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몽고왕야(蒙古王爺)의 지하보물을 찾아서...(II)

구름위 2013. 9. 28.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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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회는 색복진이 바친 재물을 계획에 따라 처리한 후, 즉시 회의를 소집했다. 여러 사람이 자기의 의견을 얘기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비교적 귀중한 물건을 내놓지 않았다. 역대제왕이 하사한 각종 물건과 문헌, 왕공가족이 수백년간 전해내려오고 집적한 기진이보와 거액의 자산은 아직 행방불명이다. 색복진에게 좀 더 캐내야 한다. 그녀는 제왕야와 생전에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고, 특히 그녀가 막내왕자를 낳은 후에 제왕야는 모든 희망을 막내아들에게 걸었었으며, 그녀에 대하여도 아주 잘 대해주었고, 말하는 것마다 들엊었으므로, 만일 지하금고가 있다면, 색복진이 모를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중요한 순간에, 하나의 놀랄만한 유혈사건이 터지고 만다.

 

당시, 동북이 해방되기 직전에, 장춘주변지구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쟁탈하려는 땅이었다. 농안, 덕혜, 전곽의 대다수지역은 "톱처럼 밀고 당기는"형세가 되어 있었다. 이것은 토비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이 지역에는 많은 토비들이 있었는데, 적은 집단이 수십명, 많은 집단은 수백수천을 헤아렸다. 그들은 집단을 이루어 노략하고 강탈하였다.

 

그중의 한 토비중에 "서래순(西來順)"이라는 자가 있는데 토호(土豪) 출신이었고 악독했으며, 기괴한 계책을 잘 냈다. 그는 밀정을 통하여 왕부둔 농회가 제왕부에서 금은재보가 든 상자를 찾아냈으며 가치가 백만금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제왕야의 셋째부인이 그들의 손에 들어있으며, 그녀가 지하금고의 행방을 알고 있으며, 농회가 곧 조사해서 찾아낼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서래순"은 이 말을 듣자마자 회가 동하였다. 즉시 밀정을 보내어 왕부둔 농회의 지리적인 위치, 무장정도, 화력배치, 조직기구등을 알아냈다.

 

토비의 밀정이 내부인을 통하여, 왕부둔 농회의 모든 상황을 자세하게 알아내었다. 농회는 원래의 "엄과장(嚴科長, 제왕부의 사무총감)"의 집에 세워져 있었고, 사방은 1장8척높이의 흙담장이 있었고, 4각에 포대가 있으며, 포대에는 태간총(두 사람이 사격하는 대형 화약포)이 하나 설치되어 있고, 매 포대는 밤낮으로 4 사람이 당번을 서며, 모두 총을 들고 있다. 농회는 무장역량이 자위대 하나로 36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장과 몇명의 주요인물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대원들이 쓰는 것은 엽총이다. 농회간부 13명은 모두 장총과 권총을 가지고 있고, 집안에는 5,60명정도가 있다는 것이다.

 

10.

 

8월 15일, 바로 토지개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이다. 왕부둔 부근의 몇개 촌의 농회는 연합하여 대규모의 투쟁회를 개최하였다. 회의상에서 몇몇 죄질이 나쁜 토호를 처결하였고, 몇몇 만주국의 매국노와 비적괴수를 총살하였다.

 

회의후, 왕부둔농회는 부근 몇개 촌 농회의 지원에 감사하기 위하여, 농회에서 간단한 연회를 베풀었다. 연합행동공약을 체결하여, 이후 투쟁업무와 적들의 파괴와 습격에 대비하기 편하게 하였다. 연합투쟁의 성공적인 개최와 대회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내어 농회간부들은 한 자리에 모여 질펀하게 먹었다. 연회때, 주량이 낮은 간부들은 취하였고, 우회장은 이 사람들을 농회에서 자도록 했다. 나머지 외지간부들은 각자의 촌으로 돌아갔다.

