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스크랩] 스코틀랜드 전쟁(5-웨어데일과 할리던 힐)

구름위 2012. 10. 7.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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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나와서 컴퓨터 잡으니까...시간이 없군요 ㅇㅅㅇ;;

그래서 이번 짤방은...없습니다...(퍽!)

나중에 수능끝나고 나면 다시 짤방 붙여서 올릴 수 있을까요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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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들 오랜만이야
그동안 기숙 학사에 틀어박혀 있다가 드디어 외박나와서 컴퓨터 만져보니 참 감개무량하네-_-;;
그래도 외박 나왔는데 친구들은 다 대학가서 놀고 있고 집에 남아 있는 애들이 없어서 재수생의 설움이 그대로 느껴져서 지난번에 하던거나 다시 하려고 해;;
지난 번에 내가 배넉번(Bannockburn)전투 직전까지 올렸는데 과감하게 그 중요한 배넉번 전투를 건너 뛰는건 지난 번에 쓴 것도 있고, 거기에 정보 소스가 바꼈거든 ㅇㅅㅇ
그동안엔 월터 스콧경의 스코틀랜드 역사 이야기하고 Men-at-arms로 이야기를 꾸렸는데, 컴퓨터가 없는데 Men-at-arms를 영 볼 수가 없어서 새롭게 질러버린 스티븐 턴불의 "The Knight Triumphant-the higt middle age"로 소스를 바꿨는데 거긴 배넉번 전투가 없더라구 ㅇㅅㅇ;;
어쩔 수 없이 배넉번 전투를 건너뛰게 되었으니까 혹시 보던 ?O들 있었다면 미안하게 생각해;;
거기다 이번엔 따로 덧붙일 내용 없이 책 내용이 그대로 올라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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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과 대응


플랜태저넷 왕가에서 두 번째로 에드워드란 이름을 지녔던 왕, 즉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를 재정복하고 독립의 불꽃을 잡으려고했던 시도는 배넉번 전투의 처참한 결과로 물거품이 되어버렸어.
그것만 있으면 좋은데, 여태껏 잉글랜드가 그토록 심한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던데다, 이번엔 그 영향도 심각해져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보복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버렸고.
에드워드가 대군을 몰고 의기양양하게 진군해 포위를 풀어주려 했던 스털링 성은 스코틀랜드한테 항복해버렸고, 퍼스(Perth), 덤프리스(Dumpries), 에든버러(Edinburgh), 록스버러(Roxburgh)같은 중요한 성들도 하나하나 스코틀랜드의 손으로 들어갔어.
그 뿐만 아니라 역으로 1314년 여름, 스코틀랜드의 영웅이 된 국왕 로버트 브루스의 명으로 스코틀랜드 군대는 국경을 넘어 보복 공격을 감행했고, 16년 전 스털링의 영웅 윌리엄 월리스가 했던 것보다 훨씬 남쪽 깊은 곳까지 군대를 몰고가 잉글랜드 마을을 불사르고 도시를 노략질했어.
8월이 되자 스코틀랜드 군대는 티(Tee)강을 너머 리치먼드(Richmond)까지 행군했고, 더럼(Durham)의 주교는 1315년 1월까지 한정 기간 특전으로 돈을 내고 평화를 사야했어. 컴벌랜드(Cuberland)도 알아서 돈을 냈고, 타인(Tyne)강 북쪽의 계곡은 아예 스코틀랜드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기까지 했어.

1315년, 이제 잉글랜드는 지난 100년만에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었어. 왕국의 지도자는 전장에서도 참패했을 뿐더러 이어지는 스코틀랜드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조롱거리로 전락시켜버렸지. 처음 배넉번 전장으로 나설 때의 위풍당당한 잉글랜드 군대는 사라지고 없었을 뿐더러, 외교적으로도 에드워드 2세는 별다른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양쪽 모두 평화 협상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에드워드는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로버트 브루스와 에드워드의 해묵은 적대심은 그나마도 이루어지기 어렵게 만들었지. 하지만 1318년, 잉글랜드는 일단 강경하게 나가기로 하고, 아주 중요한 요새가 자기꺼라고 주장하고 나섰지.
그 요새는 트위드(Tweed)강 한가운데에 있는 베릭(Berwick)이란 성채로, 오랫동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경으로 남아 있었을 뿐더러 트위드 강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상징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어느 한쪽도 포기하기 어려운 곳이었어. 비단 잉글랜드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역시 이 요새의 소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는데 잉글랜드가 강하게 요새의 소유권을 주장하자 스코틀랜드도 결론을 내렸어.

"좋은 주먹 놔두고 왜 말로하냐?"

이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법칙에 따라 스코틀랜드의 명장 제임스 더글러스 경과 그 휘하의 스코틀랜드 군대가 베릭으로 접근했어.
원래 베릭은 강력한 요새였지만 이번에 스코틀랜드에게는 아주 좋은 조력자가 있었으니 바로 "배신자".
배신자들의 도움으로 1318년 4월 2일, 더글러스 경과 스코트인들은 배신자의 도움으로 성벽을 넘는데 성공했지.
외성벽이 넘어가고 내성벽만 남은 상태에서 스코틀랜드 인들은 한 때 약탈을 하느라 주의가 흐트러졌어. 한 때 잉글랜드 군대가 이 틈을 노리고 성문을 열고 역습을 감행해 꽤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6일 후, 내성도 함락되고 베릭은 스코틀랜드의 손으로 넘어갔지.
하지만 스코틀랜드 군대는 환호성을 지르는데 멈추지 않고 더더욱 남쪽으로 행진을 시작했어. 리치먼드는 제법 강력한 요새를 구축하고 있어서 그대로 지나쳤지만 노스알러튼(Northallerton), 버러브릿지(Boroughbirdge)같은 곳은 불태우고 약탈되고 불태워졌지. 6월 1일, 리펀(Ripon)은 보호비로 1,000파운드를 지불했고, 돈을 받은 더글러스 경은 군대를 물려 서쪽으로 행군했어. 오틀리(Otley)도 약탈의 대상이 되었고 최후의 목적지는 스킵턴(Skipton)이란 곳이었지. 이곳의 성주였던 로버트 드 클리퍼드(Robert de Clifford)경은 배넉번 전투에서 전사해서 사실 이곳은 툭 건드리면 푹 엎어질 것 같은 곳이었지만 의외로 스코틀랜드 군대는 성을 공격하기 보다는 근처의 마을을 약탈한 뒤 약탈품을 바리바리 싣고 그대로 떠나갔지.

