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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의 역사

구름위 2014. 11. 4.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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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의 역사

하와이 제도의 발견
하와이는 옛날부터 태평양의 섬들 가운데서 폴리네시아의 독특한 민족색이 특히 강한 곳이었다. 지금은 개발이 진행되어 근대화되어 가고 있는 하와이지만, 사람들의 생활 배경에는 지금도 하와이만의 독특한 문화가 남아 있다. 1778년,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최초로 발견하여 샌드위치 섬이라고 이름 붙인 하와이 제도. 그후 약 100년에 걸친 왕조시대를 지나, 미합중국의 50번째 주가 되기까지의 하와이 역사를 더듬어 본다.

최초의 하와이인
동남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이 점차 남쪽과 동쪽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이들은 솔로몬과 피지, 그리고 마침내는 뉴질랜드를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이스터 섬, 북쪽으로는 하와이 제도를 연결하는 거대한 3각형의 폴리네시아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이 문화권 안에는 사모아, 통가, 타히티, 마르케사스 등의 제도들이 포함되며, 이들 섬들은 오래 전부터 서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이 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와이 비숍 박물관의 과학적 연구에 의하면, 하와이 제도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마르케사스 섬(타히티의 북동 지역)에서 쌍둥이 카누를 타
고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서기 750년경에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후 서기 1000년경에는 타히티와 소시에테 제도의 다른 부족들이 하와이로 이주해 와 인구가 늘어났다. 이들은 이미 살고 있던 부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대 하와이 사회를 형성하였다.

쿡 선장의 하와이 제도 발견
이러한 하와이 제도의 잠을 깨운 것이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다. 쿡 선장은 그가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북서항로를 찾기 위해 소시에테 섬의 북쪽에서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리졸루션(Resolution), 디스커버리(Discovery)라는 두 척의 영국배를 가지고 항해를 시작했다.
1778년 1월 18일, 그는 멀리서 오아후 섬을 발견했으나, 역풍이 부는 바람에 배가 서쪽으로 밀려가, 이틀 후인 1월 20일에 카우아이(Kauai) 섬의 와이메아(Waimea) 부근에 상륙하였다.
영국 해군의 샌드위치 공작 밑에서 복무했던 쿡 선장은 공작을 기리기 위해 그가 발견한 섬들에 대해 샌드위치 섬이라고 이름을 붙여 세계에 소개했다. 샌드위치라는 말은 공작이 샌드위치를 즐겨 먹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1850년대까지 하와이 제도는 샌드위치 섬이라고 불렸다.
선원들은 섬의 원주민들과 무역을 하기 시작하여 멜론, 호박, 양파와 같은 야채들이 섬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과정에서 임질과 매독 같은 무서운 전염병도 함께 전해져 하와이인들을 파괴시켜 갔다. 역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쿡 선장이 발견할 당시 하와이 제도는 인구가 30만 명 정도였는데, 80년 후에는 6만으로 줄었다고 한다.

쿡 선장의 죽음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고 있는 북서 항로를 찾아 항해를 계속하던 쿡 선장은 1778년 11월에 다시 샌드위치 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 달 동안 여러 섬들을 순항하다가 1779년 1월 16일에 하와이(Hawaii) 섬의 케알라케쿠아(Kealakekua) 만에 배를 정박시켰다. 그는 이곳에서 배를 수선하고,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은 후, 2월 4일에 북쪽으로 떠났다. 그가 떠나자, 그 동안 많은 식량을 빼앗겼고 두려움을 느꼈던 섬 원주민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3일 후, 쿡 선장의 배는 큰 폭풍우를 만나 앞돛대가 망가진 채 수리를 위해 다시 하와이 섬으로 되돌아왔다. 섬 주민들은 쿡 선장 일행을 더 이상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고, 선원들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디스커버리(Discovery) 호의 가장 큰 보트가 없어져 버린 어느 날 밤, 쿡 선장은 부하 선원들과 함께 마을의 추장을 붙잡아 사라진 보트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마을의 원주민들은 힘을 합쳐 추장을 구출해 내고, 그들은 더욱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러던 중에 다른 부족의 추장이 영국군의 대포 공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모여든 군중의 공격성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쿡 선장은 급히 철수를 지시하였으나, 충돌을 피하지 못하고 원주민의 단검에 찔려 죽었다. 그러한 혼란의 와중에 그의 배도 불타 버렸다.
하와이 섬의 원주민들은 싸움에서 숨진 많은 부족민들의 시신을 거두고 부상자들을 돌보았으며, 쿡 선장과 부하 네 명의 시신도 거두었다. 클라크 선장이 쿡 선장의 시신 일부를 케알라케쿠아의 만에 붙였으며, 나머지 부분은 싸움에 참가했던 다른 부족의 추장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른 영국의 선박들은 2월 22일, 케알라케쿠아 만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갔다.

