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임진왜란

구름위 2013. 9. 2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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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

(1592(선조 25)~98년에 2차례에 거친 일본의 조선침략전쟁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조선과 명(明)나라의 군사가 연합하여 물리친 전면적인 국제전쟁이었다.

임진년에 처음 발생했다 하여 보통 '임진왜란'이라고 하며, '7년전쟁'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1597년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만을 따로 언급할 때는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부른다. 그외 임진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게이초[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이라고 한다.

16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정세

동아시아의 조선·중국·일본 각 나라는 14세기에 다같이 새 국가와 정권이 등장한 이후 2세기 동안 안정기를 누려왔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명나라가 동요되고 이웃한 여러 민족들이 자주적으로 발전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동아시아의 정세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명나라는 16세기경에 환관(宦官)이 실권을 장악하는 등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졌고, 지방에서도 향리재주(鄕吏在主)의 관리나 과거급제자층이 향신(鄕紳)이라는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여 반(反)환관운동·반(反)해금정책 등 중앙권력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또한 각지에서는 농민봉기와 종실간의 반란이 잦았으며,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적이 자주 침입해왔다. 한편 일본은 16세기 전반에는 전국 다이묘[大名]들의 영국경영(領國經營)에 기반하여 상공업 발달이 이루어졌고, 후반에는 권력을 잡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정권이 전국통일전쟁 과정에서 국내의 상권과 국제무역권의 통일을 강화해갔다 . 그리고 포르투갈인의 내항과 총의 급격한 보급으로 철포대 등 총보병부대를 중심으로 새 전투대형을 편성했다. 오다 정권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간토[關東]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연합한 뒤 1587년 전국을 통일했다. 도요토미 정권은 통일 과정에서 도시 부상들의 협력을 기반으로 대륙과의 교통 창구인 하카타[博多] 등을 장악하여 역시 상권과 무역권의 통일적 확보를 중시했다. 그리고 토지와 농민을 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전국적 검지(檢地)와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새로운 신분규정을 정하는 등 체제정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은 다이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고, 토지소유에서 제외된 하급 무사들의 불만을 많이 샀다. 더욱이 삼포왜란(三浦倭亂), 영파(寧波)의 난(亂) 등으로 명·조선과의 무역이 거의 폐쇄되자, 정치적으로 강력한 다이묘들의 무력을 해외로 분출시켜 국내의 안정을 기하고 경제적으로 국제교역상의 불리를 타파하기 위해 '당입'(唐入:중국 침입)을 통한 '체제변혁전쟁'(體制變革戰爭)을 구상하게 되었다.

조선은 개국 이후 1세기 동안은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의 확립이 이루어졌으나, 15세기말부터 정치의 실권을 가진 훈척(勳戚)과 중앙정계로 진출하던 사림(士林) 간의 권력투쟁이 격화되면서 연이어 사화(士禍)가 발생했다. 1567년 선조(宣祖)의 즉위를 전후하여 사림정치가 확립되었지만, 그들이 바라는 혁신은 선조의 구신계(舊臣系)에 대한 비호와 내부 분열로 인해 정파정치(政派政治)의 양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심의겸(沈義謙) 문제로 인해 동서(東西)로 분당(分黨)되고, 이어 정여립(鄭汝立) 사건을 계기로 동인에서 퇴계(退溪) 문하가 남인(南人)으로 분립하는 등 중앙정치세력의 알력 및 개편이 계속되었다. 더욱이 권세가들의 경기도·황해도 지역의 해택(海澤)·노전(蘆田)의 강점, 군역의 포납화(布納化), 수령·유향소(留鄕所)를 통한 상납물의 강제 징수 등은 민심의 동요를 가져왔다. 그리고 군제도 병농일치의 개병제 원칙이 붕괴되고, 각급 지휘관들이 군사의 입번(立番)을 면제해주고 대가를 받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군사는 기능을 상실하여 국방력이 약해졌다. 이에 대해 이이(李珥)는 초기의 군사제를 규정대로 운용하면서 10만 양병을 주장했는데, 선조의 미온적인 반응과 사림 내부의 뒷받침이 없어 실현되지 못했다.

