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명군의 패악질과 민폐

구름위 2013. 6. 2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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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위신료들, 명군에게 곤장을 맞다

 

 

경남 창원시에 있는 웅천 왜성(왼쪽). 1593년 진주성 공격 이후 일본군은 웅천을 비롯한 남해안 각지에 성을 쌓고 장기주둔 태세에 들어갔다.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고 명군도 싸울 의지 없이 그저 주둔만 하던 이 시기가 조선 백성들에게는 최악의 시간이었다. 한명기 제공

 

“명군의 기예는 아군에게 미치지 못하는데 군량을 공급하는 어려움은 배나 됩니다. 만약 또다시 명군을 청하고 그에 맞춰 군량을 댄다면 우리나라 백성들은 모조리 아사하여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계사, 갑오년에 큰 흉년이 들지 않았음에도 백성들이 굶어죽어 열 명 가운데 서너 명도 남지 않은 것은 하늘이 이 숫자만 남기고 온 나라의 곡식을 전부 명군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때 명군에게 준 곡식을 아군에게 주었더라면 10만의 병력을 기를 수 있었을 것이며 지금과 같이 쇠약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명백한 증험이 되었는데 어찌 다시 똑같은 잘못을 허용할 수 있겠습니까?”

 

1597년 고상안(高尙顔)이 류성룡에게 올린 편지의 내용이다. 계사년(1593)과 갑오년(1594), 조선 조정이 명군에게 군량을 공급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수많은 조선 백성들이 굶어죽었다는 것, 명군에게 신경 쓰느라 조선군에 대한 급량이 상대적으로 소홀해져서 조선군의 전력은 더욱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는 통탄이었다.

 

“일본군에 항복하겠다”고 흘린 선조의 고육지책

 

‘진주성의 비극’을 겪은 이후에도 강화협상에 매달리던 명군 지휘부의 집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군이 부산과 웅천, 거제도 일대에 머물며 철수할 생각을 하지 않음에도 그들을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심유경이 주도하던 협상은 시간만 끌 뿐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593년 벽제전투 패전 직후 시작된 협상은 1596년까지 4년이나 이어졌다. ‘7년 전쟁’ 가운데 4년을 ‘협상’ 운운하면서 흘려보낸 셈이다. 명나라 신료 서광계(徐光啓)는 일찍이 이러한 임진왜란을 가리켜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非戰非和) 어정쩡한 전쟁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일본군은 물러가지 않고 명군은 그저 주둔만 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조선 조정의 고민은 깊어졌고,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가중되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은 하늘을 찔렀다. 무엇보다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온 직후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파헤쳤던 것은 선조와 조정 신료들을 경악시켰다. 조상의 무덤까지 건드린 그들은 이제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원수’(萬世不共之讐)였다. 그런데 명군 지휘부는 그 ‘만세불공지수’와 협상을 운운하며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협상에 방해가 된다며 조선군을 윽박질러 일본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하지만 선조와 신료들에게는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명군 지휘부를 찾아가 결전을 벌여 달라고 간청하고, 명 황제에게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고 머물고 있다’는 실상을 알리기 위해 사신을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선조는 심지어 신료들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군에게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슬쩍 내비치기도 했다. 항복해서 상황에 변화를 주면 일본군이 공세로 나설 것이고 그러면 명군 지휘부 또한 어쩔 수 없이 일본군과 결전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협상에서 소외된 채, 이렇다 할 ‘카드’도 없었던 약소국 군주가 생각해낸 고육지책인 셈이다.

 

명 조정에서도 강화협상을 놓고 논의가 분분했다. 협상에 찬성하는 신료나 반대하는 신료를 막론하고 공유하는 전제가 하나 있었다. 갈수록 늘어나는 전비(戰費)와 그 조달 과정에서 커지고 있던 명 백성들의 부담을 고려하여 더 이상 조선에 무조건 원조를 제공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양자 모두 명의 군사,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었다. 자연히 그 과정에서 조선 군신들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커지고 내정 간섭이 심화되었다.

 

1593년 1월, 명군의 군량 보급을 담당하고 있던 흠차경리(欽差經理) 애유신(艾維新)은 검찰사 김응남(金應南), 호조참판 민여경(閔汝慶), 의주부윤 황진(黃璡) 등 조선의 고위 신료들을 붙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명군은 조선을 위해 애쓰는데 조선 신료들은 군량 수송을 태만히 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방 백성들, 군량운반 고역에 진저리

 

국왕 선조가 겪어야 했던 수모 또한 만만치 않았다. 1593년 9월, 명의 병부 주사(主事) 증위방(曾偉邦)은 일본과의 강화에 반대하면서 조선을 다잡아 자강(自强)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황제에게 올렸다. 그는 조선이 본래 당 태종의 침략을 막아낼 정도로 만만찮은 나라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일본군의 침략에 맥없이 무너진 것은 군주가 시원찮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구체적으로는 선조가 ‘황음’(荒淫)하여 전쟁을 불렀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증위방은 일단 선조에게 각성하여 자강할 수 있는 기회를 주되, ‘개과천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경우 그를 왕위에서 쫓아내고 왕세자 광해군을 즉위시키자고 촉구했다. 명 조정에서 불거진 최초의 왕위 교체론이었다.

