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스크랩] 백년 전쟁 이야기(1-왕위 쟁탈전에서 크레시까지)

구름위 2012. 10. 7.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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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 재수생은 힘듭니다 OTL...

다행히 이번에 올릴 내용이 대문 사진 관련 내용이군요 ㅇㅅㅇ;;
위안이나 삼을까요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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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외박을 빨리 나왔다^_^ 근데 다음 주가 점수가 수능 점수에서 100점씩 푹 떨어진다는 월례 고사라는데...덜덜덜...재수생 생활은 서럽다 OTZL
아참, 그리고 2주나 지나고 대답하는게 좀 그런데, 초딩?O 말대로 그건 프로와사르 연대기가 아니라 내가 산 책에 나오는 말이야-_-
그리고 지난 번에 올려달라는거 올려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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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왕, 그리고 프랑스의 왕

지난 번에 할리던 힐 전투까지 했었지?
할리던 힐 전투의 결과 잉글랜드의 새로운 전술, 즉 장궁과 보병 기사의 합동 전술은 스코틀랜드 군대를 완벽하게 붕괴시켰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힘의 우열도 확실해졌지. 잉글랜드로서는 배넉번과 웨어데일에서 당했던 굴욕을 씻고 마침내 당당한 강국으로 부활했음을 알리는 전투였고.  만약 에드워드 3세가 다음에 그 엄청난 폭풍우를 몰고 오지만 않았어도 할리던 힐 전투는 나름대로 역사에서 의의를 지니는 전투였을고야. 하지만 이 큰 전투도 곧 닥쳐올 치명적인 전쟁에 비하면 서막 정도에 불과했지. 에드워드 3세, 그 이름은 스코틀랜드 전쟁 때문이 아니라,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완전히 "분리"시킨 전쟁, 즉 백년 전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으니까.

사실 작가도 이 "분리"라는 말을 아주 조심스럽게 사용한다고 하고 있어. 왜냐하면 적어도 백년 전쟁에서 싸운 "영국"과 "프랑스"는 완전하게 독립되어 따로 노는 나라들은 아니었거든. 명목상으로나마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고, 잉글랜드는 프랑스에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 나라들 사이의 정치는 확장되기도 하고, 때때로 같이 굴러가기도 하면서 완전하게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거든. 특히 가스코뉴(Gascony)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가들은 가스코뉴를 "영국 최초의 해외 식민지"라고 부른다고 해. 이 지역은 남쪽으로는 피레네 산맥,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해있어. 그 반대쪽, 즉 육지 쪽으로 프랑스와 맞닿은 국경선은 시대에 따라 자주 달라졌지만, 이 지역은 후대 제국주의 시대의 인도처럼 잉글랜드에게 반드시 필요한 장소였지. 마치 왕관의 보석처럼.

가스코뉴와 충성 맹세

가스코뉴와 영국간의 관계는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이 때 이 지방의 상속녀였던 유명한 여인네, 아퀴탱의 엘레아노르(Eleanor of Aquitaine)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여인들 중 한 명이고, 이 귀부인의 결혼은 후대에도 이름을 남기게 되었지.

원래 엘레아노르의 남편은 프랑스의 왕인 루이 7세였는데, 이 아저씨는 상당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나봐. 아내는 신경도 안쓰고 수도원에 들어가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는 왕이었어. 군대를 이끌고 십자군을 떠나 다마스쿠스까지 갔다가 별 소득 없이 돌아오기도 했지. 이러니 교회는 좋아했을지 몰라도 아내는 싫어했고, 여러 이유가 합쳐지면서 엘레아노르는 루이 7세와 이혼하고, 이혼한 지 몇달 후인 1152년 헨리 플랜태저넷(Henry Platagenet)이라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어. 막상 엘레아노르와 이혼한 루이 7세에게 이보다 나쁜 동맹은 없었지.

헨리 플랜태저넷, 이 프랑스의 귀족은 아버지로부터 메인(Maine), 투렌(Touraine), 그리고 앙주(Anjou)를 물려받았고, 거기에 노르망디의 공작이자 브루타뉴의 영주였어. 거기다 엘레아노르와 결혼하면서 아퀴탱까지 손에 넣은 그는 이제 프랑스 왕보다 더욱 넓은 영지를 소유한 강력한 제후가 되었어. 여기에 하이라이트로 멋진 유산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어.

정복왕 윌리엄 이후 이어지던 노르망디 왕가는 헨리 1세를 끝으로 끊겼는데, 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한 앙주 백작, 그리고 헨리 1세의 친척이었던 스티븐 사이에 치열한 내전이 벌어졌어. 결국 양쪽은 내전을 끝내는 대신 한 협약을 맺었어. 스티븐이 세상을 뜨면 잉글랜드의 왕위는 앙주 백작의 아들, 즉 헨리 플랜태저넷에게 건너가게 되어 있었어.

1154년, 아퀴탱, 즉 가스코뉴를 손에 넣은지 2년 후, 잉글랜드의 왕 스티븐이 세상을 뜨자 헨리 플랜태저넷은 입에 함박 웃음을 지으며 잉글랜드로 건너가 왕관을 썼지. 그가 바로 플랜태저넷 왕가의 창시자인 헨리 2세야.
잉글랜드와 앙주의 결합으로 강력한 왕국이 형성되었고-플랜태저넷 왕가는 이 때문에 앙주 왕가Angevin라고 불리기도 해- 마침내 위대한 플랜태저넷 왕가의 영광이 막이 올랐어. 이로 인해 플랜태저넷 왕가는 프랑스와 잉글랜드에 걸친 광대한 제국을 형성했지만, 동시에 프랑스라는 적과 오랜 대립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지.

가스코뉴 이외의 지방에서 잉글랜드의 권세는 오래 가지 못했어. 헨리 2세와 그의 아들 사자왕 리처드님하는 프랑스에서 끊임없이 세력권을 확대하려고 했어. 하지만 새로이 국왕에 오른 자는 바로 존엄왕 필리프. 리처드 님하와 부적절한 관계에 있었다는, 미확인 소문의 소유자인 이 필리프란 인물도 결코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지. 마침내 리처드가 별 중요하지도 않은 전투에서 화살에 맞고 죽자 필리프는 기회를 맞았어. 리처드의 동생인 무지왕 존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오토와 연합해서 프랑스를 공격했지만, 결국 전쟁은 부빈 전투에서 프랑스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지. 잉글랜드는 가스코뉴를 제외한 대부분의 프랑스에서 쫓겨났고, 대헌장에 서명하며 형편없이 왕권이 약해진 반면 필리프는 알비주아 십자군을 주도하며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뻗어나갔지.

이후의 대립은 주로 가스코뉴를 두고 벌어졌어. 지난 번에 살펴봤던 에드워드 쨩(1세)과 단려왕 필리프 4세 사이의 대립에서도 잉글랜드는 가스코뉴를 지켜낼 수 있었지.

그런데 본토와 분리된 지역을 통치하려면 반드시 본국과 연결로가 이어져 있어야 해. 그렇다면 당시 주요 연결로는 어디였을까? 바로 와인 무역로라는 길이야. 보르도에서 파리를 거쳐 칼레로 이어지는 와인 교역로를 따라가면 3주만에 가스코뉴에 도착할 수 있었지. 하지만 만약 양쪽이 주먹다짐에 들어가면? 길은 하나밖에 없었지. 바로 해로였어.