 

한밤중에, 돌연 말소리와 총소리가 크게 들렸다. 왕부둔의 농회간부, 자위대, 다른 촌에서 온 농회간부, 대원은 즉시 조직해서, 포대와 담장 사방의 사격지점으로 갔다. 토비들은 원내에 왕부둔 농회의 수십명만 있는 줄 알고, 사람이 많은 것을 과시하며 미친 듯이 공격하였다. 몇 차례 담장꼭대기에 올랐다가 격퇴되곤 하였다. 전투가 아주 격렬하고 잔혹하게 진행되었으며, 쌍방의 사상이 엄중했다. 그러나, 쌍방의 역량의 차이가 크고, 무기는 토비들이 훨씬 우수했다. 전투시간이 길어지자 농회측이 수세에 몰렸다. 엄과장대원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우회장은 일부 남은 사람들의 엄호를 받아 나머지 대부분 사람들이 포위를 뚫고 철수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집안에 있던 색복진은 총소리를 들은 후, 국민당의 군대가 해방구로 진입하여 소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몇차례 동주임의 손을 벗어나서, 담장을 넘어 국민당에 투항하려고 하였다. 나중에 담장밖에서 토비들이 큰 소리로 "왕야의 작은 마누라를 잡아라. 반드시 살아 있으면, 상금 1천을 주겠다"고 한다. 이 때서야 토비가 난을 일으킨 것을 알고 안색이 창백해 졌고, 농회간부와 함께 포위를 뚫고 나가서 산속에 숨기 시작했다.

 

이번 놀라운 돌발사건으로 색복진은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보냈다. 농회간부가 여러모로 위안을 하고, 세심하게 돌보아주어도, 그녀는 미래생활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지지 못했다.

 

어느날 밤, 깊이 잠들었던 동주임이 돌연 울음소리와 중얼거리는 소리에 깨었다. 그녀는 울면서 얘기하고 있었는데. "왕야, 그 금고...나는 정말 양쪽 다 곤란합니다..." 잠꼬대이므로 말은 끊어졌다 이어지곤 하였고, 전부 명확히 들을 수는 없었다. 다음 날, 동주임은 이 상황을 우회장에게 보고했다. 분석을 거쳐, 색복진이 꿈에 제왕야를 만나고, 제왕야를 향하여 자기 내심의 고충을 털어놓은 것이라고 보았다: 말해버리자니, 제왕야의 생전에 고심하여 만든 지하금고의 수백년간 모아온 거액의 자산을 고스란히 날리는 것이 되고, 말하지 않자니, 농회의 그녀에 대한 보살핌을 배반하는 것이 되어 그녀는 둘 다 곤란하다고 한 것일 것이다. 낮에도 계속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보니, 밤중에 끔을 꾼 것이고, 꿈 속에서 그 내용을 얘기한 것이다. 농회는 이렇게 판단하고, 그녀가 지하금고의 상황을 분명히 알 것으로 보고, 즉시 조사강도를 높였다.

 

여전히 우회장이 스스로 이번 중임을 맡았다. 그는 먼저 부드럽게 대한 후 나중에 강경하게 대하는 방식으로 색복진의 입을 열고자 생각했다. 그는 먼저 며칠을 두고 한 번씩 연회를 베풀어 그녀의 우수와 번민을 해소해주고자 하였다. 그녀의 마음 속의 일과 왕부내의 주요한 지점에대한 반응을 관찰하기 위하여, 그녀와 함께 제왕부를 산택하곤 하였다. 원내를 한번씩 다 둘러보았다. 불당, 왕야침실, 특히 후화원의 가선아래에 이르렀을 때, 그녀의 표정이 매우 무거운 것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가산을 한바퀴 둘러보고, 그 자리에 서서 많은 생각에 잠기었으며, 오랬동안 떠나고자 하지 않았다. 떠날 때는 서산방향을 한참 바라보고 그 다음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서, 농회원의 침실로 돌아왔다.

