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강화 결렬과 정유재란 발발

구름위 2013. 6. 20.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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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에 겁박당하고 일본에 손발을 묶이다

 

 

명의 신종황제(神宗皇帝)가 내린 책봉문(冊封文). 1596년 9월, 명 황제는 책봉사 양방형을 보내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했다. 황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강자로 떠오른 뒤 중국을 사모하여 내부(來附)했기 때문에 특별히 일본 국왕으로 삼는다’며 ‘향후 중국의 울타리이자 신료로서 충성의 마음을 변치 말라’고 유시했다. 국립진주박물관 ‘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에서 전재

 

1594년(선조 27) 2월, 북경에 머물고 있던 조선 사신 김수일행은 명의 예부낭중(禮部郎中) 하교원(何喬遠)을 만난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조선의 현실을 털어놓았다. “이여송 등이 강화 협상에 집착하여 조선을 억누르고 일본군이 날뛰도록 방임하는 바람에 진주성에서 6만명의 관민이 도륙되었다”고 폭로했다. 명군 지휘부가 조선의 의사는 무시한 채 협상에 매달리며 조선군이 독자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까지 막고 있던 상황에서 조선이 처한 ‘참상’을 명 조정에 알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김수 일행의 눈물 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명의 병부상서 석성(石星) 등은 강화에 대한 집착을 끝내 멈추지 않았다. 석성은 강화의 성공 여부에 자신의 정치생명까지 걸고 있었다.


황제를 속인 석성 “조선도 강화를 원한다”


석성과 송응창(宋應昌) 등 명군 지휘부가 강화 협상을 벌이며 기만적인 자세를 보였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했다. 그들은 ‘명의 황녀를 천황의 후궁으로 달라’, ‘조선 팔도 가운데 사도를 떼어 달라’ 등 일본 쪽의 핵심적인 요구 사항은 황제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해 주기만 하면 강화는 성공하고 일본군은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이라고 얼버무렸다. 그러면서 가짜 사절을 왕래시키면서까지 협상을 매듭지어 하루라도 빨리 ‘조선 문제’를 털어버리려 시도했다.

 

그런데 당시 명 조정에는 강화의 실효성이나 성공 가능성을 의심하는 신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의 본심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협상은 위험하다”거나 “히데요시를 책봉해 줄 경우 무역도 허용해야 하므로 명의 경제적 부담이 커지고 강남 지방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며 강화에 반대했다. 특히 병과급사중(兵科給事中) 장보지(張輔之)와 오문재(吳文梓), 호과급사중 왕덕완(王德完) 등은 석성 등이 협상에 급급하여 간사한 심유경에게 속고 있다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강화에 반대하는 신료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석성 등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꼼수’를 부린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조선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1594년 송응창의 후임으로 경략(經略)에 임명된 고양겸(顧養謙)은 송응창보다 더 철저한 협상론자였다. 그는 ‘조선도 명군 지휘부와 마찬가지로 강화를 원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황제에게 주문(奏文)을 올리라고 강요했다. 전쟁의 당사자이자 피해자인 조선도 일본과의 강화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처럼 꾸며 명 조정의 강화 반대론을 잠재우기 위한 술수였다. 고양겸은 조선이 요구를 거부할 경우, 명군을 모두 명 내지로 철수시키고 다시는 조선을 원조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애초부터 강화 협상에 부정적이었던 선조와 조선 조정은 격앙될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일본과의 강화를 황제께 요청할 수는 없다”고 반발하며 국왕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고양겸이 계속 압박해 오자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독자적으로 일본군을 몰아낼 만한 군사적 역량이 없는 상황에서 고양겸이 명군을 압록강 너머로 철수시킨다면 어찌할 것인가? 조선은 결국 고양겸의 강압에 굴복하고 만다.

 

1594년 9월, 조선은 강요에 떠밀려 황제에게 주문을 올렸다. ‘왜를 책봉하여 전쟁을 멈추게 함으로써 조선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상주문(上奏文)이 명 조정에 도착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황제는 당장 석성과 고양겸 등 강화론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석성을 격렬하게 비난한 바 있던 형부주사(刑部主事) 곽실(郭實)을 파직시키고 그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는 초강수까지 빼들었다.

 
오늘날 오사카성의 천수각.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에서 명 황제의 책봉을 받으면서 공순하게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는 4년간의 협상에서 책봉문서 한 장밖에는 얻어낸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다시 조선 침략에 나선다.

 

명나라 심유경의 표첩과 이종성의 탈주


조선의 상주문이 도착한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가 파견했던 ‘가짜 사절’ 나이토 조안(-小西飛)은 명의 신료들 앞에서 “중국이 히데요시를 책봉해 주기만 하면 일본은 일절 다른 요구 없이 조선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강화의 성공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1595년 1월, 명 예부는 히데요시에게 관복(冠服), 인장(印章), 고명(誥命) 등을 하사하라고 황제에게 요청했다. 이어 직접 일본에 가서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의식을 주관할 사절단의 정사(正使)에 이종성(李宗城), 부사(副使)에 양방형(楊方亨)을 지명했다.