전쟁 직전의 한일관계

도요토미는 규슈[九州] 정벌로 전국통일이 막바지에 이른 1587년에 중국 침입의 구체화를 위해 조선 내 사정에 정통했던 쓰시마 섬[對馬島] 도주(島主) 소[宗義調]에게 조선침략 방안을 의논했다. 이때 소가 우선 조선과 교섭할 것을 건의함에 따라,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가신인 다치바나[橘康廣]를 파견했다. 조선에서는 다치바나가 가져온 서계(書契)의 서사(書辭)가 오만하다며 회답하기를 미루다가, 이듬해에 수로(水路)가 미매(迷昧)해서 통신사를 파견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새 쓰시마 섬 도주 소는 1588년 10월과 다음해 6월 다시 승려 겐소[玄蘇]와 함께 내한하여 공작과 조총을 바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1590년 3월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을 파견했다. 그들은 교토[京都]에서 도요토미를 만나 답서를 받았는데, 답서에는 종래의 '예폐'(禮幣)가 '방물'(方物)로 바뀌어 있었으며 명나라를 침입한다는 '입대명'(入大明)의 구절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에 통신사가 시정을 요구하자 방물은 다시 예폐로 바꾸었으나, 입대명의 구절은 없애지 못했다. 이듬해 1월 귀국한 통신사들이 3월에 입경(入京)하여 일본의 조선 침입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서로 엇갈리게 보고함에 따라 조정의 견해도 양분되었고, 이에 일본침략에 대한 방비책의 논의가 유야무야되었다. 그해 4월 겐소 등이 다시 들어와 1년 후에 "명에 쳐들어갈 길을 빌리겠다"(假道入明)라고 통고하자, 조정에서는 이 내용을 명에 통보하고, 하삼도(下三道)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했는데, 몇 곳을 제외한 각 도에서는 오히려 일어나지 않을 왜란에 대비하여 민폐를 야기한다는 원성이 제기되는 등 별 성과가 없었다. 반면 도요토미 정권은 1591년부터 조선 침략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여 규슈·시코쿠[四國]·주고쿠[中國]의 다이묘들의 군대를 재편성했다. 도요토미는 그해 8월 침략일을 다음해 3월 1일로 정하고 나고야[名古屋]에 지휘본부를 건설하여 수륙군의 편성을 완료했다. 총15만 8,700명의 육군을 1~9번대로 편성하고 11만 8,300명을 후속 병력으로 잔류시켰다. 그중 선봉대로서 최전선 투입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주장(主將)으로 하는 제1번대 1만 8,700명,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번대 2만 2,800명,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번대 1만 1,000명 등 5만 2,500명의 병력을 편성했다.