 

11

 

위에서 말한 잠꼬대와 제왕부를 한바퀴 둘어보고 난 후, 색복진의 정신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어떨 때는 정좌하고 앉아 오래 생각하고, 어떤 때는 발을 옮겨 돌아다녔다. 특히 밤에는 전전반측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떤 때는 탄식을 내뱉곤 하였다. 우회장은 그녀가 마음 속으로 갈등을 많이 느끼는 것으로 보았고, 복잡한 정신적인 갈등을 겪는 것으로 보았다. 즉시 작업을 개시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호기목력이 언제가 색복진의 생일이라고 말해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녀에게 사상공작을 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날 밤, 색복진은 뭔지 알지도 못하고, 제왕부의 원래의 침실로 불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는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실내는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모든 진열물이 예전과 똑같았다. 책상과 침대위의 생활용품까지도 원래와 똑같았다. 탁자위에는 중간에 커다란 케잌을 놓아두었고, 위에는 촛불을 붙여두었다. 주위에는 제왕부에서 일하던 범주방장이 요리한 각종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우회장, 강대장등 몇명의 농회주요 간부들이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회장은 농회를 대표하여 축사를 했다. 색복진은 감동했고, 감개가 무량했으며,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먹고 마셨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아주 즐거워 했다.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며 술을 권하고 축하하여 실내는 아주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술이 세 반 돌고 요리가 다섯번 바뀌자 색복진은 이미 술에 거나하게 취했다. 이 때 우회장이 암호를 발하고, 동주임 이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핑계를 대고 나갔다.

 

우회장은 색복진과 한 잔을 부딪친 후, 주제를 지하금고로 옮겨갔다. 그는 "셋째 부인, 저번에 당신이 스스로 우리에게 그 재물을 건네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당의 해방사업과 농회업무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매우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제왕부의 수백년의 기업과 거액의 자산은 아직도 여전히 지하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그것도 원래는 많은 노동인민의 피와 땀이므로, 인민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외에, 전국의 해방전쟁에도 자금이 많이 필요합니다. 장래 국가건설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농회의 자금은 매우 부족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부인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회장의 이번 말로 색복진의 마음이 달아올랐다. 거기에 술기운까지 겹쳐서 그녀는 처음으로 왕야의 지하금고에 대하여 말을 꺼냈다. "농회의 저에 대한 보살핌과 대접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내가 알고 있는 지하금고에 관한 모든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요구에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색복진이 말한바로는 그녀가 아들, 즉 제왕야의 유일한 계승자인 청고길이 9살이 되던 해에, 희망에 가득찬 제왕야가 왕자책봉을 진행하려는 때에, 그는 페결핵에 걸려 불행히 죽고 만다. 제왕야는 아주 슬퍼서, 자기가 일생동안 일궈온 것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였다. 더욱 발전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비통한 나머지 그는 본 가족의 수백년간의 기업과 쌓아온 재물과 가치가 엄청난 문화재와 기보들은 쉽게 외척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은 더욱 원치 않았다. 그래서, 비교적 견고하고 잘 숨겨진 지하금고를 만들어 거기에 모든 보물을 감추어 두기로 계획했다.

 

12

 

심사숙고를 거쳐, 제왕야는 위치를 선정했다. 그것은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견고하고 잘 숨겨진 곳이었다. 나중에 산동, 하북에서 관외로 도망쳐온 난민들 중에서 20명의 신체건장하고, 손재주가 있는 청장년을 뽑아서, 그들의 집사람들과 3년의 고액의 품삯을 선불하고, 가족들에게는 깊은 산에서 채광을 하므로, 가족들과는 모든 연락을 끊는다고 말했다.

 

지하금고의 설계도는 제왕야의 백부인 상대야(祥大爺)가 설계한 것이다. 당시에는 그에게 어디에 쓰는지는 말해주지 않았고, 그저 절대로 안전하고 임시로 부숴버릴 수 있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요구했다. 상대야는 깊이 묻기가 뭣해서, 있는 힘을 다하여 계획을 세워주었다. 상대야는 아주 이름난 발명가였다. 각종 기계, 총포를 만들 줄 알았을 뿐아니라, 스스로 발전기를 만들어 발전도 하였다.

