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몽고왕야(蒙古王爺)의 지하보물을 찾아서...(III)

구름위 2013. 9. 28.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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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현지정부는 유일하게 정부가 직접 나선 공개적인 발굴활동을 조직했다.

 

당시 전국은 대약진시대였다. 군중은 포를 쏘고 산을 뚫고 광석을 캐내고 강철을 제련했다. 이 때 모두 지하금고를 생각한 것이다. 어떤 간부가 제안했다. "이렇게 많은 역량을 투입해도 강철을 얼마 만들어내지 못하는데, 제왕부의 지하금고를 캐는 것이 어떤가? 만일 이 재물을 캐낸다면 엉터리 강철 약간보단 훨씬 나을 것이다"

 

왕부둔대대의 몇몇 지도자는 연구를 거쳐, 조씨성의 주임을 파견해서 보물발굴업무를 하도록 결정했다. 그는 먼저 당초 사정을 잘 아는 우회장, 제회장과 강희의 부친 강정방을 초빙했고, 같이 협의했다. 모두 일치하여 동의한 것은 가산의 의문점이 가장 크다는 것이었다. 다만 공사량이 크고, 대량의 인원이 필요했다.

 

조주임은 인근촌의 조양대대와 협의하여 공동으로 발굴하기로 했다. 그래서 인근 몇 개촌의 우파와 일부 농민도 모아서, 모두 100여명이 되었다. 가선을 둘러싸고, 먼저 주위에 2미터 넓이, 4미터 깊이의 도랑을 팠고, 어떤 의심스러운 흔적이 있으면 계속 깊이 파내려갔다.

 

보물찾기이므로,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수행했다. 어떤 때는 낡은 동, 폐철등 구물품을 파내기도 하였다. 2미터 가까이 파내려갔을 때, 지반이 무너지는 곳이 나타났고, 특히 가산에 가까운 곳이었다. 더욱 의외인 것은 넓은 면적이 무너지는 바람에 사람들이 막지를 못하였다. 몇 사람이 다치고 나서 공사는 진전이 더욱 늦어졌다. 가산위에 쌓아둔 새 흙의 토질로 볼 때, 다른 산에서 온 것이었다. 왕부에서 가까운 서산에서 흙을 파와서 대조해보았는데, 이 산의 토질이 가산위에 쌓은 토질과 서로 일치했다. 이로써 지하금고는 서산아래에 있다고 단정했다.

 

토질분석을 거쳐, 역량을 집중하여 가산과 서산을 있는 지역을 발굴했다.

 

발굴과정에서, 흙은 계속 무너졌고, 또 몇 사람이 다쳤다. 연속되는 노동으로 사람들도 매우 피로해졌다. 이때 다시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지하금고를 만든 색복진이 이미 말한 것처럼, 만일 입구의 석문을 건드리면 자동으로 폭발한다. 그 때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재보라는 물건은 만일 연분이 닿지 않으면 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앞에 몇 사람처럼 목숨을 잃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때는 바로 대약진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이다. 강철을 크게 하고, 토지는 크게 파며, 위성을 쏘고, 백기를 뽑고, 운동의 열기가 하늘에 닿을 때였따. 상급에서 하달하는 임무가 하나하나 쌓였따. 인력부족으로 인하여 임무를 완성하기 힘들게 되자, 여러가지 생각을 한 다음에, 상부에서 지하금고발굴작업을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마을에서는 부득이하게 모든 발굴인원을 철수시켰다. 그래서 발굴공사는 중단되었고, 지하금고수색작업은 아무런 성과없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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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에서 이틀을 머물면서 강희노인을 뵙고, 전곽현 박물관을 본 후에, 필자는 마침내 합랍모도로 가는 객차에 몸을 실었다.

 

차가 현성을 출발하여 개략 1시간가량 운전해간 후, 진흙이 날리고 양쪽에 키낮은 평방이 쫙깔린 공로변에 섰다. 매표원이 나에게 말했다. 이 곳이 바로 합랍모도라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보기에 아주 평범한 마을이, 바로 역사상 혁혁한 이름을 날린 왕부의 소재지라는 말인가?