일본의 침략

1592년 4월 13일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 1만 8,700명이 700여 척의 병선에 나누어 타고 쓰시마 섬의 오우라 항[大浦港]을 출항하여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부산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부산성은 함락되었다. 다음날 일본군이 동래성을 공격하자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군민과 더불어 항전했으나 전사했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그후 18일 가토의 후속부대가 부산에, 구로다의 제3번대가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했다. 4~5월에 걸쳐 제4~9번대에 이르는 후속부대가 상륙하여 수군병력 약 9,000명을 합해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의 총병력은 약 20여 만 명에 이르렀다. 부산·동래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해 북진을 계속했는데, 중로는 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를, 좌로는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을 거쳐 조령(鳥嶺)에서 만나 충주로 향하기로 했고, 우로는 김해-성주-지례-김천-추풍령의 길을 택해 경기도로 북상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임시변통으로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조령·충주 방면의 중로를,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에 임명해서 죽령·충주 방면의 좌로를,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추풍령·청주·죽산 방면의 우로를 방어하게 했다. 그리고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륵(金)을 좌도안집사로 삼아 민심 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했으며,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방어태세를 갖추게 했다. 그러나 4월 24일 이일은 상주에서 대패하여 충주로 도망했고, 신립은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적을 막아내지 못하고 달천에 투신했다. 충주가 함락됨에 따라 일본군은 다시 여주-양근-용진나루와 죽산-용인-한강의 진로로 나뉘어 북상했고, 관군은 큰 전투도 1번 치르지 못하고 흩어져 달아났다. 조정은 일본군의 서울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았으나 충주 함락 소식을 듣고는 천도를 결정했다. 4월 30일 새벽 선조와 세자 광해군(光海君)은 평양으로 피난하고,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는 함경도와 강원도로 가서 근왕병을 모집하게 했다. 그당시 서울의 민들은 경복궁·창덕궁과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掌隸院)·형조 등을 불질렀고, 개성의 민들은 왕의 실정을 비난하면서 왕의 행렬에 돌을 던지는 등 민심이 극도로 이반되었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18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점령하고, 군대를 재편하여 고니시는 평안도, 가토는 함경도, 구로다는 황해도로 진격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수성부대와 하삼도 후방지역 담당부대를 나누었다. 5월 15일 김명원은 평안도 정병 3,000명으로 임진강에서 고니시군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패해 27일 일본군은 임진강 이북으로 북상했다. 그런데 이미 5월 12일 조정은 명에 원병을 청하기로 결정하고 이덕형(李德馨)을 청원사로 파견하는 한편, 우의정 윤두수(尹斗壽)와 유성룡의 '평양사수' 결의를 받아들여 윤두수·김명원·이원익(李元翼)에게 평양을 방어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니시군이 대동강 연안까지 북상하자, 조정은 다시 평양 사수를 포기하고 북행을 결정하게 됨에 따라 평양의 민들은 위정자들의 무능과 무책임에 격분했다. 6월 11일 선조는 평양을 떠나 숙주·안주·안변을 거쳐 박천에 이르러 군권을 광해군에게 넘겨주고 의주로 향했다. 6월 14일 평양이 함락되었고, 17일 가토군은 함경도까지 유린하고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부산 상륙 이후 2개월도 채 못 되어 전 국토가 일본군에 유린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수군의 승리와 이순신

 

일본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 육군에게 물자를 조달하면서 수로로 북상하는 작전을 세웠다. 당시 경상좌도수군절도사는 박홍(朴泓), 경상우도수군절도사는 원균(元均), 전라좌도수군절도사는 이순신(李舜臣), 전라우도수군절도사는 이억기(李億祺)였다. 그중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부터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을 갖추며 식량을 저장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돌격선(突擊船)의 필요를 절감하여 조선 초기에 만들어졌던 귀선(龜船:거북선)을 개량했는데 이는 일본수군과의 해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다. 4월 15일 경상 좌·우 수영군이 무력하여 일본수군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전라도로 진격했다.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군은 5월 4일 주전투함인 판옥선(板屋船) 24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7척으로 출동하여 6일간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해전에서 총 40여 척의 적선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5월 29일부터 6월 10일에 걸쳐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우수영 함선 및 원균의 경상우수영 함선과 합세하여 사천(泗川)·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에서 적선 70여 척을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경상도 가덕도(加德島)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 장악했고, 특히 사천해전에서부터 거북선을 사용했다. 이에 일본군은 전수군을 집결하여 조선수군을 격파하기로 하고 구키[九鬼嘉隆]·도토[勝堂高虎]·가토[加藤嘉明] 등이 합세하여 6월말 부산포에 진을 쳤다. 7월 8일 이순신의 함대는 이억기·원균의 함대와 합세하여 55척의 전선으로 견내량(見乃梁)에 정박중이던 와키사카[脇坂安治]의 일본 함대 73척을 공격했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으로 포위·공격하여 47척을 분파(焚破)하고 12척을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한산도대첩은 전쟁중에 제해권(制海權)을 완전히 장악한 전투로, 임진왜란중에 조선군이 거둔 3대 승리의 하나로 꼽힌다. 이 활약으로 해상으로 북진하여 육군과 합세하려던 일본의 작전이 좌절되고,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이어 다음날에도 안골포(安骨浦)에서 구키의 전함 42척을 대파하여 3차 출동을 마무리지었다. 8월 24일 조선수군 연합함대는 4차로 출동하여 삼천포(三千浦)·서원포(西院浦) 등을 거쳐 9월 1일 절영도(絶影島)를 돌아 일본수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로 진격했다. 병사와 전선의 수와 지세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연합함대는 장사진(長蛇津)으로 공격하여 100여 척의 적선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다음해 5차 출동에서는 웅포(熊浦)를 공격했고, 7월 한산도의 두을포로 진을 옮겨 삼도수군의 제일선 기지로 정했다. 이와 같이 이순신 함대에 의한 제해권의 장악은 의병활동과 함께 불리했던 전세(戰勢)를 역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의병의 봉기

