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오병감(伍秉鑒)과 임칙서(林則徐)의 은원

구름위 2013. 9. 28.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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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고부호 오병감의 마지막 인생

 

그는 일찌기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2600만냥 백은의 가산이든, 3품벼슬이든 모두 그로 하여금 대청왕조와 서구열강의 틈에 끼어서 편안히 살 수 없도록 하였고, 더더구나 전쟁과 청나라의 몰락을 막을 수가 없었다.

 

2001년,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1000년간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50명을 선정했다. 그중 중국인은 6명인데, 각각 징기스칸, 쿠빌라이, 유근(劉瑾), 화신(和?), 오병감과 송자문(宋子文)이었다. 다른 다섯명과 비교하자면, 오병감은 유일하게 상업무역으로 세계최고부자의 반열에 오른 중국인이다.

 

1839년 3월 10일(음력 정월이십오일), 구정이 막 지나갔는데, 주강(珠江)의 남안 계협가(溪峽街)의 오씨화원(伍氏花園)은 예전의 평정을 되찾았다.

 

홍루몽의 대관원과도 비길만한 이 화원의 중앙에 있는 대청은 수십개의 식탁을 놓고 연회를 베풀 수 있을 정도였고, 천명이 넘는 승려가 독경을 하고 예불을 할 수도 있었다. 후화원에는 수로가 주강으로 직접 연결되었다. 적막한 화원에 한 노인이 잠시 쉬고 있었다. 그는 광동십삼행(廣東十三行)의 우두머리인 오병감이었다.

 

이해에 그는 70세였으며, 바로 보통사람이라는 자식 손자들과 함께 어울려 만년을 즐겁게 보낼 때였다. 그러나, 이날부터 그는 편안한 만년을 보낼 수는 없게 되었다.

 

1839년. 금연전석(禁煙前夕)

 

이날 흠차대신(欽差大臣) 임칙서(林則徐)가 광주에 도착했다. 광주성의 사람들은 서로 앞다투어 이 흠차대신의 풍채를 보려고 나섰다. 오병감의 다섯째 아들인 오소영(伍紹榮)은 현재 이화행(怡和行)의 사장이자 십삼행(十三行)의 총상(總商)이었다. 그가 이 소식을 부친에게 전하자,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던 오병감은 돌연 불안해졌다.

 

십삼행은 하나의 단순한 무역단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세관의 책임도 맡고 있었다. 지금 광주의 아편밀수는 창궐하고 있어, 십삼행의 우두머리로서, 오병감 부자는 자연히 연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청과의 특수관계에 의지하여, 오병감은 일찌기 임칙서가 광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임칙서가 왜 오는지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일찌감치 아들 오소영으로 하여금 외국상인들에게 경고를 주어, 칼끝을 향해 덤벼들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다.

 

다만, 아편을 갖고 오는 외국상인들은 오병감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관료에 대하여 잘 안다고 생각했고, 임칙서도 다른 관료들처럼 뇌성대우점소(雷聲大雨點小, 천둥소리는 크지만 비는 조금만 내린다)의 결과를 보이면서 지나갈 것으로 생각했고 바람을 한번 일으킨 다음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그들이 오랫동안 중국의 아편밀매업자와의 양호한 협력과 광주지방관리와의 친밀한 관계를 믿고 있어 자신들의 판단을 더욱 확신했다. 그들은 요행심리를 가지고, 되돌아가지도 않고, 아편을 없애지도 않고, 아편을 실은 배를 대여산의 남쪽에 숨겨두었다.

 

이러한 사실은 금방 임칙서의 귀에 들어갔고, 이는 오병균이 아편상인과 결탁한 증거의 하나가 되었다.

 

이날 밤, 오병감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이때, 임칙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다음날 고시할 내용을 초안하느라 바빴던 것이다.

 

다음 날, 두 장의 고시가 임칙서의 관청문앞에 내걸렸다. <<수정시고(收呈示稿)>>에서 흠차대신이 이번에 온 목적은 해구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변방시고(邊防示稿)>>에서는 흠차대신 및 따라온 업무인원은 공관내에서 식사를 할 것이니, 지방에서 공급해줄 필요가 없다는 것; 물건을 살 때는 일률적으로 시가에 따라 대금을 지불할 것이며, 외상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흠차대신이 행차할 때 지방관리가 따르지 못한다는 것; 만일 흠차대신을 대접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거두는 등 괴롭히는 일이 있으?, 즉시 엄벌하겠다는 것등이었다.

