 판세가 전혀 달라졌다. 중국은 EAEU 너머 EU 까지 내다보고 있다. 일대와 일로를 통하여 유라시아연합과 유럽연합까지 연결해 내겠다는 것이 중국의 야심이고 복심이다.
흥미로운 것은 유라시아의 이 거시적 통합의 마지막 열쇠를 몽골이 쥐고 있다는 점이다. 몽골은 여태 EAEU 가입을 미루고 있다. EAEU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베트남보다도 신중한 행보이다. 중국이 주도하고 있는 상하이협력기구(SCO)도 가입을 보류하고 있다. 러시아의 경제 울타리에도, 중국의 안보 우산에도 쉽사리 편승하지 않겠다는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양 대국 사이에서 지난 100년간 단련된 맷집이라고 하겠다.
1915년과 2015년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몽골의 종주권은 중국에 있으되, 실질적으로는 러시아의 보호국이라는 캬흐타 조약의 시대는 지나갔다. 유라시아의 대일통을 위해서라도 중국도 러시아도 300만 소국 몽골을 정중하게 모시고 깍듯하게 대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유라시아 대통합의 화룡점정도 몽골이 찍게 될 것이다. 21세기 유라시아의 향방을 가늠하는 척도이자 축도이다.
과연 유라시아는 몽골세계제국으로 말미암아 최초로 하나가 되었다. 동서남북에서 각개약진 하던 국가와 문명들이 하나의 제국 아래 수렴됨으로써 '세계사'가 탄생하였고, '세계 지도'가 편찬되었다. 즉 몽골이 보유하고 있는 최대의 자산은 땅 밑에 묻혀 있는 지하자원이 아니다. 역사의 지층에 새겨두었던 유라시아 제국의 유산이다.
유럽형 세계 체제(Inter-state system)가 작동했던 20세기에는 사방이 막혀 있는 '내륙 국가'로 신음했으되, 유라시아형 세계 체제(Trans-state system)를 복구해가는 21세기에는 동서남북을 맺고 잇는 '가교 국가'로 비상하는 것이다. 북방에서도 오래된 세계가 새롭게, 다시, 펼쳐진다.
몽골 견문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는다.

 

(외)몽골국 아래에는 내몽골 자치주가 있다. 몽골도 일종의 분단 국가이다. '두 개의 몽골'이 병존한다. 내/외몽골 견문에 나선 가장 큰 이유이다. 한반도의 분단을 동아시아로 확대투영하지도 않고, 작금의 G2 구도를 과거로 소급적용하지도 않으며, 동아시아 (대)분단 체제의 실상을 궁리하는데 북방의 분단 국가를 참조항으로 삼을 만 한 것이다.

 

내몽골로 향하는 기차가 울란바토르를 떠난 시간은 9시 10분이었다. 해가 지지 않은 북방의 밤은 여전히 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