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사우드 왕가

구름위 2016. 1. 2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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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드(Saud) 왕가가 통치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의 발생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위치해 있으며,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을 통한 재력 덕분에 흔히 이슬람의 종주국으로 불린다. 또한 사우디 국왕은 특별히 ‘두 성지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이 메카와 메디나의 보호자로서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사우드 왕가는 18세기 중반 무함마드 빈 압드 알 와합과 정략적 동맹을 통해 국가를 건설했기 때문에 가장 엄격한 교리로 알려진 와합주의를 국가 종교 이념으로 채택하고 있다.

현재 사우드 왕가는 국왕의 직위뿐만 아니라 군대의 지휘권을 갖고 있으며 국방장관, 내무장관, 외무장관 등 주요 장관직과 13개 주의 통치자 자리도 독점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절대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국왕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총리직을 겸직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국왕이 총리직을 내놓는다는 것은 국정 운영자로서의 실권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차기 왕위 후보 1순위인 제1왕세자(또는 왕세제)는 제1부총리직을 겸직하며, 차기 왕위 후보 2순위인 제2왕세자(또는 왕세제)는 제2부총리직을 겸직한다.

사우드 왕가는 이슬람의 종주국 수장으로서, 메카와 메디나라는 ‘두 성지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메카 성지순례 모습. Al Jazeera English/flickr

사우디 왕가의 특징과 현안

2015년 1월 23일 지난 20년 간 사우디아라비아를 통치해 왔던 압둘라가 사망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권력 후계 구도를 놓고 국내외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일단 압둘라의 이복동생이자 사우드 왕가 내 최대 파벌인 수다이리파 출신의 살만 빈 압둘 아지즈가 별 잡음 없이 왕위를 승계함으로써 권력 이양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왕족의 조건

사우드 왕가는 국왕의 직위뿐 아니라 군대의 지휘권을 갖고 있으며 주요 장관직과 13개 주의 통치자 자리도 독점하고 있다. 군 지휘권자이자 국왕이었던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의 모습.

현재 사우드 가문의 전체 숫자는 약 3만 명에 달한다. 이들은 18세기 중반 제1차 왕국을 건설한 무함마드 빈 알 사우드(재위 1744~1765년)의 후손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왕족으로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왕족으로 행세하고 있는 자들은 그 가운데서 파이살 빈 투르키(재위 1834~1865년)의 후손들로서 그 수는 약 5천 명 가량 된다. 파이살 빈 투르키는 19세기 중반 리야드의 통치자로서 사우디 가문의 세력을 크게 확장시켰고, 제2차 사우디 왕국을 실질적으로 일으킨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후손들은 특별히 사우디 가문 내에서도 ‘알 파이살 분파’로 분류된다. 그리고 이 분파의 후손만이 왕족임을 의미하는 ‘아미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다.

1932년 건국 이후 현재까지 사우디아라비아의 역대 국왕들은 모두 제3차 사우디 왕국의 건국자였던 압둘 아지즈와 그 후손으로서, 이들은 알 파이살 분파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력한 분파를 형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 2~7대 국왕 모두 그의 아들이다. 위 국왕들을 비롯하여 압둘 아지즈의 아들은 모두 이름 뒤에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의 아들’이란 의미의 ‘빈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가 붙는다.

국왕 선출 방식

사우드 왕가는 왕위 계승 시 정치적 혼란을 줄이고 왕가 내부 구성원 간의 관계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해 1990년대 이후부터 왕가 구성원 중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자격과 왕세자(또는 왕세제)를 선출하는 방식을 제도적으로 규범화하려는 시도를 두 차례 진행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1992년에 제정된 기본통치법의 제2장 제5조의 조항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의 통치자가 될 수 있는 자격으로 압둘 아지즈 빈 알 사우드의 아들과 그 직계 자손이어야 하며, 그중 가장 고결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두 번째 2006년에 제정된 충성위원회법은 왕위 계승 과정과 관련된 규범을 더욱 구체화했다. 이 법에 따라 2007년 12월 7일 충성위원회가 발족되었는데, 이 기구의 주요 기능은 차기 왕위를 이을 왕세자(또는 왕세제)를 임명하는 것이다. 충성위원회 구성원은 창건자 압둘 아지즈의 아들(2세대)과 손자(3세대) 가운데서만 선별되며, 비왕족 인사는 참여 자격이 없다. 2007년 출범 당시 2세대에서 16명, 3세대에서 19명이 선별되어 총 35명의 구성원으로 시작했으나, 2013년 4월 현재 2세대 구성원 중 7명이 사망하거나 사임하여 28명으로 축소되었다.