 

합랍모도는 전곽현의 동남쪽에 있다. 모두 700-800호의 사람이 있고, 향정부, 양식창고, 농장, 왕부둔촌의 4개단위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든 마을은 길지 않은 두 개의 거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1개의 길은 부여방향으로 향하고, 한개의 길은 농안으로 통한다. 마을에는 4개의 크지않은 식당이 있고, 2개의 채소, 고기, 계란, 물고기를 파는 상점이 있다. 두개의 사진관이 있고, 몇 개의 화학비료 농구를 파는 잡화점이 있다. 공장은 없다. 건축도 하나같이 평방(平房)이다. 만일, 내가 1주일만 먼저 도착했다면 마을에 여관도 하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00년전에 여기에는 규모가 방대한 왕부가 있었을 뿐아니라, 큰 저택이 운집하고 매우 시끌벅적했다. 천호이상이 모여 살았고, 그중 90%는 몽고족이었다. 몇개의 넓은 거리가 있었고, 그 중의 하나는 세계각지에서 오는 베와 기타 잡화를 사는 길이었고, 하나는 각양각색의 먹을 거리를 사는 곳이었다. 왕부의 뒷산에는 유명한 아랍가묘가 있다. 전성기때에는 안에 1000여명이 살았고, 승려만도 수백명이었다.

 

내가 짐을 마을의 유일한 아직 리노베이션이 완료되지 않는 대청같은 여관방문에 풀어놓았을 때, 얼굴이 태양에 발갛게 탄 여자주인이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행운아입니다" 그러나, 금방 나는 스스로 그다지 행운아이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가져온 연통 핸드폰은 신호가 잡히지 않았고, 오른 쪽귀에는 기괴한 웅웅 소리가 들렸으며, 이런 상황은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나중에 심양에 돌아온 후에나 괜찮아졌다. 더 엉망인 것은 내가 카메라를 열었을 때, 원래 이미 28장이나 찍은 카메라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짐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여자주인은 계속 떠나지 않고, 한켠에 서서 호기심있게 쳐다보았다. 나는 이 기회에 그에게 한 사람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포희청(包喜淸). 이 이름은 강희 노인이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그는 포희청은 제왕야 일가와 비교적 먼 친척이 었다. 현재 왕부둔에 살고 있으니 그가 왕부쪽의 상황을 비교적 잘 알 것이라고 했다.

 

여자 주인은 반갑게 말했다. "포희청? 압니다. 그는 왕부둔의 촌장이죠, 여기 앞쪽 멀지 않은 곳에 살아요. 내가 금방 그가 서쪽으로 가는 걸 봤는데..." 그녀는 밤에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저녁에 되기 전에, 필자는 촌민이 가르쳐주는대로 제왕부의 원래 자리로 가봤다.

 

제왕부의 원래 자리는 마을의 서쪽 끝이었다. 북쪽은 이미 농장의 양록장(養鹿場)과 양식창고 양식말리는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남쪽에는 낮은 민방이 흩어져 있어, 옛날에 수백년간 위풍을 날리던 왕부는 민방들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저, 두 개의 길지 않은 담장과 하나의 흙더미같은 포대(砲臺)가 남아 있었다. 왕부의 원래자리의 서문이 있던 곳에서, 나는 집안에서 태양을 쐬는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내 뒤의 반미터가량 두께의 벽을 가리키며, "이전에는 이게 많이 두꺼웠다. 한 사람이 옆으로 누우면 양쪽에서 머리가 보이지 않았어"라고 했다.

 

나는 노인에게 물었다. "여기에 자주 사람들이 보러 오나요?"

 

노인은 눈을 뜨고 나를 자세히 쳐다봤다. "있지. 여러해 전에, 항상 도시 말쓰는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돌아다니는데, 무슨 보물을 찾는다고 하였다"

 