옛날부터 해로는 쉬운 길이 아니었어. 물론 바람이 순풍순풍 불고 날씨가 쾌청해서 푸른 하늘이 펼쳐지는 날이면, 돛을 펼친 배는 바다 위를 미끄러져 플리머스(Plymouth)에서 보르도까지 2주만에 갈 수 있었어. 하지만 비스케이만의 폭풍우 치는 밤이나 주변에서 어기적 거리며 상선을 약탈하는 해적들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어. 그래도 빨리 갈 수만 있다면 이 정도 대가는 치룰 수 있었겠지. 하지만 더 치명적인 것은, 일단 잉글랜드에서 가스코뉴로 가고 싶어도 언제 도착할지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거였어. 예를 들자면 1355년,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흑태자의 경우 플리머스에서 가스코뉴까지 11일만에 도착했지만, 그 전에 순풍을 기다리느라 6주동안 플리머스 항구에서 시꺼멓게 속을 태워야 했어.

상황이 이랬으니 가스코뉴의 통치자들이 불평을 늘어놓는 것도 이해 못할바는 아니었지. 하지만 잉글랜드에게도 이 지방은 결코 상실할 수 없는 곳이었어. 이에 대해 재미있는 통계가 하나 있어. 잉글랜드 국왕이 세금을 거두면 잉글랜드 전체에서 거둬 들이는 세금보다 보르도의 와인 무역에 부과해서 얻는 세금이 더 많았다는 거야. 하지만 잉글랜드가 이 부유한 속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귀찮은 대가를 치뤄야만 했어. 바로 프랑스의 군주들이었지. 프랑스의 여러 왕들도 이 부유한 지방에 눈독을 들이고 집적거렸어. 단려왕 필리프와 에드워드 사이에 벌어진 전투, 그리고 이어진 에드워드 2세의 군사적 무능과 에드워드 3세 치세 초기에 스코틀랜드 전쟁의 실패로 이 지방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배권은 크게 약화되 있었어. 당시 노인들은 잉글랜드가 이 부유한 속주를 지배했던 좋았던 옛날을 회상하며 그리워했다고 해.

그런데 이거라면 참을 수 있었겠는데, 하나 더 나쁜 문제가 있었어. 원래 가스코뉴는 프랑스 왕의 거였지? 그게 결혼 동맹으로 넘어갔던거지, 엘레아노르가 헨리 2세와 결혼하며 지참금으로 가져갔을 때부터, 적어도 "명목상" 군주는 프랑스였잖아. 기타 지방이야 다 프랑스에서 쫓겨났으니 그런다고 쳐도 가스코뉴를 점령하는 한,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의무가 있었지. 무지왕 존과 필리프의 시절부터 지긋지긋할 정도로 문제가 발생했지만, 에드워드 3세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게 되었지.

 

(뭐가 이렇게 복잡해!)

 

 


1328년, 아퀴탱의 상속자 따위의 시시껄렁한 논쟁은 그보다 몇 배나 거대한 논쟁에 휘말려 밀려나버렸어. 아퀴탱보다 몇 배나 거대한 곳을 지배하는 자, 바로 프랑스의 왕위를 놓고 벌어진 대립이었지. 당시 프랑스의 법에 따르면 여성은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되어 있었어. 그런데 만약 여성을 통해서 그 왕위가 "전달"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었지. 프랑스의 국왕이 자손없이 죽었는데 마지막 왕과 가장 가까운 혈통의 남자는 그의 외손자, 바로 에드워드 3세였지. 그 때 그의 나이는 겨우 13살로, 한참 이사벨라의 수렴첨정(...)을 받고 있던 시기였어. 한편 이사벨라가 자신의 아들이 프랑스의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자 프랑스 왕궁은 발칵 뒤집혔어. 왕위 계승권을 놓고 법적 논쟁이 벌어졌지. 그렇긴 해도 잉글랜드 국왕은 웨어데일에서 더글러스 경에게 농락당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왕위는 유력한 귀족에게 넘어갔지. 그 귀족은 필리프 드 발루아로 전왕의 사촌이자 그의 아버지는 두 차례 가스코뉴를 공격한 전과가 있는 사람이었지. 그리고 필리프는 발루아 왕가의 시초로서 이름을 남기게 될거야.

어쨌든 새로이 국왕에 오른 필리프 드 발루아는 그의 경쟁자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어. 에드워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겠지만 어쩌겠어. 스코틀랜드에게 완전히 휘둘리고 난 뒤라 왕의 영향력은 물론 보석까지 저당잡힐 정도로 돈도 없었는데. 거기에 프랑스 국왕은 가스코뉴에 세금을 부과했을 뿐 아니라 잉글랜드가 세금을 걷는 것도 방해하고 나섰어. 결국 1329년 현충일에 어린 왕은 아미앵으로 가서, 살짝 기분 나빠질 것 같은 웃음을 짓는 필리프 드 발루아에게 충성을 맹세했지.

 


(살짝 기분 나빠질 것 같은 웃음)

 


이날 이후, 에드워드 3세는 굴욕을 씻기 위해 가스코뉴에서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시작했어. 한편 프랑스 왕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지. 양쪽 모두 군비 경쟁이 시작되었어. 프랑스도 이미 가스코뉴를 공격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지. 1329년, 에드워드가 충성을 맹세한 바로 그해의 문서에 따르면 프랑스는 5,000명의 중기병과 16,000명의 보병을 소집할 목표를 세우고 있었어. 아마 1337년 5월에 대충 목표가 달성 되었던 것 같아. 이 달, 필리프는 명령을 내려 가스코뉴에 공격을 시도했어. 하지만 이에 대한 에드워드의 반응은 극적이었어.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런 일화가 있어.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과 대립할 것을 망설이고 있을 때, 프랑스 출신으로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맹세한 아르누아 백작이 연회에 초청받았어. 그런데 국왕까지 참석한 연회에 아르누아 백작은 나타나지 않았지. 귀족들도 왕이 있는데 나타나지 않는 아르누아 백작을 뒷다마 까고 있을 때, 갑자기 백작이 손에 새 한 마리를 들고 나타나 바쳤지.

"전하, 이 새는 바로 왜가리라는 새입니다. 새들 중 가장 겁이 많은 놈이 제 밥 그릇도 못 챙겨 먹지요. 이 새를 전하에게 바칩니다."

에드워드는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고 프랑스와 실력 대결에 들어가게 되었다는데, 에드워드가 정말로 망설였는지는 모를 일이지. 어쨌든 왜가리를 보고 삘이 받은 에드워드는, 필리프는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단순한 강탈자일 뿐이며, 선왕의 손자로서 진정한 프랑스 국왕의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어.

 


(무념무상...)

 


당시 에드워드의 행동은 대단히 무모한 것으로 비춰졌어. 과연 잉글랜드의 군주가 강력한 프랑스 왕과 맞서 싸울 힘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은 많지 않았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에드워드는 신중하게 계획한 끝에 이를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며 그 반응도 매우 신속했다는 거였어. 에드워드는 장관인 올리버 d'lngham 경에게 가스코뉴의 수비를 맡긴 후, 자신은 플랑드르에 짧지만 강력한 공격을 감행했지. 그러나 프랑스 왕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에드워드는 딜레마에 빠졌지. 과연 프랑스 왕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쟁이 장기전이 된다면 잉글랜드는 문제점이 많았어. 프랑스에서 전투를 벌여야 겠지만 거점이 없었거든. 가스코뉴는 너무 멀었고, 그에 비해 점령해야 할 프랑스 영토는 너무 넓었지.

과연 어느 곳에 거점을 마련해야 할까? 어떤 문을 열고 프랑스로 들어가야 할까? 1341년 4월 30일, 마침내 그 문이 열렸어.


브루타뉴 원정


1341년 4월 30일, 이 날은 브루타뉴 공작인 존 3세가 사망한 날로 기록되어 있어. 브루타뉴 공작은 프랑스의 어떠한 귀족보다도 큰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어. 그들은 대대로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지만 역사적으로는 잉글랜드와 깊은 관계가 있었지. 그 관계는 정복왕 윌리엄과 브루타뉴의 지배자인 알란 루푸스(Alan Rufus)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 윌리엄은 루푸스에게 리치먼드의 지배자라는 직위를 하사했고, 그는 노스 요크셔의 광대한 영지와 리치먼드 성, 리치먼드 백작이라는 작위도 가지고 있었지. 물론 나중에 이 지역은 잉글랜드 국왕에게 선물로 반납되지만, 대대로 브루타뉴 백작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중 어느 한 쪽 편을 들기보다는 자신이 최근에 충성을 맹세한 쪽의 편을 들어 그때그때 다르게 행동했어.