충성위원회법에 따르면, 국왕은 충성위원회 위원과의 자문을 거친 후, 왕세자(또는 왕세제) 후보를 1~3명 선택하며, 충성위원회는 그중 한 명을 지명하게 된다. 만일 국왕이 천거한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충성위원회는 독자적으로 후보를 지명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국왕과 충성위원회가 의견이 맞지 않을 경우, 각각 한 명의 후보를 추천하고 이 두 명의 후보를 놓고 표결하여 다수 득표자가 왕세자(또는 왕세제)로 임명된다. 왕세자(또는 왕세제)로 책봉된 자는 선왕이 사망할 경우 자동적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왕가 내부의 주요 파벌과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

현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창건자 압둘 아지즈는 약 17명의 여인과 결혼을 했으며, 아들의 숫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50~60명 사이로 추정된다. 압둘 아지즈의 부인들 가운데 핫사 빈트 알 수다이리가 가장 많은 7명의 왕자를 낳았다. 이들은 흔히 ‘수다이리 일곱 형제’이라고 불리며 2세대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분파를 형성하고 있다.

<수다이리 일곱 형제>

 

• 파흐드 국왕(King Fahd, 1921~2005): 5대 국왕 역임. 2005년 8월 1일 사망
• 술탄(Prince Sultan, 1929~2011): 국방부 장관(1962~2011), 왕세제(2005~2011) 역임. 2011년 사망
• 압둘 라흐만(Prince Abdul Rahman, 1931~?): 국방부 차관(1978~2011) 역임.
• 나이프(Prince Nayef, 1934~2012): 내무부 장관(1975~2012), 왕세제겸 제1부총리(2011~2012) 역임.
  2012년 사망
• 투르키(Prince Turki, 1934~?): 국방부 차관(1968~1978) 역임.
• 살만(Salman, 1935~?): 리야드 주지사(1963~2011), 국방부 장관(2011~2015), 왕세제(2012~2015) 역임.
  국왕(2015년 등극)
• 아흐마드(Ahmad, 1942~?): 내무부 차관(1975~2012), 내무부 장관(2012년 6월~2012년 11월) 역임.

수다이리 일곱 형제 중 첫째 아들인 파흐드 국왕.

제5대 국왕을 역임했던 파흐드 국왕(Fahd bin Abdul Aziz, 1982~2005 재위)이 바로 수다이리 일곱 형제 중 첫째 아들이었다. 그 외에 다른 여섯 형제도 지난 수십 년 동안 권력의 핵심인 왕세제, 내무부 장‧차관, 국방부 장‧차관을 독차지 해 왔다. 이들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그 자리를 대물림하는 방식으로 다른 이복형제들을 왕세제, 내무부, 국방부 요직에서 철저히 차단시켜 왔다.

하지만 수다이리파의 장자였던 파흐드 국왕이 2005년 사망하고 제6대 국왕인 압둘라가 왕위에 오르면서 세력균형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왜냐하면 압둘라 국왕은 파흐드의 이복동생으로서 수다이리파의 일원이 아니며, 따라서 그를 중심으로 비()수다이리파 왕족들이 결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다이리파의 위세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다. 압둘라 국왕의 통치 기간인 2005년부터 2015년까지 왕세제에 책봉되었던 술탄 빈 압둘 아지즈, 나이프 빈 압둘 아지즈, 살만 빈 압둘 아지즈 모두 수다이리파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앞의 두 인물은 왕세제 재임 중 사망했으나 살만 빈 압둘 아지즈는 2015년 1월 23일 압둘라가 사망하자 제7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이로써 수다이리파는 과거 파흐드 국왕에 이어 두 번째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우디 왕족의 재산

