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청나라 말기의 청과 속국의 관계

구름위 2013. 9. 28.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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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나라와 조선(朝鮮)의 관계

 

청나라가 흥기하기 전에, 조선은 명(明)나라와 전통적인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명나라 홍무원년, 주원장은 사신을 보내여 조선에 옥새와 글을 내렸다. 이로써 양국간에는 종번(宗藩, 종주국과 번국)관계가 성립되었다.

 

1636년, 홍타이시(나중의 청태종)는 친히 병사를 이끌고 조선을 정벌하러 나섰고, 조선의 수도인 한성을 점령했다. 조선국왕은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어쩔 수 없이, 청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항복했다. 명나라의 연호사용을 중지하고, 명나라와의 모든 내왕을 단절했으며,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했다. 청나라가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후, 쌍방의 사절은 매년 끊이지 않았다. 조선측에서는 매년 하동지, 하정삭, 하성절, 납세폐등 네 번의 고정적인 조공사절을 보내는 외에, 여러 유형의 부정기적 사절을 중국에 보냈다.

 

일본은 명치유신이후에 침략의 창끝을 조선으로 돌렸다. 1876년 1월, 일본은 원정군을 보내어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고, 조선에 통상을 요구한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을 청나라에 보내어 교섭하는데, 당시 청나라의 총리아문은 이렇게 답했다: "청나라는 종래에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지 않았다" 일본은 이러한 답변을 받은 것을 기화로 청나라가 조선의 일에 대하여 관여하지 않겠다면, 소위 "속국"이라는 것도 허명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자주국"으로 조선을 대했고, 1876년 2월 26일, 조선으로 하여금 강화도조약을 맺게 한다. 강화도조약은 명백히 일본이 중국의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배제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조약이다. 이후, 일본은 조선침략의 발걸음을 가속화하여, 1882년 임오군란, 1884년의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비록 청나라군대가 신속히 행동하여 두번의 사태를 수습했지만, 일본은 이 기회를 틈타 조선과 1882년 인천조약, 1885년 한성조약을 체결한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서의 침략을 확대하는데 성공한다.

 

일본은 이러한 이익에 만족하지 못하고, 준비를 마친 후 조선을 침략하면서 이어 중국을 침략하는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에서 청나라군대는 패배하고 청나라정부능 일본과 <<마관조약>>을 체결하게 되어,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며, 청나라와 조선의 종번관계는 이로써 단절된다.

 

2. 청나라와 유구(琉球)의 관계

 

유구는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이다. 명나라 초기이래로, 유구와 중국의 관계는 밀접했다. 청나라가 건립된 이후, 유구의 사절은 1646년에 중국으로 와서, 순치제를 접견한다. 이로부터 유구사절의 발길은 청나라조정에 끊기지 않는다. 1662년, 청나라정부는 병과부례관 장학례를 정사로 하는 사절단을 유구에 파견한다. 이후 매번 유구의 새 왕이 즉위할 때마다, 청나라는 사절을 보내어 책봉하고 축하했다.

 

1663년(강희2년)과 1756년(건륭21년), 청나라 황제는 두 번에 걸쳐 도장을 유구국왕에게 내린다. 건륭이 내린 도장에는 "유구국왕지인(琉球國王之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1860년대까지 유구는 시종 자기들이 청나라의 속국임을 인정했다.

 

1872년, 일본의 메이지천황이 등극하면서, 유구에 사절을 보내도록 요구한다. 유구국왕은 아들을 도쿄에 보내어 축하하고 선물을 바친다. 일본천황은 조서를 내려, 유구를 번속(藩屬)으로 삼고, 1873년 유구를 일본의 부현(府縣)으로 한다. 1875년 5월, 일본은 강제로 유구국왕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중단시키고, 군대를 보내어 유구에 주둔한다. 중국과 유구간의 "종번관계"의 흔적을 말살하기 위하여, 6월에는 유구로 하여금 일본의 연호로 바꾸게 한다.

 

1876년, 일본은 유구에 사법기관을 설치하여 사실상 유구를 그들의 통치하에 둔다. 유구국왕은 일본의 침략과 압박을 참다 못해, 1877년 4월, 비밀리에 자건관(紫巾官)인 향덕굉(向德宏)등을 중국으로 보내어, 국왕의 밀서를 전달하고, 일본의 병합의도를 막아달라고 요청한다. 청나라조정은 하여장(何如章)을 일본에 보내어 협상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한다. 1879년 3월, 일본정부는 병력을 보내어 유구를 점령한다. 3월 30일, 정식으로 유구를 오키나와현으로 선포한다.