나는 "당신은 제왕야가 여기에 보물을 묻었다고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노인은 웃기 시작했다. "모두 그렇다고 말하지.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도 못찾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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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녘에, 나는 포희청의 집으로 갔다. 이 제왕야의 먼 친척은 과연 제왕야의 지하보물에 대하여 적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포희청은 제왕야의 지하금고가 있다고 믿을 뿐아니라, 몇개의 증거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제왕야가 왕부를 새로 지을 때, 안은 평지였다. 그런데, 왕부를 다 짓고 난 후에 왕부의 서북쪽, 지금의 양록장이 있는 그 곳에 갑자기 높이 3.5미터, 길이 30여미터, 넓이 20여미터의 가산이 생겨났다. 이 흙은 어디서 온 것인가? 만일 외부에서 왔다면, 전체 마을 주위에 흙을 파간 흔적이 없다. 그래서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바로 이 흙은 왕부의 지하에서 파낸 것이라는 것이다. 흙을 파낸 규모가 이렇게 큰 것을 봐서는 지하시설이 방대할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아무도 왕부에서 어떤 지하시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지하시설은 분명히 아주 은밀한 공사를 거쳐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단지, 제왕야가 왕부를 지을 당시에, 불러온 사람들이 모두 관내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 지하공사는 도대체 어디에 지었는지? 어떻게 지었는지? 구조는 어떤지? 왜 만들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포희청의 두번째 증거는 제왕야는 관외에서 특히 18개의 큰 석조자(石槽子)를 주문제작해서 왕부 안으로 가져갔다. 왜냐하면 이 곳이 주요도로에서 매우 멀고, 당시의 운반수단이 아주 낙후되어 있어서, 이 18개의 돌로 만든 조자를 운송하는 것은 큰 일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괴한 것은 이 18개의 석조자가 왕부로 운반되어 들어간 후에, 신비스럽게 없어졌다는 것이다. 왕부가 다 털릴 때에도 반개의 석조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석조자는 어디로 간 것인가? 유일한 가능성은 지하에 묻었다는 것이다. 지하에 왜 묻었을까? 이것도 사람들이 지하보물과 연관시켜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포희청은 또 하나의 증거를 내놓았다. 바로 왕부안의 옛날 우물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왕야는 그 곳의 우물물을 먹지 않기 시작했다. 그 곳의 물이 쓰다는 것이다. 왕부에서 밥할 때 쓰는 물은 모두 건너편 제대야의 집에서 길어갔다. 나중에 왕부가 훼손된 후에,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왕부의 원래 자리에 집을 지었고, 집집마다 우물을 팠는데, 우물물은 전혀 쓰지 않았다.

 

어렸을 때, 포희청은 그 우물에 가 본 적이 있다. 위에는 아무런 물긷는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고, 수면은 지면에서 5, 6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물색깔이 비정상적이었고, 녹색을 띄고 있었다.

 

그는 추측하기를, 왕야가 우물물이 쓰다고 한 것은 믿을 수 없고, 진정한 이유는 그 우물이 보물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전설에 의하면, 당초 제왕야를 도와 지하금고를 만든 관내인들이 지하금고를 만든 다음에 모두 산채로 지하에 묻었다는 것이므로, 왕야는 아마도 묻힌 시체들로 인하여 우물물이 오염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집안의 우물을 버리고 쓰지 않은 것일 거라는 것이다. 이외에 그 우물이 아마도 지하금고의 출구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우물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하여는 포희청이 계속 입을 다물고 있다.

 

20

 

해방후, 왕부둔의 농민은 무의식중에, 왕부에서 분가해나간 몇몇 종실이 거주하던 곳에서 재물을 캐냈다. 현지인의 눈에는 이것도 왕부에 지하금고가 있다고 믿은 중요한 증거중의 하나였다.

 

제왕야는 막내아들 청고길을 얻은 후에, 자기의 이 숙부, 백부형제들보다 많이 어린 아들이 권력을 빼앗기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제왕야는 자기의 형제와 숙부와 분가를 했다. 매 집마다 수만향의 땅을 준 것을 빼고도, 제왕야는 그들에게 집집마다 북경 사합원식의 집을 지어주었는데, 모두 크기가 적지 않았고, 앞 뒤로 화원이 있는 저택이었다. 이로부터 왕부둔에는 왕부외에 왕소야부, 상대야부, 제대야부, 포가대원의 몇 개의 전형적인 북경사합원건축이 지어졌다.  그중에 왕소야부와 포가대원이 토지개혁때 훼멸된 것을 제외하고, 상대야부, 제대야부는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상대야부는 농장의 장부가 되었으며, 제대야부는 현재 하밥모도향 향정부의 소재지이다.

 

해방구, 토지개혁시기에 훼멸된 포가대원과 왕소야부는 모두 현지인들이 무의식중에 발굴하거나 그 후인들이 재물을 찾은 적이 있다.