 

세밀한 생각과 정교한 설계를 거쳐, 고도로 정밀한 설계도가 제왕야에게 건네졌다. 위치는 지하 30미터이고, 사방은 돌, 청석벽돌, 시멘트로 만들며, 중국거리로 1리에 이르는 지하 터널을 만들고, 1층의 돌문, 2층의 철문을 두어 봉쇄하는 것이었다. 앞의 2층문의 안에는 폭약을 설치하고, 마지막 문이 파괴되면, 자동폭발장치가 순간적으로 작동하게 만들었다. 1리 길이의 지하터널과 금고는 같이 폭파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번천복지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지하금고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제왕야는 도면을 보고는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하며, 자신의 뜻에 딱 맡는다고 하였다.

 

봄이 되어 땅이 풀리면서 공사를 시작했고, 겨울이 되어 땅이 얼면 공사를 중단했다. 일꾼들은 완전히 봉쇄된 생활을 하였다. 비록 의식주는 풍족했지만 세상과 격리되어있어 연금생활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귀와 눈을 피하기 위하여, 후화원에 가산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파낸 흙을 거기에 쌓아두었다. 그들은 낮에는 숨어있고, 밤에는 나와서 3년의 시간을 들여, 마침내 지하금고를 완성하였다. 이 일꾼들은 매우 기뻐하며 환호작약하였다. 자기들도 마침내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그러나, 그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지하금고가 준공될 때가 바로 그들의 제삿날이라는 것이었다. 완공연회를 마친 후에, 그들은 영원히 지하금고와 짝이 되어 토산속에 잠들게 되었다.

 

색복진이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주임이 실수로 바깥에서 찻잔을 땅에 떨어뜨리는 소리였다. 색복진은 저번 돌발사건으로 놀라서, 마음 속에 꺼리는 것이 있었었다. 이번 소리로 깜짝 놀라며 몸에서는 식은 땀이 흘렀으며 술도 거의 깨버렸다. 잠시 쉬고는 "이런 내용은 제왕야가 나에게 말해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죽기 전에 입구를 말해준다고 하였는데, 그가 급히 병사하는 바람에 나에게 미처 말해주지 못하였습니다. 우회장, 상세한 상황은 이미 다 말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입구를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당신들 농회의 운을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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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부둔 농회는 색복진이 털어놓은 상황에 대하여 격렬하게 토론을 벌였다. 부회장인 제씨를 위시한 일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전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색복진은 착취계급이므로 투쟁대상이라는 것이었다. 적대계급에 대하여는 마음이 약해지면 안되고, 더군다나 고식적인 방법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만일 계속 이렇게 하다가는, 결국은 적대계급에 항복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색복진은 상층 통치계급의 주요한 인물인데, 혁명독재의 대상이다. 이런 자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고, 그녀의 영혼에 닿지 않고서는 그녀로 하여금 과거의 잘못은 통렬히 반성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일 이렇게 부드러운 방법을 계속 쓴다면, 어느 해 어느 달이 되어서야 지하금고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현재, 농회의 임무는 매우 중요하다. 토지개혁임무, 전방지원업무, 선전교육업무, 모든 업무가 전력을 기울어야 할 것이고, 단시간내에 끝내기 힘든 것들이다.

 

우회장은 반대파들의 비난과 질책을 받은 후 내심으로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말이 약간 과하기는 하지만 역시 이치에는 맞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농회가 색복진에 대하여 적지 않은 인력과 시간을 들였고, 그녀에 대하여 지나치게 인자하게 대한 측면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회장은 스스로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결국 색복진은 일반적은 독재의 대상이 아니라, 이전의 여러 방법을 사용하여 이미 성공적으로 그녀로 하여금 일부분 재물을 내놓게 하였고, 이 재물은 전체 왕부에서 보면 적다고 할 수 있지만, 금액은 적지 않았던 것이다.

