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임진왜란시 국내외 정세와 진주대첩

구름위 2013. 10. 30. 15:42
728x90

임진왜란시 국내외 정세와 진주대첩

이 상 훈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머 리 말


15세기 말 조선 내에서는 7년에 걸쳐 동아시아의 세나라 朝鮮·明·日本이 전쟁을 통하여 서로의 국력을 가늠하였다. 그리고 이 전쟁에 대한 세나라의 관점도 서로 달라 朝鮮에서는 종래 왜구 내지는 야만족의 침략이라는 의미로 ‘壬辰倭亂’이라 하였고, 明은 자신을 동아시아의 종주국으로 자처하여 주위의 제후국 간의 잘잘못을 가리는 국제사회의 심판자의 역할을 하였다는 의미로 ‘萬曆東征’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日本은 침략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대륙진출을 정당시하는 의미로 ‘文祿慶長の役’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은 발발 원인에서부터 승패를 논하기에 이르기까지 현재까지도 여러 면에서 異論이 많다. 그러나 이런 중에도 전쟁을 거시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그 이전의 전쟁과는 다른 양상을 띠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은 작게는 동아시아 3개국 간의 전쟁이었지만 참여한 사람이나 사용된 무기 면에서 살피면 서구의 영향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만을 두고 살펴보더라도 초기 전투에서 정규군이 붕괴된 후 義兵이라는 自發的이고 自衛的인 민간 조직의 활약이 있었다. 이런 면에서 배경이나 정세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임진왜란은 크게 7년 간의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전투상으로 살펴보면 침략 직후부터 약 1년 간, 그리고 정유재란기 2년 간의 전체 3년 정도만이 실제 큰 싸움이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관련된 여러 가지 중요한 사건이 대부분 초기의 1년 사이에 일어났다. 또 이 시기에서 중요한 사건이 晉州에서 일어난 일련의 전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수차의 진주에서의 싸움 중 통상 ‘晉州大捷’이라고 불리우는 1592년 10월의 전투에 이르기까지 국내외적으로 본 임진왜란의 여러 모습을 짚어보고자 한다.


1. 임진왜란 전의 국내외 정세


1) 국내 정세

현재 학계에서는 임진왜란의 발발 배경을 논할 때 조선의 사회적인 혼란을 꼽지는 않는다. 그러나 과거 임진왜란의 발생원인으로 첫손에 꼽힌 것은 바로 조선의 사회 각 분야에서의 침체였다. 이러한 논조는 임진왜란 직후 유성룡이 쓴 『懲毖錄』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국내 문제는 왜적의 침입 초기 ‘望風大潰’라는 참담한 패퇴의 원인은 될 수 있어도 발발의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시기 조선의 사회 각 분야에서의 국가적인 위기는 임진왜란의 전개과정 이해에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국내정세를 분야별로 살펴본다.

16세기 조선사회는 확실히 사회 각 분야에서 점차 쇠퇴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건국 후 2백여 년 간의 昇平期 속에서 지배층의 편당, 정치 기강의 해이, 세제의 문란 등의 폐단으로 민심이 이반되고 있었다. 민심의 이반과 연계된 폐단들은 대체로 위정자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에는 무력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제점들이 일찍부터 지적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정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바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치적으로 네차례의 士禍를 겪으면서도 최종적으로 집권하게 된 사림세력의 정국 운영은 종래의 六曹 중심을 벗어난 三司 중심의 公論 정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 결과 공론화 된 의견은 議政府의 三公이라도 무시할 수가 없는 상호견제의 정치풍토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공론을 모으는 과정은 쉽지 않았고 사안에 따라 뜻이 맞는 사람끼리 이합집산할 폐단이 상존하였다. 실제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기성관료와 신진관료 사이에 동서 분당이 생겼다. 분당의 초기에는 李滉과 曺植의 문인들이 많았던 동인이 李珥와 成渾의 학맥으로 이루어진 서인을 압도하였다. 이들은 1589년 己丑獄事로 일시 실각하기도 하였으나 서인 鄭澈의 建儲議事件을 계기로 집권하면서 의견이 갈려 남북으로 분열하였다. 붕당정치는 상호견제 속에서 공론에 의하여 정국을 이끌어 나간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붕당 간에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정국의 운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중앙의 붕당과 연관을 가지면서 書院을 중심으로 鄕約과 같은 조직을 통하여 결속을 다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또한 각 지역에는 학문과 행실이 뛰어나 존경받는 인물들이 거주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과 인물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각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주체세력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건국 이래 수차 녹훈된 공신에게 지급된 공신전과 별사전이 세습되고 양반관료를 중심으로 토지의 매입·겸병·개간 등이 이루어지면서 이 토지들이 면세됨에 따라, 국가는 수입이 줄어들고 농민은 부담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특히 직전법이 폐지된 이후 관리들이 토지소유를 확대하자 피해지역은 삼남지방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확대되어갔다. 농민들은 소작인으로서 2분의 1의 전세를 내었고 특산물의 공납도 큰 부담이었다. 공납은 규모뿐만 아니라 수납의 절차도 복잡하여 전문적으로 공물을 납부하는 防納에 의한 부담이 가중되었다. 이외에도 군역의 요역화와 收布代役의 성행, 환곡의 고리대금화 등으로 농민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5세기 이래 전세계적으로 닥친 소빙기의 영향으로 가뭄과 홍수, 흉년·蝗災 등 각종 자연재해와 전염병의 발생으로 많은 농민들이 집단적으로 떠돌거나 대규모의 도적으로 변하여 농촌은 날이 갈수록 황폐해져 갔다.

사회적으로는 지배계층의 엄격한 신분제를 고수하려는 쇄환정책과 붕당정치로 인한 지배층의 분열로 인한 동요가 심했다. 특히 쇄환령과 관련된 1583년(선조 16)의 玉非의 난과, 붕당 간의 대립에서 야기된 1589년(선조 22년)의 鄭汝立의 난은 당사자들 뿐만아니라 무고한 士族들과 일반 서민까지 많은 사람들이 연좌되어 그 파장은 전국에 미쳤다. 이외에도 1587년(선조 20) 왜구의 興陽 入寇 등으로 국내의 사회는 인심이 흉흉하고 유언비어 속에 기강이 해이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외교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조선왕조의 기본적인 대외 정책은 事大와 交隣이었다. 사대 정책은 明과의 관계였고, 교린 정책은 倭·女眞·琉球와의 관계였다. 이중 일본과는 조선의 개국 초부터 倭寇를 막기 위한 羈   政策이 기본이었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이나 외교적 요청이 없는 한 그들의 국내정세를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알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외교정책의 기본방침은 조선초 태종 때부터 임진왜란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양국의 외교관계는 주로 對馬島主 宗氏를 중개로 전개되어, 조선이 宗氏에게 歲遣米를 하사하고 무역에서 특혜를 인정하였고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를 교린이라 하여도 上國으로서 자처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한편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하고 대륙 침략의 준비를 진행하고 있던 풍신수길은 조선의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대마도주 宗義調·宗義智 부자에게 소위 ‘假道入明’을 교섭하게 하였다. 대마도주는 조선왕조의 歲賜米와 무역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양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통하여 전쟁을 피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선조 20년(1587)에는 가신인 橘康廣을 日本國王使라고 사칭 파견하여 일본에 정권이 교체되었음을 설명하면서, 수길이 조선왕을 일본에 오도록 하라는 명령을 변조하여 조선에 와서는 通信使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그런데 이 사절단은 도착하면서부터 영접 可否, 書契의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바닷길에 어둡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 접촉이 무위로 돌아간 뒤에도 대마도주는 玄蘇와 宗義智를 파견하여 그 다음해와 다음해 6월 두차례에 걸쳐 통신사 파견을 교섭하였다. 이들은 공작·조총 등의 예물을 바치고, 興陽 損竹島 약탈시 嚮導 沙火同 등을 인도하면서 통신사의 파견을 거듭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조정은 더이상 거절하기도 어려웠고, 일본 사정도 탐지하기 위해 1589년 9월 정사 黃允吉·부사 金誠一·서장관 許筬로 구성된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이는 1443년(세종 25)의 통신사 파견한 이래 약 1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풍신수길을 만나고 선조 24년 정월에 귀국하였으나 정사와 부사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국론이 분분하여 적극적인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다만 明에도 일본의 ‘假道入明’에 관해서는 통보함으로써, 막연하나마 일본의 전쟁준비의 정보를 얻고 있었던 명이 조선도 일본의 침략준비에 가담하려한다는 의심을 풀고 임진왜란 발발 후 원정군을 파견하는 동기가 되었다.