 

토지개혁후 얼마지나지 않아서, 한 쌍의 산동에서 도망쳐온 최씨 부부가 두 아들을 데리고 왕부둔에 정착했다. 그들이 지은 집은 마침 포가대원의 옛 부지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다. 어느 날, 최씨집의 큰 아들이 집안에서 땅을 파다가 하나의 단지를 발견했다. 그는 아무 소리내지 않고 단지를 자기 방으로 가져갔다. 이 거동에 대하여 최씨 집안의 누구도 주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최씨의 큰아들은 급사했고, 집안 사람들이 유물을 정리하다가 그가 입고 있는 목면옷속에 돈을 가득 숨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집안 사람들은 그 때서야 원래 그 단지안에 적지 않은 재물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최씨집안의 큰 아들이 돈이 타죽었다"는 소문이 이렇게 주변으로 퍼져갔다.

 

왕소야가에 묻어둔 재물은 일찌기 살인사건을 불러왔다.

 

사건은 하북에서 도망처온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이 "왕목장(王木匠)"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왕목장은 왕부둔에 정착한 지 수년후에, 자기가 살 곳에 새집을 지으려고 준비하였따. 새 집은 마침 원래 왕소야가의 옛집터였다. 왕목장은 이 촌에서 십여명의 도움을 받았는데, 강희와 이웃인 고씨집의 20여세된 젊은이도 불려갔다. 고씨 청년은 새집의 한곳을 파다가 석판을 파냈다. 쇠로 치니 안이 비어 있었다. 고씨 청년은 주인 '왕목장'을 불러서 보게 했다. 두 사람은 석판을 열었는데, 석판 아래는 검은 지하동굴이었다. 왕목장은 급히 석판을 닫고 도와주던 사람을 불러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쉬자고 했다. 곧 밥을 짓겠다고 했다.

 

그날 정오, 왕목장의 집에서는 술과 음식을 매우 많이 준비했다. 왕목장과 그 집안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매우 친근하게 술을 권하였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술에 취했다. 왕목장은 모두 취했으니 오후에는 일을 하지 말자고 하고, 내일 다시 하자고 하였다.

 

저녁에 밥을 먹을 때, 고씨 젊은이는 낮에 자기가 찾아낸 그 석판의 일을 집안 사람들에게 얘기했다. 부친은 그 말을 듣고는 마음이 조급해 졌다. 그 동굴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든 것이다. 아마도 안에는 왕소야가 묻은 적지 않은 재물이 있을 거라고 보았다. 그래서 아들에게 왕목장을 찾아서 따지라고 했다. 분명히 그 석판은 그가 먼저 발견했으니, 만일 재보를 발견하면, 그에게도 나눠주어야 한다고. 고씨집의 아들은 다음날 왕목장이 자기를 불러서 일하라고 할 때 이 일을 따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 왕목장의 집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집은 잠시 공사를 쉰다고 했다. 고씨집안 사람들은 일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아들을 불러 바로 왕목장의 집으로 가서 따지라고 했다. 그러나 고씨 젊은이가 왕목장의 집에 들어간 이후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날 저녁에 고씨 젊은이는 왕목장이 불러온 파출소 사람에게 체포되었다. 죄명은 "그의 딸을 강간했다"는 것이었다. 다음 말, 고씨 사람들이 파출소에 갔을 때, 고씨 젊은이는 이미 차가운 시체가 되어 있었다. 얼마되지 않아, 왕목장은 밖으로 이사갔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가장 요란했던 일은 1980년대초에 있었다. 어느 봄날, 제대야 외가의 후손(일설에는 원래 왕부둔에 사는 오씨 성을 가진 엉터리의사의 마누라)이 도면을 가지고, 현공안국 경찰의 보호를 받아, 제대야부(현재의 향정부 소재지)에서 보물을 파기 시작했다. 보물을 파는 지점은 현재의 토지사무소의 뒷면이고, 방바닥 반쯤 정도로 팠다. 그러나, 이때 보물을 찾았는지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보물캐던 사람이 두 개의 쇠상자를 찾아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은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21

 

포희청은 나에게 확인해 주었다. 우만강은 당시 확실히 토지개혁을 담당한 간부였고, 항상 등에 긴 총을 매고, 아주 위풍당당했었다고. 그리고 강희 노인의 부친은 별명이 있었는데, "강활아자(姜豁牙子)"였으며, 당시 자위대의 부대장이었다고 한다.

