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각종 사료로 보는 칠천량해전

구름위 2013. 7. 19. 16:54
728x90

각종 사료로 보는 칠천량해전

 

※ 《선조실록》 1597년 7월 22일 ※
“7월 15일 저녁 10시에 왜선 5~6척이 갑자기 소동을 일으키며 불을 질러 우리나라 전함 4척이 전부 타버렸고, 우리 여러 장수들은 황급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진을 벌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닭이 울 무렵, 왜선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타나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 근처에 가득 널린 채 싸우거니 물러나거니 하였는데, 도저히 적들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에 우리 군사들이 고성 땅 춘원포로 물러나 진을 쳤으나 적세가 하늘을 찔러 우리 배들이 전부 불타고 깨어지고, 장수와 병졸들도 모두 불에 타서 죽고 빠져 죽을 때에, 신은 통제사 원균, 순천부사 우치적과 함께 빠져나와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원균은 늙어서 달아나지 못하고 혼자 칼을 집고 외로이 소나무 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다가 돌아보았더니 왜놈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면서 원균이 있는 곳에 이르렀는데, 원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경상우수사 배설과 옥포 · 안골포 만호 등이 겨우 몸을 보전하였고, 모든 배들의 불타는 연기가 하늘을 찌르는데 왜적들이 무수히 한산도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전관 김식이 조정에 보고한 칠천량해전 상황을 기록한 장계 내용이다.

김식은 원균의 기함에 타고 부산포 공격을 계속 독촉했던 것 같다. 밤 10시에 왜선들이 와서 불을 질렀다면 조선 함대의 정박지는 이미 들통 나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왜군 특공선단이 몇 척의 병선에 불을 질렀고 이를 신호탄으로 이튿날 새벽 영등포 · 장문포 · 가덕도 · 웅천포 · 안골포 · 김해 등지에서 작전 대기중이던 왜선단이 바다를 뒤덮듯이 몰려들었다.

조선 함대는 왜군들의 방화가 있은 직후 즉시 함대를 한산도로 물려서 왜군들의 공격에 대비했어야 했다. 그러나 선전관이 기함에 타고 앉아 어명을 들먹이며 한산도로의 퇴각을 막았는지, 아니면 원균이 그날 저녁에도 술을 마시고 취해 있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칠천량에 눌러 있다가 당한 참변이다.

김식의 장계를 받아본 선조는 할 말을 잊은 채 별전에서 대신들과 비변사, 당상관들을 불러 모아 시국 수습에 대한 긴급 어전회의를 열었다.

 

※ 《선조실록》 ※
선조 : (김식의 장계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수군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으니(궤멸당하였으니) 이제는 어찌할 길이 없다. 대신들이 마땅히 명나라 도독과 안찰의 아문으로 가서 이것을 보고해야 할 것이다. 글쎄 원, 충청도나 전라도 등지에는 혹시 남은 배가 있는지! 어찌 이 사태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나. 이제라도 남은 배들을 거두어서 수비할 계책을 세우는 것이 옳지.

(좌우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갔다.)

선조 : (목소리를 높여서) 그래, 대신들은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이대로 두고 그저 아무 것도 아니할 셈인가! 그래, 아무 대답도 아니 하면 왜적이 저절로 물러가고 나랏일도 잘 되어갈 거란 말인가!

 

모두들 할 말이 없었다.

특히 그동안 원균을 두둔했던 대신들은 책임 추궁이 두려워서 자라목이 되어 있었다.

※ 《선조실록》 ※
유성룡(영의정) : 감히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도 답답해서 당장 무슨 좋은 계책이 생각나는 게 없으므로 미처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조 :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다는 것은 천운(天運)이니까 어찌할 수가 없어! 원균은 죽었을망정 어찌 달리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겠나. 그저 각 도의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할 뿐이야. 원균은 척후선도 배치하지 않았던가? 왜 한산도로 물러나서 지키지 않았을까?

 

선조는 패전의 결과를 하늘의 뜻으로 돌리고 있다. 스스로에 대한 책임회피였고, 그 덕에 윤두수, 윤근수, 김응남 등 원균을 두둔했던 사람들이 책임추궁을 면하게 되었다.

선조는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한다’ 고 했지만, 그러고 싶어도 그럴 병력은 이미 모두 다 사라지고 난 후였다.

 

※ 《선조실록》 ※
유성룡 : 거의 한산에 가까이 오다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밤 9시쯤 적이 어둠을 타고 몰래 들어와서 갑자기 총포를 쏘고 우리 전함 4척에 불을 질렀습니다. 어리둥절한 중에 따라가 잡지 못했으며, 그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적들이 사면을 에워쌌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해서 상륙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이 먼저 올라가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손을 쓸 도리도 없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왜군 측은 수륙군 합동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공격전을 펼쳤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던 선조는 원균이 부산포 쪽으로 나가기만 하면 고니시의 도움을 받아 가토를 잡을 수 있을 줄로 알았다. 그래서 선전관을 원균의 기함에 동승하게 해서 부산 출동을 어명으로 강요했던 것이다.

