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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창(李毓昌): 청나라 최대의 원안

구름위 2013. 9. 2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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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묵(卽墨) 이가영촌(李家營村)은 아주 유명한 곳이다.

 

이곳은 묘지기들이 대대로 살면서 번성한 작은 마을이다. 그들이 지키는 묘의 주인은 이육창(李毓昌)이라고 하는 사람이다. 옛날에 원안(寃案, 원통한 사건)은 아주 많지만, 그의 사건은 "양내무와 소백채"사건과 더불어 '청나라 4대원안'중 하나로 불리운다.

 

이 사건은 재난구호비용을 착복한 것과 관련이 있고, 조야를 떠들썩하게 했으며, 아주 나쁜 영향을 끼쳤다. 가경황제는 친히 <<민충시(憫忠詩)>>를 지어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육창의 억울함을 드러내고, 탐관오리를 참했으며, 소인들을 능지했다.

 

중국역사상 원안은 무수히 많다. 도대체 이육창사건은 어떤 것이기에 가경제가 대노했단 말인가? 그리고 탐관오리들에게 죽음을 내렸을까? 아래에서 자세히 얘기해보기로 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관료의 권력이 감독을 받지 않는다면, 그저 개인의 품행,양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청렴을 보증하기는 힘들다. 가경연간에 왕신한(王伸漢)은 바로 관료로 있으면서 돈을 목숨보다 귀중히 여겼다.

 

산양현(山陽縣) 지현(知縣)인 왕신한은 '이익을 보면 눈이 멀고' 안과발모(雁過拔毛)하는 비열한 소인이다. 평소에도 백성의 고혈을 빨았는데, 천재지변이나 기근을 만나면 더욱 심해졌다. 아래위를 속이고, 자기 몫을 챙겼다. 한편으로 이재민의 수를 허위보고하여, 재난구호비를 많이 타내고, 다른 한편으로 실제지급금액을 줄여서, 자신이 챙겼다.

 

황하가 청강에서 회하로 진입하는데, 매년 여름이 되면, 큰 비가 내릴 때마다 홍수가 난다. 홍수지역의 백성들은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경13년(1808년) 가을, 황하의 제방이 다시 붕괴되었다. 산양현은 수재를 만나서 이재민들은 유리걸식해야 했다.

 

온통 물바다로 바뀌어 백성들의 생활이 곤란해졌을 때, 인심을 안정시키고 도탄에 빠진 생령을 구하기 위하여, 가경제는 은9만9천냥을 보내어 산양현의 백성들을 구휼하도록 했다.

 

이 십만냥에 가까운 재해구호비가 내려오자, 왕신한은 굶주린 이리처럼 자기 뱃속을 채웠다. 기근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근 2만5천냥이 왕지현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러다보니 산양의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재해구호비가 내려온 후, 관리의 부패가 이미 심각하다는 것을 예감하고, 이번 재해구호비는 이전처럼 탐관오리의 수중에 들어가는 일은 없도록 해야하겠다고 생각하여, 가경제는 11명의 조사반을 산양현에 보내어 처리하게 했다. 그 중에는 막 진사에 합격하여, 부임한 즉묵사람 이육창이 들어 있었다.

 

이육창(1771-1808)의 자는 고언(?言)이고, 호는 영헌(榮軒)이다. 청나라때 즉묵현 각리(지금의 이가영촌)에서 태어났다. 인품이 단정하고, 글과 행실이 모두 뛰어났다. 이육창은 아마도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진사에 합격한 바로 그 해가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해가 될 줄은. 그리고 그 원인은 바로 그가 정직한 업무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되어 기율감찰업무에 종사하게 된 후, 이육창은 친히 각 지역을 순시했고, 재난상황을 살펴보고, 백성들을 돌보았다. 현으로 돌아오는 중에 이육창은 호구부를 가져다가 대조를 해보기 시작했다. 역관에서 머리를 쳐박고 5일간 대조작업을 해보니, 기본적으로 왕신한이 부패한 확실한 증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는 분노하여, 즉시 보고서를 초안해서 번사(藩司)에 올리려고 준비했다.

 

이 모든 것은 왕신한에게 매수된 이육창의 가복(家僕)인 이상(李祥)에 의하여 누설되었다. 관료사회의 숨은규칙을 잘 알고 있는 왕신한은 이것을 단지 이육창이 그에게서 입막음하기 위한 돈을 받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모든 사람들은 돈앞에서는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특히 관료들은 그랬다.

 

왕신한은 관료사회의 관례에 따라, 이육창에게 약속했다. 이육창이 이미 조사해낸 것들을 보지 않은 척만 해주면, 자신이 1만냥을 이육창에게 차비(茶費)로 줄 생각이 있다고 말한다.