 

 

(......)



그러나 존 3세가 뚜렷한 상속자 없이 사망하자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이 지역을 놓고 맞붙었어. 만약 잉글랜드가 지지하는 상속자(그리고 당연히 친 잉글랜드파가 나올 수 밖에 없었지.)가 브루타뉴의 지배자가 된다면 잉글랜드에게 좋은 거점이 되었겠지. 잉글랜드가 미는 후보자는 존 드 몽포르라는 자로 초기에 몇 가지 성공을 누린 후, 더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 잉글랜드로 건너갔지.
프랑스 왕으로 인정받기를 바라던 에드워드는 이 상속자를 리치먼드 백작으로 임명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어.

 



한편, 프랑스가 지지하는 후보는 필리프의 양자인 샤를 드 발루아(son-in-law라는데, 성이 같은걸 보니 사위보다는 양자겠지? 혹시 데릴사위? -ㅅ-;;)라는 인물이었어. 그는 낭트 성에서 브루타뉴의 지배권을 노리던 존 드 발루아를 포위하고 사로잡는데 성공했어. 하마터면 전쟁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날 뻔 했는데, 잉글랜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몽포르의 아내이자 플랑드르의 여백작인 조안이라는 여사(...)의 활약이 있었어. 샤를 드 발루아는 브루타뉴 해안의 Hennebont라는 곳에서 조안을 포위한 후 공격을 퍼부었어. 하지만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어.

에드워드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군대를 준비했지. 잉글랜드는 이 내전을 틈타 프랑스에 군대를 보낼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결코 쉽지 않았어. 악천후 때문에 잉글랜드 군대는 2달 동안이나 항구에 발이 묶여 있었고, 그 후에야 피니스테르(Finistere)곶을 돌아 지원하러 갈 수 있었지. 한편 잉글랜드 군대가 미적거리는 사이 Hennebont의 성벽은 거대한 투석기에게 두들겨 맞아 거의 항복하기 직전의 상황이었어. 간신히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한 남자는 아이놀트 기사로 월터 매니(Walter Manny)라 불리는 남자였어. 그는 성 안으로 들어가 여백작이 배풀 수 있는 가장 화려한 파티를 즐긴 뒤, 군대를 이끌고 역공을 가해 투석기를 파괴하고 그 이름을 빛냈지...(라곤 해도 저건 또 뭔 삽질-ㅅ-)


 


첫 전투



일단 잉글랜드는 브루타뉴에 거점을 마련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동시에 순식간에 증원되는 강력한 프랑스 군대와 맞서 거점을 지켜내야 했어. 특히 이 문제는 노햄프턴 백작이 브루타뉴에 상륙해 모를레(Morlaix)성을 공격할 때 잘 드러났어. 전쟁에 대비해 강력한 군대를 양성해 두었던 프랑스 군대는 즉시 샤를 드 발루아의 군대에 지원군을 보냈고, 그의 대규모 군대는 갱강(Guingamp)에 진을 치고 노햄프턴 백작을 노려봤지. 그 군대는 무려 노햄프턴 백작이 이끈 군대의 네 배나 되었다고 해.

뒤통수를 맞을 위기에 처하자 할 수 없이 노햄프턴 백작도 모를레의 포위를 풀고 프랑스 군과 진검승부를 나왔지. 1342년 9월 30일 벌어진 이 모를레 전투가 백년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첫 번째 회전이었어.

모를레 전투는 크레시, 푸아티에 같은 메이저 전투에 비하면 확실히 네임벨류가 떨어지는 전투야. 이 전투로 특별히 무슨 변동 사항이 발생했다거나, 어느 한쪽이 크게 패한 것도 아니라 더더욱 그렇지. 하지만 잉글랜드 군은 모를레 전투에서 이후 그들이 사용할 그 무시무시한 전술을 처음으로 선보였어. 함성을 지르며 잉글랜드 군대를 공격하던 프랑스 전위부대는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비에 두들겨 맞고 와해되어 버렸어. 그러나 뒤따라 오는 본대는 계속해서 잉글랜드 군을 밀어 붙였고, 여기에 화살까지 떨어진 노햄프턴 경은 군대를 근처의 숲으로 물렸어.

이 전투를 통해 잉글랜드의 장군들은 새로운 전술이 필승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패배는 막아주리라는 것을 깨달았어. 서서히 잉글랜드 군대도 자신감을 었고 있었지.

 


한편, 전략적으로는 양쪽 모두 전황이 생각한 만큼 잘 풀리지 않았고, 여기에 겨울이 다가오자 양 군대 모두 일단 철수를 준비했어. 그러나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바친 프랑스 기사인 아르누아 백작은 겨울의 추위를 무릅쓰고 좀 더 대담한 작전을 펼칠 계획이었지. 그는 군대를 이끌고 Hennebont를 떠나 포위된 낭트 성으로 향했어. 그러나 프랑스 해군이 뱃길을 막자, 아르누아 백작은 뱃머리를 돌려 반(Vannes)을 공격했어. 잉글랜드 군대는 반에 맹렬한 공격을 시도했고, 고전적(?) 방식대로 밤이 되자 소수의 특공대가 성벽을 기어올라 성 안으로 침입하는데 성공했어. 곧 성문이 열렸고 잉글랜드 군대가 격렬한 기세로 성 안을 공격하며 약탈을 개시했지. 올리비에 드 클리송 경을 비롯, 프랑스 군대는 이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어.

아르누아 백작은 성공을 거두고 기뻐했겠지만, 이 일은 겨울잠을 잘 준비를 하던 샤를 드 발루아의 면상을 댑다 걷어찬 셈이었어. 비록 모를레에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의 군대는 여전히 잉글랜드 군대를 압도하고 있었고, 돌아온 클리송 경의 부대와 합류하여 반에서 아르누아 백작을 도로 쫓아내버렸어. 1342년 10월, 마침내 에드워드 3세의 본대가 브루타뉴에 발을 디뎠을 때, 왕은 아르누아 백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

슬픈 소식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어. 오히려 그와 장군들은 위축되지 않고 강력한 공세를 취했어. 잉글랜드 군대는 일단 셋으로 나뉘어 브루타뉴의 주요 도시인 렌(Rennes)과 반(Vannes), 그리고 낭트를 동시에 들이쳤어. 이 과정에서 에드워드는 약탈과 살육, 방화를 엄격하게 금지했고 이 과정에서 인기와 명성을 손에 넣었지. 그런데 겨울이 다가오는데 현지 보급을 배제하고 본국에서 오는 식량으로만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은 위험한 작전이었어. 만약 장기전으로 갔다면 잉글랜드 군도 위험해졌겠지만, 샤를 드 발루아는 적의 과감한 공세에 밀려 일단 브루타뉴에서 물러났어. 하지만 그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프랑스 왕에게 원병을 요청했어. 필리프 드 발루아는 이에 답해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브루타뉴로 들어왔어.

이 군대의 수는 워낙 대규모였기 때문에 에드워드나 잉글랜드 장군들도 잔뜩 긴장하고 있었어. 아직 반을 점령하지 못했는데 북쪽에서 접근해 온 필리프와 샤를의 발루아 부자의 견제가 이어지고 있었고, 그의 군대는 대규모인 적과 맞서 싸울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거든. 그는 황급히 본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프랑스의 공격에 대비해 방어선을 구축했어. 이 위기의 순간, 행운의 여신은 에드워드의 손을 들어주었지.

