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 이탈리아의 수도. 아펜니노 산맥에서 발원하는 테베레 강 하류의 구릉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2 메시나 – 시칠리아 섬 북동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 이곳을 중심으로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포에니 전쟁이 일어났다.
3 루비콘 강 – 아드리아 해로 흐르는 작은 강. 카이사르가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한 다음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다.
4 밀라노 – 293년부터 402년까지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다. 313년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이곳에서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다." data-
1 로마 – 이탈리아의 수도. 아펜니노 산맥에서 발원하는 테베레 강 하류의 구릉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2 메시나 – 시칠리아 섬 북동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 이곳을 중심으로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포에니 전쟁이 일어났다.
3 루비콘 강 – 아드리아 해로 흐르는 작은 강. 카이사르가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한 다음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다.
4 밀라노 – 293년부터 402년까지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다. 313년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이곳에서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로마를 알면 유럽을 안다.’라는 말과도 통할 것이다. 로마사는 고대 세계사의 중심이지만 너무 방대해 연결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학교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세계사를 다루고 일정 지역의 통사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방대한 로마인 이야기와 이탈리아 문화를 원고지 50매로 엮었다. 짧은 글에 많은 내용을 담았지만 연결고리가 명쾌하도록 가능한 스토리텔링 방식을 활용했다. 이를 뼈대 삼아 유럽사의 살을 붙여나가면 서양사와 서양 문화가 훨씬 쉽게 다가올 것이다.
역사는 지리 공부의 배경 지식이다. 지리 공부는 어떤 지역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이해해나가는 작업이다. 지리, 역사, 문학, 철학, 미술 등 인문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결합될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에게 전신을 보여주기 시작할 것이다. 신체 각 부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전신을 이루듯이. [이탈리아의 역사]는 1편에서 다룬 [이탈리아의 음식과 지리]와도 일정 부분 관련되어 있다.
로마 문화의 뿌리, 에트루리아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땅에 제일 먼저 문명을 꽃피운 민족은 라틴 족이 아닌 에트루리아 족이었다. 이들은 소아시아 지방에서 이주해 왔다는 주장도 있고, 이탈리아 본토 사람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이탈리아 남부에는 그리스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식민 도시 국가를 형성하여 살고 있었다.
조금 늦게 이주해 온 라틴 족이 에트루리아 인, 그리스 인과 영토를 다투며 이탈리아 반도 중앙에 터를 잡았다. 기원전 272년 라틴 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했지만 그들이 세운 로마 제국은 라틴 족의 문명과 함께 에트루리아 문명과 그리스 문명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로마자로 알고 있는 알파벳도 알고 보면 지중해를 무대로 무역을 하던 에트루리아 인들이 그리스에서 받아들인 문자로부터 시작했다. 에트루리아 인은 알파벳뿐 아니라 그리스 신화의 일부도 수용하여 이후 그리스 신화가 녹아든 로마 신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우리의 이름은 ‘성+이름’으로 이뤄져 있어 ‘성명(姓名)’이라고 부른다. 서구에서는 이름이 ‘개인 이름+중간 이름+가문 이름(성)’으로 이뤄져 있어 ‘명성(名姓)’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 ‘명성’의 토대도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전파했다. 에트루리아 인의 인명은 ‘개인 이름+씨족 이름+가계 이름’으로 이뤄져 있다. ‘율리우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나 ‘존 에프 케네디’도 자신들이 멋진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을 에트루리아 인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아치 공법으로 만들어진 판테온의 내부. <제공: 리베르스쿨 출판사>
로마의 아치 건축도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건너온 에트루리아 인이 전해준 것이다. 로마의 판테온은 아치 기법으로 지어져 높이가 43m나 되는데도 가운데에 기둥이 하나도 없다. 로마의 건축물은 기둥을 좁게 일렬로 세운 그리스식 건축물에 비해 훨씬 더 실용적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2000)에 나오는 검투사나 [벤허(Ben Hur)](2010)에 나오는 마차 경기 또한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치르던 장례 예식에서 발전한 오락 경기이다. 천으로 몸을 두르는 고대 로마 의상 토가(Toga) 역시 에트루리아 인의 의상에서 유래했다.