걸프 지역 아랍 왕족들은 막대한 석유 자원 덕분에 세계적인 부호들이 즐비하다. 그 가운데서도 단연코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의 부는 타 아랍 왕족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사우디 왕족들의 재산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기 힘들다. 하지만 2011년 중동의 유력 경제지 <아라비안 비즈니스>가 발표한 왕족과 정치인을 제외한 아랍인 최고 부자 50명 가운데 사우디 국적인이 30명을 차지한 것을 미루어 볼 때, 사우드 왕가는 아랍 부자 왕족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세계에서 3번째로 부유한 왕족, 압둘라 국왕

2011년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압둘라 전임 국왕 자신과 직계가족이 소유한 공개 자산은 약 210억 달러에 달하며, 이로써 태국의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350억 달러), 아부다비 국왕인 셰이크 칼리파 빈 자이드 알 나흐얀(230억 달러)에 이어 세계 왕족 가운데 세 번째로 부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압둘라 국왕은 젊은 시절 승마를 즐겼는데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자나드리야 농장에는 1,000마리가 넘는 명마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아랍의 워런 버핏, 알 왈리드 빈 탈랄 알 사우드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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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 아지즈의 손자 알 왈리드 빈 탈랄은 ‘나는 궁전’이라는 보잉 747과 수십 척의 요트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시민들을 직접 만나기도 하고, 시리아 난민을 돕는 데도 적극적이다. 자녀와 요트를 즐기는 모습(좌), 2014년 요르단의 시리아 난민 캠프에 방문한 모습(우).

왕가의 인물 중에는 대외적으로 알 왈리드 빈 탈랄이 가장 유명하다. 그는 많은 사업체를 거느리고 있어 어느 정도의 재산은 공개되어 있는데, 재산이 공개된 사업가 중 중동 최고의 부자로 알려져 있다. 알 왈리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창건자 압둘 아지즈의 손자이다. 그의 모친 모나 알 솔흐는 레바논의 초대 수상을 역임했던 리아드 알 솔흐의 딸이다.

2014년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알 왈리드의 재산은 218억 달러로 세계 부호 순위 36위에 랭크되었으며, 참고로 한국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125억 달러로 세계 부호 순위 92위에 랭크되었다. 그는 자신의 주력 회사인 킹덤 홀딩의 CEO로서 부동산과 주식투자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 때문에 그는 흔히 ‘아랍의 워런 버핏’이라고 불린다.

알 왈리드가 소유한 킹덤 홀딩사는 뉴스 코포레이션, 시티그룹, 포시즌 호텔, 뫼벤픽 호텔, 사보이 호텔 등에 투자하고 있다. 2012년 그는 트위터 지분을 3억 달러어치 매입했고, 최근에는 중국의 전자상거래 사이트인 JD.com에도 1억 2,500만 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 왈리드 빈 탈랄은 에어버스 A380을 개조하여 만든 세계 최대 규모의 개인 전용기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흔히 ‘나는 궁전’이라고 불리는 그의 전용기의 가격은 2억 4,000만 달러로 여러 개의 호화 객실들과 함께 터키탕, 롤스로이스 주차장, 10석 규모의 콘서트홀 등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기도실에는 컴퓨터로 작동하는 전기 카펫이 설치되어 있어 언제든 자동으로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사우드 왕가의 성립과 역사

“로마는 하루아침에 건설되지 않았다.”라는 말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꼭 들어맞는 표현이다. 사우디 왕국은 18세기 중반부터 건설과 패망을 반복하며 제1차 사우디 왕국(1744~1818년), 제2차 사우디 왕국(1824~1891년), 제3차 사우디 왕국(1932년~현재) 등 세 차례에 걸쳐 건설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우디아라비아는 1932년 압둘 아지즈 빈 압둘 라흐만 알 사우드가 건설한 제3차 왕국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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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와 앰블럼.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의 통치 가문인 사우드 왕가의 시조는 무함마드 빈 알 사우드(재위 1744~1765)이다. 그는 1744년 나즈드 지역에서 종교 정화운동을 부르짖었던 무함마드 빈 압드 알 와합이라는 이름의 신학자와 만나 동맹을 체결했다. 무함마드 빈 압드 알 와합은 엄격한 유일신주의(타우히드)를 내세우며 수피주의(이슬람 신비주의)와 시아파에서 나타나는 성인숭배 사상을 우상숭배라고 질책했다. 두 사람의 동맹을 계기로 사우드 가문은 무슬림 공동체의 정치 지도자로, 무함마드 빈 압드 알 와합은 종교지도자로서의 지위를 상호적으로 인정받았다. 이 동맹은 일종의 정치‧종교 동맹으로서 아라비아 반도 나즈드 지역에서 사우디 왕조가 창건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무함마드 빈 압드 알 와합은 사우드 가문의 후원 덕분에 자신의 사상을 설파할 수 있었다. 엄격한 종교 정화운동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사상은 후대에 와합주의로 알려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사우디 왕국의 국가 종교 이념으로 남게 되었다.