필리프 발루아는 압도적인 군대를 이끌고도 적을 공격할 생각을 내지 못하고 있었어. 어쩌면 그의 지나친 조심성이 문제였을 지도 모르고, 샤를 드 발루아가 모를레에서 당했던 끔찍한 사건을 상기시키며 공격을 미뤘을지도 몰라. 어쨌든 프랑스는 우세한 상황에서 잉글랜드와 평화 조약을 맺었어. 이 Malestroit의 화약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군대를 물려 브루타뉴에서 철수했어. 대신 반(Vannes)은 중립 지역으로 남게 되었지.

언뜻 보기에 잉글랜드 국왕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갔어. 하지만 젊은 에드워드는 잉글랜드의 군대가 유럽 본토에서도 충분히 통할 것인지를 시험해 보았고, 고무적이게도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지. 이제 양쪽 모두 진검 승부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어. 그리고 그 승부는 이번과는 비교하기도 힘들 정도로 잔혹할 것이고.


전쟁에 앞서...


지금까지 일단 백년 전쟁의 서막에 대해 이야기 해 봤어. 하지만 본격적으로 전쟁에 들어가기 전에 당시의 상황에 대해 알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일단 백년 전쟁 당시의 기사들에게 있어 전쟁의 기술이란 기사와 다른 기사가 충돌하여 용맹스럽게 무기를 휘두르며 그 무용을 뽐내는 거였어. 그리고 이들의 용맹은 직접 이 것을 지켜본 연대기 작가의 펜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해 명성을 흩날리게 되겠지. 물론 이것은 아주 "이상적"인 것이었어. 실제로 전쟁은 기사들끼리의 소규모 접전-주로 정찰, 약탈의 과정에서 만난-의 연속이었지만, 대규모 접전이 벌어질 때, 보병과의 협동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지. 물론 중세 프랑스의 예를 볼 때, 군대 구조는 보병과 기병의 명령 체계가 이원적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체계적인 보-기 협동 작전은 좀 무리가 있기는 했지만. 그리고 연대기 작가는 기사가 좋아할 말만 골라서 적어놓고 추태는 적당히 삭제했지.

그러나 프로와사르의 연대기에서 보이는 기사의 모습들, 즉 전투에서 빛나는 무기를 휘두르는 기사들과, 패하여 사로잡힌 귀족들을 정중하게 대접하는 기사도는 극히 부분적인 것이었어. 프로와사르가 중요시 여기는 전투는 몇 시간 동안으로 결정되는 것이었지만, 실제 전쟁은 몇 주, 몇 달 끄는 것은 기본이었어. 전투에서 기사들은 전사이자 지휘관이었지. 그들은 지휘관, 훈련관같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자주 그들이 이끄는 불한당과 비슷할 정도의 빵을 낭비하는 기생충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어. 거기다 전투에서 싸우는 것은 전사들이지만, 전쟁에서 싸우는 것은 그들 외에 시민, 성직자, 여자와 아이도 휘말리게 돼. 특히 크레시, 푸아티에 전투로 역사에 남을 1340, 50년대의 전쟁은 이제 단순한 몇 차례의 전투로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었어.

전쟁에 동원될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에드워드 3세 시기 잉글랜드 군대는 예전의 귀족 기사들로 이루어진 군대에 비하면 훨씬 거대한 것이었어. 그의 군대는 이제 귀족 기사들이나 보병들 외에 무서운 장궁병들, 그리고 특정한 임무를 수행할 노동자, 하인, 선원들이 동원되었고 특히 공성전에서 매우 중요한 광부들도 합류했어.

당시 병사들을 모은 방식은 주로 세 가지가 있었어. 첫 번째는 가장 고전적인 것으로, 왕에게 위임받은 귀족이 자신의 봉건 군대를 이끌고 참가하는 거였지. 전쟁에 참가할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병사를 모으고, 선별하여, 훈련시키며 병사를 모았어. 그리고 나서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보수를 제공하며 자신의 전력으로 포함시켰지. 하지만 이런 방식이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고, 이 시대에 들어서는 중요성도 떨어지고 있었어. 1341년에 소집된 궁수들은 "약해 빠졌다"고 험담을 들었지.

다른 하나는 에드워드 3세가 자주 사용할 방식으로, 바로 계약을 통해 일종의 용병들을 모으는 거였어. 일단 왕은 몇몇 기사들과 계약을 맺어. 기사들은 자신들이 제공할 병종과 병사 수에 따라 왕에게 돈을 받았지. 그러면 기사들은 다시 일반 병사들과 하부 계약을 맺어 병사들을 모으는거야. 모집 인원이나 계급, 봉급과 복무 기간에 대해서도 자세한 합의가 이루어졌어. 특히 복무 기간의 경우, 40일을 넘는 초과 근무에는 추가 수당이 지급되었어. 에드워드 초기 재위기간에 전사들이 받았던 급료는 다음과 같아.

백작(earl)-6s 8d/ 배너릿 기사-4s/ 기사-2s/ 멘엣암즈("맨엣암즈"라는걸 정확히 뭘로 번역해야 할까ㅇㅅㅇ;; 무장병...은 좀 그렇고;; 단순히 중기병이라고 하기도 그렇고;;)-1s/ 승마 궁수-6d/ 보병 궁수-3d/ 웨일즈 창병-2d/

 

 

(돈만 되면 이런 것도 됩니다...?)

 


비슷한 예로 1341년 워릭 백작은 3명의 배너릿 기사, 26명의 기사, 71명의 멘엣암즈, 40명의 보병과 100명의 궁수를 제공했어.

세 번째 방식은 바로 자원 봉사자들을 동원하는 것인데,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는 죄수들도 감옥에서 썩어가는 대신 군대에서 근무하는 경우도 있었지. 심할 때에는 에드워드의 군대 중 1/10이 범죄자로 이루어졌던 적도 있었다고 해.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자원자들은 범죄자 외에 일반 시민들의 숫자도 늘어나기 시작했어. 특히 1346년 이후, 잉글랜드 군대가 귀환하면서 막대한 약탈품을 바리바리 싣고 돌아오자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났지. 여기에 특정 지휘관은 자비로운 행동으로 명성을 얻기도 했고, 어떤 지휘관은 전장에서 뛰어난 지휘력을 선보여 자원병들을 받아들였어. 예를 들자면 존 챈더스경 같은 경우, 처음에는 아주 적은 영지로 시작했지만 1359년에는 어떤 영주들보다도 많은 군대를 모을 수 있었지.

 




기마 행렬(Chevauchee)


1346년 7월 12일, 에드워드 3세는 드디어 본격적인 승부를 내고자 콘텐틴 반도(Contentin peninsula)끝의 생 바스트(St-vasst)에 상륙한 뒤, 드디어 "크레시 전역"이라 이름붙여질 역사적인 전쟁을 시작했어. 이번에 에드워드의 군대는 지난 번의 플랑드르, 브루타뉴에서 동원했던 군대보다 훨씬 많은 군대였어. 하지만 동시에, 왕의 지휘를 받는 기사들은 기사들이라면 당연히 품을만한 환상 따위는 일말도 품지 않고 있었지. 이제 그들은 말 위에 올라탄 위풍당당한 기병으로서가 아니라, 궁수들과 어깨를 맞대고 싸우는 보병 기사로서 적과 싸워야 했으니까. 더 나쁜 것은, 기사도의 미덕조차 지켜지지 않을 전쟁에 동원되었다는 거였어. 이것은 말 그대로 "토탈워"였으니까.