한편으로 조정에서는 임란 1년전부터 의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만일에 대비한 방어책을 세웠다. 첫째는 각도의 성곽을 수축하고, 둘째 무기를 점검하고, 셋째 무신 중에 뛰어난 재질이 있는 자는 서열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는 일이었다. 특히 조정에서는 전국적으로 성곽을 수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경상도에서는 永川·淸道·三嘉·大丘·星州·富山·東萊·晉州·安東·尙州와 좌우 兵營의 성을 증축하고 해자를 깊이 파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일부 양반들은 왜군이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하였고, 성곽 수축과 군사 훈련에 동원된 백성들은 관찰사나 수령, 병마절도사 등에게 원망을 품게 되었다.1)  임란이 일어나기 1개월 전인 3월에 전라도 강진에서는 서울에서 내려온 巡察使 申砬의 독촉으로 성곽을 수축하는 승군과 군사의 원성이 높았다고 했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어디나 같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을 텐데 성곽을 수축하면 민폐만 크게 일어난다고 반대하였다.2) 따라서 城堡의 수축은 형식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전란에 대비하는 일은 백성의 원망만 샀을 뿐 외적에 대한 방비는 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은 軍事에 재능있는 인재를 발탁하라는 명령에 따라, 서열에 관계없이 발탁하였는데 이중에서 李舜臣·權慄·元均·金命元 등과 같은 인물이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기 패퇴를 극복하고 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한편 1년 전부터 국방상의 요충에 무장을 배치했으나 연로하다든가, 무능하다든가, 탐오하다든가 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임란 직전 많은 사람이 교체되어 침략 직후 한층 혼란이 심한 결과를 초래했다. 

국방 전략상으로 조선은 鎭管法 체제를 유지하다가 을묘왜변(명종 10년, 1555) 이후 制勝方略으로 개편하였고 임진왜란 전에 다시 진관법으로 돌아가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대로 시행되고 있었다. 이 제승방략은 적의 침략이 있으면 지방의 농민들이 군대로 편제되어 약속한 곳으로 집결하고 중앙에서 지휘관을 파견하여 지휘하는 체제였으나 대규모의 침공에는 적용될 수 없는 전략이었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순찰사  金  가 즉시 制勝方略의 分軍法을 시행했으나 실패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왜구의 침입 중 큰 것은 中宗 17·18년(1522·1523)의 침입, 蛇梁倭變(중종 39, 1544), 乙卯倭變(1555)을 꼽을 수 있다. 그간에 왜구는 일본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해진 틈을 타서 중국 등지로부터 화약과 병기의 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견고한 선박을 건조함으로써 점차로 강성하여져 갔던 것이다.

명종 10년(1555)에 일어난 을묘왜변은 삼포왜란보다 피해가 심각하였다. 5월에서 6월 사이에 倭船 70여척이 전남 해남군 達梁浦에 침입하여 전라병사 元績과 장흥부사 韓  을 살해하고 靈巖까지 침입하는 등 연해를 횡행하며 분탕과 살륙을 자행하였다. 이 왜변에 대해 조선 조정에서는 왜구가 唐으로부터 조선술을 배워 선박을 개량하고 銃筒의 조작도 지극히 정교해져서 조선의 병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고 지적하여 강성함만을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3) 그러므로 삼포왜란 때처럼 왜선을 제압하지 못하고 회유책을 사용하여 동년 10월 대마도주에게 歲遣船 5척을 증가시켜주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그러나 완전한 수습은 이루어지지 않아 그 후에도 당분간 왜침은 계속되었다.

한편 날로 강성해져가는 왜에 대한 대비책으로 새로운 전선의 건조를 시도하여 임진왜란 중에 큰 활약을 한 板屋船이 등장하게 되었고 대형의 총통과 승자총통등의 화기의 개발에도 주력하였다.4)  

이상과 같은 국가 여러 방면에서의 쇠퇴 기미는 지식인들의 우려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이에 대해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세태를 평하고 있다.


때에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士論은 바야흐로 성하지만, 풍속은 각박하고 악했다.5) 


柳成龍은 『懲毖錄』에서 임란 초전의 패인을 ‘軍政의 근본이라든가 장수를 뽑아 쓰는 요령, 또는 군사를 조련하는 방법 같은 것은 한가지도 된 것이 없었던 까닭에 전쟁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선왕조는 건국 이후 큰 외적의 침입없이 2백년간 태평시대를 구가하였다. 이에 따라 점차 국운 쇠퇴의 징후가 있었으며 일부 개혁의 노력도 타성의 늪에서 수포로 돌아가 외적의 침입에는 매우 취약한 한계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2) 국외정세

16세기의 세계정세는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중세의 봉건사회가 붕괴되고 르네상스시대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또한 15세기 이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인들은 새로운 대륙을 찾아 탐험에 나서는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과 ‘대항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지구 전체는 하나의 역사로 묶이는 세계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서구인들은 미지의 동방에 대한 호기심이 높았을 뿐아니라 이를 충족하기 위한 기술도 뒷받침되고 있었다. 지리와 천문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여 항해술을 발달시켰고, 한편으로는 조선술, 화기와 대포의 개량이 활발하였다. 16세기 東方經略에 적극적이었던 나라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이들은 인도항로의 발견을 통하여 인도·중국·필리핀 등지로 진출하였고, 일본에도 많은 수의 선교사들과 상인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이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사로, 종군 선교사로, 상인으로 조선에 상륙하기도 했다.

明은 왕조의 전성기를 지나 점차 쇠퇴기를 걷고 있었다. 張居正과 같은 인물이 이런 속에서 개혁을 시도했으나 무위로 돌아갔고, 萬曆帝는 청년시절 개혁의 의지를 가지기도 했으나 장거정의 사후 정치보다는 사치에 관심이 높아져 갔다. 이에 따라 국가재정은 점차 압박받기 시작했고 밖으로는 일본정부의 장악력이 떨어진 틈을 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왜구의 침탈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일본은 應仁·文明의 난(1467-1477) 이후 약 1백여 년 간 戰國時代로 戰國大名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치열한 전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소속 영토의 경영에 힘써 제방 구축·수로 부설·농토 개간 등을 추진하고, 家臣·營民들에게 충성서약을 成文化하였다. 전국대명들의 영주국 내에는 ‘城下町’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기의 ‘國’을 지키는 곳인 동시에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였다. 전국시대에는 여러 형태의 도시가 생겼는데 항구에는 무역항이 번성하게 되었다. 이중 ‘사카이[堺]’는 그 대표적인 항구도시로 자치·자유도시로서 국내 상업 뿐만아니라 포르투갈·스페인 상인과의 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번영하였다.