제1차 사우디 왕국(1744~1818년)이 창건된 후 사우드-와하비 동맹세력은 1801년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여 시아파 성지인 카르발라를 공격했으며, 그 와중에 후세인 빈 알리를 비롯한 시아파 성인을 모신 묘당을 우상숭배 장소라고 비판하며 파괴했다. 또한 히자즈 지역의 중심지 메카와 메디나를 장악하는 데도 성공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사우드-와하비 동맹세력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고, 결국 이집트 총독인 무함마드 알리에게 공격할 것을 명했다. 1818년 오스만-이집트 원정대는 제1차 사우디 왕국을 초토화시킨 후 마지막 통치자였던 압둘라 빈 알 사우드를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했다. 이로써 파란만장한 제1차 사우디 왕국의 74년 역사는 종말을 맞이했다.

사우드-와하비 동맹은 사우디왕국 건립 후 메카와 메디나를 장악한다. 사진은 중요한 성지 중 하나인 메디나. AKPhotoPro/flickr

오스만-이집트군에 의해 제1차 왕국이 붕괴된 지 6년이 지난 1824년에 투르키 빈 압둘라(Turki bin Abdullah, 재위 1824~1834년)는 나즈드 지역으로부터 이집트 수비대를 축출하고 제2차 왕국을 건설했다. 파이살 빈 투르키가 통치했던 19세기 중반 제2차 사우디 왕국은 나즈드 지역의 질서를 회복하고 북쪽으로는 자발 샴마르, 남쪽으로는 오만 국경 지대까지 통치 영역을 확대했다.

1865년 파이살 빈 투르키의 사망 이후 1889년까지 약 24년 동안 그의 아들 삼형제는 치열한 왕위 다툼을 벌였고, 그 결과 제2차 왕국은 급속히 쇠약해졌다. 때마침 하일 지역을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한 라시드 왕국의 통치자 무함마드 빈 라시드는 나즈드 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후 사우디 왕국을 속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에 맞서 제2차 왕국의 마지막 군주 압둘 라흐만 빈 파이살은 나즈드 지역에서 추종 세력을 규합한 후 라시드 왕국에 대항했으나 1891년 물라이다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제2차 왕국은 멸망했고, 최후의 군주였던 압둘 라흐만을 비롯한 사우드 일족은 리야드를 떠나 쿠웨이트로 피난을 가는 수모를 겪었다.

오늘날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제3차 왕국(1932년~현재)에 해당한다. 제3차 왕국의 건국자인 압둘 아지즈 빈 압둘 라흐만 알 사우드는 제2차 왕국의 마지막 군주였던 압둘 라흐만의 아들이었다. 그는 라시드 가문에 쫓겨 부친과 함께 쿠웨이트로 망명을 떠났다가 다시 세력을 키워 1902년에 리야드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여세를 몰아 1921년에 라시드 왕국의 수도 하일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1924년 압둘 아지즈는 히자즈로 진격하여 타이프를 장악하고, 이듬해인 1925년에는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했다. 이로써 히자즈를 통치했던 하심 왕가의 역사는 종말을 맞이했다. 1926년 압둘 아지즈는 메카 대사원에서 ‘히자즈의 왕이자 나즈드의 술탄’이라고 선포했다. 이듬해인 1927년 압둘 아지즈는 영국과의 제다협정을 통해 신생 독립국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수년간 압둘 아지즈는 내부 반란을 진압하고 주변국과의 경계선 획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몰두했다. 1932년 9월 22일 압둘 아지즈는 국가 공식 명칭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개칭했고, 이로써 현대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이 완성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주요 군주

건국의 아버지, 압둘 아지즈

루스벨트와 회담 중인 압둘 아지즈(1945년)

1932년 압둘 아지즈 빈 압둘 라흐만 알 사우드(Abdul Aziz bin Abdul Rahman Al Saud, 재위 1932~1953년)는 서른 살의 나이에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고 근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창건하였다.