 

증위방의 상소가 있었던 직후 신종(神宗)은 조선에 보낸 칙서에서 선조에게 분발하여 나라를 되살리라고 촉구했다. 칙서의 내용은 선조에게 굴욕적인 것이었다. ‘선조가 안일에 빠져 소인배들을 믿어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국방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전쟁이 초래되었다고 했다.

 

신종이 1595년 3월에 보낸 칙서의 내용 또한 선조를 곤혹스럽게 했다. 황제는 광해군에게 전라도와 경상도로 내려가 명군에 대한 접반에 진력하라고 요구하면서 ‘부왕의 실패를 만회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라’고 훈시했다. 왕세자와 백관들을 거느리고 칙서를 맞이하기 위해 모화관(慕華館)으로 거둥했던 선조는 얼굴이 화끈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식과 신료들 앞에서 자신이 ‘실패한 군주’로 규정되는 장면을 목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선조(재위 1567~1608)의 필적(위).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여러 차례 정치적 수모를 겪어야 했다. 명 조정의 일부 신료들은 선조가 무능하여 전쟁이 초래되었다고 규정하고 그를 퇴위시키고 광해군을 대신 세우거나 조선을 직할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전재


명의 정치적 압박은 ‘왕위 교체’를 거론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았다. 조선을 아예 명의 직할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강화협상에 반대했던 계요총독(遼總督) 손광(孫鑛)은 1594년 명이 조선을 직접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이 망국의 위기로 내몰린 것은 선조를 비롯한 지배층의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명의 안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선을 원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무능한’ 조선 군신들을 방치할 경우,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바에야 과거 원이 고려에 두었던 정동행성(征東行省)과 같은 기구를 설치하고 명이 관원을 파견하여 조선 군신들을 감독하자고 주장했다. 조선에 대한 직할통치론(直轄統治論)이었다. 조선 신료들은 긴장했다. 류성룡은 원나라 간섭기 다루가치가 고려에 끼쳤던 극심한 폐해를 상기시키면서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명 내부에서는 이후에도 ‘조선을 직접 통치하여 명의 부담을 덜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흘러나와 조선을 긴장시켰다.

 

임진왜란 시기 명군이 조선 백성들에게 끼쳤던 민폐는 심각했다. 명군이 자행했던 민폐는 그 원인에 따라 대략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군기의 해이, 패전의 후유증 등 명군 자체의 문제점에서 비롯된 민폐이고 다른 하나는 명군에게 군량 등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민폐를 들 수 있다. 그런데 강화협상이 이어지면서 명군의 민폐는 특히 심각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싸울 의지는 없이 그저 주둔만 하는 상황에서 군기가 풀어지고, 조선에 대한 이런저런 요구가 격증했기 때문이다.

 

1593년 9월, 벽제전투 패전 이후 황해도로 물러났던 명군은 난병(亂兵)으로 돌변했다. 지방 수령의 목을 묶어 끌고 다니면서 이것저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요구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다고 돌과 몽둥이로 난타하여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었다.

 

강화협상 이후 명군이 삼남 지방에 주둔하게 되면서 민폐는 본격화되었다. 관아나 여염에 난입하여 약탈과 겁간을 자행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오희문(吳希文)의 <쇄미록>, 정경운(鄭慶雲)의 <고대일록>(孤臺日錄)에는 명군의 횡포 때문에 신음하던 삼남 지방의 참상이 잘 드러나 있다. ‘명군이 이동하는 길 주변의 주민들은 낮에는 숲속에 들어가 숨어 있다’거나 ‘약탈을 우려하여 곡물과 가재도구를 땅에 파묻고 있다’는 실정이었다.

 

명군에게 군량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 또한 심각했다. 왜란 초에는 명에서 실어온 군량을 남하하는 명군을 따라 운반하는 것이 커다란 고통이었다. 소나 말이 없던 지방 백성들은 남부여대(男負女戴)의 방식으로 군량을 운반할 수밖에 없었다. 고역에 진저리를 쳤던 백성들 가운데는 ‘군량 운반’ 소리를 들으면 도망쳐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

1593년 이후부터는 운량(運糧)의 어려움보다 명군에게 줄 양곡을 마련하는 과정의 고통이 더 커졌다. 명 조정이 ‘조선 스스로 군량을 마련하여 공급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괄속관(括粟官), 모속관(募粟官) 등의 직함을 가진 관원들이 촌가에 들이닥쳐 항아리에 담긴 소소한 곡물까지 다 훑어간다’는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명군 지휘부는 걸핏하면 ‘군량을 제때 주지 않으면 군대를 거두어 철수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때문에 군량 문제는 조선 군신들에게 거의 노이로제 수준의 부담이 되었다. 자연히 곡물을 모으기 위해 지방관과 백성들을 닦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조선군에 대한 급량이 소홀해지는 것은 물론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에 대한

 

 

 

 

 

구호를 방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송응창은 ‘조선에서 풀 한포기라도 건드리거나 부녀자를 범하는 자는 목을 벤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민폐는 근절되지 않았다. 일부 명군 지휘관들은 ‘대국의 군대가 조선을 돕기 위해 왔으니 약간의 민폐는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조선 조정의 민폐에 대한 자세 또한 미온적이었다. 명의 군사력에 의지하고 있는데다 그들 또한 명군 지휘부의 압박에 휘둘리는 상황에서 ‘민폐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명군 때문에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일상화되었다. 급기야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이라는 속언까지 유행하게 되었다. 명군을 ‘구원군’이자 ‘같은 편’이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들의 실망과 당혹감이 커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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