 

※ 《선조실록》 ※
선조 : 한산도를 굳게 수비해서 범이 숲 속에 든 형세를 갖추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너무 명령을 독촉해서 이 같이 패전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늘이 한 일이다. 이제 와서 말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나 어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내버려둘 수야 있겠는가? 당연히 남은 배들을 수습해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수비토록 해야 할 것이다.

 

‘한산도(견내량) 봉쇄작전’ 은 이순신의 지론인데, 언제부터인지 원균이 인용하더니, 이제 와서 선조가 이를 이용하고 있다.

 

※ 《선조실록》 ※
이항복(병조판서) : 지금 할 일이라고는 통제사와 수사를 속히 임명하고 그들을 시켜서 계획을 세우고 방비를 하도록 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순신의 복권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 《선조실록》 ※
선조 : 그래, 그 말이 옳다! 적의 수가 극히 많다니 애당초 바람에 표류했다는 말은 역시 거짓말이고,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난 것임이 분명하다. 한산의 형세는 아주 좋은 곳일 뿐더러 바다 길목을 끊어 막아 지키기에 적당한 곳인데, 거기를 내버리고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 앞바다로 나가는 것은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렇게 되었다! 내가 전에 말한 것처럼, 저 놈들이 6년 동안이나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명나라로부터 책봉한다는 문서 한 장을 받으려는 것 때문이겠는가. 그리고 또 적선들이 그 전보다 훨씬 많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사실인가?

김응남(좌의정) : 그러하옵니다.

김명원(형조판서) : 그것은 모르겠으나, 김식(선전관)의 말을 들으면 왜적들이 우리 배 위로 육박해 올라왔기 때문에 장수와 군졸들이 손 쓸 도리도 없이 모두 죽었다고 하옵니다.

정광적(좌승지) : 우리 군사는 다만 총 7자루밖에 쏘지 못했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옵니다.

선조 : 평수길이 매양 말하기를, 먼저 우리 수군을 깨뜨린 뒤에라야 육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한다더니, 과연 그렇군!

노직(상호군) : 9일 싸움에 병졸들이 겁을 내어 화살 하나 못 쏘았다고 하옵니다.

선조 : 이미 지나간 일이야 의논해서 무엇 하겠는가. 한편으로는 통제사를 임명해서 곧 남은 배들을 거두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도독부에 보고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 천자에게 주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항복을 보고) 전군이 몽땅 다 깨졌나? 하지만 도망해서 산 자도 있겠지?

이항복 : 바다에서는 설사 패했다 하더라도 도망쳐 살아 나오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하옵니다. 좁은 목에서 머물고 있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황급히 상륙한 것이므로 아마도 전군이 다 없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선조 : (바다 지도를 꺼내 이항복에게 보이며) 물러나올 때에 미처 견내량까지는 오지 못하고 고성 땅에서 적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패한 것인가? 저리로 갔다면 한산으로 빠져 나가기가 쉬웠을 텐데 이리 오다가 그렇게 패했다는 것인가?

 

왜군들은 각본에 의한 준비된 기습전을 감행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원균의 본 함대가 한산도로 되돌아갈 길목을 차단했고, 그 때문에 원균은 불가피하게 적진포 쪽 춘원포에 상륙했던 것이다. 그러나 배설은 야습을 우려해서 달아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왜선단의 접근을 확인하자 곧바로 한산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 《선조실록》 ※
이항복 : 그러하옵니다.

유성룡 : 만일 한산을 잃어버린다면, 남해는 본래 중요한 길목인데, 그곳을 그만 적이 점령하고 만 것입니다.

선조 : 그럼 영의정(유성룡)은 남해를 걱정하는 것인가?

유성룡 : 어찌 남해만을 걱정하는 것이겠습니까.

선조 : 이게 어찌 사람의 계책이 잘못되어서 그리 되었겠는가. 천명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김명원 : 만일 장수를 파견한다면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습니까?

이항복 : 오늘 할 일은 오직 여기(통제사 임명)에 있사옵니다.

선조 : 원균도 처음에는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더군! 남이공의 말을 들으니, 배설도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던데. 아닌 게 아니라 무슨 일이든 그때의 정세를 살펴보고 나서 해야 하는 법이다. 또 요해지를 든든히 지키고 있는 것이 제일인데도 도원수(권율)가 원균을 독촉해서 이렇게 되었다!