100년의 하와이 왕조
-카메하메하 대왕의 하와이 통일
카메하메하(하와이어로 외로운 사람이라는 뜻, 재위 1795~1819년) 왕은 하와이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때에 있었던,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다. 그의 출생은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하늘이 크게 갈라지면서 천둥 번개와 함께 비바람이 몰아치다가 멎자, 서쪽 하늘에서 꼬리를 길게 단 유성이 떨어졌다. 그때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파에아라고 이름 붙여진 이 남자아이는 쑥쑥 자라 건강하고 힘도 세며, 무예에도 조예가 깊은 청년이 되었다고 한다.
쿡 선장이 발견할 당시, 하와이 제도는 각지에 사는 부족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군웅할거의 시대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컸던 것은
하와이 섬의 왕 칼라니오푸우(Kalaniopuu)였다.
카메하메
하는 이 왕의 조카로, 어린 시절부터 그의 궁전에서 자랐다. 젊은 날의 카메하메하는 1778년과 1779년에 왕과 함께 쿡 선장의 배를 견학하였다. 카메하메하는 거기에서 서양 문명을 접하고, 현대적인 총포의 위력 앞에서 과학적인 지식을 배웠다. 1782년 칼라니오푸우 왕이 죽자, 카메하메하는 하와이 섬의 경쟁 부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1790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으로 카메하메하는 케오우아(Keoua) 족을 제외한 전 부족을 통일하였다.
1790년, 그는 현대적인 무기와 두 명의 전 영국 선원의 도움으로 마우이
와 몰로카이 섬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오아후 섬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중, 케오우아 족의 침략 소식을 듣고 다시 하와이 섬으로 돌아왔다.

신의 도움이 필요했던 카메하메하는 전쟁의 신을 위해 카와이하에(Kawaihae)에 거대한 돌사원을 세웠다. 그후 마우이와 카우아이의 추장들이 큰 배를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카메하메하는 이들을 물리쳤다. 카메하메하가 이보다 더 큰 신의 도움을 받은 사건은, 불의 여신 펠레가 킬라우에아 화산을 폭발시켜 케오우아의 세번째 부대를 전멸시킨 것이다. 이후 케오우아는 카메하메하로부터 카와이하에 대사원의 봉헌식에 초청을 받아 왔다가 한 추장에게 살해되었다.
1794년 카메하메하는 마우이와 몰로카이를 탈환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오아후를 정복하였다. 이리하여 카우아이를 제외한 하와이 왕국을 이루게 되었다.
1795년, 그는 마우이 섬의 라하이나를 수도로 정하고, 스스로를 카메하메하 대왕이라고 칭하며 왕국을 수립하였다. 1810년에는 그 세력이 대단해져, 카우아이의 추장, 카우무알리가 싸우지 않고도 충성을 맹세해 왔다.
이렇게 해서 하와이 제도 전체를 제패한 카메하메하는 외국과의 교역을 시작으로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는 서구 문명의 영향 속에서도 그는 조상들이 섬겨 왔던 하와이 신을 숭배하고 풍습을 중요시하여, 섬 원주민들을 당혹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현명하게 식민지를 통솔하였다. 그리하여 1819년 5월 8일, 그가 죽을 때까지 하와이는 그의 탁월한 통치력 덕분으로 태평양의 많은 섬들 중 유일하게 독립된, 평화로운 왕국으로 남아 있었다.