 

해전에서 잇달은 승리를 거둘 때 육지의 곳곳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자발적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향토방위에 나서고 있었다. 의병의 신분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는 전계층이었는데, 농민이 주력군이었고 의병장은 대개 전직관료·유학자들이었다. 의병은 향촌공동체를 바탕으로 자신의 지역을 지키기 위해 봉기한 부대였다. 따라서 향토지리에 익숙하고 지리에 알맞는 무기와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적대하는 정면충돌보다는 매복·기습·위장 등과 같은 유격전술을 사용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의병은 우선 점령당한 하삼도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경상도의 경우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권응수(權應洙) 등이 활약했다. 특히 현풍 유생 곽재우는 사재를 털어 의령에서 기병하여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의령·삼가·합천·창녕 등을 수복하는 등 경상우도를 보호하여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전라도의 경우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김덕령(金德齡)·유팽로(兪彭老) 등이 활약했다. 특히 고경명은 유팽로와 함께 담양에서 회맹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7월 9일 금산에서 일본군과 격전 도중 장렬하게 전사했다. 충청도의 조헌(趙憲)은 10여 명의 유생들과 합의하여 공주·청주 간을 왕래하며 의병을 모집, 옥천에서 기병했다. 이들은 차령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온양·정산·홍주·회덕 등에서 병력을 보충한 다음 영규(靈圭)가 이끄는 승병 500여 명과 합동하여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했다. 그러나 금산의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8월 19일 700명 전원이 전사했다. 경기도에서는 홍계남(洪季男)·우성전(禹性傳) 등이 활약했는데, 홍계남은 양성·안성 및 충청도의 읍들을 보호했다. 황해도는 전(前) 연안부사 이정암(李廷)이 기병하여 연안성을 굳게 사수함으로써 호남과 호서의 해상교통이 의주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함경도의 정문부(鄭文孚)는 경성(鏡城)에서 기병하여 정현룡(鄭現龍)·오응태(吳應台) 등과 협동, 경성·길주·쌍포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함경도 지역의 수복에 앞장섰다. 그밖에 평안도의 조호익(曺好益)·양산숙(梁山璹)의 활약도 유명했다. 그리고 의승군(義僧軍)은 특수집단인 승려 의병으로 묘향산의 휴정(休靜:서산대사)은 수천 명의 제자들로 승군을 조직하고 각 사찰에 격문을 보내 의병조직을 권유했다. 이에 호응하여 관동에서 유정(惟政:송운대사), 해서에서 의엄(義嚴), 호남에서 처영(處英), 충청도에서 영규 등이 제자들을 이끌고 의병대열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결과 1593년 1월 전국 의병은 총 2만 2,600여 명으로 관군의 1/4에 해당하는 병력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의병이 난립하여 명목뿐인 사이비의병들도 출현하는 등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실정이 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1592년 10월부터 우성전으로 하여금 남도의 의병을 통솔하게 하고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의병을 권율과 권징(權徵)에게 분속시키고자 했다가, 전 우의정 심수경(沈守慶)으로 하여금 전의병을 통솔하게 했다. 의병장들은 승서제직(昇敍除職)되어 관인이 되었다. 그런데 본래 의병들이 향리방위의 차원에서 모였으므로 관명에 불복종하고 임의 행동을 하기도 하여 통제가 불가능하기도 했다. 이후 1594년 3월에는 종전의 의병을 해체하고 김덕령에게 예속시켰으나 명목에 지나지 않게 되어 초기의 의병과는 성격이 많이 변질되었다.

