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의 거의 미친듯한 중국열기로부터 19세기에 중국을 야만스럽고 낙후한 국가로 보기까지, 중국의 유럽에서의 이미지는 180도 바뀌게 된다. 만일 이 변화를 일으킨 전환점인 사건을 찾는다면, 아무런 의심없이 전영국 심지어 전 유럽이 크게 기대하였던 매카트니사신단의 중국방문사건이었다. 이 사절단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구성원은 토마스 스탠튼이었다. 그는 이 전환의 과정을 몸소 겪는다. 1793년 제1차로 중국의 땅을 밟고 중국황제의 친절한 접견을 받은 때로부터 1840년 의회에서 중국에 무력을 사용하자고 극력 주장할 때까지, 토마스 스탠튼은 중국-유럽관계의 대전환의 목격자일 뿐아니라, 더더구나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어 협상하기보다 중국과 전쟁을 하자고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동전의 한쪽 면이 다른 쪽면으로 바뀌듯이, 유럽인들은 중국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토마스 스탠튼이 세계국면을 뒤바꾸는 전쟁을 고취함으로 인하여, 중국인의 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미친듯한 중국열기속에 출발
비록 중국에 대한 의심과 비판의 목소리가 이미 점점 높아가고 있었지만, 매카트니의 사절단은 중국열기의 남은 온기를 가지고 만리길을 지나 중국으로 갔다.
11살된 토마스 스탠튼은 매카트니사절단의 2인자인 조지 스탠튼의 아들이었다. 부친때문에 그는 다행히도 방대한 사절단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구성원이 되었다. 비록 많은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부친과 사람들간의 얘기 속에서 어린 스탠튼은 이미 머나먼 중국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그때는 중국이 인간세상의 천당으로 묘사되었다. 사실상 부친과 그 동료들도 어린 스탠튼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이전에, 유럽의 중국에 대한 인식 또는 상상은 주로 세 가지 정보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상인, 뱃사람들의 전언이었다. 둘째는 공식 사절단의 보고였다. 셋째는 전도사의 서간이었다. 상인, 백사람들의 전언은 대부분 믿기가 어려웠다. 공식 사절단의 보고서는 아주 희소할 뿐아니라 편면적이었다. 오직 장기간 중국에서 생활한 전도사들이 중국에 대하여 가장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유럽으로 보낸 서간은 유럽이 중국을 인식하는 핵심문건이 된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중국에 대한 오해는 최초의 문자자료에서 시작된다. 비록 전도사들은 인문지식도 있고, 중국경험도 있지만, 그들의 중국에 대한 관찰과 묘사가 반드시 정확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중국에서 전도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으로 통치자에게 잘 보이고자 했다. 유럽의 동포들에게 중국을 소개할 때 가능한 한 부정적인 평가를 배제했다. 전도사들이 고르고 골라서 표현한 중국이미지는 사실과 진상과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중국에 왔던 프랄스국적의 예수회 선교사 Nicolas Trigault(중국명 金尼閣)은 <<마테오리치중국찰기>>에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중국에 대하여 쓴 두 유형의 저자가 있다. 하나는 상상이 너무 많고, 다른 하나는 너무 많이 들어서, 아무 생각없이 그대로 출판했다.