백년 전쟁에서 양국의 주민들은 끊임없이 벌어질 이 전쟁 때문에 막대한 세금을 부담해야 했어. 이전의 전쟁은 몇 차례의 전투 끝에 병사들끼리의 싸움으로 마무리되었겠지만 이번 전쟁은 아주 길었지. 그래서 일반인들은 비록 부대와 함께 행동하지는 않더라도,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어. 결국 이를 위해 왕들은 다양한 선전 공작을 활용해서 적에게 대학 적개심을 불타오르게 만들었어. 수도원이나 시장같은 곳에서도 전쟁의 준비는 진행되고 있었고, 나아가 군대의 수송과 보급, 세금을 내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것, 민간인들은 이런 일에 참여해서 전쟁에 큰 역할을 수행하게 돼.

 


(하지만 전쟁을 수행하는 민간인의 기분은 이런걸 본 기분이 아니었을까...;;중화의 진수라니...)


하지만 이 총력전에서 양국이 받는 부담은 차이가 있었어. 필요로 하는 비용은 양쪽 모두 컸지만, 그걸 부담하는 것은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어. 우선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로 가 있는 동안 스코틀랜드가 몇 차례 침략을 했지만 잉글랜드는 별 피해 없이 격퇴할 수 있었고, 반대로 프랑스도 영불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어진 Sluy 해전에서 대패하면서, 그 계획은 에드워드의 선전 수단으로만 활용되었지. 물론 후대에 프랑스는 스페인과 동맹을 맺으면서 해군력에서 우위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어.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공격이 별 효과를 못 보는 사이, 잉글랜드는 압도적인 기세로 프랑스에게 장기적인 작전을 수행하면서 프랑스의 생산 수단을 파괴하고 약탈하며 부담을 강요했어.

가장 무시무시한 무기는 불이었어. 약탈할 수 없는 적의 재산을 불태워 없애는 것은 이제 새로운 전쟁 방식이 되어 갔어. 잉글랜드 군대가 움직이는 자리마다 불길이 넘실거렸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시꺼멓게 거슬린 잿더미만 남게 되었어. 사람이나 짐승이 살만한 건물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지. 프랑스의 역사가인 데니플(Denifle)은 이렇게 쓰고 있어. "불은 언제나 영국의 편이었다.", 그리고 연대기 작가인 베이커는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보다도 이 약탈행위에 더 많은 언급을 했고, 1339년 에드워드가 처음으로 유럽 본토를 공격했을 때, 캉브레(Cambrai) 근처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지. 교회의 종탑 위에서 그는 근처의 시골 마을들이 잉글랜드 군대가 놓은 불로 타오르며, 주위의 모든 방향에서 불길을 볼 수 있을 정도라고 했어.
하지만 불로 인한 파괴는 단지 이 약탈 행렬의 마지막 단계일 뿐이었어. 이 "기마행렬"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돼.

우선 첫 단계에서는 단순히 군대가 지나치는 곳에서 식량과 물을 보급하는 거였지.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본국에서 가져오는 보급품을 받는 것이었지만, 중세에 그것만으로 모든 보급을 충당할 수는 없었어. 당연히 현지 보급이 병행되어야 했지.

그 다음 단계로는 역시 약탈로 크레시 전역이 가장 좋은 예시가 될 거야. 그는 콘텐틴 반도에 상륙해 행군하면서 막대한 약탈을 시행했는데, 이는 당시 그의 군대가 필요로 하는 양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어. 당시 역사가들은 이 약탈이 왕의 뜻이 아니라 군대에 있던 질 낮은 병사들, 혹은 프랑스에게 시달리던 남부 해안의 주민들이 보복하며 저지른 일이라고 하고 있어.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었던 간에, 카옌(Caen)으로 행진하면서도 공식적인 작전에 별다른 달라진 점은 없었어. 군사적인 관점으로 볼 때 카옌의 점령은 공격으로 성을 점령하는 아주 좋은 예시라 할 수 있어. 포위하여 성을 점령하는 것은 우선 군대가 고정되어 있어야 했고 소모되는 식량도 많았을 뿐 아니라 시간도 오래 걸렸지. 카옌 공격은 육군이 여러 성문을 동시에 공격하는 한편, 해군 함대가 강 어귀를 거슬러 올라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어. 일단 에드워드는 노르망디 해안을 따라 "기마행렬", 즉 약탈 작전을 수행하며 행진하고 있었어. 그리고 해군이 그 뒤를 따르며 수륙병진을 하고 있었고. 마침내 카옌 성을 공격할 때가 되자, 함대가 강 어귀를 거슬러 오르는 한편 동시에 육군이 성을 공격해 큰 어려움 없이 성을 점령할 수 있었어. 아마도 이는 완벽한 작전 수행보다는 운이 더 많이 따랐을고야. 이런 수륙 협동 작전을 잘 맞춰 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거든.

이외에 해군 함대는 죄수, 포로, 부상병, 그리고 가득한 약탈품을 싣고 영국으로 떠날 수 있었지.
한 역사가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그의 군대에게 여자와 아이, 수녀와 수도사, 그리고 교회와 집을 약탈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을 내렸다고는 해. 하지만 그 명령은 전혀 효과가 없었어. 프로와사르에 따르면, 토마스 홀랜드 경이 거리로 말을 달려 마구 도시를 유린하는 병사들을 말려 간신히 "숙녀와 처녀, 수도사를 자비심 없는 병사들로부터" 살려냈다고 하고 있지. Harcourt의 고드프리 경은 이 상황을 왕에게 알린 후, 병사들의 약탈을 가로 막으려고 노력했어.

프로아사르는 이 책임을 "왕의 군대에서 불가피하게 발견되는 질 나쁜 병사들과 악마같은 자들" 때문이라고 돌리고 있지만, 사실 약탈은 이들만 한게 아니라 고귀한 귀족들도 실시했어. 한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어.

"잉글랜드 인들은 약탈한 보석으로 장식된 옷이나 아주 귀한 장식품을 안고 배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린다". 육군과 해군이 가까운 거리에서 행진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군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약탈품을 실어 나를 수 있었지. 프로와사르도 그 배들이 "옷과 보석, 금과 은 항아리를 싣고"있다고 했어. 늦어도 1348년에 이 약탈품들은 잉글랜드에 풀린게 틀림없어. 윌싱햄(Walsingham)은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어.

"카옌이나 칼레, 그리고 다른 바다 너머의 도시에서 약탈된 귀중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여인은 거의 없다. 모든 집에서 비단과 모피, 쿠션, 식탁보, 그리고 린넨 천을 볼 수 있다. 결혼한 여성은 프랑스 귀부인이 가지고 있던 장식품을 가지고 다닌다. 아마 후자는 그것을 잃고 비통해 했겠지만, 영국의 귀부인들은 그것을 얻고 아주 기뻐했다."

카옌에서 얻은 가장 이상한 약탈품은 바로 1339년에 작성된 문서였어. 이 문서에 따르면 프랑스 왕은 명백히 잉글랜드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 프랑스 왕과 노르망디 공작은 군사적으로 동맹을 맺었고, 여기에 전쟁 자금, 해상 연결로 유지, 약탈품 분배같은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져 있었지. 이 문서는 즉시 헌팅던 백작에 의해 영국으로 보내졌고, 캔터베리의 대주교는 세인트폴(Saint Paul)의 교회 앞마당에서 이 문서를 읽었어. 비록 이 것은 몇 년이나 지난 것이었지만, 이 선전은 잉글랜드에 반 프랑스 정서를 불러 일으켰지.  

 

(이건 100년 전의 것.)



이런 것이 기마 행렬로, 대부분 이런 행동이 백년 전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러나 이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경제적인 것도 있지만 정치적인 것이었지. 프랑스는 잉글랜드가 정복하기에는 너무 넓은 나라였어. 단순히 브루타뉴와 노르망디에 수비병을 배치하고, 병사에게 봉급을 제공하는 것만 해도 아주 비싼 돈이 들었어. 그러나 이러한 기마 행렬로 인한 약탈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어. 이 행위는 프랑스 왕에게 잉글랜드 왕의 힘을 과시한 사건이었고, 프랑스 왕은 방어를 하거나 반격을 해야 했어. 만약 이런 행동이 없다면 프랑스 왕의 권위와 충성도는 급격히 추락할 것이고, 당시 두 나라는 영주들이나 백성들의 충성을 유지해야 전쟁의 승리를 이끌 수 있었지. 나아가 기마 행렬을 통해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재정을 부담해야 할 비전투 인원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었어.