로마가 그리스를 제치고 유럽의 패자(霸者)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은 에트루리아 인이 전파한 ‘실용적 건축, 전투 기법, 효율적인 문자’ 등을 기반으로 이방인을 수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로마의 탄생, 공화정의 탄생
카피톨리나 늑대상. <제공: 리베르스쿨 출판사>
로마 한복판에 있는 카피톨리니 박물관에는 늑대 젖을 먹고 있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의 모습이 조각된 ‘카피톨리나 늑대상(Capitoline Wolf)’이 있다.
전쟁의 신 마르스가 사제 ‘레아 실비아’에게 반해 쌍둥이를 얻었다. 쌍둥이의 삼촌인 누미토르는 그들이 커서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것을 우려하여 쌍둥이 형제를 죽일 것을 명했다. 결국 쌍둥이는 바구니에 실려 테베레 강가에 버려지는데, 늑대가 이들을 건져 키웠다. 이 쌍둥이는 로마를 건국한 것으로 알려진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 형제이다. 로마라는 이름도 이들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한다.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 중앙부에는 남북으로 아펜니노 산맥이 척추처럼 뻗어 있다. 아펜니노 산맥에서 발원한 테베르 강이 로마 시내를 지나 티레니아 해로 흘러든다.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영토에 속했으나 교통의 중심지로 크게 발달하게 되자 그 힘을 바탕으로 에트루리아계 왕을 추방하고 기원전 509년경 마침내 독립을 쟁취, 귀족에 의한 공화정을 실시했다.
옛터에 재건된 로마의 원로원. <제공: 리베르스쿨 출판사>
에트루리아 인을 몰아낸 로마인들은 귀족 중에서 민정과 군사 영역에서 최고의 권한을 지닌 2명의 집정관(Roman Consul)을 뽑았고, 자문 회의를 위해 귀족 300명으로 이뤄진 원로원도 두었다. 공화정이 수립되고 15년이 지나자 전시에는 군인이 되고 평시에는 세금까지 바치던 평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했다. 그래서 ‘평민회’가 구성됐고 두 명의 호민관(Tribunes)도 뽑았다.
귀족들이 평민들을 무시하자 평민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기원전 450년경 평민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글을 구리판에 새기게 됐는데, 이를 ‘12표법(Twelve Tables)’이라고 부른다. 이 법은 이후 로마법의 기초가 되었다.
기원전 367년 호민관 리키니우스의 주장으로 귀족이 독점했던 집정관의 한 자리를 평민 중에서 선출하게 되었다. 이로써 귀족과 평민의 위치가 형식적으로는 동일해졌다. 평민이 귀족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로마가 도시 국가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서로 속고 속인 포에니 전쟁의 교훈
기원전 323년 그리스·페르시아·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연도의 ‘323’과 ‘33’세의 나이에서 3이 두 번 겹치는 것에 유의하여 기억해 두자. 알렉산더 사후 그리스 세력은 위축되었으나 카르타고는 무역 활동으로 쌓은 부를 바탕으로 강력한 해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264년, 이탈리아 반도의 신흥 강대국 로마와 지중해의 패권을 쥔 해상 강국 카르타고가 맞서고 있는 가운데 두 강국 사이에 있는 시칠리아 섬의 두 주요 도시 메시나와 시라쿠사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카르타고가 이 분쟁에 끼어들어 시칠리아를 점령할 것을 우려한 로마는 메시나로 군을 파견해 도시를 자신의 세력하에 두었다.