-카메하메하 2세와 선교사의 영향
위대한 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남인 리홀리호(Liholiho, 카메하메하 2세, 재위 1819~1824년)가 왕위에 올랐다. 카메하메하의 총애를 받았던 왕비 카아후마누(Kaahumanu)는 그의 후견인이 되어, 스스로를 섭정여왕이라 칭하며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하와이 역사에 그녀가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1820년 미국의 보스턴으로부터 선교사단이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하고, 영어로 교육을 시킴으로써 사람들은 영어를 학습 문자로 갖게 되었다.
기독교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있었던 카아후마누는 전통적인 관습이나
카푸(Kapu)라고 불리던 인습적인 계급제도를 비판하며, 마침내 카메하메하 2세로 하여금 이 제도를 폐지하게 하였다. 선교사들은 이 계기를 놓치지 않고 기독교 종교개혁운동을 펼쳤고, 일부 과격파에 의해서 성전과 많은 우상물들이 파괴되었다. 이로써 하와이 문화는 종교와 섞이게 되었고, 이것은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쳐 혼란을 가져왔다.

외래인들로 인하여 서구 사상이 하와이에 들어오기 전까지 카푸 제도는 하와이 원주민들 사이에서 100년 이상이나 전해져 오던 것이었다. 그것은 이 제도가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이었고, 또한 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1824년 카메하메하 2세와 그의 부인 카마말루(Kamamalu)는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했는데, 홍역에 걸려 그해 7월에 죽었다. 그들의 시신은 바이런 경이 진두지휘한 영국 군함에 실려 하와이로 되돌아왔다.

-카메하메하 3세
1824년, 카메하메하 2세의 뒤를 이어 나이가 10살이나 어린 동생 카우이케아오울리(Kauikeaouli)가 9살의 나이로 카메하메하 3세(재위 1824~1854년)가 되었다.
카메하메하 3세가 통치하던 30년간은 하와이 왕조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린 시대였다. 그는 1840년에 헌법을 공포함으로써 하와이가 전제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의 기강을 확립해 나갈 수 있게 했으며, 토지제도개혁(1842년) 등 국가 체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였다.
1850년에 그는 수도를 마우이의 라하이나에서 오아후의 호놀룰루로 옮겼다.
경제의 중심은 백단향 채취와 고래잡이에서 온난한 기후를 이용한 사탕수수의 재배로 옮겨갔다.

-카메하메하 4세
1854년에 카메하메하 3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그의 조카 알렉산더 리홀리호(Alexander Liholiho, 카메하메하 3세의 이복 누이인 Kinau의 아들이자, 카메하메하 1세의 손자, 재위 1855~1863년)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카메하메하 4세는 산업을 주도하면서 하와이에 경제적인 붐을 가져왔다. 하와이 섬은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고, 라하이나와 호놀룰루는 무역을 위한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카메하메하 4세는 미국 방문 때 받은 인종적인 모욕에 대한 분노와 갈수록 깊숙이 파고드는 미국의 강력한 힘에 두려움을 느낀 반면, 영국
을 방문했을 때 받은 좋은 인상으로, 하와이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점점 키워 주었다.
그가 남긴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퀸스 병원의 설립이다. 세균에 대한 면역이 없는 하와이인들이 외국인과의 접촉으로 여러 가지 병원균에 전염되어 사망률이 점점 높아지는 것을 왕실은 항상 염려해 왔던 것이다.
1863년 카메하메하 4세는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후계자로 그의 맏형 로트(Lot)를 지명하였다.