 

1879년 7월, 3일과 23일, 유구국왕은 다시 비밀리에 자건광 향덕굉을 두번에 걸쳐 천진으로 보내어 이홍장을 만나게 한다. 그리고 청나라정부가 일본정부를 물리쳐줄 것을 요구한다. 10월 24일, 유구의 이목관(耳目官)인 모정장(毛精長)등이 북경총리아문에 와서 장시간 무릎꿇고 애절한 목소리로 피를 뿜으며 요청한다. 청나라정부가 200년간 청나라에 충성하던 번속국가를 불쌍히 여겨 유구를 도와달라고. 청나라정부가 다시 나서 일본정부와 교섭했지만, 일본의 만횡과 청나라의 유약함으로 유구는 마침내 일본에 병합되어버리고 만다. 청나라와 유구의 종번관계도 이로써 끝이 났다.

 

3. 청나라와 안남(安南)의 관계

 

안남은 지금의 베트남이다. 명나라 건문제때 여씨(黎氏)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다. 16세기초 두개의 대립된 봉건집단으로 분할된다. 북방의 정송(鄭松) 집단이 여씨왕조의 조정을 장악하고, 남방은 완황(阮潢)집단이 장악한다. 남방의 완씨집단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씨집단은 청나라정부와 관계를 밀접하게 유지한다.

 

1660년(순치17년), 여씨왕조는 사절을 파견하여 청나라에 조공을 바친다. 청나라정부는 바로 동의하고 여유기(黎維琪)를 안남국왕에 책봉한다. 원래 안남의 남방에 할거하고 있던 완씨집단은 17세기말에 이르기까지 아직 완전히 점성국(占城國)을 병합하지 못했다. 1702년, 완복주(阮福周)는 사절을 중국에 파견하여, 청나라 조정의 책봉을 요청한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이를 거절한다. 그러자 완복주는 스스로 왕에 오른다. 1803년, 완복영(阮福映)은 안남을 월남국(越南國)으로 개칭한다. 청나라정부는 광서안찰사인 제포삼(齊布森)을 월남에 사신으로 보내고, 완복영을 월남국왕에 책봉한다.

 

1840-1850년대에 프랑스가 월남을 침략한다. 1862년 월남을 압박하여 <<사이공조약>>을 체결한다. 월남의 남부6성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874년 3월, 프랑스는 다시 월남으로 하여금 제2차 <<사이공조약>>을 체결하게 하였으며, 이 조약에서 프랑스는 월남의 "독립자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프랑스는 월남의 외교를 주재하고, 이로써 중국의 "종주권"을 부인하며, 프랑스의 월남에서의 특권적인 지위를 확립한다. 1875년 5월, 프랑스는 이 조약을 청나라정부에 통보한다. 그리고 중국으로 하여금 흑기군(黑旗軍)을 단속할 것을 요구한다. 청나라정부는 중국의 월남에 대한 "종주국"으로서의 보호책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월남군대는 월남국왕의 요청을 받아 '도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간 것이라고 한다. 1877년, 월남은 사신을 중국에 보내어 조공을 바친다. 프랑스도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1883년, 프랑스는 전면적으로 월남을 침략한다. 그리고 월남으로 하여금 <<순화조약>>을 체결하게 하고, 월남은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1884년 6월, 프랑스는 월남을 압박하여 제2차 <<순화조약>>을 체결한다. 이로써 프랑스는 월남을 식민통치하게 된다. 중국프랑스전쟁이 끝난 후 1885년 6월, 중국과 프랑스는 <<중국프랑스월남조약>>(중프신약)을 체결하여, 청나라정부는 프랑스와 월남이 체결한 조약을 승인하고 월남의 종주권을 포기한다.

 

4. 청나라와 소록(蘇祿)의 관계

 

소록은 지금의 필리핀 술루군도이다. 1726년(옹정4년), 소록국왕은 사신을 보내어 청나라조정에 조공한다. 1754년, 소록국왕은 상소를 올려, 토지, 민호를 중국에 편입시키고자 하나, 건륭제는 완곡하게 거절한다. 1851년, 스페인이 점령하면서 청나라와 소룩국왕의 내왕은 단절된다.

 

5. 청나라와 면전(緬甸)의 관계

 

면전은 지금의 미얀마이다. 청나라는 여러차례 미얀마에 병력을 파견하여 도와준 적이 있다. 1769년, 청나라정부는 대학사 부항(傅恒)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미얀마로 가게 한다. 면전국왕 맹박(孟駁)은 두려움에 평화적해결을 원다. 쌍방이 평화협상을 한 후, 면전국은 사절을 보내어 청나라에 조공을 바친다. 1790년, 청나라정부는 사신을 보내어 면전의 맹운(孟雲)을 면전국왕으로 책봉한다.

