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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을 확인한 비투스 베링

구름위 2014. 11. 4.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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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을 확인한 비투스 베링

러시아의 대외 팽창

서유럽 제국이 해양탐험에 열중하고 있던 15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초엽까지 러시아는 유럽에는 낯선 나라였다. 그러나 표트르대제가 강력하게 서구화정책을 추진한 결과 17세기 말에 이르면 러시아는 강대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표트르대제는 동쪽으로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획득하고, 시베리아를 거치지 않고 중국으로 통할 수 있는 북동항로 개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만약 아메리카가 시베리아와 연결되어 있다면 러시아로서는 쉽게 아메리카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고, 통로가 있다면 시베리아를 경유하지 않고 해로로 직접 아시아로 항해할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베링의 1차탐험; 아시아의 동쪽 끝을 확인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소속되어 주로 동인도 무역항해에 종사했던 베링(1681-1741)은 1703년 러시아의 발트해함대로 이적하여 1715년에는 소령, 1720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하였으나 1724년 2월 대령으로 퇴역하였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는 ‘옛날부터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는 아나디르(Anadyr) 수로가 있는지를 확인해 오라’고 베링에게 명령하였다. 이에 베링은 대령으로 러시아해군에 다시 복무하게 되었다.

1725년 1월 페트로그라드를 출발한 베링탐사대는 러시아대륙을 육로를 통해 이동하고, 오호츠크해를 가로질러 1728년 3월에 캄차카반도 동해안에 도착하였다. 1728년 4월 초부터 탐험에 사용할 배를 만들기 시작한 베링은 두 달 뒤인 6월 9일에 가브리엘호를 완성하였다. 가브리엘호는 길이 18.3미터에 돛대를 2개 장비한 두대박이 돛배였다. 7월 13일 탐사대원 43명을 이끌고 캄차카 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탐험하기 시작한 베링은 8월 15일에는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도달하였다.

베링은 아시아 대륙과 알래스카대륙 사이의 해협을 통과하여 북극해로 진출하였지만, 짙은 안개 탓으로 알래스카 대륙을 육안으로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베링은 이 지점에서 아시아 대륙이 끝났다고 결론짓고 뱃머리를 돌려 1728년 9월 1일 캄차카 만으로 되돌아왔다. 이듬해인 1729년 바다의 얼음이 녹자 탐사대는 가브리엘호와 포르투나(Fortuna)호에 나누어 타고 베링해 탐사에 나섰다. 그러나 베링은 6월 8일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베링 섬 인근에서 항로를 돌리도록 명령하였다. 탐사대는 1730년 3월에 페트로그라드로 귀환하였고, 베링은 캡틴-커맨더(Captain-Commander, 준장에 상응)로 진급하였다. 이후 베링이 항해한 해역은 베링해로, 아시아와 알래스카 사이의 해협은 베링해협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베링의 2차탐험; 베링섬에서의 최후

베링의 2차탐험은 안나 여제(1730~40)가 통치하던 1733년 3월에 페트로그라드를 출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737년 오오츠크에 도달한 베링일행은 탐험에 사용할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1740년 6월에 세인트피터(St.Peter)호와 세인트폴(St.Paul)호 등 2척을 완성하였다. 세인트 피터호는 베링이 지휘하였고, 세인트 폴호는 치리코프 대령이 조선하였다.

베링 탐사대는 1741년 6월 4일 탐사를 시작하였으나, 6월 12일에 악천후를 만나 두 배가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치리코프가 조선한 세인트폴 호는 항해를 계속하여 알류샨열도의 몇 개 섬을 발견하였으나, 베링이 조선한 세인트피터 호는 악천후로 이리저리 떠밀리다가 8월 20일에 알래스카만으로 진입하였다. 안전한 곳으로 피항하는 데 급급했던 베링 탐사대는 알래스카 남서해안과 알래스카반도․알류샨열도 등을 정찰하는 데 그쳤다. 바다를 떠돈 지 5개월만인 1741년 11월 4일 육지가 발견되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배를 해안에 대고 겨울을 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온통 바위뿐인 해안에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닻을 던지는 순간 배가 좌초되었다. 운이 좋았는지 세인트피터호는 바닷가 모래 위에 얹혔다. 11월 8일 해안가에 모래를 파 움집을 짓고 병자들을 옮겼으나 도중에 10여명이 사망하였다. 11월 15일에는 배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모두 해안으로 옮기는 작업을 완료하였으나, 11월 말에 세인트피터호는 폭풍우에 부서지고 말았다.

베링은 이 곳이 육지인지 섬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12월 1일에 정찰대원 3명을 파견하였다. 그 사이에 탐사대원들은 북극권의 살인적인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한 명씩 죽어갔고, 베링도 1741년 12월 8일 사망하였다. 12월 26일 정찰대원들이 돌아와 이 곳이 섬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탐사대는 그를 기려 섬을 베링섬이라고 이름지었다.

겨울을 이기고 살아남은 탐사대원은 부서진 뱃조각을 주워 모아 배를 만들고, 이듬해인 1742년 8월 중순 베링 섬을 출발하여 8월 27일에 캄차카로 귀환하였다. 치리코프가 조선했던 세인트 폴호는 알래스카를 발견하고, 1741년 10월에 이미 귀환해 있었다. 알래스카는 이후 모피산지로 개발되었으나, 재정이 악화되자 러시아황실은 1867년에 720만달러에 미국에 팔아 넘겼다.

베링 탐험의 의의와 교훈

베링은 북동항로 탐사를 대서양쪽이 아닌 태평양쪽에서 추진한 셈이었고, 실제로 베링해협을 발견함으로써 북동항로가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1878년까지 북동항로를 완전히 항해하지는 못했다. 북극권의 험한 날씨 때문에 당시의 범선으로는 항해하기가 불가능했다. 최초로 북동항로를 완주한 것은 1878년에 이르러서였다.

서유럽에 비해 뒤늦게 근대화되기 시작한 러시아는 베링의 탐험으로 아시아가 아메리카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북동항로를 개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알래스카를 모피산지로 개발할 수 있었다. 베링의 탐험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황실은 표트르대제에서 예카테리나여제, 다시 표트르2세에서 안나여제, 이반 6세로 제위가 바뀌는 등 정치적으로 격변기를 겪으면서도 베링의 탐험을 중지시키지 않았다. 이는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지 못하는 우리의 정치현실을 되돌아 볼 때 좋은 본보기가 된다.

우리는 러시아의 예에서 또 다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당장에는 쓸모 없는 조그마한 땅이라도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쓸모 없는 얼음덩이 땅으로 생각하여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아버렸지만, 이것이 판단착오였음을 이후 역사는 입증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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