 

그런데 책봉사 일행의 부산 도착과 일본으로의 출항은 1년 이상 지체되었다. 부산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철수 문제 때문이었다. 명의 계요총독 손광(孫鑛)은 “조선 땅에서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한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사절단을 일본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본 쪽은 이종성 등의 이동 상황을 봐 가면서 찔끔찔끔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종성 등이 북경에 있을 때는 조선으로 들어올 것을, 서울에 도착한 뒤에는 부산으로 내려올 것을, 부산의 왜영(倭營)에 도착한 뒤에는 조선도 통신사를 뽑아 책봉사와 함께 도일(渡日)시킬 것을 요구했다. 조선이 황신(黃愼)을 통신사로 보내기로 하자 이번에는 웅천과 부산에서 개시(開市)하는 것을 새로운 조건으로 제시했다. 명과 일본이 이렇게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다.

 

석성 등 명군 지휘부는 혹시라도 일본이 변심할까봐 전전긍긍했다. 그 때문에 일본 쪽의 웬만한 요구는 다 들어주려고 했다. 그 와중에 조선 백성들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1596년 초 경상도 서부 지역을 순찰했던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당시 경상도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물을 긷거나 나무를 할 때 바짝 긴장해야만 했다. 조선 군민들이 우물 주변이나 산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을 습격하는 사건이 빈발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침략 때문에 처참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조선 군민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보복성 행동이었다. 일본군 지휘부는 불만을 터뜨리며 심유경에게 조선 군민들을 통제해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사실상 일본군의 ‘대변인’ 노릇을 하던 심유경은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는 물을 긷거나 나무하러 가는 일본군 병졸들에게 ‘표첩’(票帖)을 만들어 주었다. 일종의 ‘신표’이자 ‘통행 허가증’이었다. 그러면서 경상도 일원의 조선 관민들에게 “표첩을 소지한 일본군을 함부로 공격할 경우 엄벌에 처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애오라지 강화 협상에 목을 매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쪽을 달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자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원익의 보고서에는 “영산(靈山) 등 연해 지역에 머물고 있는 일본군들이 ‘심유경 표첩’을 소지한 채 조선의 여염집에 들어가 온종일 머물러 있어도 조선 관민들은 아무런 조처도 취할 수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명군이 ‘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했다고 믿었던 조선 백성들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었다.

 

1596년 4월, 책봉사절단의 정사 이종성이 부산의 왜영에서 도망치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히데요시를 책봉해 주기만 하면 협상이 매듭지어질 것’이라 믿었던 이종성은 왜영에 들어온 뒤에야 일본의 요구 조건이 훨씬 많고 심각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와중에 ‘히데요시가 책봉사를 억류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자 겁을 먹었던 것이다.


4년간의 협상 기간에 조선은 없었다


이종성의 탈주 소식을 접한 황제와 명 조정의 반대론자들은 경악했다. 그렇다고 강화의 파탄을 섣불리 선언할 수도 없었다. 당시 왜영에 들어간 사절단의 수행원이 500여명이나 되는 상황에서 파탄을 선언할 경우 그들 모두가 졸지에 일본군의 포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 조정은 고심 끝에 부사 양방형을 정사로 승진시켜 일본으로 파견한다. 조선 또한 황신이 이끄는 통신사 일행 309명을 일본으로 보낸다. 침략을 자행한 원수에게 사절을 보내는 것은 전혀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명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견했던 것이다.

 

1596년 9월2일,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의식이 치러졌다. 히데요시는 신종 황제의 칙서에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五拜三叩頭禮)를 행하고 만세까지 불렀다.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공순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곧 ‘현실’을 깨닫는다. ‘명나라의 황녀도 올 것이고, 조선이 사도를 떼어주고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이며, 무역도 허용할 것’이라고 믿었던 그는 달랑 ‘책봉 칙서’ 한 장밖에는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격노한다. 그는 조선이 왕자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명분으로 재침략을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명 조정의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종성의 탈주 소식이 알려진 무렵, 상황은 다시 반전되었다. 1596년 3월, 병과급사중 서성초(徐成楚)는 강화와 관련된 일본의 요구 조건이 다섯 가지였음에도 석성과 심유경이 그 사실을 숨겼다고 폭로했다. 그는 일본의 재침 가능성을 언급한 뒤 중국 연안의 방어 태세를 정비할 것과 중국의 안전을 위해 조선을 다시 원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몰락 위기에 처한 강화론자들의 마지막 몸부림도 심상치 않았다. 대학사(大學士) 조지고(趙志皐)는 강화 파탄의 책임을 조선에 전가했다. 그는 “일본군이 서울에서 물러나고, 사로잡은 임해군도 송환했는데 조선이 사은사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다”고 일본군을 두둔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조선에 할 만큼 했으니 조선이 사신을 보내 일본과의 감정을 풀어야 할 때’라며, 서성초의 강경론은 화를 키울 뿐이라고 비난했다.

 

1597년 1월 일본군이 재침하여 정유재란이 터진다. 다급해진 석성은 자신이 직접 조선에 들어가 조일 양국을 효유(曉諭)하여 전쟁을 끝내겠다고 황제에게 호소한다. 황제는 석성의 주청을 불허하고 곧이어 그를 해임한다.

 

 

 

 

 

4년이나 끌었던 강화협상 기간에 조선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명의 강화론자들은 일본을 달래기 위해 민족 감정을 무시한 채 조선을 겁박했고, 일본은 명측 강화론자들의 초조감을 활용하여 조선의 손발을 묶어 버리려고 기도했다. 조선은 그러한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였지만 급기야 다시 정유재란을 겪는다. 자위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갈등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는 오늘, 정유재란 무렵 조선이 겪어야 했던 비애를 돌아보는 심정은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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