 

한편에서 우리의 얘기를 듣던 포희청의 80여세된 장모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색복진에 대하여 얘기했다. 그녀를 붙잡아 왔을 당시에, 장모는 마을의 부녀들이 함께 가서 그녀를 보았다고 한다. 당시 색복진은 농회에 연금되어 있었고, 그들이 들어가 보았을 때는, 색복진이 안쪽을 향하여 누워 있었으며, 손으로 얼굴을 괴고 있어서 자세한 모양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저 색복진의 키가 컸고, 약간 뚱뚱했었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비록 같은 마을에서 수십년을 살았지만, 포희청의 장모는 색복진의 원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왕부의 생활이 백성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이것으로도 알 수 있다.

 

포희청의 장모는 또 강희노인의 색복진이 보물을 바친 이야기의 구체적인 상황을 보충해서 증명해 주었다. 그녀는, 색복진이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에게 1차로 돈을 나누어주었는데, 한 사람마다 거의 100위안이었다. 그 때 3위안이면 말 한마리를 살 수 있었다. 농회에서 돈을 나눠준 사람이 그들에게 말해준 바로는 이 돈은 색복진에게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돈을 나눌 때, 그녀가 농회에서 친히 그 돈을 목격했는데, 마대자루 여러개였다고 한다.

 

강희노인이 필자에게 농회에서 색복진을 심문하던 과정을 얘기할 때, 특히 설명을 덧붙였었다. 당시 형세가 혼란하여, 왕부의 보물에 관한 일을 농회의 사람들이 외부에는 엄격하게 비밀유지했다고. 심문을 통해 얻어낸 이야기는 농회의 몇몇 간부들 외에는 심지어 농회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었다고. 그래서 포희청의 장모가 "돈은 색복진에게서 받아낸 것이고 파낸 보물을 팔아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라고 말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는 않은 일이다.

 

포희청의 장모는 또 한 가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색복진이 당초에 농회 대원에서 목을 매고 죽었을 때, 그 곳은 마을 사람들이 "엄과장"이라고 부른 사람의 집이었다. 위치는 현재의 중심교 부근이다. 바로 그녀가 사는 곳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색복진이 목을 맨 그 버드나무가 있었고, 심지어 몇년 전까지도 존재했다고 한다.

 

22

 

더 많은 왕부보물에 관한 전설을 찾기 위하여, 왕부가 훼멸된 원인과 상세한 과정을 알고자 했다. 며칠 후에 나는 대점으로 가서 당시에 "십팔자매"라고 불리우던 왕부의 시녀 한쌍매(韓雙梅)를 찾아갔고, 제왕야 주방에서 3년간 잡일을 했고, 이미 나이가 94세 고령인 범금산(范錦山)노인을 찾아갔다. 그리고, "왕부에서 캐낸 두 개의 쇠상자"를 산 적이 있다는 소문속의 주인공인 고소근(高素勤)도 찾아갔다.

 

왕부둔에 현재 아직 살아있는 증인들을 종합하여 나는 기본적으로 제왕부가 훼멸된 과정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왕야의 사후에 왕부는 왕위계숭풍파가 인다. 원래, 제왕야는 생전에 유언을 남겨서 상대야의 아들로 하여금 그의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왕야가 막 죽자, 제대야가 왕부의 관리와 색복진과 결탁하여, 자기의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극력 주장했으며, 최후에 그 뜻대로 되었다. 이로써 왕부의 몇 집안은 예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잃고, 모든 가족이 사분오열되었다.

 

2년이 지난 후, 일본이 투항하고 천하의 정세가 돌변했다. 왕부둔 일대는 공산당, 국민당, 토비의 세 세력이 서로 치고받으며 싸웠다. 이 기간동안 왕부의 관리, 병사들은 계속 흩어졌다. 몇몇 아가씨들도 모두 출가했으며, 색복진도 스스로를 지키기 힘들었다. 그래서 토비들에게 한바탕 노략질을 당한 후에, 총총히 도망쳤다. 왕부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빈 집이 되어 버렸다.

 

필자는 몇몇 노인을 방문했는데, 왕부가 훼멸된 과정을 얘기할 때면, 모두 일본이 투항한 그 해에 현지에 내린 기괴한 큰 비를 얘기하곤 했다. 그것은 그들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40일간이나 쉬지 않고 내린 큰 비였다.