선수를 빼앗긴 카르타고는 시라쿠사의 독재자 히에론과 손잡고 로마와 전쟁을 벌였지만 히에론은 곧 제압당했다. 로마의 장군 레굴루스는 카르타고 해군을 피해 본토를 직접 공격했으나 카르타고의 용병에게 패해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어렵게 해군력을 키운 로마는 기원전 241년 아에가테스 해전에서 마침내 카르타고를 무찔렀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카르타고가 로마에 배상금을 물게 되면서 용병들에게 봉급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카르타고 용병들이 사르데냐 섬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로마는 이들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보내 사르데냐 섬까지 차지했다.
기원전 219년 와신상담하던 카르타고의 총사령관 한니발은 마침내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로마의 동맹국 사군툼을 점령하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한니발의 군대는 로마의 허를 찔러 피레네 산맥과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 코끼리 부대를 앞세운 카르타고의 5만 대군은 칸나에 벌판에서 로마의 8만 대군을 궤멸시켰다. 이제 로마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한편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물리친 로마군 사령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카르타고 본토를 직접 공략하였고, 로마를 코앞에 두고 있던 한니발은 본토로 돌아와 로마군과의 대결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202년 노장 한니발은 젊은 스키피오와 맞붙은 자마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 만다. 한니발을 쓰러뜨린 스키피오의 무공은 이탈리아의 국가에도 나온다.
이탈리아의 형제들이여, 이탈리아가 스키피오의 투구를 쓰고 일어났다네. 승리의 여신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 앞에 머리를 숙이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카르타고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몇 년 새에 카르타고가 다시 부강해지자 로마는 카르타고의 이웃나라 누미니아를 부추겨 카르타고를 침략하게 했다. 이에 카르타고는 방어를 위해 누미니아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그러자 로마는 카르타고가 전쟁을 할 때마다 로마의 허락을 받기로 하는 조약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카르타고를 협박하였다. 또다시 전쟁이 벌어질 것을 두려워한 카르타고는 로마의 요구대로 모든 무기를 내놓는 조건으로 전쟁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카르타고가 모든 무기를 반납하자마자 로마는 카르타고의 수도를 파괴하고 주민 모두 내륙으로 이주할 것을 명령했다.
로마에 속은 것을 알게 된 카르타고는 무기 하나 없이 돌, 나뭇가지, 맨손으로 성을 지켰다. 로마군이 3년 만에 겨우 함락시킨 카르타고에는 부녀자와 어린애, 노인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기원전 146년, 로마는 이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카르타고를 철저히 파괴했다. 그래서 한때 지중해를 호령했던 카르타고에는 제대로 된 유물이 남아 있지 않다. 힘없는 평화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포에니 전쟁이 말해주고 있다.
불평등이 부른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100년 넘게 지속된 포에니 전쟁이 막을 내리면서 드디어 로마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동맹을 지키기 위해 주변 지역에 나가 있던 로마 귀족들은 그 지역의 왕이나 다름없는 총독이 되었다. 엄청난 재물과 노예가 로마로 흘러들면서 그간 전쟁 자금을 대주었던 귀족은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노예를 이용한 귀족층의 라티푼디움(latifundium, 대농장) 운영은 자영농의 몰락을 부채질했다.
불평등과 불공정은 혁명을 낳는다. 로마의 신분 격차가 첨예화되자 기원전 134년 젊은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개혁에 나섰다. 개혁의 요지는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땅을 제한하고 빈 땅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재분배하여 농민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그라쿠스가 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을 강행하자 귀족들은 그라쿠스가 독재자의 야심을 품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결국 호민관 선거 날 반대파는 재선을 노리던 그라쿠스를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시민이 보는 앞에서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기원전 133년의 일이다. 단칼(1)에 허리를 찌르는(33)는 모습을 떠올리면 연도를 외기 쉬울 것이다.