 

권율이 원균을 독촉한 것은 선조의 어명 때문이었고, 이 같은 선조의 어명은 평소 원균을 비롯한 윤두수, 김응남 등이 부산 쪽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맞장구를 쳐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부산 진출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자 선조는 슬며시 발을 빼면서 갑자기 책임을 권율에게 돌리고 있다.

선조는 성품이 포악하거나 잔인한 임금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쟁의 시대에 40년간 보위를 지켰기에 정치적 책임 회피나 붕당들을 견제하고 제어하는 데에는 천재적일 만큼 노련했다.

 

※ 《선조실록》 ※
이항복 : 적이 만약 광양과 순천으로 향하게 된다면 양원 혼자서 수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성룡 : 명나라 군사도 이제는 믿고 의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배들을 거두어 강화 등지를 수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차츰 살펴보겠지만 ‘강화도 수비론’ 은 곧 ‘울돌목 수비론’ 이다.

 

※ 《선조실록》 ※
윤두수(판중추부사) : 비록 남은 배가 있다손 치더라도 군졸을 얻기 어려울 테니 일단 통제사는 임명하지 말고 각 도 수령들에게 명령해서 그 고을 군사들을 거두어 모아 각자 제 고장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니시를 중심으로 하는 6만군과 가토를 중심으로 하는 6만군이 집단적으로 몰려올 것이므로 제고장 지키기로 대응한다면 개전 초처럼 360여 고을들이 도미노로 무너질 것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런데도 선조가 제갈량처럼 믿고 있던 윤두수의 군사 작전 수준은 이렇게 어설프기 그지 없었다. 아니, 윤두수는 자신들이 공모하여 원균을 통제사로 앉힌 과오를 은폐하기 위해서도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앉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선조실록》 ※
유성룡 : 혹시 명나라의 산동 수군이 나온다 하더라도,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 반드시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당시 함대의 겨울 출동은 흔치 않은 경우였다. 진린 도독의 함대가 조선으로 온 것도 이듬해 여름(1598년 7월)이었다.

 

※ 《선조실록》 ※
선조 : 명나라 군사가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적들이 어찌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만 나오면 왜적은 물러갈 거라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자, 한가한 이야기나 하고 있어봐야 성패에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어서 대신들은 먼저 도독과 안찰사에게 가서 보고하고 또 한편으로 수군을 수습하도록 하라. 이것 말고는 다른 좋은 방책이 없다. 내 말이 너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명나라 장수들이 전에 늘 우리 수군을 신뢰한다고 했는데 이제 이 꼴을 보고 혹시 물러갈 염려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수군이 없으면 제해권을 빼앗기게 되고, 한반도의 수은이 모두 막히게 되어 나라의 존립 자체도 어려워진다. 그렇게 되면 명나라 군대가 오더라도 별 도움이 안 된다.

 

※ 《선조실록》 ※
이항복 : 그러나 (명나라 군대는) 반드시 경솔하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조 : 한산도는 적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는 수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라우도로 물러나서 수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해를 지키려면 한산도와 진주성을 지켜내야 했다. 그러나 이들 방어선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 《선조실록》 ※
선조 : 글쎄,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제 만일 수군이 모두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남쪽 인심은 모두 놀라서 다시 대혼란에 빠져들 텐데, 어쩔 수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래, 어찌 죽기를 기다리고 약도 한 번 안 써 볼 수 있겠는가? 그저 답답하다는 말만 하고 앉아 있으면 적이 저절로 물러가 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유성룡 : 혹시 남해와 진도를 수비하다가 정 안 되면 그 다음에는 근거를 아무데나 두어도 좋을 것이옵니다.

 

유성룡도 울돌목을 막아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 징비록으로 보는 칠천량의 참극

※ 《징비록》 ※
이때 왜적이 다시 쳐들어 왔는데, 적장 평행장은 요시라를 파견하여 김응서를 속여 말하기를 “우리나라 배가 아무 날에는 꼭 더 들어올 것이니 조선 수군은 중간쯤에서 맞아 쳐부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도원수 권율은 이 말을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으며, 또 이순이 미뭇거리다가 죄를 받았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원균에게 빨리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치라고 재촉하였다.

 

요시라와 김응서의 관계는 ‘고니시-요시라-김응서-선조’ 간의 비밀교섭 통로의 중간고리였으며, 선조는 고니시를 조선을 도와주는 은인으로 확신했다. 때문에 고니시와 요시라에게 벼슬을 내리는 한편 이순신을 실각시켰던 것이다.

이순신이 파직되자 고니시는 가토 기요마사라는 미끼를 이용하여 ‘사냥개들의 곰 몰이 작전’ 으로 조선 함대마저 끝장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원수 권율은 그 말을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고 하였는데, 권율은 선조의 어명을 실천했을 뿐이다.