 

이 40일간의 큰 비로 왕부의 담장이 무너졌을 뿐아니라, 마을으리 많은 집들도 땔감이 떨어졌다. 여기에 제왕부에는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왕부의 집을 부쉈다. 제왕야가 백두산에서 힘들게 구해왔던 목재들이, 이렇게 촌민들에 의하여 땔감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공산당, 국민당이 왕부둔일대에서 밀고 당기는 전투를 벌이는 기간중에 쌍방이 모두 왕부를 휴식하는 곳으로 삼았다. 밤에 추우면, 집의 나무를 부숴서 나무로 불을 붙였다. 한번은 토비가 왕부둔에 몰래 들어왔는데, 제왕야가 기거하던 7간방에 머물렀다. 떠날 때 불을 끄지 않아서, 7간방은 깨끗이 타버렸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벽돌이나 나무가 필요하면, 왕부에 가서 가져왔다. 2년도 되지 않아서 방대한 규모의 제왕부는 몇군데 끊어진 담장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황폐해진 왕부 안에도 어떤 사람들이 2개의 쇠상자를 찾아낸 적이 있었다.

 

쇠상자를 파낸 사람은 한 사람은 외지에서 이사온지 얼마되지 않았던 관(關)씨 성의 돼지불까는사람이었다.하루는 할 일이 없어서 관씨는 왕부로 가서 보물찾기를 하고 있었는데, 현재의 양록장이 있는 곳에서 진짜로 두 개의 큰 쇠상자를 파냈다. 관씨는 사람을 찾아서 쇠상자의 열쇠를 열었는데, 큰 쇠상자 안에는 각종 의복을 제외하고는 아무른 보물도 없었다.

 

현재 왕부둔향 곽가점에 거주하는 고소근과 그의 누나는 일찌기 몇마오의 돈을 주고 두개의 큰 쇠상자 안의 옷을 샀다. 그녀는 아직도 자기가 샀던 옷의 모양을 기억하고 있다. 바로 연회색의 비단 으로 만들었으며, 앞뒤좌우에 아름다운 홍색, 황색의 자수꽃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들으면 바로 이런 생각이 든다. 왕부에서는 의복과 같은 상용품도 이렇게 묻었는데, 수백년동안 모아온 각종 진기한 골동, 옥기, 황금주보는 어디 묻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23

 

사실상, 왕부의 보물에 대하여는 하나의 세부적인 내용을 그냥 넘겨서는 안된다. 바로 제왕야가 징기스칸의 동생의 적전후손이라는 것이다.

 

이 가족에 관하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은 지금까지 몽고황제의 매장지를 아직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원나라 황제의 매장릉은 유감스럽게도 공백으로 남아 있다.

 

최근 몇십년동안, 중, 미, 영, 독, 일의 여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탐사기기를 가지고 일대효웅 징기스칸의 묘를 찾았지만, 방대한 고고팀도 중국에서 외몽고까지 외몽고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수억인민페를 썼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이 가족의 매장기술은 기이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몽고귀족의 독특한 매장기술에 대하여, 이런 전설이 전해 진다. 몽고왕공귀족은 중요한 인물을 매장할 때는 이런 방식을 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깊은 묘혈을 파고, 시신을 매장한 후에, 말로 편평하게 묘지를 만든다. 그 후에 위에 나무를 심는다. 그 후 한필의 어미 낙타를 부근에 묻어두고, 어미낙타의 새끼낙타를 묘지부근에 몇 바퀴 돌게 한 후 돍아간다.

 

이후, 죽은자의 후대가 제사지낼 때가 되면, 그 어린낙타를 데리고오는데, 어린 낙타가 멈춰서서 슬프게 울음을 그치지 않는 곳이 바로 죽은 자의 묘지이다. 작은 낙타가 늙은 후에는 다시 똑같은 방법을 쓴 다. 그 낙타를 죽인 후, 새끼낙타를 데려오고, 그 새끼낙타가 다시 늙으면 죽인 후, 그의 새끼낙타를....

 

역사연구를 하는 교수가 필자에게 말해준 것이 있다. 유목민족은 일반적으로 매우 독특한 매장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이 민족은 유목과정에서, 특히 유목전쟁시대에, 대량의 약탈해온 물건을 가지고 사방을 다닐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고 쉽게 찾지 못하는 방법으로이 보물을 묻어둔다는 것이다. 필요할 때 다시 와서 파내서 쓴다는 것이다. 원나라가 붕괴된 후에, 도망친 몽고왕공귀족은 아마도 이런 방법으로 세계각지에서 빼앗아온 보물을 묻어두었을 것이라고 한다.