 

1824년부터, 영국이 미얀마를 침략하는 전쟁을 시작한다. 영국정부가 핑계거리를 잡아 미얀마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청나라정부가 나서서 협상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영국정부는 한편으로 중국의 면전에 대한 종주권을 몰랐다고 변명하면서, 중국의 면전에서의 권리에 손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면전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한다. 영국은 1885년 12월 면전의 수도인 만달레이를 점령하고, 면전국왕인 석포(錫袍)와 왕후를 포로로 잡는다. 그리고 1886년 1월 1일 면전을 영국령 인도에 편입시킨다고 공포한다. 이로써 미얀마의 절반을 집어삼켰다.

 

영국이 면전을 흡수한 후, 청나라정부는 항의를 제기한다. 이리하여 두 나라는 협상을 진행하고, 1886년 7월, 북경에서 <<미얀마조항>>을 체결한다. 청나라정부는 영국의 미얀마에서의 특권을 인정하고, 영국은 미얀마가 관례에 따라 매10년마다 중국에 "예물을 바치도록" 합의한다. 청나라정부는 영국정부로부터 조공을 방해하지 말라는 요구는 관철시켰지만, 실제로 청나라와 미얀마와의 종번관계는 이로써 끝이 나게 된다.

 

6. 청나라와 남장(南掌)의 관계

 

남장은 지금의 라오스이다. 18세기초, 라오스는 분열하게 되는데, 북부에 낭발랍방(瑯勃拉邦)왕국이 건립된다. 청나라정부는 이를 여전히 "남장"이라고 부른다. 1727년(옹정7년) 낭발랍방왕국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한다. 1791년, 랑발랍방왕국은 만상왕(萬象王) 소남(昭南)의 간섭을 받고, 낭발랍방국왕인 아누루는 방콕으로 피난가게 된다. 오래지 않아, 청나라정부의 도움을 받아, 아누루는 다시 낭발랍방으로 돌아와 통치한다. 이후 그의 아들인 만탑도랍(曼塔圖臘)이 통치할 때까지도 청나라정부와 관계가 좋았다. 청나라정부는 칙인을 내리고 고명을 내렸다. 1893년, 낭발랍방은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이로써 청나라와 남장과의 종번관계도 끝이 난다.

 

7. 청나라와 섬라(暹羅)의 관계

 

섬라는 지금의 타이이다. 1652년(순치9년) 섬라는 사절을 보내어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이로써 두 나라간의 왕래가 시작된다. 1767년, 미얀마군대가 섬라를 침범하여, 섬라의 수도를 무너뜨린다. 태수였던 다신은 미얀마의 침입을 물리치고, 다시 섬라를 통일하고 왕으로 옹립된다. 1768년, 다신은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청나라에서 자신을 섬라국왕으로 봉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그가 왕권을 찬탈하였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한다. 그러나 다신은 계속하여 청나라정부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여, 청나라정부는 마침내 1777년 다신이 건립한 왕조를 인정하고, 섬라국이 청나라조정에 조공을 바치도록 허락한다. 1823년(도광3년), 청나라정부는 섬라국왕 라마2세에게 "영존해방(永尊海邦)"이라는 편액을 선물한다.

 

1855년, 영국대표인 홍콩총독 바오린은 섬라를 압박하여 <<영국섬라통상조약>>(바오린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등도 영국을 본받아 섬라를 압박하여 유사한 조약을 체결한다. 섬라는 이후 서방식민국가의 반식민지로 전락한다. 청나라와의 종번관계도 이로써 끝이 난다.

 

8. 청나라와 호한(浩罕)의 관계

 

호한은 18세기 우즈베키스탄족이 중앙아시아에 건립한 칸국(汗國)이다. 1759년(건륭24년)에 청나라군대는 신강의 반란군두목인 화탁(和卓)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호한의 칸인 얼더니와 직접 관계를 맺는다. 얼더니는 적극적으로 번국으로 청나라의 부속국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청나라조정에 조공을 그치지 않고 보냈다. 19세기초, 호한은 표면적으로는 청나라를 공경했지만, 실제로는 계속 중국을 침략하고 중국의 영토를 잠식했다. 1876년, 제정러시아가 호한을 병합하고, 베르간성(費爾干省)을 설치한다. 이로써 호한과 청나라의 종번관계는 끝이 난다.

 

9. 청나라와 아프간(阿富汗)의 관계

 

청나라초기, 아프간지역은 분열상태를 보인다. 1759년, 바다크산 동쪽의 보로르두는 사신을 보내어 청나라에 조공을 바친다. 1878년, 영국이 아프간을 점령하면서 청나라와 아프간의 왕래는 중단된다.