 

이 두 장의 고시는 강건너편에 있던 오병감의 우려를 더욱 가중시켰다. 그는 임칙서의 믿음과 결심이 모두 자금성안의 도광황제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눈치챘다. 대청왕조는 이미 아편을 금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서양상인의 요행심리와 대청왕조의 아편금지의 결심은 모두 오병감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전대미문의 위기가 다가옴을 느꼈다.

 

그리고 이때, 대적을 맞이한 것은 오병감만이 아니었다.

 

십삼행의 보순양행(寶順洋行)에는 영국상인 Lancelot Dent(한자로는 "顚地"라고 함)의 마음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영국최대의 아편무역상이었고, 중국에서는 악명이 자자했다. 1836년, 청나라대신인 허구(許球)가 일찌기 도광황제에게 그를 조사해서 체포하라고 상소를 올린 적이 있다. 나중에 등정정, 낙병장등의 상소문에서도 그를 괴수로 지목하고 있다. 이전에 그는 광주의 지방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처벌을 벗어났었다. 그러나, 임칙서가 왔다. 예전처럼 행운이 따라줄 것인가?

 

임칙서는 확실히 능력있는 흠차대신이다. 광주에 오기 전에 그는 이미 사람을 보내어 아편밀수상황을 파악했다. 광주에 도착한 둘째날에 등정정, 이량, 관천배, 예곤등의 지방관리와 아편금지에 대하여 논의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외국아편상인들의 행적을 조사했다.

 

며칠간의 조사연구를 거쳐, 임칙서는 "쌍관제하(雙管齊下)"의 방침을 세운다. 한편으로 아편관을 조사하여 폐쇄시키고, 아편매매를 금지하며, 불법상인을 엄벌하여, 근원적으로 아편유통을 금지시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편흡입을 엄금하고, 계연소(戒煙所)를 열며, 강제로 아편을 금지시켰다. 아편의 유통을 철저히 금지시키기 위해서는 외국아편상인들부터 손을 써야 했다. 다만, 어떻게 서양인들과 교섭할 것인가? 그래서 임칙서는 먼저 광주십삼행을 생각해 냈다.

 

샌드위치신세의 십삼행

 

심삼행 상관은 광주시 교외 서남쪽에 몰려 있었다. 주강에 붙어 있는데, 그 곳은 번화한 부두였다. 1686년, 광동정부는 13개의 실력있는 행상을 모아서, 그들을 서양상선들과 대외무역에 종사하고 관세를 대신 징수하여 납부하도록 지정했다. 1757년, 청나라는 폐쇄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유일하게 광주 한 곳만을 대외통상항구로 남겨두었다. 십삼행은 이리하여 당시 중국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대외무역채널이 되었다.

 

대외무역을 독점하게 되고, 상인들의 노력을 더하여, 십삼행은 신속히 번영한다. 청나라정부는 십삼행으로부터 매년 얻는 관세수입이 처음에 수십만냥에서 나중에는 백만냥을 넘어간다. 십삼행은 점차 "천자남고(天子南庫)"로 불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세계급의 대상인들이 나타난다. 그 중에는 바로 당시 세계최고부자 오병감도 있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오병감은 재부의 화신이었다. 그의 상인명 "호관(浩官)"은 갑부의 대명사였다. 미국 보스톤에 있는 한 상선은 배 이름을 "호관호"로 지은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일찌기 미국상인이 그에게 진 7.2만냥백은의 차용증을 찢어버린 적도 있었고, 그의 미국인 의자(義子)인 존 포브스(나중에 미국의 유명한 철도왕이 된다)에게 50만냥을 주어 그로 하여금 기창양행(旗昌洋行)을 설립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그의 이런 행동은 외국상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의 투자는 미국, 유럽, 인도와 싱가포르에 미쳤고, 서방학자들은 그를 "천하제일의 대부호"라고 불렀다.