한편 포르투갈·스페인 등의 東進에 따른 무역과 문물의 전래는 여러 면에서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다. 1543년 포르투갈인이 種子島에 來航한 후 서양인과의 접촉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鐵砲(鳥銃)가 전래되었다. 당시의 일본은 혼란기였기 때문에 신무기 조총은 빠른 속도로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활발히 수입되었으며 자체 생산도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전술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조총의 보급에 의해 종래와 같은 전문 전투 집단보다는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 집단에 의한 전투가 중요하게 되었다. 이의 시초는 1575년 長篠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織田信長의 철포대는 그 무기의 위력을 크게 과시하여 기병 주력의 경쟁자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조총의 보급은 축성술에도 변화를 가져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城 위주에서 보병부대의 전개에 유리하고 교통이 편리한 평야와 인접한 언덕에 성을 쌓는 平山城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조총의 위력에 따라 조총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성벽을 이중으로 하였고, 그 사이에는 돌을 넣어 튼튼히 하였다. 그리고 대명의 가신들은 언제든지 명령에 따라 전투배치가 가능하도록 성의 주변에 거주할 의무가 지워져 있었다.

천주교단의 예수회 전래도 또한 일본 사회에 큰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예수회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Francisco Xavier)는 1549년 포교의 허가를 얻고자 중국으로부터 京都에 도착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포교하기 힘들어 山口縣에서 활동을 하였다. 九州地方의 대명들은 자기 영토 밑에 포르투갈 무역선을 유치하기 위해 예수회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충돌도 일어났다. 이에 따라 선교사와 예수회 신자들은 점차 長崎로 옮겨 살게 되어 長崎는 항구도시인 동시에 천주교의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87년 풍신수길이 선교사의 국외추방을 명하고 長崎를 빼앗아 직할령으로 삼음으로써 예수회는 일본 내에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전국 대명 중에서 小西行長은 대표적인 가톨릭신자였고 조선침략군 중 약 2천명의 장병이 영세 교인이었다.6)

이상과 같은 변화 속에서 전국시대의 통일은 織田信長에 의하여 추진되어 豊臣秀吉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信長은 1560년 반대세력들을 물리치는 한편 京都에 입성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는 畿內의 반대세력을 정복하고 자유도시인 사카이를 굴복시키는 한편 諸國의 關所를 폐지하고 도로를 정비하는 등 상업을 진흥시켰다. 그러나 信長이 1582년 살해당하자 풍신수길이 信長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면서, 3만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大阪城을 쌓고 이곳을 통일사업 추진을 위한 본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關東의 大名 德川家康과 화평을 맺는 한편 천황에게 접근하여 1585년 7월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을 총괄하는 關白이 되어 1587년 구주정벌을 끝내고 그 여세를 몰아 국내통일사업을 완수해 나갔다.

이같은 국내통일의 수행과정에서 도시 富商의 협력을 묵과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군수물자의 보급과 수송을 담당하였다. 특히 풍신수길은 堺·博多·長崎 등지의 무역항을 직할지로 삼아 경영하였기 때문에 군자금도 윤택하였다. 또 한편 풍신수길은 정권의 기반인 토지와 농민을 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전국에 걸쳐 檢地를 실시하였다. 이 검지 사업은 정비된 통일기준에 따라 1582년부터 시작되어 수길이 죽을 때까지 16년간 계속되었다. 그리고 檢地帳에 作人으로 등록된 자는 경지의 보유권이 보장되었지만 반면 토지에 속박되어 직업의 자유를 박탈당하였다. 그러면서도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반항하는 것을 사전에 억제하기 위하여 1587년 그들로부터 칼·창·활·총 등의 무기를 거두어들이는 ‘刀狩令’을 발표하였다. 더욱이 1591년에는 小田原征伐이 끝난 것을 계기로 이후 백성들이 전토를 버리고 상업이나 임대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하고 侍人·仲間·奉公人이 새로 백성이나 町人이 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 때문에 도시에 유입된 백성들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신분규정과 함께 전국적으로 호구조사를 단행하여 家數人數臺帳도 제출하게 했다. 이것은 권력기반을 공고히하려는 정책이기도 하였으나, 임진왜란을 앞두고 군대·인부의 징발 등의 동원계획에 필요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풍신수길은 전국의 통일이 끝나자 구상 중이었던 대륙의 침략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의 原因論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었으나, 아직 논란이 되고 있다. 조선에서는 물론이요 일본의 유학자들도 수길이 ‘명분 없는 전쟁’을 도발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일본학자들 사이에서도 임진왜란의 원인을 수길의 개인적인 공명심과 영웅심, 대명무역 확대, 해외 발전 또는 봉건영주들의 세력 약화를 위한 것 등을 들고 있다.

풍신수길은 임란 6년 전, 1백여 년간의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과정 중에서 소위 ‘大唐入’을 호언했다고 한다. 수길의 소위 대명정벌을 위한 전쟁준비는 1586년 포르투갈 선교사 가스파르 고에리오(Coelho, Gaspar)에게 군함 2척을 주문한 것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국내를 완전히 통일하지 못한 때라 구체적 복안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 구주지방 토벌 중에 대마도주 宗義調와 宗義智 부자를 불러 명 원정의 계획을 말하였다. 대마도주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조선에 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하였고, 결국 조선은 선조 22년 9월에 통신사로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을 파견하였다. 선조 23년(1590) 수길은 일본 전국 66국을 완전 통일한 직후라 한층 기고만장하였고 조선통신사를 만날 때 오만불손하였다. 그는 인도와 필리핀에 사신을 보냈는데, 필리핀 총독에게 보낸 서간에서 ‘천하가 내 손안에 들어 왔는데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정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수길은 宗義智가 가지고 있는 조선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유력한 봉건영주 小西行長의 딸 마리아(천주교 영세명)를 시집보냈고, 行長은 왜군이 쉽게 조선에 침입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지식과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후 수길은 관백의 지위를 조카인 秀次에게 물려주고 조선침략에 몰두한 것 같다. 선조 24년 8월에 이르러 수길은 조선침략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렸다. 봉건영주들 중에는 내심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영토를 몰수당하던가 처형될까봐 직언할 수가 없었다. 일본에 체재 중이던 포르투갈 신부 프로이스(Luis, Frois)는 이때의 상황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쥐가 없었다.’는 우화에 비교하였다. 수길은 반대세력을 단호히 처단하는 한편 일본인의 집단성을 교묘히 이용하였다. 즉, 이제까지 멀리하였던 자들을 가까이 불러 들여 은총을 베풀고 높은 자리에 앉혀 반대세력을 억압하였던 것이다. 또 富士山 아래에서 봉건영주들을 모아 큰 수렵잔치를 베풀어 2천5백 마리의 새를 사냥하여 금박을 한 긴 대나무 꼬치에 꽂아 행렬함으로써 위세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또 일본에서 최고위급의 무장에게 사냥개의 고삐를 잡고 걷게 하여 신분이 높고 권세있는 자라하여도 자기 앞에서는 賤職을 맡을 수밖에 없다고 자신을 과시하였다. 이 후부터 조선침략에 내심 반대하던 봉건영주들도 절대 충성을 다짐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전쟁의 광기에 휘말려갔다.7) 예수교파 포르투갈 신부 Frois는 임란 중 일본에 체재하며 小西行長 등 영세를 받은 약 2천명의 일분군으로부터 정보를 얻어 임란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기록은 천주교인으로서의 편견도 있으나 서양인으로서의 제삼자적 기록으로 많은 참고가 된다.