 

징기스칸의 동생의 적전후손으로서, 제왕야도 아마도이런 괴이한 매장기술을 배웠을 것이다. 만일 이렇다면, 일반인들이 그가 보물을 숨긴 비밀을 찾아낸다는 것은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어려울 것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제왕야가 살아있을 때, 일정시간 장춘에 오래 머물렀다고 한다. 제왕부는 일본인에 의하여 관청으로 쓰였다. 이 기간동안 일본인이 일찌기 몰래 왕부안에서 물건을 찾아본 적이 있다. 범금산이 말해준 바로는 아주 여러번 그는 일군의 일본인들이 기괴한 기기를 가지고 제왕부 안의 여러 곳을 뒤진 적이 있다는 것이다. 뭐하느냐고 물었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였지만, 토지개혁때 "제왕야가물건을 묻었다"라는 말을 듣고서야,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일본인들은 당시에 제왕야가 지하에 묻은 보물을 찾고 있었던 것일것이다.

 

24.

 

제왕야의 집안은 300년동안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았을까? 그 지하금고에는 도대에 어떤 물건이 들어 있을까? 가치는 얼마나 될까?

 

이 문제에 대하여 나는 자료를 많이 찾아보았고,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나보았다. 그러나 얻은 것은 매우 적었다.

 

일찌기 왕부에서 시녀로 일했던 희격목의 소개에 의하면 제왕부는 규모가 거대할 뿐아니라 장식도 호화스럽고, 많은 방에는 적지 않은 골동과 옥기를 놓아두고 있었다. 특히 제왕야가 거주하는 7간방과 양변의 상방, 그리고 몇몇 복진이 생활하는 방과 불당, 손님을 맞이하는 영빈관 안에는 대량의 기진이보를 놓아두고 있었다. 이런 물건들은 나중에 하나하나 사라졌다. 그들은 나중에 전란중에 다른 사람들이 가져간 것인지, 아니면 땅에 묻은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제왕야가 정치를 하던 기간동안 삼라마에게 아마도 우리는 제왕야의 방대한 집안자산의 빙산의 일각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광서연간에 제왕야가 막 자사크 보국공을 승계한지 얼마되지 않아, 아랍가묘의 자사크라마가 '원적'했다. 제왕야는 방계인이 종교대권을 빼앗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친히 북경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각지에 손을 써서, 마침내 광서황제의 '은준'을 받아냈다. 그래서 그의 셋째 숙부인 아목이흠격륵도를 본기 집정의 자사크라마오 임명한 것이다. 속칭 포삼야 또는 삼야라마가 바로 그이다.

 

포삼야는 제왕부의 비호하에 사치하고 음일한 생활을 보낸다. 북경에 머무는 기간동안 그는 성색완락에 빠졌다. 제왕야가 자주 그에게 상자로 금과 은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마음껏 사치를 누리도록 해주었다.

 

삼야라마가 72세때 왕부둔에서 사망하였는데, 제왕야는 왕야 및 조카의 이중 지위로 아랍가묘에서 그의 장례를 주재했다. 의식은 상당히 융중하였고, 모든 기의 라마가 송경하고 망령을 위로했다. 이후, 그의 유물을 검사할 때, 이 삼야라마가 왕부내에 소장하면서 입어보지 않은 각종 의복(진귀한 가사는 불포함)만 이천여건이었다고 한다. 능라주단, 초피대의, 수달대의, 각종 금시계, 진주보석, 유리마차등 없는 것이 없었다. 호화사치의 정도는 완전히 수십년후에 수백억의 국가재산을 삼킨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의 영부인과 비교할 만했다.

 

왕부의 뒤에 있는 아오바오위에서 전체 합랍모도를 한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널려 있는 집들의 동쪽에, 7,8리 넓이의 평원이 펼쳐져 있고, 넓은 송화강이 평원의 끝에서 천천히 흘러간다. 수십년전에 거기는 물풀이 무성하고, 갈대가 가득 찼으며 수림으로 덮여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끝은 높은 산맥이 연결되어 있는데 현지 사람들은 그 곳을 음산(陰山)이라고 부른다.

 

수백년 기업을 보유한 제왕부의 이야기는 이 아오바오산과 음산의 사이에 깊이 잠들어 있다. 제왕부가 정말 신비한 지하금고가 있을까? 색복진이 농회간부에게 얘기한 지하금고를 만든 얘기는 사실인지 거짓인지? 그가 말한 내부에 암도기관을 설치하였다는 것은 진실인가? 당사자들이 모두 세상에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이 일련의 의문은 해결되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