 

※ 《징비록》 ※
원균 또한 “이순신이 왜적을 보고도 나아가 치지 않았다” 고 하면서 이순신을 모함하여 자기가 그 자리에 대신 임명되었기 때문에, 이때 이르러 비록 그 형세가 어려운 줄 알았지만 거절할 도리가 없어서 전함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울 수밖에 없었다.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해서 3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올랐지만, 결국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되고 말았다. 원균도 그것을 깨닫고 참회했을까?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이 절영도 앞바다에서 곤욕을 치른 7월 7일, 이순신은 ‘꿈에 원공과 만났다. 내가 원공의 윗자리에 앉아 밥상을 받는데, 원공이 기쁜 기색을 띄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라는 내용이 있다.

 

※ 《징비록》 ※
우리 배들이 출전하자 언덕 위의 왜적의 진영에서는 우리측 움직임을 살펴보고는 서로 전하여 알리었다. 원균이 절영도에 이르자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세게 일었다. 날은 벌써 저물기 시작했는데 배가 머물러 정박할 곳이 없었다.

그때 왜적의 배가 바다 가운데 출몰하는 것이 보이자 원균은 군사들에게 앞으로 나아가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배 안의 군사들은 한산도로부터 종일토록 노를 저어 오느라 쉬지도 못했는데다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배들은 풍랑에 밀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서 대열을 정비할 수가 없었다. 왜적들은 우리 군사를 지치게 만들기 위해 우리 배에 가까이 다가왔다가는 멀리 달아나기를 반복하면서 싸우지도 않았다.

밤은 깊어지고 바람은 점점 더 세게 불어 우리 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표류하기 시작하였다. 원균은 간신히 남은 배를 수습하여 거느리고 가덕도로 돌아왔다. 섬에 닿자 군사들은 너무나 목이 말라서 다투어 배에서 내려 물을 찾았다. 그 순간 왜적들이 섬에서 뛰쳐나와 덮쳤으므로 결국 우리 군사 4백여 명을 잃고 원균은 다시 물러나와 거제의 칠천도에 이르렀다.

 

설욕의 날만을 기다려 온 왜군 함대 수뇌진은 본격적으로 ‘곰 사냥’ 을 시작했다.

 

※ 《징비록》 ※
그날 밤 왜적의 배가 기습하여 우리 진영은 크게 무너졌다. 원균은 도망하여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몸이 비대하여 소나무 밑에 주저앉고 말았는데 좌우 사람들은 다 흩어져 버렸다. 어떤 사람은 그가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다고도 하는데, 사실은 알 수가 없다.

이억기는 배 위에서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에 앞서 배설은 원균에게 여러 번 권고하였다.

“이러다가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그날도 배설은 이렇게 간하였다.

“칠천도는 물이 얕고 좁아 배를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진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원균은 듣지 않았다. 배설은 자기 수하의 배들만 이끌고 지키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 오자 달아났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산도에 도착한 그는 무기와 양곡, 건물 등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남아 있는 백성과 함께 피해 달아났다.

한산도가 격파되자 왜적들은 승리한 기세로 서쪽을 향해 쳐들어가니 남해, 순천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왜적들은 두치진에 이른 다음 육지로 올라가 남원을 포위했다. 이렇게 되자 호남 · 호서 지방이 모두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왜적들이 임진년에 우리나라 땅에 쳐들어온 이래 오직 수군에게만 패하였는데, 이를 분하게 여긴 평수길(히데요시)은 소서행장에게 어떻게 해서든 조선의 수군을 반드시 쳐부수라고 명령하였다. 정면으로 붙어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소서행장은 계략을 꾸몄는데, 거짓 정성을 바쳐서 김응서에게 호감을 사는 한편으로 이순신이 모함에 빠지도록 술수를 부렸고, 그런 후에 원균을 바다 한가운데로 유인해 내어 습격한 것이다. 그의 간교한 계략에 모두 떨어져 큰 피해를 입었으니, 아, 얼마나 슬픈 일인가!

 

‘소서행장은 거짓 정성을 바쳐서…’ 라고 하였는데, 거짓 정보와 뇌물작전을 말한다. 예로부터 일본인들은 선물을 받으면 답례하는 것을 소중한 미덕으로 여겼다. 선조는 비밀 교섭 창구를 통해 요시라에게 벼슬을 내리고 선물을 보냈다. 고니시 역시 답례로 조선 측에 선물을 보냈으며 그 선물은 점차 뇌물성으로 변질되어 갔다. 김응서 주변이나 선전관들 중에는 이러한 뇌물에 매수된 인물들이 많았을 것이다.