건국 직후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본격적으로 석유 탐사가 시작되었다. 1933년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스탠다드오일과 텍사코에게 석유 개발권을 허락했다. 1937년 스탠다드오일은 리야드와 담맘 인근에서 처음으로 석유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1939년 사우디아라비아는 처음으로 유조선을 통해 석유를 수출했다.

1945년 압둘 아지즈 국왕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1945년 2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얄타에서 열렸던 연합국 정상회담을 마치고 비밀리에 이집트로 향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곳에 정박 중이던 미국 항공모함 퀸시 호를 타고 이집트의 파루크 왕,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 아지즈 왕과 연석 회담을 가졌다. 당시 압둘 아지즈 국왕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만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면 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독실한 무슬림으로서 아랍 민족의 편에 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압둘 아지즈 왕은 루스벨트 대통령과 회담을 마친 다음 날 이집트 카이로에서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과도 정상회담을 가졌다.

압둘 아지즈 국왕은 말년에 권한을 사우드 왕자와 파이살 왕자에게 대폭 이양하고 공식적인 업무에서 손을 뗐다. 권력을 이양한 지 8년이 지난 1953년 11월 9일 압둘 아지즈 국왕은 세상을 하직했다.

폐위의 불운을 겪은 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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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드 빈 압둘 아지즈. 오른쪽은 아들 마시호르와 함께 있는 모습.

부친 압둘 아지즈 국왕의 사망 직후 사우디아라비아는 왕위를 둘러싸고 극심한 내분에 휩싸였다. 마침내 1953년 장남인 사우드 빈 압둘 아지즈(재위 1953~1964년) 왕자가 국왕에 등극했고, 차남인 파이살 빈 압둘 아지즈 왕자는 왕세제가 되는 선에서 권력 투쟁은 일단락되었다.

사우드 국왕은 넓은 궁전과 사치품, 부유한 생활을 즐겼던 것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그는 석유 판매의 증가로 국부가 천문학적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국가 근대화를 위해 사용하지 못하는 미숙함을 보였다.

사우드 국왕의 무능력에 실망한 사우드 왕족과 국가 종교지도자들은 1964년 10월 왕세제이자 총리였던 파이살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사우드 국왕은 왕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사우드 국왕은 1964년 11월 3일 왕위를 동생인 파이살 왕세제에게 물려주고 이집트로 떠났다. 폐위된 사우드는 그로부터 5년 뒤인 1969년 그리스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다.

근대화의 주역, 파이살

파이살 빈 압둘 아지즈

초대 국왕이었던 압둘 아지즈가 왕조의 개창자였다면, 3대 국왕인 파이살 빈 압둘 아지즈(재위 1964~1975년)는 경제, 사회, 외교 등 국가 전반의 실질적인 발전 틀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왕세제 시절부터 외교와 재무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파이살 국왕은 즉위 직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착실히 진행했다. 그 결과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무료 보건 서비스가 실시되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파이살 국왕은 국가 근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인프라 건설 사업을 단행했다. 이로써 사우디아라비아는 하루아침에 빈곤한 사막의 나라에서 최첨단 인프라를 갖춘 근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파이살 국왕의 재위 기간 중인 1967년, 1973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에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원하자 파이살 국왕은 1974년 서방국가를 상대로 석유 금수 조치라는 사상 초유의 조치를 내려 국제 유가는 하룻밤 사이에 4배 이상 치솟았다. 파이살 국왕은 석유 위기를 통해 서방국가에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가 지닌 영향력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파이살 국왕의 개방과 근대화 정책은 울라마(종교학자)와 같은 보수 세력들로부터 반감을 샀다. 국내에서 벌어진 개혁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갈등은 TV 방송국 습격 사건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1965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최초로 TV 방송 서비스가 실시되었는데 이를 반대했던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 방송국을 습격했다. 주동자 가운데는 파이살 국왕의 조카도 있었는데, 그는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75년 3월 25일 파이살 국왕은 암살당했다. 범인은 파이살 국왕의 조카인 파이살 빈 무사이드 왕자였다. 사우디 당국은 범인이 오랫동안 정신장애를 앓아왔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범인은 10년 전 TV 방송국 습격 사건 때 사망한 왕자의 형제로서, 복수를 위해 파이살 국왕을 암살한 것이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파이살 국왕과 1970년대 한국의 중동 붐 신화]