2. 임진왜란 초전기의 전황과 의의


1) 왜군의 침략과 조선의 후퇴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 대군의 船團이 부산진 앞바다에 침입하여 다음날 부산성을 공격함으로써 7년 간의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豊臣秀吉은 1591년(선조 24년) 8월 조선 침략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九州 북서단의 작은 어촌인 名護屋에 행영본부를 축성하여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다.8) 그리고 8월 23일에는 다음해 3월 1일 조선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가 1592년 정월에는 수륙침공군의 군대편성을 마치고 다시 3월에 재편하였다. 陸兵은 1번대에서 9번대까지 총 15만8천7백명이 침공군이었고, 名護屋을 비롯한 일본국내 잔류병력은 11만8천3백여 명이었다. 이중 선봉대로서 최전선에 투입된 병력은 小西行長을 주장으로 하는 1번대의 1만8천7백명, 加藤淸正이 주장인 2번대의 2만2천8백명과 黑田長正의 3번대 1만1천명 등 5만2천5백명이었으며, 후속부대로는 4번대에서 9번대까지 1십만6천2백명이었다. 그리고 九鬼嘉隆·脇坂安治·加藤嘉明·藤堂高虎 등이 별도로 水軍을 편성하고 있었다.9)

小西行長의 제1번대는 선조 25년(1592) 4월 13일 병선 700여척에 분승하고 辰刻(오전 7-9시) 대마도를 출발하여 申尾(오후 3-5시)에 부산진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왜군은 이튿날 아침 부산성을 함락시키고 다음날 동래성을 침공하였다.10) 그 후 小西行長軍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양산·밀양을 거쳐 대구·상주·조령으로 침공하였다. 한편 加藤淸正의 제2번대는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경주를 거쳐 영천·조령으로 향하였고, 같은 날 黑田長政의 제3번대는 죽도 부근에 상륙하여 김해에 이르렀다. 이후 이들은 이전에 倭使가 상경하던 길을 따라 中路·左路·右路의 셋으로 나누어 서울로 북상하였다.

한편 ‘왜대군 내습’의 급보가 서울에 이른 것은 왜군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지 닷새만인 4월 17일 새벽이었고, 잇달아 부산 함락의 급보가 들어왔다. 조정은 급히 李鎰을 巡邊使, 成應吉을 左防禦使, 趙儆을 右防禦使, 邊璣를 助防將에 임명하였다. 이일은 서울에서 징병하여 남하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3일이나 지체하다가 23일 상주에 다다르니 목사는 도망치고 군사와 백성들도 모두 흩어지고 없었다. 밤새워 군사를 모집하자 겨우 농민 4~5백명이 입성하였다.

조선의 국방전략은 본래 鎭管法이었으나 乙卯倭變(명종 10년, 1555)이후 制勝方略으로 개편하여 시행되고 있었다. 제승방략에 의하면 문경 이남의 경상도 군사는 모두 대구에 집결하게 되었다.11) 그러나 대구 부근의 石田에 모인 아군은 서로 적군으로 오인하여 혼란에 빠졌고, 이 때 연일 비가 내리자 이곳에 집결하였던 경상도군은 순변사가 이르기 전에 해산하고 말았다. 따라서 상주에서 급히 모집한 농민군으로써는 왜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12)

4월 20일, 戰局을 총체적으로 대처하는 都體察使로 柳成龍, 부사에 金應南, 三道都巡邊使에 申砬을 각각 임명하였다. 신립은 이일보다 더 뛰어난 용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26일 충주에 도착하였는데, 충청도의 각 군현에서 모인 군사는 약 8천 여명으로 추측된다. 그의 종사관 중에는 전 의주부사 金汝   과 같은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다. 그는 여러 장수들의 의견에 따라 새재를 지키려다가 충주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쳤다. 충주 탄금대 전투에 대해서는 포르투갈 신부 프로이스가 기록을 남겼다. 이에 따르면 小西行長의 왜군은 이미 26일에 새재를 넘었고, 다음날 신립군은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13) 왜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이었고 조선군의 주력부대는 기마병이었는데 戰場은 습지였으므로 기마전은 불리한 데다가 조선군은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신립은 單騎로 돌격하였으나 무위로 끝나 달천 월탄에 투신 자살하였고 충주 목사 李宗長, 종사관 金汝  ·朴安民 등도 전사하였다.

忠州敗戰의 충격 속에 4월 29일 조정에서는 서둘러 光海君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다음날 宣祖는 서울을 떠나 西行하였다.14) 5월 3일 왜군이 침입한지 20일만에 선봉대인 小西行長과 加藤淸正軍은 각각 동대문과 남대문을 통해 서울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선봉군의 뒤를 따라 제4번대의 毛利吉成 이하 제9번대까지 속속 부산에 상륙하여 상경하였다.

왜군의 기습적인 침략으로 조선의 관군은 일방적으로 패퇴하였고 국가는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런 가운데도 자율적인 저항세력인 의병이 왜군이 진격한 후방지역에서 일어났고 관군도 차츰 정비 강화되었으며15) 남해에서는 조선 수군이 왜수군을 제압하였다는 것이다. 대체로 戰勢의 분수령이 된 것이 임진년 7월부터 9월 왜군의 전주 침략 포기, 10월의 진주대첩으로 인한 전라도 침입 기도 좌절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초전에서 秀吉과 그의 참모들은 조선 침략 전쟁을 일본 국내에서의 통일전쟁의 연장과 같은 것으로 착각을 하였다. 秀吉은 봉건사회인 봉건영주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위협 회유하여 일본 내의 66州를 통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왜군은 조선의 행정구역인 ‘道’의 개념이 이해되지 않아 일본 봉건영주의 영토 개념인 ‘國’으로(예컨대 조선의 8道를 조선지도의 官邑표시의 색깔에 따라서, 예컨대 경상도는 白國 전라도는 赤國)으로 불렀다. 그런데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로 道 마다 영주가 있는 것이 아니었을 뿐아니라 그 도의 首府를 무력으로 점령한다고 그 道가 항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침략군 7번대를 이끌었던 毛利輝元은 경상도의 통치와 秀吉의 渡海에 대비해서 도내에 11개소의 御座所(秀吉의 行營)를 설치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는 조선에 상류한 지 한달 남짓한 시기에 9개조로 이루어진 私信을 일본으로 보냈는데 조선의 침략과 秀吉의 渡海 계획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은 예상 이상으로 조선의 국토가 넓어, 이 군대로 다스리기는 곤란하며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秀吉은 明까지 정복하겠다고 호언하지만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백성들은 왜군을 왜구라고 생각하고, 소규모로 지나다니면 습격하며, 왜군의 군량은 현지 조달할 수 있으나 강징당한 조선인은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왜군은 침략의 순간부터 자신들의 의도대로 침략과 지배지의 통치가 용이하지 않음을 깨닫고 있었고, 군량 등의 조달을 위한 약탈이 매우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왜군은 평양과 함흥을 점령한 후는 진격할 여력이 없었다. 남해에서의 조선수군의 승리와, 왜군 후방에서의 의병의 봉기는 왜군의 군량·무기·통신을 두절케 하였으며, 일본의 온난한 지역인 九州·中國·四國 지방의 군대는 음력 4월에 출동하여 조선 북방의 겨울 추위에 대비하지 못하였다. 왜군은 무기가 결핍되고 기아와 질병에 죽어갔다. 여기에 明援軍이 내도하여 조선·명연합군은 평양을 공격했다.