잉글랜드도 더 이상은 못 참을 지경이었고, 드디어 손을 쓰기로 결정했어.
무려 12,000명이나 되는 군대가 동원되어 베릭을 수복하러 우르르 몰려갔지. 하지만 로버트 브루스는 굳이 군대를 보내 강력한 잉글랜드 군대와 맞붙는 것보다 더 좋은 작전을 찾아내 맞불작전을 놓았어. 또다른 약탈 부대를 잉글랜드로 보내버린고야.
이 부대가 마음껏 분탕질치며 잉글랜드를 유린하고 다녔기에 에드워드는 베릭으로 보낸 대부대르 후퇴시켰어. 하지만 존 란돌프, 머레이 백작(Earl of Moray), 제임스 더글러스 경같은 스코틀랜드의 뛰어난 명장들은 잉글랜드 군대를 전부 피하면서 버러브릿지까지 진군했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요크(York)였고, 이곳에는 프랑스의 공주이자 에드워드 2세의 마눌님인 소피 마르소...아니 이사벨라가 머물러 있었지.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요크에 이사벨라가 머무르고 있었다는 정보를 손에 넣었다고 하는데, 누가 배신했던 혹은 배신이 있었던간에 이사벨라는 요크를 벗어나 노팅엄(Nottingham)으로 탈출해 스코틀랜드의 포로가 되는 것을 면했지.

물론 훗날의 에드워드 2세가 알았다면 차라리 이사벨라가 포로가 되어버렸으면 좋았을거라고 절규했겠지만, 일단 잉글랜드는 한숨을 돌렸어. 이제 스코틀랜드 침략자들과 맞서 싸울 인물은 요크의 대주교인 멜튼(Melton)의 어깨에 놓여졌지. 아마도 이 주교는 2세기 전, 노스알러튼에서 잉글랜드의 시민군들이 스코틀랜드 군대에 대승을 거두었던 옛 기억을 떠올리고 책임감을 느꼈을거야. 그리고 이번에도 대주교는 2세기 전의 대승을 재현하기 위해 성직자와 시민, 군인들로 이루어진 연합부대를 소집했지.

마침내 9월 20일 오후, 대주교의 군대는 Myton-en-swale에서 스코틀랜드 군대와 조우했어.
드디어 적을 앞에두고 2세기 전의 대승을 재현하기 위해 달려드는 잉글랜드 군대!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장군들은 산전수전 다 겪고 잉글랜드 정규군도 격파한 뛰어난 장군들이었어. 그들은 스킬트론을 둘로 나눈 후, 가운데로 들어온 잉글랜드 군대를 양쪽에서 공격했어. 마치 집게의 이빨처럼 이 두 부대는 잉글랜드 군대를 딱 물어 버렸고, 스킬트론의 창병들이 쓰는 3미터 창은 잉글랜드의 민병대를 사정없이 밀어 붙였지. 이 불운한 시민군들은 스웨일과 Ure강이 만나는 지점까지 몰렸고, 대다수는 스코틀랜드의 창에 찔려 죽거나 혹은 물에 빠져 죽었어. 요크 시장도 그 중 하나였지.
이날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스코틀랜드는 철수하기 시작했고, 기쁘게도 잉글랜드 군대가 베릭을 포기하고 철수했다는 소식과 앞으로 10년 동안 평화 조약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지. 스코틀랜드의 멋진 승리였고 여태껏 잉글랜드의 위상이 이토록 땅바닥에 처박힌 적도 없었으니까.

--불운의 상속

한편, 에드워드 1세의 손자이자 에드워드 2세의 아들이며, 후에 에드워드의 아버지가 될 소년은 아버지가 얼마나 스코틀랜드에게 깨지는가를 지켜보고 있었지. 이 소년의 이름은 무려 에드워드 3세(-_-;;). 점차 아버지의 시대는 가고 아들의 시대가 오고있었어.
1325년 에드워드 2세의 왕비인 이사벨라는 파리로 건너가 프랑스 국왕인 샤를 4세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어. 좀 시간이 흐르고 에드워드 3세도 파리로 넘어왔고, 에드워드 2세에 대들다가 쭈그러진 사람들도 조금씩 파리로 건너왔어. 이제 파리는 잉글랜드 국왕에 대한 반란분자의 아지트가 되어 있었지.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로저 모티머(Roger Motimer)라는 작자였지.
이 남자는 에드워드 2세에게 반항하다 반역죄로 런던 탑에 처박혀 있었다가 간신히 파리로 탈출해왔지. 그 마음씨 고와 보이던 브레이브 하트의 소피 마르소와는 다르게 야심만만했던 실제 이사벨라는 이 남자를 애인으로 삼아 자기 남편과의 불화를 공식적으로 비춰보였어. 그리고 9월 23일, 이사벨라와 로저, 그리고 소년 에드워드 3세와 일단의 용병, 불평분자를 태운 배가 영불해협을 건너 서포크(Suffolk)에 상륙했어. 이사벨라의 예상은 적중했지. 바로 잉글랜드에서 에드워드 2세의 반대파들이 들불같이 들고 일어났으니까.
에드워드 2세는 마눌님의 손길을 피해 서쪽으로 도주하다가 버클리(Berkely)성에서 사로잡혔고, 달군 쇳조각에 찔려 죽는 극히 불유쾌한 최후를 맞았지.