 

공산당은 역대로 적대계급의 처실에 대하여, 투쟁의 일면과 쟁취의 일면을 강조하였다. 색복진은 쟁취의 대상일 뿐아니라, 매우 큰 가치도 가지고 있었다. 만일 계속 그녀의 마음을 공략하는 정책을 쓴다면, 단결의 방침을 채택하고, 교육을 강화한다면,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색복진이 주도적으로 지하금고를 내놓을 가능성이 있었고, 그녀로부터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경제적인 가치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모든 정력과 심혈을 해방사업과 혁명정권건설에 바쳤는데, 왕부둔농민협회의 건립과 공고를 위하여, 업무를 전개하고 투쟁을 하였으며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지하금고를 추적하는 데서도 천신만고끝에 갖은 머리를 짜내었는데, 동지들은 이해와 칭찬은 못해줄망정, 반대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고, 자기가 그녀를 보호한다고 하고,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투쟁의식이 결핍되었다고 하니, 이것만큼 불공정한 일이 어디있겠는가.

 

우회장이 여기까지 생각하자, 스스로 의욕이 사라졌다. 일이 교묘하게 되느라고, 마침 아랫배가 아팠다. 그래서 지하금고를 추적하는 일을 제씨 부회장이 처리하도록 미루고, 자기는 집으로 돌아갔다.

 

14

 

제부회장이 일을 맡은 후, 즉시 사람에게 명하여 색복진을 제왕부에서 붙잡아와서 농회원내의 거실에서 감시하였다. 오후에 출근해서, 바로 색복진에 대하여 심문을 시작했다. 그날 정오에 제부회장은 술을 몇 잔 마셨는데, 색복진이 농회로 온 후에, 제 부회장은 술기운을 빌어 탁자를 내려치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너는 인민의 머리위에 올라타서 위세를 부리고 복을 누린 물건이다. 왜 군중으로부터 긁어간 재물을 내놓지 않고, 땅속에 묻어버렸느냐. 네가 저번에 꿈속에서 잠꼬대 한 것으로 마각은 드러났다. 우리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 뭐가 좋고 나쁜지를 알아라. 만일 이렇게 계속 말하지 않다가, 나를 나중에 원망하지 말라. 나 제모의 채찍은 야채를 위한 게 아니다. 내가 신경쓰지 않도록 해달라"

 

의외인 것은 색복진이 잠시 놀란 다음에 돌연 안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회장, 당신도 화내지 마십시오. 너무 조급해 하지도 마십시오. 내가 어찌 농회에 미안한 일을 하겠습니까. 비록 양야의 새언에 나에게 지하금고의 입구에 대하여 말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자세히 생각해보면, 입구를 찾을 단서는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때 파도 늦지 않지 않을까요?" 제부회장은 이 말을 듣고는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러면 네가 좀더 생각하게 해주겠다. 내일 즉시 답을 달라"라고 말했다.

 

아마도 하늘의 뜻이었나보다. 이날 농회는 전선에 보내는 군화를 만들고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동주임과 다른 농회간부들이 사람들을 조직해서 일시키느라고, 색복진을 감시할 틈이 없었다. 호기목격도 피로해진 몸으로 늦게 돌아와서, 색복진의 건너편 침대에서 바로 잠들어버렸다. 한밤중이 되어서 색복진은 호기목격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허리의 끈을 풀어서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아무도 이 짧은 몇시간내에 색복진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모른다. 자기의 운명이 박복하다고 느꼈을까? 아니면 마음 속으로 왕부의 거액의 보물을 생각했을까? 결과적으로 다음 날 아침에 왕부둔의 촌민은 색복진이 엄과장집의 버드나무에 목을 맨 것을 발견했다.