 

다만, 중국의 전통사회에서, 사회지위와 재부는 일치하지 않는다. "사농공상"의 순서에서 상인은 맨 끝자리를 차지한다. 무역을 독점하면서 돈을 번 십삼행의 상인들은 정부에 돈을 내고 아무런 권리도 없는 관직을 얻는다. 오병감도 거액을 들여 삼품벼슬을 얻는다.

 

그러나, 행상들은 모두 허리에는 만관을 두르고, 머리에는 3품, 4품의 관모를 쓰고 있었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외국상인들이 본 오병감은 "천생 유약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평생동안 농담은 딱 1번만 한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의 근검절약은 미국상인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삼품벼슬을 나타내는 관모는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쓰지 않았고, 그저 자기의 생일에나 가끔 쓸 뿐이었다.

 

사실상, 오병감과 같은 관상은 황제나 관리의 눈에는 언제든지 벗겨먹을 수 있는 상인에 불과했다. 국가에 재난이 발생하거나, 전쟁이 있으면, 황제와 귀족관리들은 돈을 받아갔고, 혹은 지방관리들이 윗사람에 잘보이기 위하여 그들에게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대부분은 십삼행이 주도적으로 돈을 냈다. 대만학자 진국동은 관청의 자료를 근거로 하여 1773년에서 1835년까지, 십삼행이 모두 508만5천냥을 헌납했는데, 이는 그저 사료에 기록된 것뿐이라고 하였다.

 

끊임없는 부담금과 모금은 그러나 상인들에게 가장 괴로운 일은 아니었다. 청나라정부는 천조대국의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십삼행으로 하여금 외국에 부채를 지지 못하도록 하였다. 일단 발생하면, 모든 행상이 연대책임을 지게 되었고, 그 채무는 십삼행의 다른 상인들이 갚아야 했다. 이외에, 청나라정부는 어떤 외국상인이든 십삼행중 가장 부유한 상인을 담보로 내야 했고, 일단 외국상인이 청나라정부에 세금을 미납하면, 행상이 연대책임을 졌다. 이렇게 하여 십삼행의 "보상제도(保商制度)"가 형성된다.

 

십삼행은 정부와 관리의 착취를 당할 뿐아니라, 그들은 외국의 대상인들에게도 잘보여야 했다. 오씨가족이 영국동인도회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많은 무역액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고, 세계최고부자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작은 상인들은 관리의 착취를 받은 후에 굴리는 현금이 부족하였는데, 이런 때는 외국상인으로부터 돈을 빌려 겨우겨우 유지해갔다.

 

이런 상황하에서, 십삼행의 행상들은 언제든지 리스크를 안아야 했다. 대만학자 진국동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절대다수의 행상들에게 있어서 파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장사를 시작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다"

 

행상들은 이러한 틀을 벗어나고자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십삼행의 동문행(同文行)의 행상인 반정형(潘正亨)은 "차라리 한마리의 개가 될지언정, 행상의 우두머리는 되지 않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오병감도 여러번 은퇴를 신청했으나, 관청에서 허가하지 않았다. 1826년, 그는 50만냥의 댓가를 치르고, 이화행의 업무를 넷째아들 오원화(伍元華)에게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그로 하여금 모든 행상의 보증을 서게 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재산중 80%를 정부에 무상으로 출연할테니, 정부에서 그와 이화행의 관계를 끊도록 허가해달라고 하였다. 자신은 20%의 재산만으로 말년을 편하게 보내겠다는 것이었지만, 여전히 허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839년에 되어서도, 그가 여전히 이화행의 책임자이고 십삼행의 영수였다.

 

1938년 금연운동

 

3월 18일, 오병감의 아들인 오소영과 다른 행상이 임칙서의 부름을 받았다. 임칙서는 행상들이 무슨 변명을 하기도 전에 그들이 결탁하여 아편무역을 용인했다고 질책했다.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외국상인들에게 연락하여 3일내에 아편을 내놓게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병사들을 몰래 상관에 보내어 외국아편상인들의 행동을 감시했다.