아버지가 죽고 1327년 2월 1일, 에드워드 3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뤘지. 하지만 젊은 왕의 머리에 왕관이 올라가자마자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바로 그들의 투철한 개김성을 보여주었지. 그리고 그럴 실력도 있었던 스코틀랜드는 한밤중에 트위드 강을 넘어 노험(Norham)성에 사다리를 넣고 성벽을 넘어 수베대를 제압하려 했어. 물론 이 기습작전은 실패했지만 스코틀랜드가 전하는 메시지는 확실했지.

-평화 기간이던 아니던, 혹은 아버지던 아들이던간에 스코틀랜드는 그들을 복속 시키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굳건히 맞설 것이다.


----웨어데일(Weardale)의 전역


에드워드 3세의 군대가 바라 마지않는 것은 그들의 최고 지휘관이 아버지와는 다르게 똑바로 전쟁을 수행하며 잉글랜드의 위신을 바로 세워주는 거였어. 하지만 후에 위대한 지휘관이 될 소년 왕의 첫 번째 원정은 거의 재앙이나 다름없었어.

불안의 조짐은 잉글랜드 내부에서 먼저 나타났지. 이제 대비마마가된 이사벨라는 아들을 위해 사나운 아이놀트인 기사와 용병 500명을 고용해 아들에게 붙여줬어. 하지만 이 사나운 인간들은 6월, 잉글랜드 군대가 요크에 머물렀을 때 끝내 사단을 일으켰지.
주사위 도박을 하던 아이놀트 용병과 잉글랜드 궁수들 사이에서 말다툼이 일어났고, 말다툼은 폭력 행사로, 그리고 폭동으로 이어졌어. 아이놀트 인들은 궁수들을 상대로 무기를 휘둘렀고 요크의 거리에는 316구의 링컨셔(Lincolnshire) 궁수들의 시신이 널부러졌어.
엎친데 덮친격으로 장군들 사이에서도 전쟁 수행 작전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어. 이 모든 것은 이제 막 지휘권을 잡은 소년왕이 통제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어.

잉글랜드가 이런 추태를 보이는 사이에 스코틀랜드는 선공의 기회를 잡았지. 6월 말, 스코틀랜드의 영웅 제임스 더글러스와 그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 칼라이스(Carlisle)를 위협했지.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와 맞아 싸우기 위해 요크에서 나와 더럼에서 일단 군대를 멈췄어.
스코틀랜드 군대가 지르면서 돌아다니는 불꽃과 거기서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는 적의 위치를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주고 있었어.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군대와 싸우기 위해 군대를 셋으로 나누었지. 일단 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취약한 측면에 말을 탄 기사들을 배치해서 전투 준비를 마친 후 전진을 시작했지.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숫적으론 열세였을지 몰라도 기동력에서는 확실한 우세였어.
연대기 작가인 프로와사르(Froissart)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모두 말에 타고 있었어. 물론 기사나 종자들은 크고 좋은 말을 타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일반 보병들 역시 작지만 튼튼한 조랑말을 타고 있었지. 그 결과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전장으로 나아갈 때나 퇴각할 때, 본대와 합류할 때나 약탈할 때 아주 재빠르게 행동할 수 있었지.


<<그들은 빵이나 포도주같은 보급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빵 없이 반쯤 불린 살코기로 긴 여행을 버티고 포도주 대신 강물을 마신다. 그들은 솥이나 팬도 필요하지 않다. 대신 잡은 짐승의 가죽에 바로 고기를 삶는다....그들은 안장과 안장 밑에 넓직한 철판을 매어 다니고, 안장 뒤에는 오트밀이 가득 든 작은 푸대를 매 놓는다....식사를 할 때 그들은 불 위에 철판을 놓고 오트밀을 반죽한다. 그리고 철판이 뜨겁게 달궈지면 오트밀 반죽을 얇게 펴 발라 작은 케이크를 굽는다....이것으로 그들은 편안하고 배부르게 식사를 마칠 수 있다>>


물론 말을 탄 보병(hobelar)은 스코틀랜드 고유의 것은 아니었고, 에드워드 2세 시절 노련한 스코틀랜드 원정 지휘관이던 앤드류 해클러(Harcla)경도 이 "호빌라"를 도입할 것을 주장했지. 1327년에 잉글랜드 전체 보병의 1/4가 호빌라였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보병들은 발로 뛰어야 했고, 스코틀랜드 인들은 적 지휘관들을 닭 쫓던 개로 만들면서 재빠르게 적을 회피했지.
그런데 이번에 스코틀랜드 군대가 숙영지를 치우는걸 본 잉글랜드 지휘관들은 적이 퇴각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챘어. 잉글랜드 군대는 보급품을 남겨 놓고 밤새 행군해서 남쪽 타인강 근처 헥삼(Hexham)근처의 헤이든(haydon)에서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을 찾았지. 그런데 그들이 막 여울을 건너려던 순간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곧 여울은 사라져버렸어.
스코트 군대는 잉글랜드를 북쪽 강둑에 버려두고 떠나버렸고 날이 지날수록 잉글랜드의 사기는 바닥을 쳤지. 할 수 없이 에드워드는 누구를 막론하고 스코틀랜드 군대를 찾아서 전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사람에게는 100파운드의 상금과 기사 작위를 수여하겠다고 약속했어. 곧 열 다섯명의 전사가 도전했고, 이 전사들은 조심조심 강을 건넜어. 그 사이 잉글랜드는 숙영지를 걷어 치우고 좀 더 상류로 올라가 건널만한 여울 건덕지가 있나 뒤적거렸지.
한편, 약속한 상금은 토머스 로크비(Thomas Rokbey)라는 전사에게 돌아갔어. 그는 스코틀랜드 군대가 스탠호프(Stanhope) 근처 웨어(Wear)에 진을 치고 있다고 알려왔어. 스코트 군대는 강 남쪽의 바위가 울퉁불퉁 서 있는 방어에 유리한 노지 위에서 캠프를 치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 곳이 좋은 이유는 잉글랜드 사람들이 북쪽 강둑에서 아무리 화살을 쏘아도 닿지 않는다는 거였지.