조선침공에 동원된 왜군은 약 15만이었는데 평안도 함경도 등지에서 서울로 퇴각한 왜군의 그 3분의 1인 5만명이 전사·기아·질병 등으로 죽었다고 기록했고. 서울에 퇴각한 왜군은 이미 사기가 떨어지고 전력을 상실한 군대였다.16)


2) 왜군의 전라도 침입좌절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65년 후 家藏史草와 비문·행장 및 야사·잡기 등을 수집하여 『선조실록』을 수정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은 왜군의 전라도·충청도 침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왜적이 전라도와 충청도의 郡縣을 침범하였다. 처음에[선조 25년 6월]17) 호남의 군사가 패하여 본도로 돌아오니 여러 고을의 인심이 흉흉하여 보전할 수 없었는데, 오직 光州牧使 權慄만이 고을의 군사를 단속하고 이웃 고을에 격문을 전하여 守禦할 계획을 하니, (전라감사) 李洸이 즉시 첩보로써 권율을 都節制使로 삼아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 나아가 수비하게 하였다. 이에 防禦使 郭嶸, 同福縣監 黃進, 全州 의병장 黃璞, 羅州判官 李福男, 金堤郡守 鄭湛을 熊峴과 梨峴 등 지세가 험준한 길목에 나누어 배치하여 적의 침입을 방비하게 하였다. 이때에 왜병이 星州 茂溪縣으로부터 金山·知禮 지경을 경유하여 茂州 龍潭縣으로 들어와 錦山에 진을 치고, 충청도 沃川·永同의 여러 고을로 들어가 淸州에 진을 치고 사방으로 나가 방화하며 노략하였다. 그러나 충청감사 尹國馨[尹先覺의 改名]과 兵使 李沃은 錦江에 군사를 모아 방어만 하면서 감히 진격하지 못하자 趙憲이 국형에게 편지를 보내어 머뭇거리면서 적을 치지 않는 것을 책망하였으나 듣지 않았다.18)


즉 왜군은 6월에 이르자 지금까지의 빠른 진격에서 벗어나 후방을 공고히 하고자 호서와 호남으로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수립된 전략이었다. 선봉대의 뒤를 이어 속속 서울에 입성한 黑田長政·毛利吉成·宇喜多秀家·小早川隆景 등 왜군 諸將은 전열을 재정비하는 한편 5월 8, 9일 경 회합을 가지고 조선 8도를 분담하여 經略하기로 하였다. 그들의 ‘朝鮮分居政策’의 목적은 조선 전역을 명 침공의 보급기지로 삼아 군량을 조달하고, 釜山―義州 간의 도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19) 이 결과 小西行長은 평안도, 加藤淸正은 함경도, 黑田長政은 황해도, 毛利吉成과 島津義弘은 강원도로 진군하였고, 서울은 宇喜多秀家의 군대가 담당하였다. 그리고 제6번대의 주장인 小早川隆景은 전라도를 분담하게 되었다.

한편 名護屋에 있던 秀吉은 직접 조선에 건너오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石田三成·增田長盛·大谷吉隆 등 三奉行을 보내 諸將을 독려하면서 조선에 대한 점령 정책과 대륙 경략 구상을 하달하였다. 점령 정책은 서울에서 피란한 조선 국왕의 수색, 민중 지배, 왜군의 난폭한 행동 금지, 서울에 秀吉의 거처 造營, 피란민의 還住, 군량의 비축, 부산―서울 간의 도로정비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대륙 경략 구상은 다음해인 1593년 2월까지 秀吉이 서울로 출발하고, 일본의 後陽成天皇이 北京으로 幸行하며, 중국의 關白에 豊臣秀次를 임명한다는 등의 망상적인 25개조로 이루어져 있다.20) 또 秀吉은 5월13일 자로 왜장들에게 조선 8도를 각각 점령토록 하고 租稅(군수물자)의 조달량을 할당하는 문서인 『高麗國八州之石納覺之事』를 하달하였다. 조달량은 총 1천1백9십1만6천1백86석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다.21)

왜군은 칩임한 지역에서 군량과 군수물자의 현지 조달을 위해 가혹한 약탈을 자행하였다. 왜군이 약탈한 물화는 육로와 내륙 水路를 이용하여 수십 척 내지 백여 척의 배로 운반하고 있었다.22) 또 왜군은 주민들을 지배하기 위해 때로는 對民慰撫 활동도 벌였다. 이들은 점령지에 榜文을 내걸고 士民을 회유하려 하기도 했으며, 문무관료나 지방 관아의 육방 관속들에게도 본집으로 돌아와 협조한다면 賞物과 관직을 주겠다고 하여 점령지역을 지배하려고 하였다.23)

1592년 4월 19일 7번대 3만명의 휘하 군대를 이끌고 부산포에 상륙한 毛利輝元軍은 부산포를 출발하여 5월 10일 玄風에 도착하여 그 곳에 주둔지를 구축했는데 의병과의 소규모 교전이 있었다. 그는 의병의 저항을 받는 가운데 星州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회의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5월 초 서울에서 열린 회의 결과 경상도 통치를 담당하게 되었다.

전라도 경략을 맡은 제6번대 小早川隆景24)의 주력군은 임진강변에서 서울을 거쳐 남하하였고, 또한 安國寺惠瓊25)은 경상도로부터 전라도로 침입하였다. 隆景軍의 총 인원은 1만 5천7백명으로 小早川隆景이 1만명, 立花宗茂가 2천5백명, 高橋直次가 8백명, 筑紫廣門이 9백명, 毛利秀包이 1천5백명을 인솔하고 있었다.26) 隆景 등이 이끄는 제6번대와 모리휘원 등이 인솔한 제7번대는 대체로 4월 19·20일 경 부산에 상륙하여 후방을 지키며 제 3번대가 지나간 길을 따라 상경하였다. 이후 隆景軍은 임진강변에 진을 쳤다가 5월 25일을 전후하여 전라도로 남하했다.27) 그런데 隆景의 家臣이었던 梨羽宗景의 기록 『梨羽紹幽物語』에는 立花宗茂·高橋直次·筑紫廣門 등의 隆景 휘하의 장수 3인 외에 毛利輝元의 부하 毛利秀包와 吉川廣家, 秀吉의 監軍으로 新庄直房·糟屋武則·太田一吉이 함께 참전하여 남하하고 있었다.28) 이들은 6월 9일에는 善山까지 진출하여 타 군사와는 달리 서울에 입성하지 않고 6월 초 경상도 金山·開寧·善山 사이에서 머물면서 이 지역을 경략하고 있었던 毛利輝元과 6월 10일 회동하고자 하였다.29) 그러나 이들은 조선군의 저항으로 말미암아 노정이 지지부진한 험난한 상태였고 회동도 불발로 끝났다.30)

이후 이들은 6월 22일 충청도 黃澗, 전라도 錦山으로 침입하였다. 『龍蛇日錄』에 수록되어 있는 경상감사 金  의 장계에 인용된 安陰縣監의 치보에는 ‘전라도 무주의 적세를 살펴보건대 (6월)22일 그 수를 알 수 없는 賊徒가 황간으로부터 順陽驛으로 와서 근처의 민가를 분탕한 후 네곳에 結陣하고 있다’고31)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6월말 茂州·錦山 등지에 침입하여 분탕하는 한편 전주로 진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32)

한편 安國寺惠瓊은 秀吉의 명령서를 毛利輝元에게 전달하기 위해 5월 14일에 성주를 향해 부산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3천명의 왜군을 거느리고, 星州로 가려했으나 靈山에서 玄風으로 통하는 山間部에서 의병의 습격을 받기도 하였다.

惠瓊은 성주에서 5월 21일 輝元을 만나 秀吉의 명령서를 전달하고 부산포로 귀환했다. 이때 秀吉의 계획이 취소되자 惠瓊은 특명으로 전라도 공략을 목표로 삼고있는 小早川隆景軍과 합세하기 위해 전주로 향하였다.33) 惠瓊은 전라감사로 자처하여 큰 기를 앞세우고 부산·의령·운봉·남원을 경유해서 전주로 진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의령에서는, 鼎岩津에서 곽재우가 거느리는 의병에게 격퇴당하였기 때문에 진로를 바꾸어 玄風·星州·開寧을 경유하기로 했다.34) 개령에서는 거창·진안을 거쳐 전주로 진군하고자 하였으나, 이번에는 거창에서 金沔이 거느린 의병과 맞닥트리게 되었다. 여기에도 惠瓊軍은 김면 의병에게 다시금 진군을 저지당하고 지례·무주를 경유 금산으로 우회할 수 밖에 없었다.35) 결과적으로 惠瓊軍은 慶尙右道義兵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적시에 隆景의 진영에 합류하지 못하고 예정보다 많이 지체할 수 밖에 없었다.