-카메하메하 5세와 왕조의 종말
로트(Lot Kamehameha, 카메하메하 5세, 재위 1863~1872년)는 그의 할아버지 카메하메하 1세 때의 찬란했던 왕권을 다시 복원하는 데 힘썼다. 동시에 주민들에게 세심한 정책을 펼쳤던 그는 주법(酒法)의 폐기를 반대하고, 주민들과 자유롭게 어울렸다. 또한 사탕수수 산업의 증진을 위해 노동을 권장하기 시작했고, 이민 부서를 설치하여 외국으로부터 많은 노동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는 새로운 헌법에 대한 정부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1864년에 헌법을 작성하여 시행에 들어갔다. 이 헌법은 하와이 역사상 어느 헌법보다도 가장 긴, 23년이라는 기간 동안 지속되기는 했지만, 결국은 왕정을 무너뜨리게 된 반대파를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혼을 하지 않아 직계 후손이 없던 카메하메하 5세는 그의 누이인 빅토리아 카마말루(Victoria Kamamalu)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그녀는 1866년에 세상을 떠나 버렸다. 다시 파우아히 비숍(카메하메하 1세의 증손녀)에게 왕관을 물려주려 하였으나 그녀는 사양하였다.
결국 카메하메하 5세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 이상 카메하메하 직계의 대는 이어지지 못했으며, 이는 곧 그 왕조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선거로 뽑은 왕, 루날릴로
새로운 왕조가 왕과 귀족에 의해 선출되었다. 카메하메하 1세의 이복 동생의 후손인 윌리엄 찰스 루날릴로(William Charles Lunalilo, 재위 1873~1874년)는 왕실 의회의 선거에 의해 6대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경쟁자 데이비드 칼라카우아(David Kalakaua)를 투표에서 가볍게 누르고 당선되어, 의회의 승인을 받아 왕이 된 것이다.
그의 재위 기간에 왕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한 지방 하와이안 세력들과의 싸움이 표면화되고, 반면 왕조정치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경제면에서는 사탕수수 재배가 발달하여 중요한 산업으로 성장을 계속하였다.
파우아히 공주의 부군인 찰스 비숍을 포함하여 세 명의 미국인을 내각에 기용하고 있던 왕의 정부는 사탕수수의 이익을 늘리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하여 미국과 상호조약을 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미국측의 진주만 양도 요구와 맞물리자 원주민들은 분노하였고, 결국 루날릴로 왕은 그 조약을 철회하였다. 그는 건강이 좋지 못한데다 술을 많이 마셔, 왕위에 오른 지 1년 25일 만인 그의 39번째 생일에 세상을 떠났다.

-칼라카우아 왕
루날릴로의 뒤를 이은 사람은 이전의 왕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그에게 패한 데이비드 칼라카우아(David Kalakaua, 재위 1874~1891년)였다.
칼라카우아는 단 한 사람의 적수였던 엠마(Emma) 여왕을 쉽게 물리치고 입법회의에 의해 왕으로 당선되었다. 매우 똑똑하고 매력적이며, 재능있는 사람이었던 그는 폐지되었던 훌라 댄스를 부활시키는 등 사라져 가는 하와이 전통문화를 되살리려고 노력하였다.
또 미국을 방문하여 상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하와이의 설탕을 관세 없이 미국에 수출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의 상품 또한
관세 없이 수입해야만 하였다. 이를 기회로 미국의 자본가들은 점차 하와이에서 그들의 세력을 넓혀 갔으며, 그 힘은 정치에까지 미쳐 진주만을 미국 해군의 보급기지로 한다는 조항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1881년에 그는 8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했다. 첫목적지는 일본이었으며, 중국을 거쳐 빅토리아 여왕이 있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여기에서 영국 왕실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대관식에 큰 감명을 받은 그는 하와이에서도 대관식을 열겠다고 마음먹었다.
1879년부터 공사에 착수했던 이올라니 궁전(Iolani Palace)은 1882년에 완공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그가 왕위에 오른 9주년을 기념하여 1883년 2월 12일, 스스로 거대한 대관식을 열어 왕관을 썼다. 그러나 이것은 낭비였으며, 너무 사치스러웠다. 이로 인한 많은 정치적인 문제들이 하와이 왕국을 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많은 하와이의 땅이 백인들에게 팔려 넘어갔다.
그는 하와이 왕국의 위신을 높여 세계에 알리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백인들의 세력은 갈수록 커졌다. 유혈혁명으로도 정세를 바로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1887년, 결국 그는 백인들이 강요하는, 왕권을 제한하는 신헌법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 헌법에 따라 각료의 파면권까지 의회가 갖게 되었고, 왕권은 유명무실해졌다. 이러한 정치분쟁이 심해지자, 그는 요양을 위해 1890년 11월 25일에 샌프란시스코로 떠났으며, 거기에서 1891년 1월 20일 사망하였다.