 

임칙서의 견해에 따르면, 오씨집안과 십삼행은 아편밀수에 대하여 감찰과 저지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이는 '직무유기죄'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후세인들은 그들에게 '서양상인과 결탁하여 아편을 밀수했다"는 매국상인의 낙인을 찍었다.

 

오병감 일가는 아편밀수를 했었는가?

 

사료상으로 보면, 오씨집안의 이화행은 정상적인 무역에만 종사하였다. 차(茶) 무역이 주요업무였다.

 

다만, 일부 오씨집안이 담보한 외국상인은 폭리를 취하기 위하여, 왕왕 아편을 끼워들여왔다. 그리고 서양상인들은 불법밀매업자들과 아편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가장 큰 아편무역상인 Dent가 포함된다. 그리고, 오병감의 의자로 미국 기창양행의 사장인 존 포브스가 포함된다.

 

당시의 '보상제도'에 따르면, 외국상인이 아편밀매를 하는 것이 밝혀지면, 담보한 행상은 전체 십삼행과 함께 모두 책임을 지게 된다. 1817년, 이화행이 담보한 미국상선 한 척이 아편무역을 하는 것이 관청에 적발되었고, 오병감은 별금 16만냥을 납부해야 했고, 다른 행상은 5000냥의 벌을 받았다. 벌금은 당시 아편가격의 50배였다.

 

그리하여, 아편밀수는 폭리를 취할 수는 있었지만, 십삼행의 행상들은 모두 회피하였다. <<동인도회사의 대중국무역편년사>>의 기록에 따르면, "광주행상중에는 누구도 아편무역과 관련이 있는 자는 없다.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던 이 일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미국상인인 헌트고 그의 저작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 행상도 이런 매매를 하고자 하지 않았다"

 

임칙서의 훈계를 다 듣고난 후, 오소영은 양행으로 가서 서양상인들에게 임칙서가 외국상인들에게 아편을 내놓아라는 명을 내렸다는 것을 선포했고, 그리고 중국에 오는 외국상인들에게 반드시 다음과 같이 성명하도록 하였다: "이후 오는 배에는 절대로 아편을 싣고 오지 않겠다. 만일 가져온 것이 적발되면 화물은 모두 몰수되고, 사람은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겠다"

 

한편은 조정관청이고, 한편은 여러해동안 무역거래를 해온 사업파트너이다. 양쪽 모두 다루기 어려운 상대이다. 다만, 오병감은 잘 알고 있었다. 일이 커질수록 누구에게든 좋을 일은 없다는 것을. 일단 대외무역이 중지되면, 오씨집안과 십삼행은 모두 상상할 수 없는 손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위기를 해소시키고자 하였다.

 

다만, 이 며칠간 오씨집안과 서양상인들의 교섭은 순조롭지 못했다. 쌍방은 모두 양보를 하지 않았다. 관청에서 정한 기한이 다가오자, 오병감은 부득이 자기의 재산으로 외국상인들의 손실을 배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외국상인들에게 정부에 협조해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적은 양의 아편을 가지고 왔던 외국상인은 아편을 내놓겠다고 동의하였는데, 최대의 아편상인인 Dent는 협조를 거절했다.

 

Dent의 보순양행과 오씨집안의 이화행은 아주 친밀한 관계였다. Dent의 태도는 오병감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는 5년전의 Napier(律勞卑, William John Napier)사건을 떠올렸다.

 

사실상, 영국인은 중국의 조공제도에 일찌감치 불만이 있었다. 그들은 여러차례 협상을 통하여 중국과 평등한 외교 및 무역관계를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1834년, 영국의 주중구강무감독인 Napier는 양광총독인 노곤(盧坤)에게 공문을 보냈다. 그는 중국정부가 관리들이 외국인과 직접 내왕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이 있는 줄 몰랐다. 노곤은 이 공문은 그의 1품관직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Napier의 요구를 딱잘라서 거절했고, 그에게 즉시 마카오로 되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Napier는 마카오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노곤은 무역을 중단시키고, 상관을 봉쇄하도록 명령했으며, 공급을 끊어버렸다. Napier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두 척의 군함을 이끌고 주강을 올라왔다. 그리고 군함을 인도로 보내어 병사를 데려왔다. 이와 동시에, 노곤은 주강을 봉쇄하고 68척의 전함을 모았다. 그리고 도광황제의 허가를 받아 무력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Napier는 학질로 몸이 약했는데도 봉쇄를 17일간이나 견뎌냈다. 그는 본국상인들의 지지를 잃고나서야 할 수없이 포기하고 조용히 마카오로 돌아갔다.

