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이 기세를 떨치게 된 것은 일부 정치, 사회적인 요소 이외에, 가장 주요한 것은 아마도 그들이 스스로 "도창불입(칼과 총에 다치지 않음)"이라고 부르던 신술(神術)이었을 것이다. 만일 신술을 믿지 않았다면, 당시 국가최고지도자(서태후)가 의화단을 지지할 리가 없고, 일반백성들도 함께 들고 일어났을 리가 없다. 요즘 말로 보자면, '도창불입'의 신술은 바로 의화단의 핵심광고어였다. 이런 신술은 첫째, 현대과학상 근거가 없으므로, '봉건미신'적인 요소가 많고, 둘째, 그들은 서양인들의 총포앞에서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셋째, 의화단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건국이래 수많은 연구저술에서, 당시에는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신술은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다. 혹은 슬쩍 한마디하고 지나가거나, 아예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기도 한다. 역사학이라는 것이 영웅을 위하여 안좋은 일은 숨겨주는 역할도 있는데, 여기에서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의화단의 '도창불입'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분석해 보자면, 최소한 아래의 4가지 경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첫번째 가능성은 경기공(硬氣功)의 효과이다. 중국무술중에는 확실히 "철포삼(鐵布衫)"(만일 동자공과 함께 익히면 금종조 또는 금종구라고 한다)이라는 쿵후가 있고, 이런 쿵후는 익히기는 아주 번잡하여, 매일 무수하게 넘어지고 얻어맞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무막대기에서 모래구덩이로 떨어지고, 나무막대기와 쇠추로 온 몸을 얻어맞고, 또한 특수한 약물에 몸, 을 담그고, 운기토납을 섞어서, 밤에 잠을 잘 때도 딱딱한 나무판으로 된 침대위에서 자고, 아무 것도 깔면 안된다. 만일 3년에서 5년을 계속 익히면 이 쿵후를 조금 익힐 수 있게 된다. 무술계의 인사들에 따르면, 이런 쿵후를 익히면, 준비만 있으면 일반적인 병장기에는 견딜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총(조총 포함)은 막아내지 못한다고 한다. 의화단은 하북/산동지역에서 일어났는데, 그곳은 전통적인 무술을 익히는 지방이다. 의화단의 대사형, 이사형들중에 쿵후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예를 들면 유명한 주먹의 우두머리 심성화상(心誠和尙)이 바로 자료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는 "혼신기공"을 익힌 무림고수이다. 서태후의 명을 받아 의화단의 '도창불입'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하여 나왔던 강의와 조서시는 한 대사형에게 속았는데, 아마도 그는 이런 기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총이 어떻게 그의 뱃가죽을 뚫지 못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아마도 화약에 술수를 부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두번째 가능성은 경기공과 비슷한 간이술법일 것이다. 당시에 거의 모든 곳에서 '도창불입'의 의화단이 날뛰었는데, 진정 '철포삼'쿵후를 익힌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었겠는가? 절대다수는 그저 속성으로 익혔을 것이다. 산동서남의 대도회와 의화단의 연원은 이미 다툼없는 사실이 되어 있다. 의화단운동이 폭발하기 전날, 서주도의 완조당은 일찌기 사람을 파견하여 대도회를 방문한 바 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대도회는 소위 '금종조'를 익히는데, "이를 익힐 때, 가난한 자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힘이 있는 사람에게는 6천을 비용으로 받는다. 한밤중에 술법을 전수하는데, 등을 켜고 향을 사르며, 새로 길어온 우물물을 바친다. 흰 베에 부적을 그리는데, 부적글자는 '주공조, 도화선, 금종철갑호금신'등이 들어있다. 전업자는 글을 쓸 줄도 모르고, 읽을 줄도 모른다.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받아적게 한다. 이외에 주술(呪術)도 전수한다. 주문을 읽고 부척을 태운다...주문을 읽는 밤에는 칼을 다룰 수 있다. 오래 주문을 외우면 화기가 상하게 할 수 없다. 대체로는 운기지법과 같고, 기가 미치는 곳은 칼로 맹렬하게 가격해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만 잘못하면 칼이 살로 파고든다" 이와 같이 한밤중에 등을 켜고, 향을 사르고, 물을 바치고, 주문을 외우고, 부적을 삼키는 등등의 번잡한 의식은 실제로 일종의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며, '신력'을 빌어 공력이 무궁무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문을 외우는 그날만 칼을 막아낼 수 있는 '신효'가 있다. 실제로 이것은 전수사부의 '장난'이다. 즉, 역학원리를 이용하여, 수법이 적절하면, 칼에 상하지 않을 수 있다. 전부받는 사람이 사실 진정한 쿵푸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조금만 비껴나면" 즉, 각도를 조금만 다르게 하면,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진정으로 경기공을 익힌 자들 중에서도 주문을 외우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훈련이 위주이고, 주문을 외우는 것은 주로 그 기공을 신비화하고, 전수받는 자의 신념을 강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간이술법에서는 완전히 반대이다.