 

색복진의 사망소식은 즉시 전 촌에 퍼졌다. 군중간부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모두 공을 세워서 잘못을 속죄라하고 하더니, 색복진이 그렇게 많은 재물을 내놓았는데도 핍박해서 죽게 만들었다"고 하기 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지하금고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으니, 죽는게 맞다"고 하기도 했다. 우회장은 자기가 색복진을 보호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고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색복진의 유체를 남아묘에 묻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람을 보내어 제부회장을 찾았다. 그가 업무를 신중하게 하지 못하여, 색복진을 자살하게 하였으며, 이로써 지하금고를 추적할 단서를 잃어버렸고, 천만금에 달하는 재물이 날라갔으며, 농회가 지금까지 쏟아부운 정렬과 피땀이 수포로 돌아갔다.

 

16

 

우회장이 사무실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을 때, 수년전에 제왕부를 떠난 사람이 돌연 나타났다. 그는 바로 이전에 우회장과 함께 제왕부내에서 일을 했던 화파식(花把式)이었다. 그는 급히 왕부둔에 돌아와 우회장에게 하나의 비밀을 말해주었다. 그는 친히 제왕부내의 이상한 동정을 목격했고, 색복진이 최소한 일부 지하금고를 만드는 일을 지휘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회장은 장단지를 내리쳤다. "아이쿠, 넌 왜 좀 더 일찍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는가. 색복진은 이미 죽었다." 화파식은 매우 놀랐다. "그럴리가? 얼마전에 내가 고향사람에게 듣기로는 색복진이 농회에서 아주 잘 살고 있다고 하던데, 이미 일부 재물도 내놓았고. 다만 지하금고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급히 돌아와서 너에게 이걸 얘기하는 건데."

 

우회장은 말했다. "너는 어떻게 아는 건데?'

 

화파식이 말했다. "말하자면 길다. 10여년 전의 일이다. 원래 나는 꽃을 기르는데, 나중에 왕야가 말하기를 후화원에 놀리고 있는 땅에 모두 화초와 수목을 심어라, 특히 그 가산위에는 많이 심어라. 민둥머리여서 보기 싫다고. 나는 평지에 화초를 다 심은 후에, 가산위로 가서 심었어. 처음에는 어떤 변화가 있는지 주의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산언덕의 뒤편에 매일 새로운 흙이 쌓이더라고.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어. 이 새 흙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낮에는 누가 와서 내리는 것을 본 적도 없는데, 밤만 지나면 새로운 흙이 나타나는지?"

 

어느날 화파식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무 할 일이 없어 가산부근을 돌아다녔다. 무의식중에 몇대의 차에서 흙을 내리는 것을 보았다. 화파식은 앞으로 가서 그들과 얘기를 했다. 그들은 몰래 남쪽 사투리로 말했다. "셋째 부인이 채소구덩이를 파서, 겨룽레 과일과 야채를 두려고 한다. 우리보고 외인과 접촉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 후 화파식은 자세히 토질을 검사해 봤는데, 새로 운반해오는 흙이 지표상의 흙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공산토였다. 아마도 어느 산에서 파오는 것이었다. 왕부를 나서지 않았는데 이렇게 많은 공산토가 나오는 것도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러나, 화파식이 그 수수께끼를 풀기 전에 왕부둔을 떠나야 했다. 왜냐하면, 화파식은 꽃과 나무를 재배하는 기술이 뛰어나므로, 아무 곳에나 꽃을 심으면 제때에 활짝 피곤 했고, 그래서 일찌기 이름을 얻었는데, 장작림의 집에서 화파식을 빌려달라고 한 것이다.

 

장작림은 아랫사람에게 후하게 대했다. 화파식이 꽃을 잘 다루고, 사계절 언제든지 꽃이 피게 하자 여러 사람들 앞에서 칭찬을 많이 했다. 장작림이 폭파사고로 죽은 후에, 화파식은 다시 장학량을 따라 남하했다. 서안사변후에 장학량이 연금되고, 화파식은 어쩔 수 없이 지방으로 되돌아왔으며, 서안시 교외의 한 정원에서 일했고, 부인도 얻었다.