 

"Napier사건"은 청나라관리들(임칙서 포함)에게 대담하게 상관을 봉쇄하기만 하면, 외국인들은 독안에 든 쥐이며, 치지 않더라도 굶겨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또 다른 측면으로 영국인들에게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청나라의 무역제도를 변경시킬 수 없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오병감은 민감하게 포연의 냄새를 맡았다. 다만, 그는 청나라정부의 무역정책하에서가 아니라면, 십삼행은 존재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외국상인의 지지가 없이는 오씨집안의 상업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이때, 그와 십삼행의 유일한 활로는 갈등을 풀고, 전쟁을 막는 것이었다.

 

3일후, 오소영은 외국상인들이 내놓은 1037상자의 아편을 임칙서에게 내놓고, 이것으로 끝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미리 조사해두었던 임칙서는 대노한다. 이때, 그는 광주지주, 남해지현, 번우지현이 보내온 보고서에서 "아메리카의 오랑캐들은 아편을 내놓으려는 자들이 많았으나, 홍콩에 자리잡은 오랑캐 Dent가 방해했다. 왜냐하면 Dent가 가져온 아편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임칙서는 즉시 성명을 발표하여, 아편을 조사하여 처리하겠으며, 법에 따라 집행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Dent는 죄악이 엄중하여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Dent로 하여금 와서 재판을 받으라고 하였다.

 

그날 오후, Dent는 소환령을 받고, 그는 임칙서에게 친필로 24시간내에 돌여보내겠다는 보증을 발급할 것을 조건으로 요구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임칙서는 이 1037상자의 아편은 분명히 십삼행이 외국상인들과 결탁하여 관청을 기망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오병감에게 본때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한다.

 

3월 23일, 임칙서는 사람을 보내어 오소영을 결탁하여 흠차대신의 거주지로 끌고와 심문한다. 오씨집안은 다시 타협하여, 집안재산을 내놓겠다고 한다. 그러나, 임칙서는 딱잘라 거절한다: "본대신은 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네 머리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오소영의 관직을 박탈하고, 감옥에 가둔다.

 

같은 날, 임칙서는 오병감과 또 다른 행상인 반정위의 관직을 박탈하고, 쇠줄에 묶어서 보순양행에 가둔다. Dent에게는 빨리 나타나서 재판을 받도록 재촉한다. 그리고 만일 Dent가 오지 않으면, 오병감과 반정위를 죽이겠다고 한다. 그러나, Dent는 이 두 옛친구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여전히 나오길 거절한다.

 

비록 임칙서가 오병감을 처결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소동을 겪으면서 오병감의 체면은 땅에 떨어진다. 그가 거액을 들여서 사들인 3품관직은 그에게 권세를 가져다 주지 못했고, 심지어 자신의 재산과 존엄도 지키지 못했다. 그가 생명을 담보로 보호했던 영국상인은 그의 생명이 위협을 받을 때, 아무런 망설임없이 그를 버렸다.

 

임칙서는 오소영을 석방한 후, 그에게 외국상인들로 하여금 아편 전부를 내놓게 하도록 독촉하게 하고 3일내에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오씨집안은 다시 한번 Dent와 협상을 별인다. 그리고 그에게 아편을 내놓고 사건을 마무리하도록 설득한다. 다만, Dent의 태도는 영국 주중국상무감독 Charles Eliot(義律)이 온 후로 더욱 강경하게 바뀐다.

 

3월 24일, Eliot는 마카오에서 광주로 온다. 그는 Dent를 도망치도록 하였을 뿐아니라, 영국아편상인들에게 아편을 내놓지 말도록 교사한다. Eliot의 이번 조치의 진실한 목적은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크게 확대하여 전쟁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영국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치자 임칙서는 오병감과 십삼행에 적잖이 실망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을 통하여 외국상인들과 교섭하지 않기로 한다. 노곤의 조치를 본받아 직접 상관을 봉쇄하고, 식량과 물의 공급을 끊어버린다.

