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벽제전투와 강화협상

구름위 2013. 6. 2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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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이여송의 바짓가랑이를 잡았으나…

 

 

명대 초기 명군 기마대의 모습. 명은 초기부터 몽골 등 북방 민족을 공격하거나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수많은 기마병을 유지했다. 벽제전투에 참전했던 이여송 휘하의 병력 또한 대부분 기마대였다. 이여송은 기마병만으로도 충분히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막상 벽제전투에서는 조총과 장검을 가진 일본군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97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발행, <중국강역의 변천>에서 전재

 

“생각건대 우리와 일본이 어찌 원수(怨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속국이 멸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특별히 여러 차례 군사들을 수고롭게 하여 두 도읍을 되찾아 조선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멸망해 가던 나라를 되살려 일으켜 줌으로써 의로운 이름이 사방에 떨쳤습니다. 우리가 조선을 위해 해준 것은 또한 충분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조선을 위해 다시 괴로운 전쟁을 벌여 이미 강화(講和)한 일본을 갑자기 자극하는 것은 제대로 된 계책이 아닙니다.”

 

1593년 6월, 명의 병과급사중(兵科給事中) 후경원(侯慶遠)이란 인물이 신종황제에게 올린 글이다. 당시는 명군이 벽제전투에서 패전한 직후로 전투를 계속 벌일지 아니면 강화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낼지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던 때였다. 후경원은 명군이 조선을 위해 이미 할 만큼 했다는 것, 명나라와 일본이 원수가 될 까닭이 없다는 것 등을 내세워 일본군과 더이상의 전투를 벌이지 말라고 촉구했다. 비록 ‘조선을 돕는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임진왜란 시기 명군의 태도는 전황에 따라, 그들의 국익과 전략에 따라 유동하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내용이다.


겨우 목숨 건진 이여송, 개성 쪽으로 퇴각

 

평양전투에서 승리하자 이여송의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 그는 도망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1월10일 개성에 진을 쳤다. 조선 조정은 류성룡을 이여송 진영에 보내 빨리 진격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여송은 26일에야 파주 부근까지 남하했다.

 

평양전투에서 패배한데다 조명연합군이 남하해 오자 서울의 일본군 지휘부는 바짝 긴장했다. 그들은 북쪽에서 도망쳐 온 병력과 서울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수습하여 싸움을 준비하는 한편, 도성 주변에서 대학살과 방화를 자행했다. 도성 백성들이 조명연합군에 내응할 것을 두려워하여 벌인 만행이었다.

 

1월26일 이여송 휘하의 사대수(査大受) 등은 파주의 고양(高陽) 근처에서 일본군과 조우하여 60여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린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일본군을 더욱 얕잡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1월27일 이여송은 대군을 뒤에 남겨 두고, 가정(家丁-사병과 유사한 친위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1000여 병력을 이끌고 혜음령(惠陰嶺)에서 벽제관(碧蹄館)으로 이어지는 방향으로 진격했다. 그런데 이여송은 혜음령을 지나다가 말이 거꾸러지면서 낙상을 당한다.

 

일본군은 벽제관 부근에 대병을 매복시킨 상태에서 명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군이 유인 작전에 말려 진격해 오자, 숨어 있던 일본군이 쏟아져 나오면서 난전이 벌어졌다. 당시 이여송은 남병의 화포와 화기수들을 대동하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군의 입장에서 포병이 없는 명군은 결코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명군은 신기전(神機箭)을 발사했지만 몰려드는 일본군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군은 조총뿐 아니라 장검으로 명군의 기마대를 유린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여송의 군사들은 짤막하고 무딘 칼만을 지녔는데, 일본군이 서너 자나 되는 예리한 장검을 휘두르니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져서 그 기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고 적었다. 이여송은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으나 가정 이유승(李有升)이 몸으로 막아 보호함으로써 겨우 목숨을 건졌다.