-릴리우오칼라니 여왕
칼라카우아 왕이 죽은 후, 그의 여동생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 재위 1891~1893년)가 뒤를 이어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칼라카우아 왕이 외유 중일 때는 섭정을 맡기도 했던 여왕은 의지가 강하고 정치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녀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하와이를 미국과 합병시키려는 소수 백인들로부터 하와이 원주민들의 권리를 되찾는 데 온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그녀의 반대파들은 합병을 지지하는 연맹을 결성하여 왕권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그녀는 미국 해군 함대의 선원과 해군으로부
터 도움을 받아, 왕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헌법을 공표하려고 했다.
조직적인 군사력을 갖춘 합병파는 여왕이 만든 신헌법 초안에 대하여 일종의 쿠데타라 칭하며, 이올라니 궁전을 봉쇄하고 임시정부를 수립, 여왕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이렇게 하여 하와이 100년 왕국은 비운의 여왕 릴리우오칼라니의 퇴위로 막을 내렸다. 사랑하는 연인의 이별을 노래한 알로하오에(Alohaoe)는 그녀가 작사, 작곡한 것이다.

신하와이, 미국의 50번째 주

-하와이와 미국의 합병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의 퇴위로부터 1년 반 후인 1894년 7월 4일, 임시정부는 하와이 공화국을 선언하고, 돌(Sanford B. Dole)이 대통령이 되었다.
하와이 합병 문제에 대해 미국 내에서는 논란이 많았으나, 당시 스페인과 미국과의 전쟁으로 태평양에서의 전략적 요충지가 필요했던 미국 의회는 1898년 7월 7일, 드디어 하와이와 미국의 합병을 승인해, 하와이는 미국땅이 되었다.
미국의 속령이 된 하와이의 도지사로 취임한 사람은 공화국 시대의 대통령이던 돌이었다. 그의 사촌 제임스 돌이 파인애플 통조림 제조와 수출에 성공하면서부터 파인애플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여 설탕과 함께 하와이의 주요 산업이 되었으며, 이로써 하와이는 백인 자본가들의 손에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과 하와이 주의 승격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하와이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전쟁이 일어남과 동시에 태평양 지역의 전초기지가 된 하와이는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경제의 기반도 자리잡혀 갔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하와이는 미국 연방에 편입되었다.
1959년, 의회를 통과한 법안에 의해 하와이는 주(州)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그해 8월 21일,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아이젠하워의 포고로, 하와이는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하와이 경제의 주역이던 파인애플과 사탕수수 재배는 인건비가 높아져 점차 사양화되고 있으며, 대체 산업으로 관광이 주목받게 되었다. 특히 여객기의 발달은 관광산업의 발전에 박차를 가해 1978년부터는 하와이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연방정부의 군사비 지출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했다. 주(州)로 승격되어 40년이 가까워오는 오늘날, 인종 차별은 자취를 감추고, 각국에서 온 이민들끼리의 결혼으로 인종적 의식조차 엷어지고 있다.
하와이로의 한국인 이민은 1903년에 시작되어, 현재 약 3만4천여 명의 한국인들이 다양한 지위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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