오사카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고니시는 교역과 거래에 밝았고 이러한 성장 배경은 그로 하여금 명 · 왜 간의 강화교섭 및 조선과의 비밀 교섭을 주도하게 하는 밑천이 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중요고비 마다 ‘뇌물작전’ 이라는 카드를 통해 위기를 돌파할 수 있게 한 지략의 원천이기도 했다.

제2차 평양성전투 때 명군에게 평양성을 내주는 조건으로 추격당하지 않고 퇴각할 수 있었던 것이나, 한성을 비워주는 조건으로 추격당하지 않고 남으로 퇴각할 수 있었던 것도 일종의 뇌물작전의 성과였다. 1598년, 명나라 유정으로부터 순천 왜교성을 빠져나와 본국으로 가는 퇴로를 보장받은 것도 뇌물작전의 결실이었다. 당시 고니시는 진린과 이순신에게도 뇌물을 주었지만, 이순신으로부터는 툇자를 맞은 바 있다.

 

※ 《이충무공행록》 ※
행장이 공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총과 칼 등을 선물로 가지고 와서 간청하자, 공은 곧 물리치며 “임진년 이래로 적을 무수히 사로잡아서 얻은 총과 칼이 산처럼 쌓였는데 원수의 심부름꾼 놈이 여기는 무엇하러 왔단 말이냐!” 라고 하였더니, 적이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

 

아무튼 선조의 실각에서 보면 칠천량해전은 ‘어명으로 치른 해전’ 이었고, 고니시의 시각에서 보면 ‘모략과 뇌물로 치른 전쟁’ 이었으며, 권율의 시각에서 보면 (어명에 따라) ‘곤장으로 치른 해전’ 이었다. 또 원균의 시각에서 보면 ‘자포자기로 치른 해전’ 이었다. 그리고 원균을 두둔한 대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쟁의 제물 삼아 치른 해전’ 이었다.

 

● 이순신의 복귀

※ 《난중일기》 1597년 8월 ※
1일. 큰비가 와서 물이 불어 넘쳤다. 이 찰방(이시경)이 찾아와 만났다.

2일. 잠깐 개었다. 혼자 수루에 앉아 있으니 회포가 이루 말할 수 없고, 비통한 마음 걷잡을 수 없다. 이날 밤 꿈에 왕명(王命)을 받게 될 조짐이 보였다.

3일.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교서와 유서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것은 곧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은 칠천량에서 살아 돌아온 군사들과 전선의 행방을 탐문하고 다닐 때였다. 그러던 중에 노량에서 도망쳐온 12척의 전선이 있음을 확인하자 그때까지 구상하고 있던 작전 개념을 ‘진주성 수비’ 에서 ‘울돌목(명량해협) 막아서기’ 로 바꾸게 된다.

그러나 더 많은 전선과 군사가 필요했으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예전 통제사의 지휘권이 절실했다. 이순신의 이 같은 소망이 하늘에 통했는지, 3도수군통제사로의 복직을 계시하는 꿈을 꾸었고, 다음날 통제사에 재임명한다는 임금의 교지가 내려왔다.

 

※ 《3도수군통제사 임명 교서》 1597년 7월 23일 ※
왕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아!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保障)으로 생각해 온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화(禍)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고 다시 흉한 칼날이 번뜩이게 함으로써 마침내 우리 대군(大軍)이 한 차례의 싸움에서 모두 다 없어졌으니, 이후 바닷가 여러 고을들을 그 누가 막아낼 수 있겠는가. 한산을 이미 잃어버렸으니 적들이 무엇을 꺼려하겠는가.

초미(焦眉)의 위급함이 조석(朝夕)으로 닥쳐온 상황에서, 지금 당장 세워야 할 대책은 흩어져 도망간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배들을 거두어 모아 급히 요해처에 튼튼한 큰 진영을 세우는 길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망갔던 무리들이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한창 덤벼들던 적들 또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위엄과 은혜와 지혜와 재능에 있어서 평소 안팎으로 존경을 받던 이가 아니고는 이런 막중한 임무를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생각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水使)로 임명되던 그날부터 크게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의 큰 승첩이 있은 후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 왔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이고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나의 모책(謀策)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오늘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이제 특히 그대를 상복 중에 기용하고 또 그대를 백의(白衣) 가운데서 뽑아내어 다시 옛날같이 충청 · 전라 · 경상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바이니, 그대는 부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져 주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내어 단결시켜 수군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형세를 장악하여 군대의 위풍을 다시 한 번 떨치게 한다면 이미 흩어졌던 민심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며, 적들 또한 우리 편이 방비하고 있음을 듣고 감히 방자하게 두 번 다시 들고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수사 이하 모두 다 그대가 지휘하고 통제하되 만약 일에 임하여 규율을 어기는 자가 있거든 누구든 군법대로 처단하도록 하라. 그대가 나라를 위해 자기 몸을 잊고 기회를 보아 나아가고 물러남은 이미 그대의 능력을 다 시험해 보아서 알고 있는 바이니, 내 어찌 감히 많은 말을 보태겠는가.