세번째 가능성은 실제로는 두번째 가능성의 연장선상이다. 의화단운동이 가장 흥성했을 때, 각지의 권비들은 의식을 대대적으로 간략화하였다. 무사신한(巫師神漢)의 강림과 결합시켜 부적을 삼키고, 주문을 외우면 즉시 신이 내리고, 칼과 총이 뱃가죽을 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의화단의 사람들은 연공을 할 때, 모종의 기공상태에 든다고 한다. 무술의 기초가 있고, 기질과 심리상태가 비교적 잘 맞으면, 사람은 아주 쉽게 이러한 기공상태에 접어들 수 있다. 그리고 기공상태에 접어들면, 사람들은 왕왕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높이 뛰어오르거나, 멀리 뚫고 지나가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여기에 사부의 지도를 적절하게 받으면, 진짜 칼로도 살을 파고들게 할 수 없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관우, 장비, 조운, 마속과 손오공 저팔계등의 영혼이 몸에 붙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지간에, 우선 그 스스로부터 '도창불입'의 상태가 되었다고 믿는다. 당연히, 어떤 사람들은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의화단의 권비가 법술을 시행할 때, 많은 사람들은 원시민족의 무당과 마찬가지로 입에서는 거품을 물고, 정신이 어지럽게 된다고 한다. 다만, '명체자(明體者)" 즉 신이 내린 후에도 지각이 멀쩡하고 혼미상태에 빠지지 않는 경우이다. 이외에 "연체자(緣體者)도 있는데, "신과 인연이 있어, 잠시만 생각하면 신이 강림한다" 실제로 "명체자" "연체자"는 모두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이고, 제대로 익히지 않았을 뿐이다. 익혔다고 하더라도 사고가 나기 쉽다. 그리하여 당시 의화단의 권단에는 자주 "누창(총에 뚫리다), "누도(칼에 뚫리다)"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다. 스스로 연습할 때도 도창이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네번째 가능성은 의화단의 '도창불입'은 순수히 강호의 사기술인 경우이다. 이는 마술이나 장난으로 볼 수 있다. 의화단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섞여 있어서, 강호의 사기꾼들도 적지 않게 섞여 들어갔을 것이다. 원래 서양인들을 놀라게 하거나 막아내기 위하여 생각해낸 "도창불입"의 법술이 이들의 손에 의하여 마술공연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가능성중 첫번째가 약간 쿵후로 볼 수 있는 것외에 나머지는 사기술에 가깝다. 네 가지 "신술"의 어느 것도 진정으로 '도창불입'을 실현할 수 없다. 이미 총포시대에 돌입한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조그만치의 쓸모도 없는 짓이었다. 서방인들의 당시 기록을 보면, 그들에게 손실과 피해를 가한 것은 청나라의 서양총과 서양대포를 지닌 정규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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