 

외국상관에는 적지 않은 상인들이 아편무역과 관련이 없었따. 만일 인명사고라도 난다면 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인도적인 견지에서 그리고 자신의 이익측면에서, 오병감은 아들로 하여금 몰래 외국상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나중에 오씨집안이 매판상인으로 매도되는 근거가 된다.

 

3월 28일, 아직 전쟁준비를 마치지 않은 Eliot는 서로 맞부닥쳐서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다고 생각하여, 할수없이 아편을 내놓게 된다.

 

1839년 6월 3일, 임칙서는 세계를 놀라게한 호문소연(虎門銷煙)을 실시한다. 이때, Dent와 Eliot는 영국외교대신 Henry John Temple Palmerston(중문으로 巴麥尊이라 함)에게 보낸 서신이 브리튼으로 향한다. 중국과의 전쟁이 무르익고 있었다.

 

1840년, 아편전쟁

 

1840년 6월, 영국원정군은 주강입구를 봉쇄하고, 아편전쟁이 발발한다. 한 미국상인의 기록에 따르면, 오병감은 당시 놀라서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아편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는데, 결국 철저한 실패로 돌아간다. 오병감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따. 그는 그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중국이 승리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오병감은 잘 알고 있었다. 영국이 이번 전쟁을 일으킨 근원은 바로 십삼행의 무역독점에 대한 불만때문이고, 직접 중국과 무역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이번 전쟁은 중국정부의 조공무역제도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십삼행의 이익에 대한 전복이었다. 일단 영국이 이기면, 의심의 여지없이 십삼행의 지위는 상실되어버릴 것이다.

 

오씨집안과 다른 행상은 모두 이번 전쟁에 거액의 재산을 내놓았다.

 

아편전쟁이 정식으로 발발하자, 영국군함이 광동의 호문밖에 왔는데, 견고한 횡당서 방어공사로 인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이 공사는 바로 2년젼에 오씨집안등 행상들이 10만냥의 백은을 갹출하여 만든 것이다. 오랫동안 청나라정부의 "천자남고"였던 십삼행은 아편전쟁기간중에 당연히 국가를 위하여 계속 자금을 수혈해 주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오병감과 십삼행은 적극적으로 모금활동을 벌이고, 돈을 내서 보루를 쌓고, 전선을 건조하고, 대포를 만들었다. 상인으로서 오병감은 이에 대하여 좀 억울한 점이 없지는 않았다. 그가 한 미국상인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그가 거대한 압력을 받고 있다고 적었다: "나처럼 나이든 사람에게는 실제로 너무나 무거운 부담이다"

 

그렇지만, 청나라 군대는 완전히 궤멸했다. 이상한 것은 영국군이 그래도 광주성으로 쳐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광주성이 금성탕지처럼 단단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실제로 1841년 5월, 영국군이 광주성까지 밀고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당시 혁산(奕山)은 싸울 능력도 싸울 마음도 없었다. 그리하여 행상들을 내세워 조정을 시도한다.

 

광주성밖에서, 명을 받은 오소영과 영국군의 우두머리 Eliot는 협상을 시작한다. 사실상 오소영등은 협상할 꺼리는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오씨집안의 또 하나의 어쩔 수 없는 장사였는지 모른다. 결국 쌍방은 <<광주화약(廣州和約)>>을 체결한다. 이 화약에서는 청나라군이 광주성바깥 60리를 물러나고, 1주일내에 배상금 600만원을 내놓으며, 영국군은 즉시 호문포대바깥으로 물러난다는 것이었따.

 

600만원이라는 거액의 배상금으로 광주성의 안전을 확보했다. 이것은 물론 비애이다. 이 거액의 돈중 1/3은 십삼행의 상인들이 내놓았고, 그중 오병감이 가장 많은 돈을 내놓았다. 110만원을 내놓았다.