기마 행렬이 계속되면서 세금을 내야할 백성들이 줄어들면 프랑스의 재정도 줄어들 것이고, 나아가 병사들에게 지불할 봉급도 부족해 질테니까. 결국 이런 방식을 통해 에드워드는 필리프와 정면 대결을 노리고 있었어.
하지만 이 시점에서 에드워드는 프랑스 군대와 싸워본 경험이 적었어. 그리고 새로운 전술이 얼마나 통할지도 미지수였지. 하지만 1345년 가스코뉴에서 벌어진 전투는 에드워드에게 자신감을 더해주었어. 1345년 10월 21일, 헨리 랭커스터 경과 월터 매니 경이 이끄는 군대는 프랑스 군대와 격돌했어. 이 시대 가스코뉴에서 벌어졌던 전투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 전투의 승자는 잉글랜드였지. 그 때 프랑스 군대는 최근 잉글랜드가 점령한 Auberoche를 수복하기 위해 공격하고 있었는데, 이 때 잉글랜드 군대의 공격을 받았어. 잉글랜드 군대는 멘엣암즈와 궁수가 숲을 지나 서로 다른 경로로 접근해서 적에게 공격을 퍼부었어. 비록 위험한 작전이었지만, 승리는 잉글랜드에게 돌아갔지.


크레시-



에드워드는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이것만으로는 프랑스 왕과 그의 대부대를 전투로 이끌기에는 좀 부족했지. 물론 그게 에드워드 계획에 전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아니긴 했어. 지금 상태로도 에드워드는 큰 어려움 없이 필리프 드 발루아를 몰아 붙이고 있었거든. 하지만 초기 목적이 무었이었든, 필리프는 전투에 나설 것이고, 이번 전쟁은 치명적은 격전으로 마무리 될 것이고, 동시에 그 전투는 압도적인 승리로서 역사에 남게 될 거야-크레시 전투라는 이름으로.

사실 크레시 전투는 에드워드가 처음부터 원했던 바는 아니었어. 그는 필리프가 이끄는 대부대를 피해 플랑드르 동맹군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 중이었어. 그는 통상적인 기마 행렬을 저지르며 빠르게 이동했지. 플랑드르 군대도 소수의 잉글랜드 군대와 합류해서 8월에 출발, 남하를 하고 있었고 필리프는 이 군대가 합류하기 전에 잉글랜드 군대를 격파하고자 했지. 이 때 잉글랜드와 플랑드르 군대 사이의 거리는 약 350km 정도 떨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는 세느 강과 솜 강이 흘러 길을 막고 있었어.

필리프 드 발루아는 루앙(Rouen)에 있었는데, 그는 에드워드가 파리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 이후 10일 동안, 프랑스 군대와 잉글랜드 군대는 세느 강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서로를 따라 전진했어. 그 동안 잉글랜드 군대는 강둑 이쪽의 루비에(Louvier)를 약탈하고 가이옹(Gaillon)을 점령했지만, 푸아시(Poissy)에 이르기까지 강을 건넌 다리를 발견할 수는 없었어. 다행히 그 근처에서 망가진 다리를 발견할 수 있었지. 에드워드는 머리를 굴려서, 그의 아들, 즉 흑태자에게 소수 군대를 주어 파리 쪽으로 행군하는 척 하면서 필리프가 그를 따라 가는 동안 다리를 수리했어. 그리고 8월 16일, 마침내 에드워드는 세느 강 도하에 성공하고 계속 북상해 아브빌(Abbevile)과 아미엥 중간 지점까지 진군했어. 하지만 아직도 플랑드르 군과 합류하려면 1주일은 더 가야 했지.

하지만 필리프는 성공적으로 추격에 성공해 에드워드를 경악에 빠트렸어. 에드워드는 21일 솜 강에 도착해 도강 지점을 찾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의 정찰병이 뛰어오면서 필리프가 이를 갈며 반대편 강둑에 대기중이라는 소식을 전했던고야. 물론 이게 필리프의 전부대는 아니었지만, 하루에 약 35km가 넘는 거리를 뛰어와 에드워드 앞을 가로막는데 성공한거지. 필리프와 에드워드 사이의 거리는 단 5km. 그리고 지원하러 달려오는 플랑드르 군대와는 약 70km의 거리가 남아 있었어. 더군다나 워릭 백작은 프랑스 군이 강을 건널 길목을 완전하게 차단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줬지. 아무리 에드워드라도 강을 건너는데 프랑스 군대의 공격을 받는다면 버티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번 상황은 큰 위기였어.

다행스럽게도, Gobin Agache라는 프랑스 포로가 해결책을 알려줬지. 그는 좋은 대가를 받는 조건으로 Blanchetaque라는 곳에 얕은 여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어. 수위가 낮을 때면 무릎 정도만 적시고 강을 건널 수 있는 곳이었지. 잉글랜드 군대는 새벽에 출발, Blanchetaque를 향해 10km 정도를 행군했어. 하지만 이미 필리프는 적의 행동을 알고 있었기에 500명의 기사와 3,000명의 제노바 궁수와 보병을 보내 이 여울목을 막으라고 명했어. 휴 디펜서(Hugh Depenser)경이 거느리는 부대가 강을 건너는 동안, 프랑스 군대는 조용히 기다렸어. 그리고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서자 일제히 석궁을 발사하며 기습 공격을 감행했지. 하지만 장궁병들은 대응 사격을 가해 적을 흩어버리는데 성공했어. 물론 이 전투는 기습적으로 이루어졌기는 했지만, 앞으로 벌어질 장궁과 석궁의 대결의 전초전이었어.

 



이렇게 에드워드는 성공적으로 그의 진로를 가로막는 두 개의 강을 건너는데 성공했어. 모든 조짐이 좋았고, 그의 군대는 아직도 좋은 규율과 무장을 유지하고 있었어. 그 뿐만 아니라, 이번 전투의 승리로 잉글랜드 군대의 사기도 치솟았어. 이 상황에서 에드워드는 고민한 끝에, 운명적이고 역사적인 결단을 내렸어. 그는 플랑드르 군대와 합류하는 대신, 이곳에서 유리한 지점을 정하고 프랑스 군대와 싸우기로 결정했던고야. 그가 선택한 지점은 크레시 마을 동북쪽에 있는 한 언덕이었어. 이 언덕 주위에는 Maye 강이 흐르고, 언덕의 동쪽은 Wadicourt 마을이 있는 고지대로 이어져 있었어. 이 언덕의 정상에는 풍차가 서 있어서 이상적인 관측 장소를 제공해 주고 있었어. 한편, 오른쪽 측면은 크레시 마을과 주위를 흘러 지나가는 강의 보호를 받고 있었지.

잉글랜드 군대는 약 12,000에서 13,000명으로 추정되고 있어. 우익부대는 16살밖에 안된 고딩 에드워드 태자가 고드프리 경과 함께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서. 좌익은 노햄프턴 백작이 이끄는 부대로, 모를레 전투와 비슷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활약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지. 세 부대 모두 중앙에는 보병이, 양익에는 궁수들이 배치되어 있었어. 궁수들은 쐐기꼴 대형을 취해서 돌격해 오는 프랑스 기사들에게 화살비를 집중할 수 있었어. 이런 식으로 화살비를 퍼부으면 프랑스 기사들은 궁병을 공격하지 못하고 잉글랜드 보병 기사와 교전하게 될 것이고, 측면에서 쏟아지는 화살은 그들을 과도하게 밀집시켜 보병 기사들이 용이하게 대처하도록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지. 그들이 오후까지 기다리는 동안, 짧은 폭풍우가 몰아쳤어. 활줄이 젖으면 활의 정확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궁수들은 급히 활줄을 끌러 모자 밑에 가려둬서 전투 전까지 잘 마른 상태로 보존할 수 있었어.