진정으로 중국을 "신격화"시킨 것은 봉건전제통치를 전복하고자 갈망했던 유럽의 계몽사상가들이었다. 중세기의 질곡을 하루빨리 타파하고 싶었던 그들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전도사들의 서간에 근거하여 마음대로 취사선택하거나 목적을 가진 상상력을 동원했다. 그리하여 거의 신화적인 중국이 유럽인들의 면전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도적인 신화는 반드시 이성의 비판에 부닥친다. 18세기 중엽이후, 산업혁명, 해외확장, 정치개혁과 문화계몽과 더불어, 유럽은 경제, 군사, 정치, 문화측면에서 전면적으로 중국을 추월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모든 동방의 대제국들이 쇠락에 직면한다. 먼저 오스만 투르크가 그랬고, 다음으로 이란의 사파비(Safavid)왕조가 그랬고, 그 후에 인도의 무굴왕조, 마지막으로 중국의 청나라제국이다. 해외무역과 식민약탈에서 파죽지세였던 자신감을 회복한 유럽인들은 중국문화에 대하여도 태도가 바뀌게 된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중국은 전제국가이다. 그 원칙은 공포이다"라고 비판한다. 그후 니콜라스 블랑제(Boulanger)sms <<동방전제제도의 기원>>에서 유사한 견해를 밝혔다. 그는 중국은 예로부터 폐쇄적인 국가이고, 자신과 세계를 격리시켰으며, 오래되고, 탄력없고, 쇠락하고 잔혹한 전제제도를 시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콩도르세(Condorcet)는 중국문명은 유목시대이후에 흥기했으며, 시종 상당히 저급한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영국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중국은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즉, 토지가 가장 비옥하고, 경작이 가장 정교하며, 인민이 가장 많고 가장 근면한 국가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는 정지상태에 정체되어 있었던 것같다."
그러나, 순이론적인 비판은 근본적으로 근 백년에 이르는 중국열기를 뒤집지는 못했다. 아주 믿을만한 혁명적인 글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리고 이 사명은 아주 불행하게도 매카트니와 그의 사절단이 짊어지게 된다. 그 사절단에 11살의 나이고 만리길을 떠난 견습시동 토마스 스탠튼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의 방대한 규모의 중국사절단은 동서방 양대 대국의 첫번째 만남에 대하여 아주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들이 자신감을 가질만한 이유는 있었다. 16세기부터 18세기중후반까지, 영국은 스페인,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물리쳤고, 이미 유럽을 쟁패한 서방의 제1강대국이었다. 당시 거의 모든 영국인들은 이번에 중국시장을 여는 외교활동에 커다란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유럽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진전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11세된 어린 스탠튼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실질적인 의미가 없었다. 그는 그저 여행객이었고, 아무런 정치적 책임도 부담하지 않았다.
날개가 꺾여 돌아가다.
비록 자신만만했었지만, 매카트니 사절단의 실패할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자연경제를 기초로한 농경국가는 국제무역의 중요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더욱 무서운 것은 한나라만 강대했던 동아시아세계에서 일찌감치 상당히 안정적인 조공무역체계가 확립되어 있었고, 서방국가들처럼 평등한 외교나 자유무역의 개념은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1787년에 일찌감치, 동인도회사 주광주대리인이 우호적으로 일깨워준 적이 있었다: "중국정부가 외국인을 모조리 멸시하는데, 그것은 외국실력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스스로가 강대하다고 믿는 과분한 자신감때문이다. 그는 사신이 파견되어 오는 것은 그저 충성을 표시하려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경고는 그러나 매카트니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일의 진전은 그의 말대로 되었다.
1793년 9월 14일, 근 1년간의 힘든 여정끝에, 매카트니와 그의 사절단은 마침내 열하행궁에서 건륭황제를 만나도록 허락받는다. 그러나, 매카트니가 한쪽 무릎만 꿇은 예절은 삼궤구고의 중국예의에는 전혀 어긋났다. 그리고 그들이 신경써서 고른 선물도 건륭제가 그다지 아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83세된 노황제에게 있어서는 자잘한 손재주일 뿐이고, 사소한 기교에 불과했다. 만일 어린 스탠튼이 없었더라면, 이번 접견은 그저 우울하고, 재미없고, 역사책에 남길만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 행사에 그쳤을 것이다. 건륭황제는 12살된 견습시동인 어린 스탠튼에게 아주 깊은 흥미를 나타낸다. 그가 사절단에서 유일하게 중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건륭황제가 얼굴을 활짝 펴고 즐거워한다. 그에게 비취를 하나 선물로 내렸을 뿐아니라, 자신의 허리춤을 풀어서 용무늬가 새겨진 황색사직하포(絲織荷包)를 어린 스탠튼에게 선물로 준다. 이 두가지 어진기보는 지금까지도 빅토리아알버트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실상 이 날은 공물을 바치는 외에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주산, 영파, 천진등지를 개방하여 무역항구로 해달라고 요구하고, 북경에서 대사를 파견하고, 고정된 관세를 받아달라는 요구는 모두 거절당한다. 중국정부의 계속된 재촉하에, 매카트니 사절단은 유감을 가득 품고 떠나야 했다. 그들은 대학사 송균(松筠)과 양광총독 장린(長麟)등의 사람들이 호송하여 대운하, 감강, 북강을 거쳐 중국의 요지를 지났다. 70여일간의 기나긴 여정은 영국인들에게 이 정체되고 발전이 없는 제국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긴다.