 

벽제전투의 결과는 참담했다. 명군은 120여명 정도의 일본군을 참수했지만, 희생자가 1500명이 넘었다. 장수들도 14명이나 전사했다. 일본 쪽에는 명군의 전사자를 1만여명이라고 적은 기록도 있다. 이여송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개성 방향으로 퇴각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제1군을 지휘하여 평양까지 북상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전투 패전 이후 남쪽으로 철수했다. 그는 벽제전투 이후 명의 심유경과 강화 협상을 벌여 일본군을 남쪽으로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 헤이세이(平成) 19년 야쓰시로시립박물관(八代市立博物館) 도록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서 전재


걷어차이고 무릎꿇림 당한 조선 신료의 굴욕

 

서울이 수복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조선 조정은 벽제전투 패전 소식에 아연실색했다. ‘명군이 곧 일본군을 나라 바깥으로 몰아낼 것’이라는 전망도 불투명해졌다. 조바심이 커진 조선 조정은 이여송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1월28일 도체찰사 류성룡은 우의정 유홍(兪泓),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함께 이여송의 진영으로 달려간다. 류성룡이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의 상사이니 병력을 수습해 속히 진격해 달라’고 간청하자 이여송은 손사래를 쳤다. ‘서울에 있는 일본군이 20만이 되니 중과부적이라 싸울 수 없다’며 진격 요청을 거부했다.

 

류성룡이 ‘일본군의 수를 너무 부풀렸다’고 반박하면서 전진해달라고 계속 요청하자 이여송 등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여송의 부하 장세작(張世爵)은 류성룡 일행에게 물러가라고 요구했다. 조선 신료들이 버티자 장세작은 순변사 이빈을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조선 조정이 이후에도 전진해 줄 것을 계속 촉구하자 이여송은 다른 ‘카드’를 뽑아 들었다. 명군 진영에 군량과 마초(馬草)의 공급이 늦어졌다는 이유를 들어 류성룡과 호조판서 이성중(李誠中), 경기감사 이정형(李廷馨) 등을 병영의 뜰에 무릎을 꿇렸다. 이어 큰 소리로 질타하며 군법을 집행하겠다고 겁박하자 류성룡 등은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자위 능력을 갖추지 못한 약소국의 재상이 겪어야 했던 치욕이자 서글픔이었다.

 

이여송은 뒤에 부하를 시켜 류성룡에게 유감을 표시했지만 끝내는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물러났다. 벽제전투 패전 이후 명군은 일본군과 싸움을 벌이겠다는 의지를 사실상 접었다. 송응창은 심유경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를 일본군 진영에 보내 강화 협상을 벌이려는 깜냥이었다.

 

명군 지휘부는 왜 결전 대신 협상으로 방향을 바꾸었을까? 우선 패전을 계기로 장졸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염전의식(厭戰意識)이 퍼져갔던 것을 들 수 있다. 평양전투 이후 보급과 신병 충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명군 가운데는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자들이 많았다. 당연히 전쟁을 빨리 끝내고 귀환하고자 하는 열망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또 명 조정은 전쟁이 예상보다 장기화되면서 전비(戰費) 부담이 늘어나고 있던 상황 때문에 고민했다. 명은 당시 조선 원정군의 전비를 주로 강남 지방에 대한 증세 조처를 통해 충당하고 있었다. 경제적 부담이 커진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자연히 명 조정에서는 “더이상 본토 빈민의 고혈을 뽑아 조선을 도울 수는 없다”는 목소리가 커져 가고 있었다.

