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임진왜란 - 일본의 전쟁준비는 착착진행되고

구름위 2013. 9. 26.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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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쟁 계획 및 준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과의 접촉에 관심을 기울이고,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전쟁을 구상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 사후의 일이다.
    그의 통일사업은 1585년에 간바투와 다조다이진의 지위를 겸임하였고, 1590년에는 천황의 권위를 빌어 전국을 통일한 이후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급진전되었다.
    이처럼 일본 국내의 통일이 진전됨에 따라, 조선 및 중국을 정복하여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하나로 통합한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은 전통 있는 가신집단을 보유하지 못하고, 다이묘 세력들을 일시적으로 결합시켜 놓은 연합정권에 불과하다는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약점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규모 대외원정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정복 대상 지역인 조선과 명의 광대한 영토를 재분배하여 다이묘 세력들의 영지확장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침공을 위해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경로를 상정하였다.
    1. 유구를 경우 해로로 명나라 동남 해안으로 진출
    2. 조선을 경유 육로로 요동- 산해관을 거쳐 명나라 내지로 진출

    이 두 가지 경로를 검토한 결과 바다를 통한 대규모 원정은 현실상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두 번째 안을 진군 경로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전략 구상을 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안을 생각하였다.

    제 1안 : 조선에 외교적인 압력을 가하여 조선을 일본의 영향하에 들게 하고 조선군의 선도하에 중국 대륙으로 진출
    제 2안 : 조선을 침공하여 조선 전역을 단기간 내에 점령한 후 명나라와 외교적인 협상을 하면서 전열을 강화한 다음 사태의 추이에 따라 중국 대륙으로 진출

    이와 같은 두 가지 방안에 대하여 도요토미는 제 1안이 자국의 손실을 극소화하면서 조,명,일 3국을 하나의 정치권으로 통합 형성하는데 있어서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토요토미는 수차에 걸쳐 조선에 사실을 파견하여 '조선국왕은 일본에 입조하라'는 그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일 양국 사이에서 중개 역활을 담당하였던 쓰시마 도주(島主) 소 요시토시(宗義智)측에서는 일본의 이러한 요규가 조,일간의 전쟁을 야기시킬 위험이 있다고 인식하고 이에 쓰시마측에서는 도요토미가 요구한 '조선국왕의 입조'를 '조선의 통신사 파견'으로수정하여 조선에 전달함으로써 조,일 관계를 원만하게 수습하여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쓰시마측의 노력의 결과로 선조23년에 조선 조정이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러자 도요토미는 조선의 통신사 파견이 일본의 위력에 굴복한 조선의 항복을 뜻하는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해석을 내리고 조선에 국서를 보내어 '일본의 명나라 정벌에 조선군이 향도가 되라'고 강요하였다.

    조선은 '명나라를 치는데 조선이 앞정설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여 도요토미의 요구에 냉담한 반을을 보였다. 이에 도요토미는 '조선군의 선도하에 명나라를 친다'는 그의 복안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무력으로 조선을 제압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591년 8월 도요토미히데요시는 교토에서 전국의 다이묘들을 불러 놓고 조선 출병을 선언하고,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 후 10월부터 다음해(1952년) 2월까지 구슈에 전쟁을 총지휘할 대본영이 될 나고야성이 카토 키요마사의 지휘하에 건설되었다. 도요토미는 다시 1592년 1월 6일 정식으로 전국 영주들에게 동원령을 내림과 동시에 구슈, 시코쿠, 혼슈 서부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다이묘들에게 영지의 규모와 병력동원 능력에 따라 병력을 차출하도록 지시했다.

    토요토미의 명령에 따라 각지에서 모인 다이묘들은 제 1번대부터 제 16번대까지 편성되어 제 1번대가 3월 1일 나고야 기지를 출항하여 쓰시마로 향하는 것을 시작으로 각 부대에 정확한 행군 계획이 하달되었다.

    조선 침공군(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리는 분들도 계시겠지만...)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총 병력 규모

      제1선 병단(조선 출정부대) 9개군 15만 8,800명

      제2선 병단(대본영 대기부대) 8개군 10만 1,450명

      수군(해상작전 및 엄호부대) 4개대 9,200명

      대본영 직속부대 5개대 2만 9,000명

     

    이 중 실제 전선에 투입되는 제 1 병단 9개 군의 편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부대순번

    지휘관

    휘하병력

    출신지방

    총계

    제 1번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7,000 명

    구슈(九州) 지방

    18,700 명

    소오 요시토시(宗義智)

    5,000 명

    마츠우라 시게노부(松浦鎭信)

    3,000 명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2,000 명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

    1,000명

    고토 스미하루(五島絶玄)

    700 명

    제 2번대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

    10,000 명

    구슈(九州) 지방

    22,800 명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2,000 명

    사가라 나가츠네(根良長每)

    800 명

    제 3번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6,000 명

    구슈(九州) 지방

    12,000 명

    오토모 요시무네(大友吉銃)

    6,000 명

    제 4번대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2,000 명

    구슈(九州) 지방

    15,000 명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0,000 명

    다까하시 구로오(高橋九郞)

    1,000 명

    아카츠키 다네나가(秋月種長)

    1,000 명

    이토 스케타카(伊東祐兵)

    1,000 명

    제 5번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側)

    5,000 명

    시코구(四國) 지방

    24,700 명

    도다 가츠다카(戶戰勝降)

    4,000 명

    하츠스가 이에마사(峰須家政)

    7,200 명

    죠소가베 모도찌가(長宗我部元親)