잉글랜드 군대도 스코트 군대를 따라갔지만, 그들이 강을 건너 잉글랜드를 공격하게 강요할 요인 따위는 거의 없었고, 만약 잉글랜드 군대가 그 시도를 한다면 강 근처에서 대기 중인 더글러스 경과 기사들의 돌격을 받아야 했어. 거기다 원래 강을 건너느라 전력이 분산된 군대는 취약한 법이지. 할 수 없이 잉글랜드 군대도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도 숙영지를 칠 수 밖에 없었어.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내지르는 워 크라이는 잉글랜드 군인들의 신경을 있는대로 긁어놓았고 종군 상인들은 물건 하나하나에 터무니 없이 비싼 값을 요구했어.


이 힘든 상황에서 희망이라고는 스코틀랜드 군대가 굶주림에 지쳐 공격을 걸어오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상류의 좀 더 방어가 유리한 지점으로 군대를 옮긴 후, 가끔가다 잉글랜드를 방해할 때를 제외하고는 별 움직임도 없었어.
잉글랜드도 북쪽으로 좀 더 군대를 옮겼지만 첫날 밤, 더글러스 경과 스코틀랜드 기병대가 잉글랜드의 막사를 기습했지. 더글러스 경은 거의 왕의 막사까지 짓쳐들어갔고 남은 스코트 군사들은 함성을 내질러 위장 공격을 시도해 잉글랜드 군대가 잠도 자지 못하게 만들었지.
여기에 아이놀트 용병들은 스코틀랜드 군대의 기습도 방어해야 했지만, 동시에 요크에서 당한 동료의 복수를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아군의 뒤통수를 때릴 준비가 되어 있는 잉글랜드 궁수들도 주의해야 했어.


이런 식으로 노련한 더글러스 장군과 란돌프 경은 어린 소년왕에게 전쟁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뒤 어느날 밤 다시 살짝 군대를 물려 돌아가 버렸지.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 군대가 또 사라졌다는, 그리고 이번엔 어디로 갔는지 종적도 잡을 수 없다는 말을 듣자 굴욕감에 찬 눈물을 흘렸다고 해.
이제 어쩔 수 없이 잉글랜드 군대도 터벅터벅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고, 에드워드는 도움도 되지 않은 용병들을 위해 돈을 지불해야 했지.
그 비용이 너무나 비싸서 에드워드는 자기 보석까지 저당잡혔어.
그리고 이렇게 에드워드의 첫 원정은 재앙에 가까운 실패로 끝나며 아버지하고 다를  바 없다는 조롱을 감당해야 했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아주 신이 났지.
그들은 공세를 취했고, 약탈품을 가득 싣고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전황을 자기 뜻대로 이끌었고, 잉글랜드의 왕은 그 장단에 맞춰 놀아났으니까. 용병을 부리는 것은 값만 잔뜩 쓰고 실패로 돌아간데다가 군대 통솔이나 전쟁 수행 능력도 그다지 뛰어나지 못해 보였어.
하지만, 이제 그들은 뼈져리게 반성해야 했어.
적어도 아들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아주 중요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젊은 에드워드는 실패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었지.



----더플린 무어(Dupplin Moor)

웨어데일의 승리 후 얼마 안되어 스코틀랜드에 재앙이 시작되었어. 그 중 가장 먼저 일어났던 것은 가장 치명적인 사건으로 1329년, 위대한 국왕 로버트 브루스가 사망했던거지. 그의 방어적 전쟁과 게릴라 작전은 압도적인 강적을 맞서 기적적이고 수많은 승리를 거두어 내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지켜낼 수 있었어.
하지만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지.
그는 죽음에 이르러 성당에서 레드 커뮌을 살해한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의 친우이자 부하인 더글러스 경에게 말했지.

-자신이 죽거든 심장을 예루살렘에 가져다 달라고.

웨어데일의 영웅이자 충직한 신하인 더글러스 경은 왕의 마지막 명령을 받잡고 스페인으로 건너갔지. 이 곳에서 그는 스페인의 기독교 세력을 도와 무어인과 전투에 나섰어. 하지만 이 위대한 기사는 무어인의 전투 방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서전에서 승리했지만 거짓으로 퇴각하는 무어인을 추격하다가 몇 명의 기사들과 함께 고립되고 말았어. 최후의 순간, 수많은 적에 둘러쌓여 그는 왕의 심장이 담긴 은 상자를 높이 쳐들었지.

"왕이시여, 이번에도 앞장 서십시오. 언제나 그렇듯 제가 따르겠습니다."

그는 왕의 심장을 무어인들 사이에 던졌고 그 곳을 향해 말을 달렸어. 그리고 정확히 그 상자 위에서 쓰러져 죽었지.