隆景이 인솔한 왜군은 호남의 首府인 전주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왜군의 호남 침입 전략은 대체로 서울로부터 隆景의 본대가 전주를 점령하고, 별동대인 惠瓊軍은 경상도의 남부지역에서 곧장 서쪽으로 진격하여 남원 방면으로 침입함으로써 동시에 전라도의 전역을 석권하려는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침공로의 곳곳에서 강력한 조선의 관·의군의 반격과 기습전으로 소기의 목표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 결국 隆景의 본대는 간신히 충청도로부터 錦山·珍山으로 침입하였고, 惠瓊軍 역시 서쪽으로 나가지 못하고 북상 우회하여 지례·무주 방면에서 錦山으로 본대와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말 이후 왜군의 주력부대는 대체로 금산 부근에 집결하여 북쪽에서부터 전주를 점령하고 남쪽을 침입하려 했다.

이에 따라 전장은 금산지역으로 좁혀졌다. 6월 초 용인전투에서 패한 후 권율은 黃進, 魏大器, 孔時億 등과 함께 광주로 돌아왔다. 그는 관내의 장정 5백명을 모으는 한편, 또 도내의 유력 인사와 제휴하고, 이웃 고을에는 勤王兵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렸다.36) 또 권율은 흉흉한 지방민의 민심을 수습하고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約法 10조를 발표하였다.37) 그 결과 의병들의 호응으로 1천5백여 명이 모이자 권율은 이들을 훈련시키면서 전라도와 충청도에 침범하려는 왜적을 대비하였고38) 전라관찰사 이광은 그를 節制使로 임명하여 군사 통수의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후 호남의 관군은 점차 정비되고 훈련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전라도를 통하는 要害處를 나누어 전라도방어사 곽영은 錦山, 조방장 李由義와 남원판관 盧從齡은 八良峙(왜군이 남원으로 침입하려함에 따라 錦山의 松峙로 옮김), 李繼鄭은 六十峴, 張義賢은 釜項, 金宗禮는 冬乙巨旨에 진을 쳐 왜군의 침입을 방비하고자 했다.39)

왜군이 전주로 침입하기 위해 집결한 錦山은 북으로 충청도의 沃川과 21리, 서로 珍山과 19리, 동으로 무주와 50리, 남으로 龍潭과 40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전주로 들어가는 요충지이다. 금산으로부터 전주로 통하는 길은 크게 熊峙(峴·嶺)를 넘어가는 길과 진산을 거쳐 梨峙(峴)을 넘어가는 두갈래였다.40) 따라서 왜군의 전주 접근을 방어하는 것은 두 街道의 要害處인 웅치와 이치의 수비가 관건이 되었다.

왜군이 금산에 주둔하면서 전주로 진격하려 하자 전라감사 이광, 광주목사 권율 등은 나주판관 李福男, 의병장 黃璞, 김제군수 鄭湛으로 하여금 웅치에서 적을 막도록 하였다.41) 이들은 고개 아래로 부터 정상까지 3線의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하였는데, 7월 7일과 8일에 걸쳐 수천 명의 왜군과 교전을 하였다. 그 결과 3선의 진지는 모두 돌파당하고 황박과 이복남은 후퇴하였고 해남현감 邊應井은 중상을 입었으며, 정담과 그의 종사관 李   , 비장 姜運·朴亨吉 등은 전사하였다.42) 이 웅치전투는 조선측이 비록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왜군도 고개 아래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즉시 웅치를 넘어 바로 전주를 침입하지 못하였다.

한편 권율은 동복현감 황진과 함께 1천 5백여 명의 군사로 이치에 진을 치고 진산에 주둔한 왜군의 전주방면 침입을 저지하고자 했다. 권율의 군사는 비교적 훈련도 잘되고 사기도 높은 편이었다. 권율은 이치에 목책과 장애물을 설치하였으며, 화살과 水磨石을 쌓아놓고 각종의 오색 기치를 산봉우리에 세웠다. 또 계곡에서는 연기를 올려 아군 병력의 많고 적음을 헤아리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금고·징·   등을 배치하여 서로 연락이 가능토록 하였다. 7월 8일 새벽부터 이어진 공방전이 오후 5시 경에 이르자 왜군은 기세가 꺾여 후퇴하려 하였다. 이때 조선군이 城柵을 넘어 공격하자 왜군은 사상자를 버린 채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1천 5백여 명의 군사로써 수많은 왜군을 맞아 승리하였는데, 단 11명만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큰 승리를 거두어43) 왜군은 이치전을 임란 3대첩 중에서 으뜸이라고 할 정도였다.44) 권율은 전투가 끝난 후에 戰歿 將兵에 대한 祭를 올리고,45) 鄭忠信으로 하여금 이 捷報를 의주에 있는 선조에게 전달토록 하였다.46)

웅치·이치 전투 후 왜군은 한때 웅치를 넘어 전주성에 육박하기도 했으나 李廷鸞 등이 굳게 지키는 것을 보고 다시 錦山으로 퇴각하였다. 조선측도 고경명의 전사 이후 왜군을 공격하지 못하였고 보성과 남평의 관군이 적의 동정을 탐지하다가 남평현감 韓諄이 전사한 이후로는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한편 고경명은 금산에 주둔한 隆景 군의 본영을 공격하고자 했다. 그는 7월 9일 방어사 곽영·의병장 유팽로와 함께 금산성을 공격했으나 공동 작전을 펴기로 한 趙憲의 원군이 도착하지 않고 곽영 휘하의 관군이 먼저 퇴각하여 마침내 종사관 安瑛, 아들 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충청 우도 옥천에서 모병한 조헌은 1천 6백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양·홍주·회덕 등지를 순무한 다음 영규가 이끄는 승군 1천명과 합동하여 청주성을 공략하였다. 8월 1일 의병이 청주 서문을 공략하니 왜군은 성안으로 패퇴하였다가 밤을 틈타 도주하였다. 이 청주성 수복은 의병이 공격을 통하여 얻은 값진 승리였다. 조헌과 영규는 계속하여 충청도와 전라도의 관군과 합동으로 금산의 왜군을 공격하려하였다. 조헌군은 영규가 거느린 의승군과 함께 휘하의 의병 7백명을 이끌고 8월 18일 단독으로 금산성을 공격하다가 전원 순절하였다. 금산에서 주둔하던 隆景은 8월 초순에 서울에서의 회의에 참석하라는 石田三成 등의 三奉行으로부터 소환명령을 받고 상경하였다. 회의의 목적은 明 대군의 來援에 대한 방비책을 모의하는 것이었다. 隆景은 상경할 때, 대부분의 군대를 인솔해 갔고, 이후 금산에 주둔하던 隆景軍은 더 이상의 전라도 경략을 포기하고 9월 16일 옥천·개령·성주 등지로 퇴각하게 되었다.47)  

한편 웅치·이치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라순찰사 권율은 방어사 황진에게 이치를 대신 지키게 하고48) 전주로 들어가 紀律을 一新하여 도내의 병력을 재정비하였다.  그리하여 9월 16일에 이르러서는 전주를 점령하고 전라도를 경략한다는 왜군의 야심찬 계획은 더 이상 실현될 가능성이 없었다.

한편 바다에서도 전라좌도 수사인 李舜臣이 거느린 수군이 같은 시기에 閑山島 앞에서 九鬼·脇坂 등이 거느린 수군을 완파함으로써 왜 수군은 재기 불능에 빠졌고, 秀吉의 교전 금지 명령과 함께 바닷길을 통한 전라도 경략도 불가능해졌다.