그라쿠스가 죽은 지 10년 후 형에 이어 호민관이 된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국가가 농민에게 일정량의 식량을 구입해 빈민에게 시가보다 싸게 파는 개혁안을 내놓았다. 재원은 귀족에게 거둔 세금으로 해결했다. 그라쿠스는 귀족의 방해와 선동으로 호민관 선거에서 재선되지 못했고, 반역자로 몰려 동료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실패했지만 그 정신은 살아남아 로마는 귀족 세력과 평민 세력으로 갈리게 되었다.
카이사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의 1차 삼두 정치
양립할 수 없는 귀족과 평민의 다툼은 필연코 둘을 묶는 영웅을 잉태하게 마련이다. 그가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어머니의 배를 가르는 수술 끝에 태어난 인물이다. 여기서 ‘제왕 절개 수술(Caesarean Section)’이란 말이 나왔다. 영어로 7월을 의미하는 ’July’도 ‘율리우스(Julius)’에서 유래했다.
카이사르가 에스파냐의 사령관으로 있을 때 로마에는 부호 크라수스와 지중해 해적을 섬멸한 폼페이우스가 있었다. 로마 귀족들은 이 두 사람의 권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임무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 정치를 시작했다.
동방원정에 나섰던 크라수스가 전사한 후 폼페이우스에게 시집갔던 카이사르의 딸이 죽었다. 둘 사이에 인척 관계의 굴레가 없어지자 로마 귀족들이 폼페이우스를 끌어들였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귀족들과 제휴하고 갈리아 지방에 사령관으로 가 있던 장인 카이사르에게 등을 돌렸다. 로마 귀족들은 폼페이우스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카이사르에게 무기를 버리고 로마로 귀환할 것을 명령했다. 임기를 끝내고 로마로 향한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에 다다랐다.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넜다.
카이사르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던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떠나 도망갔다. 카이사르는 그리스 북쪽 파르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폼페이우스는 겨우 목숨만 건져 이집트로 도망갔지만 카이사르의 추격이 뒤따랐다.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자신의 누이이자 아내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공동으로 통치하며 권력을 다투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폼페이우스를 지지했으나 전세가 기운 것을 보고 폼페이우스를 배신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부하가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바쳤는데, 카이사르는 이를 보고 “찬란한 별이 떨어졌다”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은 카이사르는 그녀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을 몰아내고 이집트를 장악하도록 도왔다. 카이사르는 이에 반발하는 소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무찌른 후 로마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는 단 세 마디의 보고만 올렸다. 로마로 개선한 카이사르는 ‘독재자’로 임명되었고, 곧 영구 독재자가 되었다.
1인 독재를 행하던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정이 무너질 것을 우려한 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암살을 도모한 귀족들 사이에서 양아들 브루투스를 발견한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도냐!”라고 말하며 쓰러졌다. 카이사르가 죽은 기원전 44년은 ‘칼로 카이사르를 죽이고(4) 또 죽였다(4)’라고 기억해 두자.
브루투스는 로마 시민 앞에서 “나는 카이사르를 사랑했지만 로마를 더 사랑했다.”라고 추도 연설을 했다. 하지만 뒤이어 안토니우스가 “저들은 로마 영웅을 비겁하게 죽인 암살자이다.”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고 카이사르의 주검과 유서를 공개하여 민심을 흔들었다. 결국 브루투스 일파는 로마를 떠나 도망갔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의 2차 삼두 정치
카이사르 사후에 안토니우스와 함께 카이사르의 부관이었던 레피두스,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의 전면에 나타났다. 이로써 제2차 삼두 정치가 시작됐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마음을 빼앗겼지만 옥타비아누스와의 결속을 위해 그의 여동생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레피두스가 삼두 정치에서 밀려난 이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사이는 악화되었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다. 이제 갈라선 두 세력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격돌했고, 아그리파가 지휘관으로 있던 옥타비아누스 군대가 안토니우스를 크게 물리쳤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대 준비생이라면 한 번쯤은 석고상 ‘아그리파’를 그려보았을 것이다. ‘아, 그리고파’로 기억해 두자.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8월을 뜻하는 ‘오거스트(August)’는 아우구스투스에서 유래했다. 그는 직업 상비군을 만들어서 군대의 충성을 끌어내 통치의 기반을 다졌다.