한편, 프랑스 군대는 여러 이질적인 군대의 연합체였어. 우선 가장 중요한 부대는 프랑스 왕 자신의 가신 군대로 강력한 기사와 봉건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지. 여기에 자기들 지휘관 밑에서 싸울 제노바 석궁수들이 있었고, 보헤미아의 장님왕 얀과 로마인의 왕(King of Romans)이자 얀의 아들인 카를, 그리고 에드워드 3세의 왕비 필리파의 시숙님인 사보이 공작인 아이놀트의 존(John of Hainault), 그리고 마요르카의 왕인 제임스 1세등등이 프랑스 왕의 군대였어. 또한 프랑스의 봉건 징병 군대도 있었기에 이들은 보병의 질에서는 떨어졌을지 몰라도 수에서는 완벽하게 잉글랜드를 압도하고 있었어.

 

 

(내껀 이따만큼 많다고. 하지 않겠는가.)



 마침내 1346년 8월 26일 오후 늦게, 프랑스 군대는 전진하기 시작했어. 하지만 이 난잡하고 협동되지 않은 움직임은 곧 언덕위의 잉글랜드 군에게 발견되었고, 특히 에드워드 3세는 풍차 위에서 이를 지켜보며 지휘를 하고 있었어. 우선 제노바 궁수들이 전진을 시작했어. 하지만 제노바 석궁병들은 먼 거리를 행군해 온 것도 모자라 활줄이 젖은 상태에서, 해를 마주보며 행군해야 했어. 이들은 산발적으로 쿼렐을 퍼부으며 약 150미터 정도 앞까지 다가가는 동안, 장궁병들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었어. 하지만 그들이 사정거리에 들어서자 장궁병들이 일제히 한 걸음 전진하며 엄청난 일제 사격을 퍼부었어. 새까맣게 물들인 7,000발에 달하는 화살비에 두들겨 맞은 제노바 궁수들은 와해되기 시작했지. 왕의 동생인 알랑송 공작이 이끄는 부대는 제노바의 배신자들에게 저주를 보내며 그들을 깔아 뭉갠 채 웨일즈 공작-흑태자-이 이끄는 부대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어. 곧 양군 사이에 치열한 접전이 벌여졌고, 화살 폭풍에 얻어 맞은 프랑스 부대가 와해되면 후위부대가 그 자리를 메우며 전진해왔어.

이 시점에서, 아주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어. 잉글랜드 군대와 프랑스 군대가 치열한 교전을 벌이는 동안, 고드프리경은 아룬델 백작(Earl of Arundel)에게 전령을 보내 적의 측면을 들이쳐 흑태자와 그의 부대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약화시켜 달라는 부탁을 하는 한편, 동시에 왕에게 지원군을 부탁했어.
전령이 풍차에 도착해서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지.

"현재 워릭 백작, 옥스퍼드 백작, 레이널드 코햄 경...모두 왕자 곁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모두 분전하고 있고 아직까지는 승기를 잡고 있습니다만, 전하와 전하의 기사단이 지원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모두 알고 있듯이, 만약 프랑스 군대가 증원된다면 태자 저하께서는 곤경에 처하고 말 것입니다."

에드워드는 풍차 위에서 전황을 내려다보며 물었어.

"왕자가 죽었느냐?"
"아닙니다."
"심하게 다쳤느냐?"
"아닙니다."
"아니면 말에서 떨어졌느냐?"
"아닙니다만, 대단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왕자와 너를 보낸 그들에게 돌아가 이렇게 전하라. 내 아들이 살아 있는 한, 더 이상 전령을 나에게 보내지 마라. 아무 소용 없을 것이다. 또 이렇게 전하라. 그들에게 왕자로 하여금 자신의 힘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Let the boy win his spur)."

...그냥 보면 역시 대단한 아버지군하...하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는데, 사실 이러다 정말 아들 덜컥 죽어버리고 진형 무너졌으면 이건 또 무슨 망신이야-_-^ 하지만 에드워드는 자식 교육(?)을 위해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하려고 했던게 아니라, 풍차 위에서 지켜보니 아룬델 백작과 기사들이 적의 측면을 들이쳐 다시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예비대를 아껴두자는 생각이었던거지.

어쨌든 베이커는 이 시점에서 더럼 주교와 휘하의 소규모 기사단이 도착했을 때, 흑태자는 용맹스럽게 싸우고 있어고 그 아래에는 1,000명 이상의 프랑스 기사들이 죽어 있었다고 해.(...사실 S 회사에서 나온 모 게임의 영향 때문에 그분이 기사 천 명 정도는 혼자 때려 잡는 것 따위는 손쉬울 것 같은 느낌이지만-_-^)

 


(훗...기사 천 명정도 말인가.)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지만, 프랑스 기사들은 궁수들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대열을 허물어 트리지 않고 싸우는 보병 기사에 밀려 달아날 수 밖에 없었어. 그날 해가 저물 때까지 싸운 전투의 결과, 근처의 수도원이 전투가 끝나고 죽은 자들의 수를 세봤더니 기사만 1,542명에 달했으며 보병들은 훨씬 많았다고 해.

이 뿐만 아니라 샤를 드 발루아의 형이나 보헤미아의 장님왕 얀도 전사자에 포함되어 있었지.
장님왕 얀 같은 경우 거의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있었어. 하지만 전황이 어려워지자 그의 기사들에게 물었지.

"내 아들 카를은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는 알 수 없지만, 한창 전투 중일 것입니다."

이 말에 얀은 단호하게 말했어.

"경들은 내 오랜 벗들로, 이 전투에서 나의 동료이자 친구였소. 나를 갈 수 있는데까지 전장으로 깊숙이 안도하여주시오. 그리해서 내가 검으로 단 한번이라도 직접 적을 내리칠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얀의 기사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여 서로의 안장을 묶고 잉글랜드 군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어. 얀은 소원대로 적을 네 번이나 내리쳤다고 해. 하지만 다음날, 그와 호위 기사들은 한덩어리가 된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어. 마치 저물어가는 기사들의 영광처럼, 그의 최후는 황혼 속에 묻혀갔어.

크레시 전투는 모를레와 더플린 무어, 그리고 할리던 힐, 더 거슬러 올라가면 폴커크 전투에서부터 전해 내려왔던 장궁-보병 전술의 결정판이었어.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궁수들과 함께 싸웠고, 궁수와 보병 기사는 서로 협동하며 적을 분쇄시켰지. 반면 프랑스 군대는 여러 혼합체였고, 별다른 지휘력없이 협동도 이루어지지 않았어.

하지만 석궁의 명예를 위해서 말하지만, 제노바 석궁병들은 패한것은 그들이 단지 석궁을 썼기 때문은 아니었어.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용병이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전술 행동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야. 그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잉글랜드의 세 부대 중 한 곳을 향해 전진해야 했어. 이 상황에서 세 방향에서 화살을 두들겨 맞은 제노바 궁수들이 무너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

크레시 전투는 압도적인 전쟁의 화려한 대미였어. 기마 행렬은 계속되었고, 에드워드는 앞으로 프랑스 군대와 망설이지 않고 싸울 수 있겠지. 결국 그 자신의 힘으로 멋진 성공을 거둔 사람은 흑태자 뿐만이 아니라 그 아버지도 있었던 셈이야.


무기와 갑옷


(무기와 갑옷 말인가...)

 



이 시점에서 대규모 화살 공격에 너무나도 무력해 보였던 기사들의 당시 무기를 살펴보자. 14세기에 들어 체인 메일은 점차 판금 갑옷으로 대체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고, 14세기 말에 이르면 대부분의 방어 장비가 플레이트로 교체되지.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아니었어.