    3,000 명

    이코마치 가마사(生駒親正)

    3,500 명

    제 6번대

    고바야카와 타카가게(小早川隆景)

    10,000 명

    구슈(九州) 지방

    15,700 명

    다찌하나 무네도라(立花銃虎)

    2,500 명

    모리 히데가네(毛利秀包)

    1,500 명

    쯔구시 고오몬(筑紫廣門)

    900 명

    다까하시 나오지(高僑直次)

    800 명

    제 7번대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30,000 명

    주코구(中國) 지방

    30,000 명

    제 8번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10,000 명

    주코구(中國) 지방

    10,000 명

    제 9번대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

    8,000 명

    긴키(近畿) 지방

    11,500 명

    호소가와 다다오끼(細川忠興)

    3,500 명

    육군 총계 

    158,800명

    수군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1,500 명

    고노에(近江) 지방

    9,450 명

    도토오 다까도라(騰堂高虎)

    2,000 명

    와카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00 명

    가토 요시아끼(加藤嘉明)

    1,000 명

    구와야먀 마사하루(桑山貞晴)

    1,000 명

    구루시마 미찌후사(來島通總)

    700 명

    도쿠이 미치도시(得居通年)

    700 명

    스가이 에몬쇼우(管井石衛門尉)

    250 명

    호리우찌 요지요사(堀內氏善)

    850 명

    스기와카 덴사부로(杉若傳三郞)

    650 명

    총계 

    168,250 명

    원래 총 편성은 제1번대에서 16번대까지로 구성되지만, 이들 부대 가운데 실제로 투입되는 병력은 제 1번대부터 제 9번대까지의 15만 8,800명이고 그 중 제 8번대 1만 명은 쓰시마에, 제 9번대 1만 1,500명은 이키도에 대기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초기에 조선에 투입될 병력은 제 7번대까지의 13만 8,900명이었으며, 이 중에서도 최전선의 선봉은 제 1번대에서 3번대까지의 5만 3,500명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8군과 9군도 조선에 상륙하였습니다)

    다까다 이찌지로(高田一白) 등 14명의 장군과 그 휘하의 5,740명, 무기부대로 오오시마 구모하찌 등 7명의 장군과 그 휘하의 755명, 기병, 각종 하인, 매 사냥부대등을 포함한 14,900명, 후위 부대로는 오리다 노부히데등의 28개 부대와 그 휘하의 5,300명으로 구성되고, 후방 본영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38명의 장군과 그 휘하의 74,720명이 배치되어 예비 부대로 나고야성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나고야성 후방 군은 전체 10만 1천 400 여 명으로 조선으로 향하는 선봉부대와 직속 휘하 군을 합하면 어쨌던 총 병력 합계는 29만 8,000명에 달한다.

    조선 출병군 지휘부

    총 대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총 봉행(奉行)

    마시다 나가모리(增田長盛)

    이시다 미나리(石田三成)

    오오다니 요시츠쿠(大谷吉繼)

    조선관리관

    요시다 시계가츠(吉田重勝)

    육군 봉행

    구로다 고오다카(黑田孝高)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

    육군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

    해군봉행

    후꾸하라 나가다까(福原長?)

    구마다니 기요마사(熊谷淸正)

    모리 다까마가(毛利高政)

    가케이 나오루

    해군대장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토오 다까도라(騰堂高虎)

    시마츠 다카하사(島津貴久)

    와카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끼(加藤嘉明)

    구루시마 미찌후사(來島通總)

    도쿠이 미치도시(得居通年)

    이러한 대병력을 먹여살릴 군량미는 1591년 12월 당시, 나고야성에 48만명 분의 1년치 군량과 기타 군수물자가 모여졌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직접 나고야성에서 전쟁의 총지휘를 할 생각으로 간바쿠의 자리를 조카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다이코(太閤)가 되었다.

    까막눈이지만 타고난 병법의 대가였던 히데요시가 세운 조선 침공계획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①조선 출정 부대인 제1선 병단(158,700명)은 조선에 상륙하는 즉시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한성을 향해 진격하여, 한강 이남지역에서 조선군의 주력을 섬멸하고 조선 전국을 점령, 확보한다.
    ②조선 점령 후 제2선 병단(102,960명)을 남서해 수로로 파견, 평양에서 합류하여 명나라로 진공한다.

    부대의 진격진로는 다음과 같이 계획되었다.

    ①중로 : 부산 - 대구 - 조령 - 충주 - 용인 - 한성
    ②동로 : 울산 - 경주 - 죽령 - 원주 - 여주 - 한성

    ③서로 : 김해 - 성주 - 김천 - 추풍령 - 청주 - 한성

    히데요시는 점령한 조선 땅의 군정(軍政)을 위해 조선 8도를 6색(色)으로 구분하여 표시하고, 모든 작전 명령이나 공문서에 사용하게 하였는데

    경상도 : 백국(白國)
    전라도 : 적국(赤國)
    충청, 경기도 : 청국(靑國)
    강원, 평안도 : 황국(黃國)
    함경도 : 흑국(黑國)
    황해도 : 녹국(綠國)

    이리저리해서 출동준비를 다 마친 3월 초, 나고야를 출항한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 1번대가 13일 쓰시마의 오우라항에 도착했으며, 이어서 카토 키요마사의 제 2번대가 도착한 하였고, 제 3, 4번대의 수송 선단이 나고야를 출항, 이키도를 거쳐 쓰시마로 집결함으로써 전쟁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고 개전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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