군인 황제 시대에 이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 정치
로마의 카피톨리니 박물관에 있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 카피톨리니 광장에도 기마상이 있다. <제공: 리베르스쿨 출판사>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 사후 황제가 된 인물 중에서 칼리굴라와 네로는 폭군으로 유명하다. 네로가 죽은 다음 해인 서기 69년에는 황제가 네 명이나 바뀌기도 했다. 69년은 그야말로 ‘유구한(69)’ 역사를 지녔다. 69년에 네 번째로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 이래 5현제인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나타나 로마는 전성기를 맞았다.
200여 년이나 팍스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가 지속되는 동안 로마 시민은 목욕 문화와 서커스 등 사치와 놀이 문화에 빠졌고 군대 세력은 날로 성장했다. 235년부터 284년까지 약 50년 동안 공동 통치자를 포함해 26명의 군인이 황제에 올랐다가 저세상으로 갔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에 오른 284년에서야 이판사(284)판의 군인 황제 시대는 막을 내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 자리를 놓고 서로 싸우는 것을 막기 위해 제국을 넷으로 나누고 두 명의 정제와 두 명의 부제를 두는 사두 정치를 실시했다. 하지만 황제의 서열 다툼이 격심해지면서 한때 8명이 공동 황제로 집권하는 등 더 큰 혼란이 생기기도 했다.
단독 황제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자 세운 콘스탄티누스 황제 개선문. <제공: 리베르스쿨 출판사>
312년 다른 경쟁자들을 누르고 올라온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독자적인 황제의 권리를 주장하는 막센티우스와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전날 밤 꿈속에서 십자가를 본 콘스탄티누스는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하여 병사의 방패에 그리스도의 표식을 새겨 넣도록 해서 막센티우스를 무찌르고 서로마 제국의 정식 황제로 군림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 밀라노에서 동로마 제국의 리키니우스 황제와 만나 기독교를 정식 종교로 인정하는 밀라노 칙령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내심 밀라노 칙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리키니우스는 동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박해했다. 그러자 콘스탄티누스는 약속을 어긴 리키니우스를 몰아내고 324년 단독 황제에 올랐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 세력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 체제를 안정적으로 다지려고 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자마자 기독교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갈등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한가 하는 문제였다.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는 중개 역할을 위한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파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은 하나’라는 삼위일체설을 주장한 아타나시우스파를 니케아로 불러들였다.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 결과 아타나시우스파의 주장이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325년에 3위일체설이 니(2)케아 공회의에서 오직(5) 하나의 진리가 되었다.’라고 기억해 두자.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의 통일을 다질 목적으로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다. 신은 진리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데 인간이 정치적 의도를 지니고 회의석상에서 진리를 결정한 것이다.
다신교의 나라였던 로마에서 니케아 신조가 정해진 이후 다른 종교를 선택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 중심에서 신 중심으로 전환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유럽에는 중세 암흑기가 닥친다. 다신교의 관용 정책이 그리스도교만을 강요하는 불관용 정책으로 바뀌면서 로마는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니케아 공의회를 세계사 제1대 사건으로 꼽을 만하다.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수도를 천혜의 요새인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도시 이름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었다. 기독교 전파를 위해 수도를 옮겼을 거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도시는 그 후로 1,000년이 넘도록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제 기능을 유지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큰아들 아르카디우스에게는 동로마를, 작은아들 호노리우스에게는 서로마를 통치하도록 유언을 남김으로써 로마 제국은 둘로 나눠졌다. 사실상 빈껍데기만 남은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족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했다. 서(4)로마 제(7)국이 유(6)구한 천년 제국의 막을 내린 것이다.