아! 저 육항(중국 삼국시대의 오나라 장수)이 국경의 강 언덕 고을을 두 번째 맡아서 변방의 군사 임무를 완수했으며, 저 왕손(명나라 때의 관리. 성품이 곧아 남의 모함에 빠져 귀양 갔다가 다시 풀려나 복직되었음)이 죄인의 몸으로 적을 소탕한 공로를 세웠던 것처럼, 그대는 충의(忠義)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나라를 다시 구해주길 바라는 나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바라면서, 이에 교서를 내리는 것이니 생각하여 잘 알지어다.

 

내용에서 보듯이, 선조는 많이 뉘우치고 있었다. 이에 원균을 두둔하던 대신들을 멀리했고 김응서를 백의종군하게 하였다. 또한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 등 중도적이고 실용실학적인 인재들을 중용하면서 수군의 작전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고 모두 이순신에게 일임했다.

자신의 작전 관여가 칠천량 패전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고, 나라와 백성을 또 다시 고통의 전란으로 몰아넣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교서와 유서를 받은 즉시 답서를 썼다. 그리고 ‘그대는 부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져 주고… 수군의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요해지를 지켜… 힘쓸지어다’ 라고 명한 선조의 어명을 따라 모병과 군수물자 조달 등 본격적인 방비태세에 들어갔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3일 ※
교서와 유서에 숙배를 올린 후 서장(書狀)을 받았다는 회답 장계를 써서 봉해 올리고, 그날로 출발하여 곧장 두치를 경유하는 길에 올랐다. 초저녁에 행보역(하동군 횡천면 여의리)에 이르러 말을 쉬고, 자정이 넘어서 다시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밝으려 하였다. 남해 현령(박대남)은 길을 잃어 강정으로 잘못 들어갔으므로, 말에서 내려 불러오게 하였다.

쌍계동(하동군 화개면 탑리)에 이르니 삐죽삐죽한 돌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데 새로 내린 비로 물이 불어 있었다. 간신히 건너서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연곡)에 이르니 이원춘과 유해수가 복병하고 있다가 나를 만나보고는 적을 토벌할 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저물어 구례현에 이르니 경내 전체가 적막하였다. 성문 밖의 전날 묵었던 집에 가서 잤는데, 그 집 주인은 벌써 산속으로 피난을 갔다고 하였다. 곧 손인필이 찾아왔는데 곡식까지 지고 왔고, 손응남은 일찍 익은 감을 가져와서 바쳤다.

 

교서와 유서를 받은 즉시 답서를 봉해 올렸다. 그리고는 바로 출발했다. 이순신은 이날 초저녁에 행보역에 도착해서 말을 쉬게 하고→자정이 넘어서 출발→섬진강을 건너, →두치에 이르니 날이 밝았다. 즉, 밤새 강행군을 한 것인데 선조의 교유서에 따라 어명을 실천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 와중에 남해 현령 박대남은 길을 잘못 든 탓에 헤매기도 했다. 비로 인해 물이 불어난 쌍계동 개천을 건너, 저녁 무렵 구례에 도착하니 이미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다 피난을 가서 마을이 텅 비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군사들을 모으고 왜적의 침략에 대비할지 이순신으로서는 답답하고 한심스러웠다. 이 무렵 왜군들은 이순신과 2~3일 거리 뒤에서 서진(西進)해 오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4일 ※
압록강원(곡성군 죽곡면 압록리)에 이르러 점심밥을 짓고 말의 병을 돌보았다. 고산 현감 최진강이 모집한 군사들을 넘겨주기 위해 왔다가 수군에 관한 일을 많이 말했다. 정오에 곡성에 이르니 관아와 여염집들이 모두 텅 비어 있었다. 그 고을에서 잤다. 남해(박대남)는 남원으로 직행하였다.

 

말이 병이 날 정도로 강행군을 하고 있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5일 ※
맑다. 옥과(곡성군 옥과면)에 이르니 피난 가는 사람들로 길이 가득 메워졌다. 말에서 내려 타이르고 고을로 들어갈 때 이기남 부자를 만났다. 고을에 이르니 정사준과 정사립이 마중을 나왔다. 옥과 현감(홍요좌)이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는데, 잡아내서 처벌하려고 하자 찾아왔다.