 

10. 청나라와 네팔(尼泊爾)의 관계

 

네팔은 수천넌 중화제국의 최후의 속국이었다.

 

중화민국이 건립된 후, 위안스카이는 일찌기 네팔을 오족공화에 가입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네팔은 당시 영국령인도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청나라왕조와 네팔의 종번관계는 아주 현실적인 국제전략관계였다.

 

청나라초기 라다크, 철맹웅(哲孟雄), 부탄등 히말라야산의 여러 나라는 모두 중국의 속국이었다. 나중에 영국령인도가 이들 국가를 합병하고 침략했다. 여러나라들은 줄줄이 중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정부에 보낸 문서에서 영국령인도를 "피릉(披楞)"이라고 칭했다. 당시 청나라조정은 "피릉"이 바로 영국이라는 것을 몰랐다. 소국정도로 생각하고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라다크, 철맹웅, 부탄등은 차례로 영국령인도에 먹혔다. 영국은 다시 중국티벳과 네팔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이때의 청왕조는  국제정세에 어느 정도 눈을 떴다. 그리하여 네팔과 번속관계를 강화하여 영국을 제어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네팔은 히말라야 남쪽의 여러 나라들이 차례로 멸망하는 것을 보고는 이를 귀감으로 삼아 중국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강화했다.

 

중국과 네팔의 종번관계는 국제법상 영국령인도의 네팔에 대한 침략속도를 확실히 늦추는데 작용했다. 이는 티벳을 중국이 유지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이 청나라를 교란시킬 때, 네팔은 일찌기 청나라조정에 서신을 보내어 대포를 가지고 중국으로 지원와서 소탕작전에 참가하겠다고 하였다. 청나라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11. 추가설명

 

청나라와 주변국가의 종번관계와 결말은 대체로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외에 티벳과 외몽고의 문제도 약간 언급해야 할 것이다. 모두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청나라정부는 티벳과 외몽고에서 완전한 주권을 행사했다. 당시의 영국과 러시아등의 국가는 계속 종주권으로써 중국의 주권을 대체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영국은 계속하여 중국의 티벳에서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청나라정부는 티벳에 종주권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이러한 주장은 청나라정부의 반대에 부닥쳤고, 영국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외몽고가 독립하기 이전에, 중국이 외몽고에 대하여 행사한 것은 완전한 주권이었다. 신해혁명후, 러시아는 외몽고의 "독립"을 획책했다. 이리하여 위안스카이의 북양정부를 핍박하여 러시아는 <<중러성명문건>>을 체결한다. 이로써 중국은 외몽고의 영토, 주권을 상실했고, 그저 종주권이라는 허명만 남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주권과 종주권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청나라와 주변국가간에 존재하던 종번관계는 다툼이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종번관계는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불평등관계이고, 주변국가가 청나라에 '칭번납공(稱藩納貢)"하는 것이며, 중국의 책봉을 받고, 중국으로부터 도장과 옥새를 받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상으로 이런 종번관계는 그저 중국과 주변각국간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하나의 형식이었다. 통치와 피통치라는 실질적인 내용이 담기지는 않았다. 또한, 종주국으로서의 중국통치자는 일종의 "왕은 오랑캐를 통치하지 않는다. 오는 자는 막지 않고, 가는 자를 붙잡지 않는다"는 불치주의(不治主義)의 태도로 외국을 대했다. 원칙적으로 속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중국통치자는 자신이 천조상국(天朝上國)이라는 것을 자랑하고자 하여 "오는 것보다 많이 준다"는 원칙하에 조공하는 나라에 대량의 하사품을 내렸다. 그 가치는 먼 길을 와서 조공하는 나라에서 진공한 물품의 가치를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각 번속국은 기꺼이 중국으로 와서 조공을 바친 것이다. 어떤 때에는 중국통치자가 자신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각국에서 중국으로 조공을 오는 시간과 규모에 대하여 제한을 한 적도 있었다. 비록 어떤 국가는 규정을 지키기 않고 수시로 중국에 조공을 바치러 왔지만, 중국정부는 항상 기꺼이 받아주었다. 이외에 각국에서 중국으로 조공을 오는 동시에 중국과 무역거래도 하였다. 이로써 볼 때, 청나라와 주변국가의 종번관계는 근대서방국가간의 표면적으로는 평등하나, 실질적으로는 약육강식인 국제관계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서방식민국가와 식민지간의 지배와 피지배, 압박과 피압박, 착취와 피착취, 약탈과 피약탈관계와는 천양지차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