로버트 브루스와 제임스 더글러스라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사라진 후, 새로이 왕위에 오른 데이비드 브루스는 너무 어렸어. 뿐만 아니라 배넉번 전투 이후, 로버트 브루스는 친잉글랜드 파 영주들의 영지를 몰수 했었거든.
이제 소년왕에 맞서 영주들이 들고 일어났어.
마지막 대들보인 란돌프 경은 이들을 제압하는데 성공했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적은 제압하지 못했어. 그는 바로 에드워드 베일리얼(또...에드워드)이란 자로, 바로 1292년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스코틀랜드 국왕에 오른 존 베일리얼의 아들이었지.
그리고 그가 노리는 것은 바로 스코틀랜드의 왕좌였어.


추방된지 얼마 되지 않아 베일리얼은 잉글랜드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바다를 통해 스코틀랜드에 도달했어.
그는 1332년 8월 6일, 파이프(Fife)에 상륙했고, Dunfemline을 경유해 퍼스(Perth)로 진군했어. 전황은 웨어데일과 유사했지만, 역할은 뒤바뀌었고, 결과는 더더욱 뒤집어졌지. 반 베일리얼 파는 기록에 따르면 무려 40,000명이나 되는 군대를 모집했다고 해. 하지만 이들은 정면대결을 펼칠만큼 잘 훈련받지도 못했고, 에드워드 베일리얼이 주장하는 왕위 계승권에도 귀를 기울일만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
여기에 이 군대를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대들보, 존 란돌프 경은 출정하는 날 급사했지.
모든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어. 더플린 무어 전투를 앞에 두고 지휘관들끼리 신경전이 벌어졌고, 둘다 알아서 전투를 수행하기로 했어. 결국 두 군대는 전혀 협동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지.

한편 기껏해야 1,500명 밖에 되지 않는 베일리얼과 그 추종자들은 압도적인 수의 적에 맞서 근처 고지대에 자리잡고 방어적 대형을 취할 수 밖에 없었지. 군마는 후방으로 보내졌고, 궁수들이 스코트인의 맹공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대형을 취하면서, 베일리얼은 앞으로 잉글랜드 군대가 150년 동안 드높은 명성을 휘날릴 전술의 프로토타입을 보여줄 것이고, 그와 더불어 이 전술이 많은 수의 적에 맞서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도 보여주게 돼.

드디어 더플린 무어 전투가 시작되었고, 스코트인들은 언덕을 올라오기 시작했어.
측면에 배치된 잉글랜드 궁수들은 스코트 군대 측면을 향해 화살비를 쏟아부었어. 경장에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스코트인들은 측면에 쏟아지는 화살비를 피하기 위해 정면으로 쏠리기 시작했어. 마치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그랬듯, 이들은 운신도 힘들 정도로 밀집했어. 이 시점에서 스코틀랜드 지원부대가 위풍당당하게 나타났지.
마 백작(Earl of Marr)이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대는 압도적인 아군이 소수의 잉글랜드 군대를 밀어 붙이는 광경을 보았지. 앞에서 말했다시피, 전혀 사전 약속이나 협동이 이루어지지 않은 스코트 군대는 위풍당당하게 공을 뺏기지 않기 위해, 그리고 아군을 돕기 위해 밀어닥쳤지.(...;;)
옆에서 꾸역꾸역 밀려오는 녀석들만 해도 죽겠는데 갑자기 뒤에서 밀려온 녀석들 때문에 완전히 밀집해버린 스코틀랜드 병사들 위로 잉글랜드 궁수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화살비를 쏟아부었어. 기회를 잡고 몰아치는 매서운 화살비를 맞은 스코틀랜드 군대는 시체밭으로 변했지.
이 아비규환에서 탈출하고자 스코트인들은 서로를 짓밟으며 물러나려 했고, 이 와중에 밟혀죽는 자는 말할것도 없고 밀집도는 더더욱 심해졌어. 그 위로 잉글랜드 궁수들이 화살을 또 쏟아부었고.

전투 후,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스코트인들의 시신이 15피트, 즉 4미터에 가깝게 쌓였다고 해.
잉글랜드 병사들은 무표정하게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에게 창을 던져 죽이는 그로테스크한 광경을 연출했지.
웨어데일에서의 굴욕적인 패배는...몇 배로 청산되었어.


----베릭 공성전

한 때 에드워드 베일리얼은 스코틀랜드의 왕관을 쓰는데 성공했지만 잉글랜드 군사들은 다시 스코틀랜드인의 저항에 쫓겨났어. 베일리얼은 에드워드 ?O한테 찾아가 복수해달라고 부탁했지. 에드워드는 생각에 잠겼어.
웨어데일 전투는 스코틀랜드 인들의 강력함을, 더플린 무어는 그 약점을 노출시켰지. 하지만 그는 곧 결단을 내렸고, 폐주는 1333년, 왕국으로 돌아와 트위드 강 위에 베릭을 공격했어. 지난 번 로버트 브루스는 스코틀랜드 남동부의 요새들이 잉글랜드 군사들의 피난처가 되는걸 두려워해 손에 넣는 족족 부사버리거나 약화시켰기 때문에 이제 주요 요새는 베릭밖에 남지 않았지. 스코트인들도 이 요새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1318년 이 요새를 손에 넣었을 때 성벽을 더욱 강화시켜 놓았어.