 

명이 강화 협상의 방향으로 돌아선 데는 전략적인 고려 또한 크게 작용했다. 누차 언급했듯이 명군의 참전은 명 본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공세적인 방어’ 대책이었다. 그런데 이미 평양전투에서 승리하여 일본군을 파주 이남까지 몰아낸 것만으로도 그들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된 셈이었다. 실제로 벽제전투 패전 이후 명 조정에서는 “우리는 조선에 할 만큼 해 주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이제 “더이상 피를 흘리며 일본군과 싸워 명군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힘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벽제관의 과거 모습. 벽제관은 고양시 벽제역에 있던 객관(客館)이었다. 조선을 방문하는 중국 사신이 서울로 들어오기 직전 머물던 숙소이기도 했다. 1593년 1월, 벽제관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여송의 명군은 일본군에 참패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임진왜란의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전재


명군, 철수하는 일본군을 에스코트하다

 

심유경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벌여 잠정적인 휴전을 이끌어냈다. 일본군 또한 명의 협상 제안에 적극 호응했다. 일본군은 비록 벽제전투에서 크게 이겼지만 승리에 취해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의 상황 또한 심각했기 때문이다. 당장 군량과 탄약을 비롯한 보급 물자가 크게 부족했다. 서울 주변에 주둔한 병사들은 하루에 겨우 한번 죽으로 연명하는 처지였다. 그나마 죽 가운데는 풀잎이 둥둥 떠 있다고 하는 상황이었다. 1593년 3월3일, 서울 현지의 일본군 상황을 파악하려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비롯한 세 명의 봉행(奉行)이 나고야로부터 도착했다. 애초 그들은 전투를 독려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장졸들이 처한 처참한 상황을 목격하고는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당시 일본군의 전력은 크게 약화되어 전쟁을 계속 치를 형편이 되지 못했다. 구 일본군 참모본부(參謀本部)에서 발간한 <일본전사(日本戰史) 조선역(朝鮮役)>을 보면 당시 일본군의 병력 손실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력은 애초 1만8700명 가운데 1만2074명이, 가토 기요마사의 병력은 1만명 가운데 4508명이,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병력은 1만2000명 가운데 4356명이 전사하거나 질병 등으로 사망했다. 손실률이 각각 64.5%, 45%, 36%에 이르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격해 오는 조명연합군을 상대하려면 휴식과 정비가 필요했다. 벽제전투 패전 이후 명군과 일본군은 일정 부분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것이다.

 

문제는 조선이었다. 조선은 계속 명군 지휘관들에게 결전을 벌여 일본군을 몰아내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성품이 간사하므로 언제 마음이 바뀔지 믿을 수가 없다’거나 ‘속히 진격하여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조선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을 것’이라는 등의 명분을 들어 호소했다. 선조는 1593년 3월, 이여송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은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원수(萬世不共之讐)이므로 죽을 각오로 싸울 뿐 강화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선조의 다짐은 결연했지만 송응창 등 명군 지휘부의 생각은 달랐다. 송응창은 선조에게 사람을 보내 강화 방침을 전하면서 조선 핑계를 댔다. ‘평양전투 이후 기가 꺾인 일본에 조공을 허락하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지만 다시 싸울 경우 2~3년 안에 조선이 병화를 입게 될 것’이고 ‘조선은 오로지 시부(詩賦)만 숭상하고 무비(武備)는 닦지 않는 나라이므로 일본군을 막아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선조는 ‘만세불공지수와 강화할 수 없다’고 다시 호소했지만 송응창 등은 요지부동이었다.

 

송응창은 조선이 계속 반대하자 속내를 드러냈다. 그는 같은 해 4월, 자신의 참모 왕군영(王君榮)에게 보낸 서신에서 “오랑캐들을 설득시키기가 이토록 어렵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자신들의 강화 방침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조선을 ‘고집불통인 오랑캐’라고 매도했던 것이다.

 

 

 

 

 

 

송응창은 또한 조선 장수들에게 일본군을 함부로 공격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일본군을 자극하여 강화협상을 망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윽고 일본군이 서울에서 철수할 때 명군 지휘부는 배후에서 그들을 ‘에스코트’까지 해 준다. 조선군이 그들을 공격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한 조처였다. 바야흐로 전쟁은 이상한 방향으로 꼬여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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