527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로마법 대전]을 편찬하였는데, 이 법전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나라 법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527년 로(5)마법대전에 법의 이치(27)를 담았다고 기억해 두자.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라는 이름이 Just(공정한)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공정한 법을 만든 사람이란 것도 쉽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568년 스칸디나비아에서 내려온 랑고바르드 족이 북부 이탈리아에 랑고바르드 왕국을 건설하자 로마 교황은 불안해졌다. 교황은 카롤링거 왕조를 세운 프랑크 왕 피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피핀은 로마 황제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꺼이 교황의 후원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교황령까지 선포해주었다.
774년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프랑크 왕국에 병합하였다. 로마 교황은 800년에 샤를마뉴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했다.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로마 제국의 권력은 사실상 동로마 제국에게 있었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샤를마뉴에게 서로마 제국의 황제 칭호를 부여한 것이다.
한편 827년 이탈리아 남부는 튀니지 지방에서 건너온 이슬람교도에게 점령되었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북부의 게르만 문명권, 동부의 비잔틴 문명권, 남부의 다민족 문명권(아랍민족, 라틴 족, 그리스 인)으로 나뉘었다.
10세기 말 동부 지중해 지역과의 무역으로 번성한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 <제공: 리베르스쿨 출판사>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이탈리아 북부는 중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북부는 프랑스, 독일,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의 각축장이 되면서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 베네치아, 베로나, 피렌체, 피사, 제노바, 밀라노 등의 도시는 비잔틴과의 교역을 통해 번성하였다.
15세기에는 이들 도시 국가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꽃피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등장해 이슬람 세계를 장악하자 동방 무역의 길이 막힌 이탈리아 도시 국가는 17세기 이후 쇠퇴의 길을 걸었다.
통일의 영웅, 마치니‧가리발디‧카보우르‧에마누엘레 2세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하여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제공: 리베르스쿨 출판사>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뿌린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은 이탈리아에도 번져 통일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빈 체제가 시작되자 이탈리아 반도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많은 강대국의 간섭을 받았다. 주세페 마치니는 비밀 결사 단체인 카르보나리당에 입당하여 이탈리아를 공화제로 통일할 것을 내세우며 오스트리아와 싸웠다. 하지만 마치니의 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그의 뒤를 이은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유일한 입헌 군주국이었던 사르데냐-피에몬테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것을 도왔다.
사르데냐 왕국의 총리였던 카보우르는 탁월한 외교술을 발휘해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중·북부 이탈리아까지 장악하였다. 1859년 가리발디가 시칠리아를 장악한 데 이어 1866년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베네치아를 되찾았다. 카보우르의 외교적 성과에 힘입어 1870년 마침내 에마누엘레 2세가 로마에 입성했다. 카보우르는 과감한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남북 간의 빈부격차를 감안하지 않았기 때문에 혜택이 주로 산업화된 북부 이탈리아에 돌아갔다. 더욱 가난해진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내전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미국 이민이 줄을 이었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었지만 얻은 것은 별로 없었다. 전후 사회의 혼란을 틈타 베니토 무솔리니가 파쇼(Fascio, 결속)를 조직해 노동 운동을 탄압했다. 무기를 갖추고 ‘검은 셔츠’를 입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당원들은 로마에 입성해 무혈 쿠데타에 성공했다.
무솔리니는 나치 독일, 군국주의 일본과 추축국을 결성해 1940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1945년 전쟁에서 패하자 이탈리아 국민은 공화정을 선택했고 국왕은 국외로 추방됐다. 1948년, 드디어 마치니가 꿈꾸던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유럽 역사의 중심축인 이탈리아 역사는 고대 유럽의 전신을 보여준다. 특히 로마를 있게 한 것은 수용적 관용이었고 로마를 무너지게 한 것은 배타적 불관용이었다. 이는 모든 역사에도 적용될 것이다. 아쉽게도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잘못된 역사는 늘 반복돼 왔다. 문명과 비문명의 차이는 교훈을 수용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역사는 문명으로 향해 가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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