날개가 꺾여 돌아온 매카트니는 할수없이 이번의 참담한 실패를 가급적 감추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사신보고서를 비빌로 처리한다(1908년에 그가 사신으로 갔던 일기가 공개적으로 출판된다). 그는 부사인 스탠튼에게 상대적으로 완곡한 기록을 공개하도록 요청한다. 그것이 바로 1797년에 출판된 <<영국폐하파견사신이 중국황제를 접견한 사실기록, 주로 매카트니 훈작의 문건을 발췌함>>이라는 책이다. 이 보고서는 확실히 영국의 체면을 고려하여, 거의 모든 영국인들이 난감해했던 일들을 감춘다. 비록 그러하지만, 그것은 중국사회에 대하여 전통적인 인식을 180도 뒤집어버린다.
출판상의 집요한 요청하에, 사절단으로 따라갔던 다른 사람들의 기록도 계속 출판된다. "사자"호의 Aeneas Anderson, 어린 스탠튼의 가정교사였던 헤테난, 사병인 홈스등의 기록이 금방 유럽인들이 길거리에서 얘기하는 중국뉴스로 등장한다. 10년후, 사절단의 또 다른 부사인 존 바로가 자신의 사신보고서를 발표한다. 그는 중국에 대하여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 보고서는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에딘버러 리뷰>>에서는 이 글을 싣고, 반야만적 제국의 명성이 땅바닥에 떨어지게 된 것에 환호했다.
서로 다른 동기를 지니고 있던 어른들과는 달리, 천진무사한 어린 스탠튼은 충실하게 그가 목격한 일체를 기록했다. 부친과 매카트니대사가 외교상의 원인으로 감추었던 사정까지도 포함해서. 그의 기록은 유럽인들이 중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비록 매카트니의 중국방문은 실패하였고, 중국의 이미지가 급격히 악화되었지만, 천진무사한 어린 스탠튼은 중국에 대하여 선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건륭제가 자신을 접견해준 일과 대학사 송균과 '심후한 우의'를 건립한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즐겨했다. 1800년, 어린 스탠튼은 다시 중국으로 한번 더 가기로 결정한다.
중국통의 탄생
1800년, 어린 스탠튼은 영국동인도회사 주광주상관의 서기원으로 다시 한번 중국에 간다. 1801년, 부친이 사망한 후 스탠튼은 부친의 작위를 세습한다. 1814년, 스탠튼은 동인도회사 주광주상관의 관리기구인 특선위원회의 위원이 된다. 1815년, 그는 다시 특선위원회 주석에 선출되고, 동인도회사의 대중국무역업무를 전면적으로 책임진다.
십여년의 중국경험은 스탠튼에게 중국사회를 깊이 이해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1811년, 스탠튼은 '좋은 친구'인 송균과 광주에서 다시 한번 만난다. 신임 양광총독인 송균은 스탠튼이 중국의 관료사회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다.