장궁에서 쏘아지는 강력하고 날카로운 촉을 가진 화살은 체인 메일을 손쉽게 파고들었고, 적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어. 물론 석궁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오로지 장궁의 화살만으로 그런 파괴적인 결과를 이끌어낸 것은 주목할만한 사건이야. 유사한 예로 1361년 덴마크의 왕실 군대는 위스비(Wisby)전투에서 스웨덴의 농민과 시민군을 대파하고 살육했어. 이 때 스웨덴 군대의 방어 장비라고는 오로지 체인 메일 뿐이었고, 전투 후 시체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구덩이에 파묻혔어. 1930년대의 발굴에 의하면, 최소한 125명의 남자들이 석궁에서 발사된 쿼렐에 머리를 얻어 맞고 죽은것 같다고 해. 그들의 두개골에서 살촉이 발견되는데, 사슬 코이프가 석궁에 무력함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어.

나아가 체인 메일은 찌르기를 제외한 검 공격에 효과적인 방어를 제공해 줄 수 있었지만, 그래도 결과는 치명적이었어. 만약 강력한 내려치기를 당한다면 비록 그것이 체인 메일을 쪼개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부러지지 않은 고리가 살점으로 파고들어 끔찍한 부상을 입힐 수 도 있었어.

발전된 형태의 판금 갑옷은 우선 팔과 견갑에서 시작되었고, 상완을 보호하는 rerebrace와 하완을 보호하는 vambrace가 있었어. schynabald라고 불리는 것이 정강이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고 sabaton이라는 금속제 신발이 다리와 발에 방어력을 제공해 줬겠지. 아마 배넉번 전투에서 싸웠던 기사들도 이와 유사한 무장을 했을거야. 할리던 힐 전투에서는 사슬 벙어리 장갑 대신에 플레이트 건틀릿이 손을 보호하게 되었고, 여기에 투구도 개량되어 머리와 목을 어느 정도 보호할 수 있었어.

하지만 몸통을 덮는 갑옷은 훨씬 만들기 어려운 것이었어. 그 전까지 서코트는 거의 모든 몸통 부위를 덮고 있었지만 점차 짧아지고 후로는 갑옷의 흉갑의 개량도 이루어지게 돼. 우선 검이나 단검같이 체인 메일을 관통할 수 있는 무기에 대항해 브레스트 플레이트가 나타났고, 후대로 가면 이런 판금 갑옷들은 착용자의 등도 덮을 수 있게 돼.


승리의 해


크레시에서 압도적인 패배를 경험한 필리프는 스코틀랜드의 왕이자 로버트 브루스의 아들인 데이비드 2세에게 잉글랜드를 공격하라고 요청했어. 이 요청을 받아들인 스코틀랜드는 대규모 군대를 형성해 더럼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어.

스코틀랜드 군대의 공격을 알아차린 노섬브리아의 지주인 Herle경은 10월 15일 일요일, 다섯 개 마을이 적의 침략을 받았다고 해. 집과 곡식은 불태워졌고 70마리의 수소와 83마리의 암소, 142마리의 송아지, 32마리의 새끼를 안 낳은 암소, 316마리의 양과 기타 많은 물품이 약탈되었다고 적고 있어. 이 상황에서 잉글랜드의 왕은 어떤 수단을 취해야 했을까?

다행히 프랑스로 떠나기 전,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의 침입에 대비하여 험버(Humber) 북쪽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지시를 해두었어. 우선 더럼 주교가 프랑스에서 왕과 함께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 군대를 이끄는 역할은 요크의 대주교가 맡게 되었지. 이외에 랄프 네빌(Ralph Nevile), 헨리 퍼시(Henry Percy),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전 국왕 에드워드 베일리얼등은 스코틀랜드 군대와 맞먹는 규모의 부대를 이끌고 더럼 근처에 진을 쳤어.

랄프 네빌경에게는 즐겁게도, 그들이 스코틀랜드와 맞서 싸울 곳은 Neville's Cross라는 곳이었어. 이곳은 더럼 서쪽에 있는 곳으로 전체적은 지형은 크레시와 유사한 곳이고 네빌 경도 이와 유사하게 군대를 배치했어. 여기에 요크의 대주교는 성당의 성물을 들고 나와 잉글랜드 군에게 축복을 내렸고, 그들은 일종의 십자군 같은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스코틀랜드 군대와 싸우게 되었어. 아마도 이 이야기는 1138년 깃발 전쟁(Battle of Standard-언젠가 다음에 설명할 기회가...)때와 비슷한 것으로, 이 때 한 무리의 수도사들이 성 커스버트(Curthbert)의 깃발을 들고와 두 군대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고 해.

스코틀랜드 군대는 스킬트론 대형을 취하고 언덕으로 다가왔지만 가파른 경사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틈을 타 잉글랜드 궁병들은 화살비를 쏟아냈어. 스코틀랜드군이 지리멸렬해진 틈을 타, 잉글랜드 군대는 이들을 흩어버렸어. 이날 스코틀랜드의 왕인 데이비드 2세는 사로잡혔고 몇 년 동안 런던 탑의 감옥에서 썩어야 할 운명이었지.

한편, 그의 국민이 네빌스 크로스에서 큰 승리를 거두는 동안, 에드워드는 칼레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어. 칼레는 아주 잘 방어되는 도시였지만 굶주림에는 장사가 없었지. 필리프는 군대를 이끌고 지원하러 왔지만 크레시의 악몽 때문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결국 칼레의 여섯 지도자는 목에 밧줄을 걸고 나와 항복했어. 뭐, 이야기에 따르면 마누라인 필리파가 충고해서 이들이 살아났다고는 했지만, 아마 윤색된 이야기이고 사실은 에드워드도 살려줬을거라고 봐. 그는 칼레를 영국의 도시로 만들 생각이었고, 그렇게 위해서는 주민들을 몰살 시키는건 말이 안되는 일이었지. 이 것은 베릭에서 있었던 일과 비슷하기도 해.

그리고 데이비드 왕은 곧 친구 한 명을 얻게 되었어. 브루타뉴에서 토머스 대그워스(Thomas Dagworth)경이 이끄는 군대는 여전히 샤를 드 발루아의 포로가 되어 있는 존 드 몽포르, 그리고 나아가 잉글랜드를 위해 작전을 계속했지. 1346년 6월 9일, 크레시 전투 두 달 전, 샤를 드 발루아의 강력한 군대는 브루타뉴 북부의 상 폴 데 레옹(Saint pol de Leon)에 있었어. 이들은 대그워스 경의 부대와 교전했는데, 대그워스 경은 우선 프랑스 군대의 전위 부대는 격파했지만 곧 세 방향에서 몰려오는 적과 상대해야 했어. 하지만 다시 한 번 잉글랜드 궁사들은 화살을 쏘아보냈고, 프랑스 군대는 견디지 못하고 격파되었어. 이렇게 한 해에 세 번, 잉글랜드는 멋진 승리를 거둘 수 있었어.

1347년, 샤를 발루아는 다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해 부르타뉴로 진군해 왔어. 하지만 토머스 대그워스 경은 프랑스 군대에 야습을 가했지. 샤를 드 발루아는 갑옷도 입지 않고 뛰어나와 용맹히 싸우며 적과 교전했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만 결국 샤를은 사로잡혀 런던탑 감방 속에서 외롭게 지내던 스코틀랜드 왕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지.

새 친구를 사귄...데이비드는 행복했을까;;;

 

(행복했을리가 있나.)

 


이 시기는 잉글랜드의 영광스러운 해였어. 기사와 궁수의 조합은 유럽 전장을 지배했고, 마침내 승리의 해를 일궈낼 수 있었던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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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게이볼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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