사우디아라비아는 가난하고 헐벗었던 1970년대에 한국이 외화를 벌어 근대화의 첫걸음을 뗄 수 있게 도와준 중동 건설 붐의 진원지였다. 한국이 중동 건설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1973년 12월 삼환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수주하면서부터였다. 삼환건설 근로자들은 기후와 지형이 험난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총연장 164km의 알 울라-카이바 구간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첫 공사의 성공을 계기로 삼환건설은 제다의 도시미화 사업을 수주했는데, 메카 순례 기간 이전까지 완공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막에 횃불을 켜놓고 야간 공사를 강행했다. 마침 공사 현장을 지나던 파이살 국왕은 한국 근로자의 근면 성실함에 크게 감동하여 “저렇게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들에겐 공사를 더 주어야 한다.”며 후속 대형 공사도 맡겼다고 한다. 이른바 ‘사우디아라비아 횃불 신화’로 회자되는 이 사건은 한국 건설기업이 중동 건설시장에 대거 진출하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온화한 금욕주의자 칼리드

칼리드 빈 압둘 아지즈

칼리드 빈 압둘 아지즈(Khalid bin Abdul Aziz, 재위 1975~1982년)는 파이살의 암살 직후 4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칼리드 국왕은 온화한 성품에 금욕주의적 성향을 지닌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1979년 11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성도 메카가 극단적인 종교 세력에 의해 점령당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사건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과격한 와합주의 종교지도자였던 주하이만 빈 사이프 알 오타이의 광신적 추종자들이었다. 주하이만은 이슬람력 1400년 1월 1월이 되는 날 마흐디(구세주)가 메카 사원에 강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메카 점령 사건은 2주나 지속되었고, 결국 129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유혈 사태로 끝이 났다. 메카 사태는 메카의 수호자임을 자처해온 사우드 왕가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

이듬해인 1980년 12월 카티프 오아시스 지역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이 지역은 사우디아라비아 내 시아파 본산으로서 약 30만 명에 달하는 시아파 교도들이 살고 있었다. 당시 폭력 사태는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이슬람 혁명에 성공하고 시아파 교도들에게 혁명 이념을 부추기면서 촉발되었다.

1981년 5월 칼리드 국왕은 이란 혁명의 확산을 방지하고 집단안보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오만, 카타르, 쿠웨이트 등과 함께 걸프협력기구(GCC)를 결성했다. 걸프협력기구의 본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 설립되었다. 이듬해인 1982년 6월 14일 칼리드 국왕은 6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걸프전에 휘말린 파흐드

파흐드 빈 압둘 아지즈

1982년 파흐드 빈 압둘 아지즈(Fahd bin Abdul Aziz, 재위 1982~2005년)는 칼리드의 뒤를 이어 사우디아라비아의 5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대외적으로 친미 노선을 택했고, 대내적으로 이슬람 종교정책을 취했다. 파흐드 국왕은 미국으로부터 대량의 최첨단 무기를 구입함으로써 경제 및 군사적 동맹관계를 강화해 나갔다.

1986년 그는 스스로 ‘두 성지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종교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1987년 순례 기간 동안 발생한 이란의 시아파 순례자와 사우디 경찰 간의 유혈 충돌은 전 세계 이슬람 종교지도자가 되기를 원했던 파흐드 국왕의 희망을 좌절시켰다. 당시 유혈 충돌로 약 400명이 사망했고, 이로써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을 감행하자 사우드 왕가는 국내외적으로 치명적인 위협에 노출되었다. 1991년 초 걸프전 기간 동안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해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했다. 국가 안보에 중대한 위협을 느낀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자국 내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을 허락했다.