3) 제1차 진주성 전투

임란 초전 조선의 일방적 패전 양상을 바꾸어 놓은 요인으로는 수군의 승리, 명원군의 참전과 관군의 재편과 더불어 들 수 있는 것이 의병의 봉기를 손꼽을 수 있다.49) 『선조수정실록』은 임진왜란 의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여러 道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경상·전라·충청 3道의 兵使들은 모두 인심을 잃고 있었다. 때문에 왜란이 일어난 뒤에 군량을 독촉하니 사람들은 모두 미워하여 왜적을 만나면 모두 흩어져 도망갔다. 마침내 도내의 巨族으로 명망있는 사람과 유생들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義를 부르짖고 일어나니 소문을 들은 자들은 격동하여 원근에서 이에 응모하였다. 비록 적을 크게 이기고 얻은 것은 적으나 人心과 國命은 이에 힘입어 유지되었다.50)

임란이 일어나자 대부분의 수령과 군사들이 먼저 逃散한 가운데 백성들이 의지할 존재는 지방의 巨族名望者였다. 이들은 인민이 신뢰할수 있는 인물이었으며, 백성들은 관군에 응모하기보다는 이들 휘하의 의병으로 호응하였고, 난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창의하였다. 특히 전쟁 초기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일어난 의병의 역할은 왜군의 호남 침입 저지는 물론이고 향리에서 나아가 국가를 보존하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51)

경상우도 초유사 金誠一은 관군을 모집하면서 ‘본도가 함락된 후 사방으로 흩어진 자는 비단 도망하고 흩어진 군사뿐만 아니라 大小人民이 모두 산속 수풀의 새처럼 숨고 짐승처럼 엎드려 있어 비록 수차례 반복하여 타일러도 응모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라고52) 할 만큼 관군에 응모하는 자가 적었다.    

호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호남은 임란 초기 직접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임란 초 金致老라는 사람은 “전라도 사람들은 평소 왜라는 이름을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심하게 두려워하지 않는다.”53)고 한 바와 같이 경상도에 비해 왜군을 두려워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왜군의 서진에 따른 피난민의 유입으로 말미암아 역시 경상도와 같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54) 그러나 제2차 관군의 북상 시기에 이르러서는 金千鎰·高敬命 등에 의한 의병의 규합 여건이 성숙되었다. 지역에서 신망있던 인사인 광주의 고경명, 순창의 楊士衡, 전주·고부 등지의 유생 등의 협조 아래에서 이들이 모집한 군사가 다시 관군으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호남으로 침공하는 왜군의 격퇴와 관련해서 호남·호서 지역에서의 의병활동도 중요하지만 경상우도 군사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惠瓊의 서진을 막은 의령의 곽재우의 활약과55) 거창의 金沔의 활동이56) 직접적인 것이라면 惠瓊軍의 북상 후에는 慶尙右道 招諭使 金誠一의 지휘로 경상도로부터 전라도 남부 지역으로의 침입하려는 왜군을 저지하였다. 김성일은


신이 보건대 晉州는 남쪽 지방의 巨鎭으로 兩道의 요충지에 위치하였으니,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 일대에 보존된 여러 고을이 土崩瓦解되어 朝夕을 보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이 반드시 호남을 침범할 것입니다. 호남은 지금 근왕으로 인하여 도내가 텅 비었으니 만약 또 적의 침입을 받는다면 더욱 한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곳은 바로   陽 1군이 江淮의 保障이 된 것(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과 같으니, 오늘날 꼭 지켜야 할 곳입니다.57)

라고 장계를 올려 호남의 실정과 진주의 중요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는 현풍·영산 등지의 왜군을 공격하는 한편, 거창·고령·초계 등지의 경상우도 의병으로 金山·무주·성주 등지의 왜군을 방비하고, 함안·칠원·사천·곤양은 그 고을의 수령으로 함락되었던 성을 수복하고 수비하게 하였다.58) 이러한 경상우도 각 고을 의병에 의한 방어와 왜군 견제는 향리를 自守하는데 그치지 않고 초유사 김성일의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안배에 의해 호남으로 왜군이 西進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다.

경상 우도의 대읍이며 전라도로 들어가는 또다른 길목에 위치한 진주는 왜군이 향한다고 하자, 목사 李  과 판관 金時敏이 지리산에 숨어 피했다. 김성일이 이 소식을 듣고 진주에 가서 김시민으로 하여금 군사를 정돈하여 성을 지키게 하는 한편, 전 군수 金大鳴을 召募官으로, 孫承善을 守城有司로, 許國柱와 鄭惟敬을 伏兵將으로, 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임명하여 돕도록 하였다.

그 결과 진주 지역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곽재우·김면·정인홍 등의 의병활동이 성과를 거두자 8월부터 10월에 이르기까지 관군과 전 병사 曹大坤·사천현감 鄭得悅·함안군수 柳崇仁·칠원현감 李邦佐 등과 경상우도 연안의 왜군을 급습하고 진해에 주둔하던 적장 小平太를 생포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고 사천·고성·진해 등지의 고을을 수복하였다.59)

이에 왜군은 조선군의 본영이라할 수 있는 진주를 직접 공략하고자 하였다. 왜군은 10월 1일 함안군의 동남쪽을 분탕질하고 곧 富多峴을 넘어오다 진주·사천·곤양·하동·단성·산음의 군사들로 구성된 조선군의 매복에 걸려 많은 사상자를 내고 도주하였다. 다음날은 진주의 召村驛에 진군하였고, 그 다음날인 3일부터는 馬峴과 佛遷을 넘어서 바로 양쪽으로 진주를 공격하였다. 이것이 진주대첩의 시작이었다. 이 전투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10월 10일까지 이레 동안 치열한 접전이 있었고 전투의 내용은 다른 발표에 자세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러나 전투의 막바지에 김시민은 유탄에 맞아 전투가 끝난지 여드레 뒤인 10월 18일 사망하고 말았다.

진주대첩은 초전 이래 조선이 거둔 큰 승리였다. 그리고 왜군의 전라도 경략 의지를 완전히 꺾었으며, 전국의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큰 승리였다.





맺 음 말


임진왜란은 16세기 말 동아시아에 있어서 동아 삼국이 국력을 기울인 초유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때마침 서구의 지리상의 발견, 대항해시대에 자극받고 영향을 받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전투를 치뤘다.

국력이 쇠퇴의 징후를 나타내던 조선은 기습 침략을 당한 初戰에 고전을 하였으나 곧 전열을 가다듬고 왜군과 맞서게 되었다. 왜군에게 전라도는 아직 왜군이 침략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전술적으로 왜군은 후방에서 자신들을 위협하는 전라도군을 제압하는 한편 곡창인 호남에서 군량미를 징발하고자 했다. 한편 조선도 호남을 보전하는 것이 침략한 왜군을 격퇴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宣祖와 조정에서도 南兵을 믿고 기다리기도 했지만 전라도에서도 호남이 조선의 保障이라는 인식과 자긍심이 강하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호남을 가리켜 ‘오직 이곳 호남만이 다행히 하늘의 도움에 힘입어 거의 보전되어 나라의 근본을 이루고 있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일은 모두 이 도에서 마련된다’고 하였고60) 권율은 호남을 ‘保國의 근본으로 조선 왕실이 일어나게 된 기반’으로 파악하고 있었다.61) 고경명은 '우리 본도(전라도)는 본래 병마가 精强하다고 한다.‘라고 하고62) ‘오늘 우리가 믿는 것은 호남 一道가 아니겠는가’라 하였으며,63) 또 全州에 대해 ‘호남의 근본이 되는 땅일뿐만 아니라 眞殿(慶基殿)이 소재한 곳으로 우리 聖朝의 豊沛’라고64) 하였다. 따라서 호남, 그 중에서도 전주를 지켜야한다는 의식이 매우 강하였다.