 

조선 함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혼비백산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민들 속에는 올망졸망한 어린 자식들과 노부모들도 섞여 있었다. 과연 어디로 가서 무엇을 먹고 살 것인지, 곧 겨울이 닥쳐오는데 가을걷이는 또 어떻게 할지… 피난 떠나는 백성들이나 이를 바라보는 이순신이나 다 마찬가지로 두렵고 막막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은 진주성에서의 패전을 설욕한다면서 조선 백성 8만여 명을 죽였다. 그리고 그간 전라도를 향해 이를 갈아 왔는데 그 보복성 작전이 조선 백성들에게 자행된 무차별적인 ‘코 베기’ 였다.

전란이 터지자 전라도 백성들은 남편과 자식을 군대에 보냈고, 자신들은 굶으면서까지 군량미를 보내면서 선전을 기원했다. 그러나 남편과 자식은 수중고혼이 되었고, 이제 그 가족들은 ‘코 베기 군대’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6일 ※
맑다. 이날은 옥과에서 머물렀다. 초저녁에 송대립 등이 적의 움직임을 정탐하고 왔다.

 

송대립이 3일 거리를 두고 뒤쫓아 오고 있는 왜군들을 정탐하고 왔다. 왜군들은 이순신의 통제사 복권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7일 ※
맑다. 일찍 떠나 바로 순천으로 갔다. 길에서 선전관 원집을 만나 임금의 분부를 받았다. 병사(이복남) 휘하의 군사들이 모두 패하여 돌아가는데 그 행렬이 길 위에 연달아 있었으므로 말 3필과 활과 화살 약간을 빼앗아 왔다. 곡성의 강정(석곡면 유향리)에서 잤다.

 

‘모두 패하여 돌아가는데’ 라고 했지만, 이는 어떤 전투에서 패한 것이 아니라 산성과 산골 소로를 지키던 부대들이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이순신이 복직되어 호남의 여러 고을들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다닐 무렵, 왜군들은 노령산맥을 넘어 전라도 해안과 도서 지역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기타노 쓰기오가 쓴 《이순신과 히데요시》에서 인용한 것이다.

 

※ 《이순신과 히데요시》 ※
이 무렵 일본 육군은 두 가지 작전계획에 따라 행동 중이었다. 그 한 가지는 모리 히데모토를 우군 총대장으로 삼은 가토 군 · 구로다 군 · 아사노 군 5만에게는 전라도 수도인 전주를 공략케 하고, 또 한 가지는 우키타 히데이에를 좌군 총대장으로 한 고니시 군 · 시마즈 군 · 하치스카 군 5만여 명은 남원성을 함락케 했다. 전주 · 남원 모두 북진을 위한 최대 관문이 되는 전라도 호남지방의 요소였다.

8월 12일, 육상의 고니시 군은 남원성에 접근했다. 성내에는 조선왕조의 애끓는 호소로 응원 나온 명나라 장수 총병 양원이 명나라 군사 3천여 명과 약간의 조선군과 함께 농성하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8일 ※
새벽에 떠나 부유창(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서 아침을 먹었는데 병사 이복남이 명령하여 불을 질렀기 때문에 다만 재만 남아 있어 보기가 참담했다. 광양 현감 구덕령, 나주 판관 원종의 등이 부유창 아래에 있다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급히 구치로 달아났다. 이에 곧 전령을 내렸더니 일제히 와서 보므로 나는 도피한 것을 꾸짖었다. 그들은 죄를 모두 병사 이복남에게로 돌렸다.

 

이복남은 며칠 후 남원성에서 우키타와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다.

 

※ 《난중일기》 ※
곧장 길을 떠나 순천에 이르니 성 안팎에 인적이 드물었다. 종혜희가 찾아와서 인사를 하므로 의병장 임명장을 주었다. 관사와 곳간의 곡식과 군기 등이 그대로 있었으나 병사는 그것들을 처치하지도 않고 달아났으니 탄식할 노릇이다. 총통 같은 것을 옮겨서 땅에 묻어 감추고, 장편전은 군관들이 나누어 가지고 순천에서 잤다.

 

화약무기 등을 후방이나 산성으로 옮기지도 않고 달아난 것을 개탄했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9일 ※
맑다. 일찍 떠나 낙안(승주군 낙안면)에 이르니 많은 사람들이 5리나 나와서 환영해 주었다. 도망가고 흩어진 까닭을 물으니 모두들 하는 말이 “병사(兵使)가 적이 가까이까지 왔다고 겁을 먹고는 창고에 불을 지르고 물러갔기 때문에 인민들도 흩어져 도망갔던 것” 이라고 하였다.