 

주성치는 그의 작품인 <<구품지마관>>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탐관은 간사하다. 청관은 탐관보다도 더 간사하다"

 

품행이 고결한 이육창은 이 점을 간과했다. 그는 직접 왕신한과 맞붙어서, 그와 같이 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조정의 부패를 척결하는 임무를 지닌 관리로서, 자신의 눈아래에서 부정부패가 성행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부드러운 방법이 되지 않자, 마음이 급해진 왕신한은 살인멸구를 준비한다.

 

왕신한은 이육창을 연회에 모셔내온 다음에 이육창의 가복인 이상 등 3사람을 암중으로 매수한 후, 이육창이 연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목이 마르다고 할 때, 비상을 넣은 찻물을 올리게 한다.

 

순식간에 이육창은 입에서 선혈을 토하며 복통을 호소한다.

 

이때, 방밖에서 들여다보던 3명의 가복들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이상은 곁에서 냉소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겠다. 우리는 오늘이 당신을 모시는 마지막 날이다." 말이 떨어지자 마자, 이들 몇몇은 베로 이육창의 목을 조른다. 이육창은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다. 이상등은 시신을 대들보에 매어놓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것처럼 위장한다. 그리고 방문을 닫고는 떠나버렸다.

 

다음 날, 이상등은 놀란척 하면서 주인이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고 말한다. 왕신한은 급히 회안부로 가서, 횡령한 돈으로 회안지부 왕곡(王穀)에서부터 오작(?作, 검시관) 이표(李標)까지 모조리 매수한다. 그리하여 이육창은 자살했다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짓게 한다.

 

정직했던 한 사람이 이렇게 부패한 세상에서, 돈에 매수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야기는 당연히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육창의 숙부인 이태청(李太淸)은 산동 즉묵에서 산양으로 달려와서 후사를 처리한다. 그런데, 조카의 얼굴색이 백지와 같았다. 현령인 왕신한은 스스로 총명하게 한다고 노비(路費) 150냥을 준다. 바로 이 점이, 나중에 이 사건을 수상히 여긴 가경황제에게 의심할 빌미를 주게 된다.

 

이씨집안 사람들은 유체를 고향으로 가져갔다. 이육창의 처는 남편의 의복과 물건을 정리하다가, 몸에 가지고 다니던 가죽옷에 혈흔이 묻은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급히 이태청에게 보고한다.

 

이태청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즉시 관을 열고 시신을 검사해보았다. 사자의 손가락이 검게 변했다. 그리고 은비녀를 인후부에 넣자 즉시 변색했다.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는 모두 중독의 증거였다. 그리하여, 그는 비용을 모은 다음 상소문을 써서 경성으로 간다. 그리고 도찰원에 억울하다고 고소한다. 도찰원은 규정에 따라 조정에 보고했다.

 

가경제는 풍기가 갈수록 문란해지자 관료사회을 정돈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을 아주 중시하고, 자세히 들여다 본다. 그리고 군기처에 명을 내려 산동순무 길륜(吉綸)으로 하여금 이육창의 시신을 성성(省城)으로 옮겨와서 조사하게 시킨다. 그리고 즉시 산양지현과 관련증인을 북경으로 데려오게 한다. 군기대신이 형부와 함께 직접 심문했다.

 

검시보고서는 이육창이 먼저 독살된 후, 교살되었다고 확인해주었다.

 

가경제는 검시보고를 본 후에 대노하여, 왕신한을 즉시 처결한다. 그리고 명을 내려, 그의 가산을 몰수하게 하고, 왕신한의 아들은 이리(伊犁)로 유배보내어 속죄하게 한다. 나머지 사람들 이상등은 이육창의 묘 앞에서 먼저 협형(夾刑)을 가하고, 다시 능지(凌遲)하도록 한다.

 

가경14년 8월 2일은 정의가 회복된 날이었다.

 

가경제는 이육창의 장례를 융중하게 치러주도록 지시한다. 이상등은 이육창의 영구 앞에서, 협형을 한번 받은 후, 다시 능치처사당한다. 그 후에 심장을 꺼내어 제사지낸다. 이육창의 충혼은 이렇게 안위를 얻었다.

 

1개월후, 9월 4일, 원안을 조성한 회안지부 왕각이 교결(絞決)되고, 나머지 관련관리들은 예를 들어, 이육창과 함께 산양으로 조사를 나갔으나, 돈을 받고 왕신한의 죄행을 묵과해준 9명의 관리들은 모조리 조사받고 처벌받는다.

 

가경제는 친히 삼십운의 <<민충시>>를 지어서 이처럼 정직한 인사가 해를 입은 과정을 상세히 기록했고, 그가 이익의 유혹을 물리치고, 악을 원수처럼 미워한 품성을 찬송했고, 그의 가족후인들도 그 음덕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지금도, 산동 즉묵의 이가영촌에 있는 이육창의 묘비에는 여전히 이 <<민충시>>를 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