 

명의 참전과 반격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군에 대한 조선군의 반격작전은 한층 강화되어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부대를 정리해 관군에 편입시켜 관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작전도 보다 조직화되었다. 이에 따라 육해(陸海)의 모든 전선에서 반격전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1592년 10월의 진주성(晋州城) 전투의 승리가 돋보였다. 김해 주둔의 일본군이 전라도와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진주를 점령하기 위해 3만 명의 병력으로 공격해왔을 때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판관 성수경(成守慶)·이광악(李光岳)의 지휘하에 수성군 8,600명과 곽재우·최경회(崔慶會)·이달(李達) 등 의병장들이 성 밖에서 호응하는 6일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김시민은 전사했지만, 적을 격퇴시킴으로써 전라도를 점령하여 군비를 마련하려던 일본군을 좌절시켰다. 한편 조선의 구원 요청을 받은 명에서도 일본이 전쟁 초기부터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워 대륙침략을 공언했으므로 자위책으로 원병을 파견했다. 우선 랴오양 부총병[遼陽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5,000명의 군대가 파견되어 7월 15일 평양을 공격했다가 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했다. 이에 명은 12월 송응창(宋應昌)을 총지휘관인 경략(經略)으로, 이여송(李如松)을 동정제독(東征提督)으로 삼아 4만 3,0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1593년 1월 8일 명군은 조선군과 연합하여 먼저 평양성을 공격, 일본군 1만 여 명을 살상하고 성을 탈환했다. 그뒤 명군은 패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다가 벽제관(碧蹄館)에서 패하고 주력부대는 평양으로 후퇴했다. 한편 함경도에서는 정문부 의병부대가 백탑전투에서 가토군을 섬멸하여 마천령 이북지방을 수복하는 등 경기 이북지방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때 삼도제찰사 권율은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명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탈환하려다가 명군의 후퇴로 고립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벽제관에서 명군을 패퇴시키고 사기가 올라 있던 일본군은 2월 12일 우키다[宇喜多秀家]의 지휘하에 3만 명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조선군은 민과 합동하여 화차(火車)·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총통·활 등을 총동원하여 수차례 공격해온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는 임란3대첩의 하나로, 이후 일본군은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못하고 철수를 서둘러 마침내 4월 18일 서울에서 총퇴각했다.

휴전의 성립과 강화의 결렬

한편 전쟁의 와중에서 고니시의 강화제의가 있었고, 1592년 6월 대동강변에서 이덕형과 겐소의 회담이 열린 것을 계기로 휴전교섭이 시작되었으며, 명나라에서도 심유경(沈惟敬)을 일본 진영에 보내 강화를 추진했다. 그해 8월 평양에서의 강화회담을 한 후 평양 북방에 휴전선을 책정했고, 이후 본격적인 강화회의가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3월에 열린 용산회담의 결과 일본군은 서울을 버리고 경상도 해안일대로 물러났고, 포로가 되었던 왕자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일본군은 군량을 해결하기 위해 전라도 지방으로는 침략을 확대했고, 이순신의 수군을 배후로부터 공격하는 동시에 강화회의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6월 다시 진주성을 공격했다. 이때 일본군 12만 3,000명의 공격에 대해 김천일·최경회 등 의병·관군 3,000명은 7일 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나, 마침내 진주성이 함락되었고 6만 명의 인근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이후 명과 일본 간의 강화회의도 5년을 끌다가 결렬되고 말았다. 본래 일본의 도요토미는 강화의 조건으로 명나라의 황녀(皇女)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보낼 것,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줄 것 등을 요구했다. 심유경은 이 요구가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알고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책봉하고 조공(朝貢)을 허락해줄 것을 요구한다고 본국에 거짓 보고했고, 명은 1596년 사신을 파견해 도요토미를 일본왕으로 책봉하는 책서(策書)와 금인(金印)을 전했다. 이에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이를 받지 않고 조선 재침략을 기도했다. 한편 휴전기간 동안 조선에서는 여러 무기와 화약이 발명되고 함선들을 건조했으며, 유성룡을 도제조로 하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방법을 바꾸었다. 즉 속오법(束伍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군대를 살수(殺手)·사수(射手)·포수(砲手)의 삼수기(三手技)로 나누어 침략에 대비했다. 수군도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하여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세우고 기지의 방비와 포구 간의 연락을 강화했다. 한편 축성 작업도 활발하게 벌어져 남한산성·독산산성·무한산성·죽산산성 등이 새로 축조되었다.