더 이상의 진격을 위해서는 조선의 서남부를 수중에 넣어야 했으며, 조선 역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호남의 방어가 관건이었다. 따라서 임진년 7월부터 10월에 이르기까지 왜군이 시도했던 전라도 경략은 임진왜란의 승패가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 하는 전쟁의 가장 큰 승부처였다. 왜군은 결국 웅치의 방어전과 이치대첩을 비롯한 일련의 대소 전투 끝에 호남의 점령에 실패하였으며 그 대미는 진주대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전략에 차질을 빚자 왜군은 당황하였다.

豊臣秀吉이 조선에 파견한 三奉行과 四軍監役은 임진년 6월 중순에 부산에 이르고 7월 16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 중 秀吉의 심복 부하이며 삼봉행의 한사람인 石田三成은 상경 도중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부산진에 저축한 군량에는 한계가 있고 계절은 이미 8월이 다가오니 해상의 물결은 높고 바다 위 포구에는 해적(조선수군)들이 몹시 창궐하여 우리의 군량선이 오는 일도 불안하다. 선봉군은 이겨 へやくい(평안도 ?)에 이르렀으나 赤國(전라도)·白國(경상도)은 아직 평정하지 못했으니 불안하다65)


라고 하였다.

11월 명군의 내도하자 서울에서 왜군은 군사회의를 열고 그 대책을 논의했는데 그 때 ‘남방의 赤國의 一揆勢는 몹시 강세이다.’라고 하였다.66) 또한 임진년 11월 11일 자 豊臣秀吉의 書狀에서도 ‘赤國·白國의 在陣軍은 一揆들이 나오면 곧 합세하여 격멸하라.’고 하였다.67) 서울에서 왜군 5장군 評定에서는 ‘赤國에서 一揆 봉기 때문에 통로가 막히어 군량이 오지 못하고 있다. 서울 군량창고의 저축은 앞으로 60일밖에 견디지 못한다.’라고 하고 있다.68) 이 ‘一揆’란 일본 봉건사회에서 영주에게 반항하는 무사 계급이나 농민의 반란을 뜻하는 말이었다. 전라도 또는 경상도의 ‘一揆’란 왜군을 공격하는 관·의군을 말하는 것으로 ‘赤國一揆’라 표현한 것은 전라도군의 공격에 왜군이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임진왜란 초전에서 진주 대첩에 이르기까지의 전투는 임진왜란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는 왜군의 호남 침범을 격퇴하여 조선군이 반격할 수 있는 근거지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호남 지역이 온존하였기 때문에 조선은 왜군과 싸울 수 있는 군사를 계속 공급할 수 있었다. 전라도 지역에서 모병된 군사는 크게 관군과 의병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중 관군으로 징집된 군사는 바다에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휘하에서 수군으로 참전하였으며 무적 조선 수군의 근간이 되었다. 한편 육지에서는 권율 휘하의 군대로서 이후 경기도에서의 독산산성 전투, 행주대첩 등의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한편 의병은 1, 2차 금산전투 등에서 비록 고경명, 조헌, 영규 등의 의병장이 전사하고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金千鎰 휘하의 의병은 강화도에 머물면서 후방과 의주의 조정을 연결하는 통로를 마련하고 왜군을 견제하였고, 崔慶會 등의 의병은 경상우도로 진출하여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폈다. 또한 1,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한 군대의 주축이 되었다. 호남 의병의 전통은 이후 忠勇將 金德齡, 高從厚의 奮義復讐軍으로 이어졌다.

호남지방이 보전된 것은 조선이 군사뿐만 아니라 군량의 공급처를 확보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순신 등에 의해 조정으로 군량이 공급되기도 했으며69) 명군이 참전한 이후 전라도의 곡물은 군량으로서의 비중이 더욱 커졌다.

둘째로는 전국적인 관군의 정비 강화와 의병의 봉기를 촉진했다는 점이다. 제승방략의 체제 아래서 상주, 충주, 용인 전투에서 패퇴한 관군은 괴멸된 상태였다. 그러나 웅치방어전과 이치대첩으로 왜군을 저지하게 되자 관군은 실전을 통하여 점차 왜군과의 전투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즉 이치전투의 승리는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 대해 지형지물을 이용하고 성채가 없어도 목책·수마석 등을 적절히 배치하여 방어전을 펴면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권율은 독성산성 전투, 행주대첩, 파주산성 등지에서 필승의 전술로 구사하였다. 또한 관군은 왜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훈련을 통해 관군의 병력을 강화할 수도 있었다.

이 시기부터 봉기하기 시작한 의병도 점차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때에 세자 光海君에 의해 주도된 分朝 활동은 의병 봉기를 고조시켰다. 分朝는 선조 25년 6월 14일부터 10월까지 활동하였는데, 민심을 수습하였고 의병 지휘를 일원화하였다.70) 그리고 이 때 만약 호남이 보전되기 않았더라면 분조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광해군이 伊川에서 분조활동을 시작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은 점차 안정을 찾게 되었고 의병의 소모와 督軍을 통해 전국적으로 의병장을 직접 지휘할 수 있었다. 광해군의 의병을 일으켜 勤王하라는 下書는 倡義使 金千鎰을 통하여 전국의 의병들에게 전달되어 行宮과 분조의 명령이 전국에 통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의 起義가 권장되었고, 除職과 褒賞이 이루어졌으며, 군량이 지급되었다. 또한 관군과 의병의 합동작전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특기할 일은 선조 26년 윤11월에 설치된 2차 분조인 撫軍司에서 광해군은 柳夢寅 등을 대동하고 수원을 거쳐 공주·전주 등을 순행하였는데 이해 12월에 세자는 진주·금산 싸움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명부를 작성하고 그 가속들에게 免役帖과 米·太를 지급하였다.71)

셋째로는 왜군의 배후지를 장악하여 왜군의 진격과 보급 계획에 차질을 가져오게 했다는 점이다. 왜 침략군은 주요 간선도로를 따라 급거 진격하였고 그 후방에는 요지에만 소수의 수비군을 駐留시켰다. 그러므로 왜군의 군세는 주요 간선도로를 잇는 주변 고을에만 미치고 하삼도의 대부분 지역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곳이 의병이 주로 봉기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72) 왜군도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을 점령한 이후 회합을 가지고 각도의 분담을 통해 관군과 의병의 저항을 섬멸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 진격로 이외의 가장 중요한 지역인 전라도 점령이 실패하게 되자 작전상의 어려움을 가져오게 되었다. 특히 육지에서의 전라도 점령 실패와 한산도 해전의 패배로 왜수군이 서해로 진격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할 수 없었다.

또한 현지에서 부족한 군량미 등 전쟁물자를 보급하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특히 현지조달에 차질을 가져온 왜군은 일본으로부터 최전선까지 긴 보급선을 유지하기 위해 병력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호남 지역에서는 계속 의병이 봉기하여 왜군의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끊임없이 왜군의 전선과 후방, 일본 본토와의 연락망,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왜군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3백명 이상이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통행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73) 결국 왜군이 평양과 함경도를 점령하고도 전세가 역전된 한 遠因은 호남의 점령 계획이 좌절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듬해 강화교섭이 진행되어 1593년 5월 명의 사신이 일본에 건너가게 되자  秀吉은 이에 앞서 明使節에게 무력 시위를 하여 위협을 가하고자 했다. 秀吉은 淺  長政·黑田孝高·增田長盛·石田三成·大谷吉繼 등에게 명과의 강화 조건을 제시하고 협상을 준비시켰다. 이 협상 준비에 관한 문서 중 7조와 8조의 내용은 진주성을 공격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학살하라는 지시였고 이것은 전날 전라도 침공의 실패를 보복하기 위한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제2차 진주전투의 장렬한 패배는 이미 이때부터 배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