 

우회장은 화파식의 말을 다 듣고 나서 탄식했다. "이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인가 보다. 재보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얻을 것이 아닌가보다. 만일 네가 하루만 먼저 왔거나, 아니면 그날 내가 배만 아프지 않았다면, 이 지하금고는 곧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 보니, 지하금고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고, 색복진이 알고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저번에 색복진이 왕부로 돌아왔을 때의 거동과 표정을 보면, 내 생각으로는 지하금고의 입구는 불당, 왕야침실, 가산아래 이 세곳뿐이다. 그러나, 지하금고의 주요공사는 산언덕의 아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점은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제왕부의 서쪽과 북쪽은 모두 산이 하나씩 있고, 모두 왕부와 거리가 멀지 않다. 그러니 찾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후, 농회의 해방군전선지원업무가 바쁘고, 토지개혁운동이 심화되며, 왕부둔농회의 주요 지도자들도 변동이 있어, 지하금고를 찾는 일은 팽개쳐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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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농회는 보물찾는 일을 팽개쳤지만, 마을의 촌민들은 이 일을 쉽게 잊지 못했다. 이후에도 계속 암중으로 제왕부의 보물을 찾았다. 그러다가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저녁에 밥먹을 때, 강희 노인이 흥미롭게 현지의 농민 두 사람이 보물찾던 얘기를 해주었다.

 

왕부둔에 별명이 "조이류자"라는 자가 있었다. 하루는 농회가 그에게 재산을 적게 분배해주자, 회장을 찾아가서 따졌다. 그가 집밖으로 걸어나가는데, 집안에서 낯선 사람이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문틈으로 몰래 들었다. 일이 묘하게 되느라, 마침 우회장과 화파식이 지하금고의 행방을 얘끼할 때였는데, 그가 엿들은 것이다. 다 들은 후 그는 조심조심 몰래 떠나갔다.

 

조이류자는 왕부에서 며칠 일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왕부의 내부상황은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옛 친구 송씨를 찾아가서 같이 보물 파는 일을 상의했다. 그는 "우회장이 말한 바에 의하면 입구는 세 곳이다. 비교적 파기 좋은 곳이 불당과 왕야침실이다. 왜냐하면 그 곳은 면적이 좁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지도 않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 두 곳부터 파는게 좋을 것같다"

 

농회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 둘은 밤이 되면 달빛을 받으면서 불당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조이류자의 집안 사람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으나, 송씨의 처는 놀랐다. 급히 조씨집에 물어보았고, 왕부에 보물캐러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을 불러 왕부안에서 사람을 찾았다. 이 큰 집안에서 두 사람을 하루 종일 찾다가 불당내에서 파낸 새 흙과 무너진 불대를 보았다. 조금 파내자 옷이 나오고, 좀 더 아래로 파자 두 사람이 이미 흙더미이 눌려서 죽어 있었다. 손애는 노란색 물건을 들고 있었다. 파내서 보내, 원래 황동으로 만든 180근짜리 관공대도였다. 일부 노인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원래 "진택(鎭宅)"을 위하여 매설한 것이라고 한다.

 

이 일은 현지를 떠들석하게 했다. 어떤 사람은 왕야가 신령을 파괴하려 하므로 벌을 내린 것이라고도 하였고, 어떤 사람은 박복한 사람은 재보를 얻을 수 없고, 오히려 목숨을 잃는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지하금고를 도굴하려는 행동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보물을 찾아나서게 하도록 만들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밤낮으로 왕부안을 왔다갔다 했고, 동쪽도 파보고, 서쪽도 긁적였다. 어떤 사람들은 운좋게 작은 금불상, 옛날 동전, 대양전등의 물건을 파냈다. 어떤 사람은 금은장신구를 파내기도 하였다. 일부 보물캐기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왕부의 뒤에 있는 남산에도 여러개의 길다란 구멍이 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