정유재란

 

일본은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선조 30) 1~2월 14만 1,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침략했다. 명나라도 병부상서 형개(邢)를 총독,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5만 5,000명의 원군을 보내왔다. 이때 조선군의 전선 동원병력은 3만 명으로 권율부대를 대구 공산에, 권응수부대를 경주에, 곽재우부대를 창녕에, 이복남(李福男)부대를 나주에, 이시언(李時言)부대를 추풍령에 각각 배치했다. 7월초 일본은 주력군을 재편하여 고바야가와[小早川秀包]를 총사령관으로, 우군은 대장 모리[毛利秀元] 이하 가토·구로다 등으로, 좌군은 대장 우키다 이하 고니시·시마즈[島津義弘] 등으로 편성한 뒤 하삼도를 완전 점령하기 위해서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등을 점령한 후 구례를 거쳐 전병력으로 남원을 총공격했다. 이에 이복남·이춘원·김경로 지휘하의 수성군은 격전을 벌였으나 수의 열세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군은 전주에 집결한 후 좌군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약탈을 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9월초 충청방어사 박명현부대는 여산·은진·진산에서 일본군을 공격했고, 이시언부대도 회덕에서 일본 좌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정기룡(鄭起龍)부대는 고령에서, 조종도(趙宗道)부대는 황석산성에서 일본 우군과 치열한 격전을 전개했다. 9월 5~6일 권율·이시언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해생(解生) 지휘하의 명나라 연합군은 직산에서 가토군·구로다군을 대파했다. 이에 일본군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고니시군은 순천, 가토군은 울산으로 후퇴하여 농성했다. 그해 11월 명의 형개가 4만 명의 병력을 3로로 재편하자 조선군도 이시언·성윤문(成允文)·정기룡이 각각 1영(營)씩 지휘하여 남진을 시작했다.

한편 그해 1월 일본군측의 거짓 정보와 서인 일부의 모함에 의해 정부의 출동명령을 집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순신은 파직당하고 대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4월 조선수군은 조선 연해로 들어오는 일본수군을 중도에서 공격하려다 태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수군의 부산상륙을 허용했다. 이어 일본군이 제해권을 빼앗기 위해 해전에서 맹렬한 공세를 취하자,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6월 안골포전투와 7월 웅포전투, 칠천도전투에서 대패했다. 8월초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은 9월 16일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출동하여 서해로 향하는 300여 척의 일본전선을 명량(鳴梁)에서 대파했다. 이 승리로 일본군의 수륙병진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조선수군은 다시 제해권을 장악했다. 육지와 바다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하여 남해안 일대에 몰려 있었다. 그해 12월과 다음해 1월에 걸쳐 울산 도산성에서 권율 지휘하의 조선군은 가토군을 공격했고, 각 지역에서 일본군 잔당들을 섬멸했다. 그리고 이순신 지휘하의 수군도 절이도와 고금도에서 일본 수군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1598년 8월 마침내 도요토미가 죽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이에 조선군은 마귀·유정(劉綎)·동일원(董一元) 등이 지휘하는 명군과 함께 육상에서 일본군을 추격했으나, 명군의 유정이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명군을 철수시킴으로써 일본군을 섬멸하지 못했다. 한편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진린(陳璘) 지휘하의 명 수군과 함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11월 노량(露梁)에서 일본전선 300여 척과 해전을 벌였다. 그결과 조선과 명이 일본의 함선을 200여 척이나 격침시키는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순신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전쟁의 결과