스코트인들은 처음에는 그들의 오랜 전통에 따라 잉글랜드에 약탈 공격을 감행하여 베릭의 포위를 풀려고 했지만 이 폭력적인 역습은 에드워드에게 전쟁의 명분을 더해주고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잔인성을 널리 광고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어. 공공 선언과 성직자들의 탄원서가 잇달았고, 곧 복수는 정당화 되었지.
이 '정의로운 분노'를 바탕으로 에드워드는 군대를 소집했어.
남아있는 기록들에 따르면 그가 웨어데일에서 충분한 교훈을 얻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지.
그는 중부와 남부 주(shire)의 장관들에게 명령을 내려 군졸과 군마를 먹여 살릴 군량을 댈 것을 요구했고, 곧 이 식량이 잉글랜드 각지에서 뉴캐슬(Newcastle)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지.
하지만 에드워드는 여전히 식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
총 15개 주가 식량을 보낼 의무가 있었지만 보낸 주는 10개 뿐이었고 그나마 식량은 1/5밖에 되지 않았지. 그러나 얼마 안되어 그 정도 양만 해도 충분하다는 것이 밝혀졌고, 혹시 에드워드가 일부러 엄살부린게 아닌가 싶어.
이외에 여러 가정들에서 수레와 짐말이 소집되었고, 각종 물품이 요구되었지.
한편, 스코트인들도 깊은 숲을 지나 록스버러의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축복을 받으면서 적어도 종교적으로는 꿀리지 않는 상태가 되긴 했어.


곧 에드워드와 그의 군대가 베릭에 도착했지.
두달 전부터 폐주 베일리얼은 이를 갈며 베릭 공격을 주도하고 있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어.
그러나 곧 잉글랜드 군대는 베릭 성에 물을 대는 수도관을 찾아 이를 파괴했고 물 공급을 끊었어. 여기에 스코틀랜드 인들은 윌리엄 월리스나 로버트 브루스가 했던 것 같은 청야작전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군대는 식량 보급에 별 문제 없이 성을 공격할 수 있었지.
공성전을 감행하는 잉글랜드 군대의 가장 좋은 조언자는 1318년 베릭 공성전 당시 수비대에게 여러 조언을 했던 존 크랩(John Crabb)이라는 플랑드르 사람으로, 한 때 포로로 잡혔지만 에드워드가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풀어주었던 사람이야.
그가 제조한 가공할만한 트레뷰셋들이 반발력을 이용해 성벽을 향해 돌을 쏘아보냈어.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그 트레뷰셋들 중 하나는 만드는데만 40그루의 참나무가 들었고, 37명의 석공과 여섯 명의 채석꾼들이 이 투석기까 쏘아날릴 돌포환을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지.


6월 내내 잉글랜드 군대는 베릭의 성벽에 사석(射石 bombardment)을 실시했고, 돌이 떨어지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성벽도 흔들렸지. 그리고 27일, 잉글랜드 군대는 수륙 양면에서 성을 공격했고 이번엔 꽤 성공적이었어.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접근해 오는 배를 태우기 위해 성벽 위에 타르에 절인 다발들을 쌓아놓았는데, 그들이 불을 붙여 배에 던지려는 순간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불 붙은 다발들이 성벽 안으로 날아들었어. 곧 수많은 민가가 불에 탔고 그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지.
잉글랜드의 공격이 워낙 거셌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협상가들이 잉글랜드 사람들과 협상을 시작했고, 곧 열 두명의 인질을 넘겨주며 15일간 평화조약을 맺었지.


중세 공성전에서 이 평화조약은 땅굴 파기나 성벽 포격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였어.
물론 즉각적인 파괴 작전이 가능한 현대전이나 압도적인 물량을 동원할 수 있던 동양권과는 달리 한정된 인적 자원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던, 그리고 어찌되었건 간에 같은 크리스트 교도라는 동질감이 있던 중세에서는 이런 평화 조약이 자주 맺어졌지.
일반적으로 당시 사람들은 성이 공격자로부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식량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지원군이 언제 도착할지에 대해 비슷한 결론을 뽑아냈기 때문에 평화조약이 이루어질 수 있었어.
수비대는 시간을 벌 수 있었고 공격자는 굳이 큰 희생을 치루지 않고도 성을 점령할 수 있었으니까.


베릭에서도 첫 번째 평화조약에 따르면 15일 후, 7월 11일까지 스코틀랜드 군대가 지원하러 오지 않는다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했어. 그들이 바라는 영웅은 바로 위대한 제임스 더글러스의 이복 동생인 아키발드 더글러스(Achibald Douglas)경과 군대였지.
그러나 더글러스 경은 서둘렀지만 대규모 군대가 만들어지기까지 기다렸어. 그러면서 그가 시도한 행동은 비록 극적인 것이었지만 실제 큰 도움은 되지 않는 것이었지.


더글러스 경과 스코틀랜드 군대는 트위드 강을 건너 강 어귀를 불태웠고, 잉글랜드 군대는 강 북쪽에서 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지. 마침내 며칠이 지나고 11일, 더글러스 경의 명령을 받은 200명의 스코틀랜드 기사와 휘하 군사들이 부서진 트위드 강의 다리를 건너 보급품을 전달했지.
이들은 잉글랜드 군사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충실하게 작전을 수행했고, 실제 소수의 병사들은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했어.
이 제한 작전에 성공한 더글러스 경은 협상대로 자신이 베릭 성을 지원하는데 성공했다고 말하면서 다시 군대를 움직였지. 그는 트위드 강 남쪽의 서니사이드 힐(Sunnyside Hill)로 군대를 물린 뒤, 잉글랜드 본토로 들어갔어.
하지만 여전히 성은 포위되어 있었고 소수의 보급품이나 병사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게 사실이야.