걸프전 당시 미군의 장기 주둔은 사우디아라비아 사회에 ‘문화적 충격’과 함께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1991년 사우디 여성들은 미국의 여성 군인들이 차를 운전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에게도 운전면허 발급을 허락하라고 시위했다. 같은 해에 사우디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정치적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파흐드 국왕에게 제출했다. 1992년 초에는 성문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이 발표되었고, 1993년 8월 20일에는 국왕 자문기구인 슈라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파흐드 국왕은 1996년 건강이 악화되어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결국 그의 이복동생인 압둘라 왕세제가 국정을 대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랜 투병 끝에 2005년 8월 1일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점진적 개혁주의자, 압둘라

이미지 목록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는 젊은 시절 매 사냥을 즐겼다.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Abdullah bin Abdul Aziz, 재위 2005~2015년)는 이복형인 파흐드 국왕에 이어 2005년 8월 1일 사우디아라비아의 6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즉위 직후 압둘라 국왕은 알카에다를 비롯한 테러 단체로부터 국가 안보의 위기를 맞았다. 2006년 2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3/4 이상을 정제하는 아브카이크 석유 단지가 알카에다로 추정되는 무장 괴한에 의해 습격당했다.

이슬람 테러주의자들은 사우디 정부가 지나치게 친()서방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비난하며, 자국 내에 거주하고 있는 비무슬림 외국인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압둘라 국왕은 테러범들을 소탕하고 공개 처형하는 등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압둘라 국왕은 알카에다와 같은 반정부 세력을 잠식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조치로 교육, 경제, 산업, 여성 권리 등의 분야에서 점진적인 개혁과 개방정책을 취했다.

2005년 압둘라 국왕은 국가 개혁과 산업 다변화를 위한 인재 육성을 위해 젊은 학생들을 해외의 유수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기 위한 정부 지원 장학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유학생들은 최대 4년 동안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국고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2012년 기준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해외에 나간 13만 명의 유학생에게 약 50억 달러의 장학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2009년 문을 연 킹압둘라 과학기술대학교(KAUST)에서는 종교 보수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학생이 대학교 캠퍼스 안에서 남학생과 자유롭게 공부하고 토론하며, 운전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다.

2011년 9월 압둘라 국왕은 2015년 지방자치단체 선거부터는 여성에게도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2013년 1월 11일 압둘라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 역사상 처음으로 30명의 여성을 국정 자문기관인 슈라 위원회 위원으로 공식 임명했다. 이로써 여성은 그동안 남성이 독식해 왔던 슈라 위원회 전체 150개 의석 가운데 1/5을 차지하게 되었다.

탁월한 중재자, 살만

살만 빈 압둘 아지즈

2015년 1월 23일 이복형인 압둘라가 사망한 후 살만 빈 압둘 아지즈(Salman bin Abdul Aziz, 2015년 등극)는 79세의 늦은 나이에 7대 국왕 자리에 등극했다. 살만 국왕은 온건적이고 친서방적인 인물로 전임 국왕인 압둘라가 추진한 사회 및 경제개혁을 큰 변화 없이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살만 국왕은 1935년 리야드에서 태어났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자 압둘 아지즈 국왕의 25번째 아들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우디 왕가 내 최대 파벌인 수다이리파 일곱 형제 중 여섯째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요직을 거치며 다양한 행정 능력과 인맥을 쌓은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그는 1963년부터 2011년까지 48년 동안 리야드 주지사를 역임하며 관광 진흥, 리야드 도시 개발, 투자유치 프로젝트 등을 진행한 바 있다. 2011년 국방부장관에 오른 뒤에는 국방력 증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노력 덕분에 2013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방 예산은 670억 달러로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을 제치고 세계 4위를 차지했다. 살만은 2012년 6월 18일 수다이리파 출신의 친형인 나이프 빈 압둘 아지즈가 사망하자 왕세제에 올랐고, 2015년 1월 23일 이복형인 압둘라가 사망한 당일 왕위에 올랐다.