부지런한 스탠튼은 중국을 가장 잘 이해하는 중국인이 되었다. 중국에 있는 기간동안, 그는 중국역사, 정치, 경제와 사회등 각방면의 자료정보를 모으는데 주력했다. 심지어 10년의 시간을 들여서 <<대청율례>>를 번역한다. 바로 이 저작이 세상에 나올 때, 스탠튼은 이미 자신의 중국에 대한 시각을 정립한다. 1810년, 그는 <<에딘버러 리뷰>>에 <<대청률례평론>>을 발표한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매카트니가 중국민족에 대하여 너무 높이 평가했다고 비판하고, 자신의 부친도 우유부단했으며, 오로지 바로만이 정확하고 공정한 관점을 견지했다고 지적한다.
귀국후, 그는 수집한 정보를 가지고, 책을 쓰고 자신의 견해를 정립한다. 자신의 중국정치, 외교와 역사문화등 각방면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정리한다. 이들 저작은 서방인들이 중국을 이해하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떤 것들은 영국정부가 대중국정책을 정립하는 기초로 된다.
1823년, 스탠튼은 핸리 토마스 콜부르크(Colebrook)와 함께 로얄아시아학회를 창립한다. 그리고 아시아 각국의 정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를 추진한다. 스탠튼은 적극적으로 영국의 한학(漢學)연구를 추진한다. 그의 노력하에, 영국런던대학대학원과 제국학원은 그를 교수로 초빙하여 한학과를 개설한다. 그는 거기서 한학을 강의한다. 이리하여 그는 영국한학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제2차 사신으로 떠나다
1816년, 영국은 다시 한번 사신을 중국으로 보낸다. 그들은 매카트니와 완전히 동일한 사명을 지고 간다. 신이매사는 윌리엄 피트 암허스트(William Pitt Amherst) 훈작이었다. 매카트니와 같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오는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그는 중국경험이 풍부한 영국인을 자신의 조수로 삼았다. 이미 명망을 얻고 있던 스탠튼이 뽑힌 것은 당연했다.
매카트니가 중국을 방문한지 23년동안, 중국-영국양국간에는 거대한 변화가 생긴다. 중국에서 가경제는 부친인 건륭의 황제위를 이어받는다. 날로 쇠락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제국에서는 가경제가 즉위하자마자 대규모의 백련교의 난이 일어난다.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가경제는 2억여냥 백은을 쓰는데, 이는 국가전체의 4,5년간의 재정수입에 해당했다. 이로부터 청왕조는 재정부족의 곤경에 빠진다. 멸망할 때까지 이는 지속된다.
손안에 가진 것이 없는 가경제는 이때 영국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줄도 몰랐다. 전체 서방세계에 이미 영국의 적수는 없었다. 그리고 산업혁명을 완성하여 영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ㅚ었고, 세계시장을 갈망하는 영국인들은 23년전보다 훨씬 더 절박하게 중국의 시장이 필요했다. 비록 매카트니의 전철이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은 매카트니사절단보다 훨씬 심한 대우를 받는다. 7월 28일, 사절단이 북직예에 도착하여 고두(叩頭)를 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인다. 사절단의 3인자인 아리리스는 고두는 대국과 관련없는 형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탠튼은 고두에 극력 반대한다. 그는 암허스트 훈작에게 보고하면서 이렇게 직언한다. "사명을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고두에 동의해서는 안된다." 암허스트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1816년 8월 28일, 암허스트 사절단은 한밤중에 북경에 도착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들을 그날 밤으로 황궁에 데려간다. 예절문제를 놓고 서로 밀고 당기기를 거듭한 끝에 암허스트는 명확하게 가경제에게 고두로 절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분노한 가경제는 즉시 영국사절단을 북경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한다.