에드워드는 이에 신경쓰지 않고 계속 작전을 행했지.
그가 걱정하는 거라곤 밤버러(Banburgh) 성과 그 안에 있는 왕비인 필리파(Phillipa)가 사로잡히는 것이었지만, 적어도 밤버러 성은 베릭이 버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버틸 수 있으리란 것은 확실했지.
거기다 그의 투석기는 여전히 성벽에 돌을 날리고 있었고, 그가 염려하는거라곤 기껏해야 소수의 스코틀랜드 군사가 다리를 건너 성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지.
정황상으로도, 합법성으로도 아키발드 더글러스 경의 지원은 거의 무효에 가까웠고, 에드워드는 여전히 항복하지 않은 상대에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인지 보여주겠다고 결정했어.


그날 성벽 최대한 가까운 곳에 큰 교수대가 세워졌어.
그리고 그 교수대에는 첫 번째 인질인 토머스 세튼(Thomas Seton)이라는 사람이 올라갔지.
얼마 후, 그는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목이 매달렸어.
물론 에드워드가 단순히 잔혹해서라거나 복수심에 사로잡혀서, 혹은 더글러스경의 군대를 협박해서 멈추기 위해 인질을 처형한 것은 아니었지.
잠시 후, 베릭 성에서 사절단이 파견되었고 그는 미리 냉철히 계산하여 세워둔 계획대로 협상을 진행했어.
결국 7월 15일, 더글러스 경이 없는 상태에서 도저히 중세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계산대로 양측은 다음과 같이 동의했어.

-1333년 7월 20일까지 다음 세 조건 중 하나가 이루어지면 잉글랜드 군대는 포위를 풀 것이다.

1. 스코틀랜드 군대가 20일날 해 뜨기 전까지 다시 트위드 강을 건너 베릭 서쪽에 나타난다.

2. 스코틀랜드 군대가 트위드강에서 바다 사이의 어느 장소에서 19일까지 잉글랜드 군대를 격퇴한다.

3. 더글러스 경이 파견한 200명의 기사들과 보병들이 잉글랜드 본진을 돌파해 베릭 성으로 진입한다. 단, 이때 기사들의 희생자가 30명을 넘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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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하나가 이루어지면 잉글랜드는 물러날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베릭은 성문을 열어야 했어.
그러나 아키발드 더글러스 경은 이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세 명의 스코틀랜드 기사들은 반드시 그를 이곳으로 데려오겠다고 맹세하고 성문을 나갔지.
곧, 모르페스(Morpeth)에서 그를 발견한 기사들은 스코틀랜드의 명예를 위해 반드시 되돌아올 것을 간청했어.

-------할리던 힐 전투

더글러스 경이 없을 때 맺어진 이 조약은 여러모로 스코틀랜드에게 불리했지.
일단 1번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어. 잉글랜드 궁수들이 떡하니 유리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모든 준비를 마친 채 대기하는 곳으로 군대를 끌고 들어가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를바 없었지.
2번, 즉 정면 대결은 위대한 로버트 브루스가 반드시 회피할 것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그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제임스 더글러스 경은 웨어데일에서 멋진 성공을 거두었지.
3번도 가능하긴 했지만, 이는 어쨌든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 군대를 흔들어 놓아야 가능한 것이었지.
결국 2, 3번 중 하나가 이루어져야 했고, 에드워드도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지.
그는 2번에 대기해 군대를 보내어 스코틀랜드 군대가 올만한 곳에 배치해 상황을 탐지하게 했고, 다시 일부 군대를 남겨두어 3번에 대비했어. 그리고 자신은 약간 군대를 물려 근처에서 가장 높은 장소에서 군대를 정돈했지.

그곳이 바로 할리던 힐(Halidon Hill)이었어.


한편 더글러스 경은 황급히 돌아왔지만, 이미 그날은 19일이었어. 하루만 지나면 베릭은 항복해야 했지.
거기다 잉글랜드 군대는 유리한 장소를 잡고 있었기에, 그는 다른 루트를 모색했어. 이미 할리던 언덕의 정상에서 주변 장소를 전부 내려볼 수 있는 잉글랜드 군대에게 기습을 가하기 위해서는, 그 뒤에 있는 더 높은 언덕, 현재 Witches Knowel이라 불리는 곳으로 접근해야 했어.
이를 위해서 더글러스는 200명의 병력을 선발에 선회 도중 공격받을 수 있는 좌측을 보호한 뒤, 행군을 시작했지. 더글러스경의 생각대로 한낮이 되어서야 잉글랜드 기사들이 스코틀랜드 군대의 움직임을 탐지했어. 이제 곧 전투는 시작될 것이고, 이는 위대한 에드워드 3세의 경력 중 최초의 정면 대결이었어. 웨어데일과 더플린 무어에서 왕은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을까? 과연 브루스가 없는데 다시 한 번 배넉번의 위업이 달성될 수 있을까?


이제 스코틀랜드 군사들은 잉글랜드 군대가 할리던 힐에서 Witches Knowel을 향해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배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 그 장소는 지금이나 1333년 7월 19일이나 비슷했을 거야.
에드워드 3세는 중군을, 좌익은 폐주 에드워드 베일리얼이 맡았지.
베일리얼이 더플린 무어에서 보여준 작전은 매우 수비적인 것이었어. 하지만 이제 그들은 수많은 스코틀랜드 군대를, 그것도 귀찮은 아군이나 형편없는 지휘 없이 실력발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군대와 맞서 싸워 그들의 전술이 효과가 있을 것인지를 결판 내릴 것이었어.


이 전투에서 에드워드 3세의 궁수들이 어떤 대형을 취했을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가운데의 보병 기사들 양 옆에 비스듬하게 배치해서 스코틀랜드 측면에 화살비를 쏟아부었을거야. 그렇게 해서 더플린 무어처럼 적 군사들을 과도하게 밀집시키려 했을테지.
이번에도 기병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기에 추격에 대비해서 군마는 후방으로 보내두었지.
에드워드 자신도 말에서 내렸고,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기사도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다고 해.