 

배상금으로 도시의 안전을 확보한 것에는 행상들의 희생이 제일 컸다. 그러나 광주성을 지킨 공로는 혁산에게 모두 돌아갔다. 그는 청나라정부에 보고하면서 상인들이 돈으로 구걸하여 강화한 진상을 숨겼다. 그저, '외국상인들과의 일은 이미 안정되었다'고만 보고했다. 도광황제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혁산이 능력있다고 칭찬했다.

 

유감스러운 점은, 이번에 행상들의 노력으로도 오병감등에게는 아무런 영예가 돌아오지 않았고, 더 많은 비난만 쏟아졌다는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서양인들과 장사를 하던 행상들은 중국인들에게 '매국노'로 찍혀버렸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기부하든지간에, 이 낙인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돈을 내고 평화를 구걸하는 것도 열혈애국자들의 뜻과는 어긋났다. 이것은 치욕이고, 당연히 그 질책은 협상에 가담한 오씨집안과 십삼행의 행상들에게 돌아갔다.

 

청나라정부는 전쟁에서 패한 후, 영국과 담판에 들어간다. 조정관리의 추천하에, 오병감의 아들인 오소용이 오랫동안 영국인들과 협상한 경험이 있다고 하여, 남경으로 불려가서 중국측대표가 되어 영국측과 협상을 벌이게 했다. 오소영은 명령을 받은 후 즉시 북상했다. 그러나, 그가 남경으로 가는 도중에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진 기영(耆英)을 대표로 하는 청나라조정은 아주 불평등한 <<남경조약>>에 서명을 마쳐버린다.

 

아마도 오소영을 대표로 하는 중국측이 영국측과 협상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결론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오씨집안이 중국역사를 바꿔 쓸 수 있는 이 기회는 이렇게 지나가 버렸다.

 

1842년, 아편전쟁은 중국의 패전으로 끝이 나고, 패전의 결과는 오병감과 십삼행이 부담했다.

 

<<남경조약>>의 제4조 내지 제7조는 중국이 영국에 2100만냥의 은원을 배상하여야 하는데, 이는 1470냥백은에 해당했다. 이때 청나라정부의 국고에 남아 있던 은은 겨우 700만냥에 불과했다. 광동십삼행은 청나라정부의 착취대상이 된다. 이번의 배상금에서 오씨집안은 100만냥, 행상공소에서 134만냥, 다른 행상들이 66만냥을 나누어 부담한다.

 

이외에 오병감이 걱정했던 대로, 영국은 이 기회에 행상제도를 없애버린다. <<남경조약>>의 규정에 따라, 광주행상은 더 이상 무역을 독점하지 못한다. 5개의 항구가 개방되었고, 십삼행의 무역특권은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하게 되었다.

 

1843년, 병사

 

심삼행은 아편전쟁의 최대피해자이다. 십삼행의 우두머리인 오씨집안은 더욱 거대한 손실을 보았다. 오병감의 계산에 따르면, 전쟁중에 오씨집안의 손실은 200만냥백은을 넘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당시 2600만냥을 소유한 세계최고부자에 있어서 내상이라기보다는 외상에 불과했다. 하물며, 심모원려의 오병감은 미리 사업을 세계로 전개해놓았고, 행상사업만이 오씨집안의 유일한 생명선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의 오병감은 만사에 의욕을 잃었다.

 

1842년 12월 23일, 그는 매사추세츠에 사는 미국친구 J. P. Cushing에게 편지를 썼는데, 만일 나이가 많아서 바다의 폭풍을 견디면서 건널 수 없지 않으면, 그는 미국으로 옮겨서 살고 싶다고 했다. "보기에 오호관(오병감)은 양행의 업무에 실망하였을 뿐아니라, 전체 중국에 실망했던 것같다" 진국동은 <<동아시아해역1천년>>에서 이렇게 말한다.

 

1843년 9월, 오병감은 내우외환중에 오씨화원에서 병사한다. 향년 74세이다.

 

그는 일개상인으로서 국가의 흥망에 책임을 부담했다. 이는 세계최고부자인 그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따. 오병감의 비극은 여기에 있었다.

 

13년후, 다시한번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광주십삼행은 전쟁터가 된다. 그해 12월 15일, 170년역사를 지닌 상관은 포화속에서 사라진다. 십삼행은 철저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