군(郡)에 이르니 관사와 창고의 곡식들이 모두 다 불타버렸다. 관리와 촌민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와서 보았다. 오후에 길을 떠나 십리쯤 오니 늙은이들이 길 가에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바쳤는데, 받지 않자 울면서 억지로 권하였다.

저녁에 보성의 조양창(오성면 오성리)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나 창고의 곡식은 봉해진 채 그대로 있었다. 군관 4명을 시켜서 지키게 하고 나는 김안도의 집에서 잤는데, 그 집 주인은 벌써 피난을 가고 없었다. 순천부사 우치적과 김제 군수 고봉상이 찾아와서 인사를 하였다.

 

이복남은 청야 작전의 일환으로 관사와 곳간을 불태웠고, 백성들에게는 피난을 떠나게 했으며, 자신은 남원성에 들어가 전사했다. 이순신이 지적한 내용을 보면, 이복남은 지휘관으로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기에 이순신의 전란 수습을 어렵게 만들었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
10일.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그대로 김안도의 집에서 머물렀다. 동지 배흥립도 같이 머물렀다.

11일. 아침에 양산원의 집으로 옮겼다. 이 집 주인은 벌써 곡식을 배에 가득 싣고 바다로 피난갔다고 하였다. 송희립과 최대성이 찾아왔다.

12일. 맑다. 장계 초고를 쓰며 그대로 유숙했다. 거제 현령(안위)과 발포 만호(소계남)이 들어와서 명령을 들었다. 그 편에 배설이 겁을 먹고 벌벌 떨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괘씸하고 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였다.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하여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에까지 승진하면 군사를 크게 그르치게 된다. 조정에서 반성함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배설의 자질을 개탄했다. 아울러 배설 같은 위인을 경상수사로 임명한 조정의 부적절한 인사발령에도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13일 ※
맑다. 거제와 발포 등은 돌아가고 우후 이몽구는 전령을 받고 들어왔는데, 본영의 군기들을 하나도 옮겨 싣지 않은 일로 곤장 80대를 때려 보냈다. 하동 현감 신진이 와서 전하기를, 8월 3일 내가 떠난 뒤에 진주 정개 산성과 벽견 산성의 군대가 해산하여 저절로 무너졌다고 한다. 통탄할 일이다.

 

이몽구가 여수 본영에서 피난해 나오면서 병장기를 챙기지 않았기 때문에 곤장 80대라는 중벌을 내렸다. 이복남도 순천 지역의 무기들을 버려두고 피난을 갔지만 그는 이순신의 옛 부하가 아니었기에 개탄만 했었다. 그러나 이몽구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여수 본영의 우후로서 이순신을 보필해 온 측근이었다. 그런 그가 본영의 군기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몸만 빠져 나왔으니 이순신으로서는 중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14일 ※
아침에 여러 가지 문서를 7가지나 봉하여 윤선각을 시켜서 받들고 가게 하였다. 오후에 어사 임몽정을 만나러 보성에 갔다가 열선루에서 잤다. 이날 큰비가 내렸다.

 

이 무렵, 왜군들은 섬진강을 타고 구례→남원으로 북상하고 있었고 이순신은 왜군들의 추격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이동했다. 보성 고을에는 며칠간이었지만 왜군들의 진입이 늦어지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7년 8월 15일 ※
비. 늦게 개었다. 열선루에 나와 앉았다. 선전관 박천봉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그것은 8월 7일에 발행한 것이었다. 곧 받았다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보성의 군기를 검열한 후 말 4마리에 나눠 실었다. 술을 많이 마셔서 잠들지 못했다.

 

열선루(보성 관아에 있던 누각)에 앉아 그 유명한 ‘한산도가(閑山島歌)’ 를 지어 읊은 날이다.

한산도의 원래 한자면은 ‘한가(閑暇)하다’ 는 뜻의 ‘閑’ 자로 쓴다. 이순신은 한산도가의 제목은 이 ‘閑’ 자로 그대로 하고, ‘한산도월명(閑山島月明)’ 으로 시작되는 시조의 서두는 춥다, 쓸쓸하다는 뜻의 ‘寒’ 자로 썼다.

왜 그랬을까?

閑山島月明夜
上戍樓撫大刀
深愁時何處
一聲羌笛更添愁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어루만지며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소리, 이내 시름을 더하네

시조를 쓴 날은 음력 8월 추석날이었다.

당시 이순신을 따르는 군사들의 수는 약 2백 명 정도였다.

통제사에 복권되었지만 군사 모집을 위해 고을들을 둘러보니 관아와 민가는 폐허가 되어 텅 비어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보성 관아의 군기를 모아서 말에 싣게 했는데, 곧 들이닥칠 12만의 왜군에 비해 너무도 초라했기에 ‘寒’ 자로 표현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