살만은 오랫동안 사우디 왕가 종친회인 왕가후손위원회 회장을 역임하며 왕족 간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의견을 규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보수적인 성직자, 다양한 부족 세력, 인구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젊은 세대의 다양한 요구를 적절히 조율하며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살만은 2015년 즉위 직후 압둘라 국왕 시절 제2왕세제였던 무크린 빈 압둘 아지즈를 제1 왕세제로 임명하며 압둘라의 후계 정책을 그대로 이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살만은 2015년 4월 29일 급작스럽게 개각을 단행하여 무크린을 왕세제 자리에서 해임시키고 수다이리파 출신으로 자신의 조카인 무함마드 빈 나이프를 제2왕세자에서 제1왕세자로 격상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을 제2왕세자로 책봉했다.

특히 1985년생인 무함마드 빈 살만은 살만 국왕이 즉위한 직후 국방부장관으로 임명한 바 있다. 2015년 현재 그는 세계 최연소 국방부장관으로 기록되고 있다. 무함마드 빈 나이프와 무함마드 빈 살만이 각각 제1왕세자와 제2왕세자에 책봉됨에 따라, 살만 국왕이 사망할 경우 사우디아라비아 역사상 최초로 국왕 자리가 건국자 압둘 아지즈의 3세대, 즉 손자 세대로 넘어갈 것이 유력할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살만 국왕의 아들 중 술탄 빈 살만 왕자는 1985년 미국의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 탑승한 우주 비행사로 유명하다. 현재 술탄 왕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광부장관을 맡고 있다. 또한 그의 아들 가운데 압둘 아지즈 빈 살만은 1995년부터 석유부차관을 역임하고 있으며, 파이살 빈 살만은 메디나 주지사를 역임하고 있고, 투르키 빈 살만은 2013년부터 사우디리서치앤마케팅그룹(SRMG)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사우디리서치앤마케팅그룹은 아랍 뉴스, 앗샤르크 알 아우사트, 알 이크티사드야 등과 같은 범아랍 신문사를 소유한 대형 언론사로 실제 소유주는 살만 국왕으로 알려져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가 소개

• 건국: 1932년 9월 23일
• 공식국명: 사우디아라비아 왕국(Kingdom of Saudi Arabia)
• 국왕: 살만 빈 압둘 아지즈(Salman bin Abdul Aziz, 2015년 즉위)
• 제1왕세자: 무함마드 빈 나이프(Muhammad bin Nayef, 2015년 책봉)
• 제2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Muhammad bin Salman, 2015년 책봉)

사우디아라비아 지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인구 약 3천만 명(2014년 기준)의 절대왕정 국가다. 국토는 2,149,690㎢로 아랍 국가 중 최대 크기이며, 그 가운데 90% 이상이 사막이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 최대 자원부국 중 하나로 석유는 세계 매장량의 21%, 천연가스는 세계 매장량의 4.1%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동부 지역에 위치한 가와르 유전은 단일 유전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산업이 국내총생산의 55%, 재정 수입의 90%, 수출의 90%를 차지하고 있어 경제 동향은 국제 유가의 등락과 원유 생산량의 증감에 크게 좌우되고 있다.

국민의 대다수는 아랍인이며 공용어는 아랍어다. 1970년대 석유 붐 이후 외국인 노동자 유입이 증가하여 전체 인구 중 외국인이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대부분은 인도, 파키스탄 등 아시아 출신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역사적으로 크게 3개 지역으로 나눠지며 각 지역은 문화, 종교, 인구 등에서 확연하게 구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히자즈 : 홍해와 접한 해안 지역으로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있다. 종교와 무역의 중심지로서 오랜 세월 동안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순례객 및 상인과의 접촉이 빈번했다. 아프리카, 아시아, 이란 등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섞여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자유롭다.

나즈드 : 내륙에 위치한 사막 지역으로 수도 리야드가 위치하고 있다. 사우드 왕가의 출신지이자 국가 종교 이념인 와합주의가 탄생한 곳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다.

하사 : 걸프만에 접한 해안 지역으로 오늘날 동부 주에 속해 있다. 이란 및 이라크와의 교류가 잦아 시아파 인구가 많으며,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매장량 90%가 밀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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