이 전쟁은 16세기말 동아시아 3국이 모두 참전한 국제전으로 가장 큰 손실을 입은 것은 조선이었다. 조선은 전국 8도가 전장으로 변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엄청난 재산피해를 입었다. 토지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없어져 국가운영이 마비상태에 빠졌고, 전쟁 전에 170만 결에 달했던 토지결수도 54만 여 결로 줄었다. 이는 물론 양안(量案)에 등록된 결수(結數)이므로 실제 경작면적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 초기에 비하면 1/3도 안 되는 면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기 위한 개혁이 정권의 급선무였다. 제도적 개혁으로는 비변사(備邊司)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원래 비변사는 군사만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지만, 영의정 이하 삼공육조판서(三公六曹判書)가 모두 당상제조(堂上提調)에 임명됨으로써 서정일반에 관여하는 기관이 되었다. 이어 국가의 모든 국사가 국방문제와 관련되어 처리됨에 따라 의정부·육조의 업무 대부분까지 비변사가 담당함으로써 행정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군사적으로도 명의 제도를 받아들여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오군영제(五軍營制)를 마련했고 지방에는 초관과 속오군을 조직했다. 그런데 전쟁중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납속책(納粟策), 서얼허통(庶孼許通), 향리의 동반직(東班職) 취임허용, 병사의 면역(免役), 노비의 방량(放良) 등이 일부 허용됨에 따라 중세적 신분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또 근본적으로 군역(軍役)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양전(量田)이 실시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정책들은 많은 모순을 안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국가의 조세수입은 줄어들었지만 군비의 확장, 국가의 지출 경비는 계속 늘어나게 되어 농민들에게 과중한 부역·공납·납세를 강요했고 이에 따른 이농현상이 광범하게 나타났다. 그결과 공물의 미납화, 양전수세의 간편화, 면세전 확대 방지책, 병역의 납세화, 환곡책, 모곡(耗穀)의 회수책 등이 제도화되었다. 문화적으로는 전란으로 궁전·관청건물들과 홍문관·춘추관 등에 보관되었던 서적, 실록들이 소실되었고 많은 귀중한 문화재들이 약탈당했다. 사상적으로 봉건집권세력은 일반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하고 내부 분열이 심해져, 해이해진 기존 질서를 더욱 강화시킬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에 따라 주자학 이념의 교조화가 더욱 심해지고 집권세력 내부 간에도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경직된 풍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집권세력·지식인층들의 사상에는 명군의 원조에 대해 존화의식이 강화되어, 이는 이후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북벌론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전쟁을 통하여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하고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정권이 등장했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국내적으로 〈무가제법〉·〈대오법도〉·〈참근교대제〉 등을 제정하여 신분위계제에 근거한 봉건지배체제를 세우고, 도요토미의 팽창주의와는 달리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대외교역의 단일적 통일체제를 갖추었다. 더욱이 도쿠가와 바쿠후는 조선과의 통교회복을 서둘러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들의 귀환문제 등에 적극적인 유화책을 썼다. 그리하여 1604년 승려 유정이 일본으로 가 교섭을 하여 3,000여 명을 귀환시켰다. 1607년에는 도쿠가와 정권의 화의를 받아들여 여우길(呂又吉) 등의 사절을 파견했으며,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무역을 재개했다. 일본은 전쟁중 조선으로부터 약탈해간 활자·그림·서적 및 포로로 데려간 우수한 활자 인쇄공을 통해 성리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과 인쇄문화를 발전시켰다. 더욱이 조선에서 데려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일본의 도자기 문화가 크게 발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명나라는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소모되어 재정압박이 가속되었고, 각종 봉건징세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봉기와 지방의 봉건군벌들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만주에서는 명의 세력이 약해진 것을 계기로

 

누르하치[奴兒哈赤]가 건주위(建州衛) 및 하다[哈達]·휘파[輝發]·우리[烏拉] 등 여러 여진족을 통일한 뒤 1616년 칸[汗]에 즉위하여 후금(後金)을 세워 명·청 교체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을 계기로 지금까지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에서 후진국으로 인식되어왔던 일본과 여진족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중화문화의 정통을 자부해온 명과 조선이 상대적으로 쇠약해져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새롭게 변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