스탠튼이 보기에, 이번 굴욕은 저번보다 훨씬 심했다. 그들이 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광주로 갈 때, 따르는 관리들은 적의를 나타냈따. 음식물공급도 악독해서 참기 힘들었다. 가경황제가 영국섭정왕에게 보낸 서신은 영국인들을 절망하게 만든다: "이후 사신을 보내어 멀리 올 필요가 없다. 먼길을 오느라고 헛고생하는 것이다. 그저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이지, 매년 찾아와서 배알할 필요는 없다." 그 뜻은 명확했다 대청왕조는 영국인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가경제는 스탠튼을 중국에서 축출하도록 명령한다.
비록 이 사건후 중국정부가 미안한 마음에서인지 아니면 관계를 완화시키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유럽상인들에게 유리한 몇 가지 지방법규를 반포하기는 했지만, 스탠튼의 내심으로부터의 분노를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그는 "굴복은 그저 치욕일 뿐이고 굳건히 보위하는 입장이 합리적이며 태도를 굳건히 하는 것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내심세계에서는 건륭시대에 그에게 주었던 약간의 친절감은 가경제의 거친 태도로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주전파
1818년에서 1852년까지 스탠튼은 여러번 영국하원의원에 당선된다. 당시 영국하원에서 중영관계에 영향력이 가장 컸던 인물중 하나이다. 바로 스탠튼이 중영관계의 곤경으로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또 다른 역량이 중영양국의 관계를 바꾸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아편밀매상이었다.
처음에, 동인도회사가 아편을 밀매한 것은 단순히 기형적인 중영무역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편밀매의 폭리는 금방 개시한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밀수에 참가한 것은 동인도회사뿐아니었다. 아편밀매의 창궐은 중국의 대외무역에 있어서의 균형을 철저히 무너뜨린다. 중국은 흑자국에서 적자국으로 변모한다. 그리하여 대량의 백은이 외국으로 유출되고, 국내에 백은부족현상이 나타난다. 아편을 흡입하는 중국인들의 신체를 망치는 것은 제국의 무장역량을 무너뜨릴까봐 우려할 수준이었다. 그리하여, 청나라정부는 아편무역금지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간다. 결국 도광황제는 임칙서를 보내어 광주에서 아편밀매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임칙서는 호문에서 아편을 소각한다. 이는 즉시 영국하원에서 격렬한 토론을 불러온다. 의원 그레이스는 죄악의 교역을 위하여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반대한다. 중국통인 토마스 스탠튼이 일어난다. "우리는 아편무역을 진행한다.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인가 아닌가? 아니다. 양광총독이 자신의 배로 아편을 무역할 때, 아무도 외국인이 같은 일을 하는데 대하여 놀라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중국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도에서도 금방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다...만일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진행할 권리가 없다; 우리가 그들을 이긴다면, 우리는 포기할 권리가 없다." 이때 회의장은 숙연해진다. 모든 사람은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몇분후, 그는 마지막 결론을 얘기한다: "비록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나는 그래도 이번 전쟁이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의석에서는 장시간의 박수가 울렸다.
3일후 하원의 투표결과가 나왔다: 주전파 271표, 반대파 262표, 9표의 차이였다. 토마스 스탠튼은 아편전쟁을 폭발시켰다. 이번 전쟁의 결과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영국이 승리했다. 이때부터 동서양대치의 국면은 철저히 끝이 나고, 동방은 서방에 종속되기 시작한다.
토마스 스탠튼은 아마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중국에 대한 입장으로 아편전쟁이 발발했을 뿐아니라, 이 전쟁을 통하여 중국의 이미지를 유럽에서 180도 뒤바꿔 놓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영향을 가장 심각하게 받은 것은 중국이라는 것을. 아편전쟁후, 중국은 두번, 세번 연이어 전쟁에서 패배한다. 중국인은 자신의 문화에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중국인은 계속되는 민족위기에서 한걸음 한걸음 서방의 중국에 대한 인식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기물에서 정치, 정치에서 문화의 현대화운동(서방화)가 100여년동안 계속된다. 오늘날에 이르러, 국력이 다시 강대해진 중국은 여전히 전통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서방을 배우는 것은 아직까지도 전체 인민의 심리적인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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