스코트인들도 세 대형으로 군대를 배치했지.
역시 중기병(men-at-arms)들은 말에서 내려 스킬트론 창병들을 지원하도록 명령받았어. 이는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한 사람이 세 명을 막을 수 있는" 언덕에 잉글랜드 군대가 배치되었기도 하지만, 동시에 펼쳐진 습지가 말의 전진을 방해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지.
스킬트론 대형은 배넉번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에서 위대한 승리를 안겨주었고, 이번에도 불가능 할 것은 없었지만 치명적으로 시간은 더글러스 경의 것이 아니었어.
아마 오늘 결판을 내지 못하면 내일 해가 뜨자마자 다시 성벽에 교수대가 세워질 것이고, 에드워드는 기쁜 마음으로 인질을 다시 목 매달 테지.아마 그걸 본 스코틀랜드 병사들의 사기는 뚝 떨어질 것이고, 잉글랜드 군대의 사기는 오를 것이다....그럼 이길 수 있는 전투도 이길 수 없잖아!
대신 더글러스 경은 잉글랜드에게 한 가지 재미있는 제안을 했지.
바로 챔피언들끼리 1:1 대결이었어.


이런 식의 전개는 배넉번 전투에서도 있었던 일이야. 헨리 드 보헌이라는 젊은 기사가 로버트 브루스 왕에게 달려들었지만, 국왕은 그가 랜스 차지를 시도하기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돌려 차지를 회피한 뒤, 도끼를 거세게 휘들러 기사의 머리통을 부사버렸지. 결국 헨리 드 보헌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죽었"어.
이번에 더글러스 경이 내세운 전사는 책의 저자인 스티븐 턴불(Turnbull)과 깊은 관계가 있는 인물이지. 그의 별칭도 "턴불(Turnbull)"이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그는 로버트 브루스 왕에게 달려오는 성난 황소를 잡아 돌려 세워서 왕의 목숨을 구했다고 해.
하지만 그의 과거 공훈이 어쨌든, 이 거인 기사는 검은 마스티프 개 한 마리와 함께 결투장으로 나섰지.
이에 대항해 잉글랜드측 기사는 노퍼크(Norfolk)의 기사인 로버트 벤헤일(Robert Benhale)이란 기사였어.
턴불 역시 더글러스 경에게 영지를 제공받는 기사였으니 이번 전장에 나설 만한 인물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이번 결투는 앞으로 스코틀랜드 군대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지.
먼저 턴불은 사나운 마스티프 개를 풀어놓았어.
개는 사납게 로버트를 물어 뜯으려 했지만 곧 두동강났고, 얼마 후 개의 주인도 그 뒤를 따랐지.
턴불이 검에 두동강 났던, 아니면 창에 찔려죽었던, 확실한 것은 하나였어.
-귀한 시간 잡아먹었다!!


이제 스코틀랜드 군사들은 스킬트론 대형으로 질퍽질퍽한 습지를 넘어 언덕 위로 올라가려고 시도했어. 이들을 향해 잉글랜드 궁수들이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으며 화살비를 날렸지. "햇빛이 비춰보이는 먼지들만큼 두꺼운" 이놈의 화살비에 스코틀랜드 군대 전위 500명이 쓸려나갔어.
곧 스코틀랜드 군대가 언덕 위로 접근했고 잠시 후 에드워드의 군대와 스코틀랜드 군대 사이에 치명적인 교전이 일어났어. 스코틀랜드 창병들과 잉글랜드 보병기사들이 서로 치열하게 무기를 치고 받으며 격전을 벌였어.
전투는 그날 늦게까지 치열하게 이어졌지만 결국 지형이 불리한 스코틀랜드 군대가 결국 밀리기 시작했고, 잉글랜드 궁수들은 스코틀랜드 후위를 향해 일제 사격을 퍼부었어. 그 결과 스코틀랜드 후위부대가 무너졌지. 지원군이 사라진 상태에서 밀리며 하나로 빽빽하게 밀집된 스코틀랜드 군대는 마침내 무너져 내렸고, 후방으로 가 말에 올라탄 잉글랜드 기사들은 달아나는 스코틀랜드 군사들을 학살했지.
전하는 말에 따르면 스코트인의 전사자는 3만~6만명이 이르렀다고하고, 잉글랜드 측의 손실은 경미했다고 해. 물론, 믿을 수 없는 숫자지만 아키발드 더글러스 경도 그 전사자 중 하나였어.


아키발드 더글러스 경은 쓸 수 있는 자원과 시간이 한정되어 있었던 점에서 지나치게 불리한 전투를 진행해야 했지. 물론,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스코틀랜드 인들은 치열한 교전을 벌였지만 결국 무너져내렸지.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좀 더 잘 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또 인상적인 것은 포로로 잡힐 때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행동이야. 그들은 포로로 잡히기보다는 바다에 뛰어내려 자결을 택했지.
물론 작가는 "이런 예는 본적이 없다"라고 하는데, 뭐, 강화도에서 조선군이 포로로 잡히기보다는 자살을 택했다...하는 이야기는 작가가 모를테니 제쳐둡시다.


어찌되었건 이제 베릭은 성문을 열었고, 웨어데일에서 치욕을 갚으며 에드워드 3세는 당당히 입성했지.
하지만 이 전쟁은 결코 그의 인생의 경로 중 하나일 뿐, 목적은 아니었어.
에드워드 3세, 이 위대한 왕의 진짜 경력은 이제 시작이었어.
그리고 그 전쟁은 프랑스를 상대로 백년 동안 진행될 것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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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은 백년 전쟁이 될 듯 한데-_-;;
다음 연재는 운이 좋으면 2주 후??=_=

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게이볼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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